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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아 시집, <내가 지켜내려 했던 것들이 나를 지키고 >, 푸른사상, 2023년 12월 31일.
귀가의 권리
맹문재
“뭐라도 먹어야지.”
엄마가 말했다.
“뭐라도 먹어야지, 은정아.”
엄마가 말하고 있었다.
―현효정, 「연필 샌드위치」 중에서
1.
김용아의 시작품들에서 눈길을 끄는 문장은 “집으로 돌아가(오)지 못하다”이다. ‘못하다’라는 부정 서술어 앞에서 숨이 멎는다. 원래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에 놓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추위와 더위와 비바람을 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족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식구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큰 슬픔이고 불행이다. 시인은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는다. 그들의 불행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포옹은 오늘날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이혼과 미혼이 늘어나면서 유대감이 약해지는 추세를 반영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인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이들이 무사히 돌아가게 하는 일”을 “강이 있는 그대로 흐르게 하는 일”(「시인의 말」)이라고 말할 정도로 귀서(歸棲)를 중요하게 여긴다. 한 사람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작품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추구할 가치로 삼는 것이다. 시인에게 사람들의 무사 귀가는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하는 차원을 넘는 삶의 과정이자 행복의 표상이다. 물질주의와 비인간화가 심화하는 현대사회를 극복하는 토대이다.
현대사회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산업재해자, 외국인 노동자, 국가폭력 희생자, 역사 희생자 등인데, 시인은 그들 중에서 노동자들을 우선 호명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노동자의 수가 2천만 명에 이를 정도로 사회적인 비중이 높아졌지만,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 등 고용불안이 크게 확산하고 있다.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간에는 물론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도 심화하고 있다. 노동시간도 길고, 산업재해도 많이 일어난다. 시인은 이와 같은 노동 환경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을 품는 것이다.
2.
뜻밖의 긴 기다림 끝에 다가온 것은 나를 기다리던 익숙한 손길이 아니었어요. 그때 들었어요. 그녀가 작업장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요. 저도 당연히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졌지요. 닳아 없어지지 않은 채 사라지는 것들의 마지막은 어쩌면 닮은 것 같습니다. 하루 내내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붉은 행성을 지나 어딘가로 끊임없이 나를 찾아 떠나는 희미하게 빛나는 별 비누 거품을 내며 손을 깨끗이 씻은 누구나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은 그 마음이 언젠가 그녀를 집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이기에 그곳에 가 닿는 일은 좀 더 늦어도 괜찮을 일입니다.
―「비누 연습-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spc 노동자를 위하여」 부분
위의 작품에서 “비누”는 한 여성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녀는 작업이 끝나면 비누로 “거품을 내며 손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지만 안전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그녀의 일상은 소멸하고 말았다. 비누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이라고 소망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여성은 “SPC 노동자”이다. 실제로 SPC 계열사의 제빵공장에서 반죽 기계와 소스 교반기에 끼인 사고로 사망한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회사가 기계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아 일어난 안전사고였는데, 노동자가 숨진 다음날에도 그 기계를 가동한 데서 보듯이 회사가 노동자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SPC그룹은 “창업의 모태가 됐던 삼립식품(Samlip)과 샤니(Shany)를 의미하는 ‘S’, 국내 베이커리 브랜드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파리크라상(Paris Croissant)의 ‘P’, 그리고 비알코리아(BR Korea)를 비롯해 앞으로 그룹의 새로운 가족을 의미하는 그 외 계열사(Other Companies)의 ‘C’”가 모인 종합식품회사이다. 글로벌 프랜차이즈인 파리바케트,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 파리크라상, 파스쿠찌 등을 가진 국내 최대의 식품업체인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자의 불법 파견과 반복적인 산업재해의 발생으로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민주노총에 가입한 노동자들에게 승진, 매장 배치, 육아휴직 등에 대한 불이익을 협박으로 내세워 노조 탈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피 묻은 빵을 먹을 수 없다”라며 불매운동을 벌였다. 위의 작품도 안전사고로 귀가하지 못하는 한 여성 노동자의 비극적인 상황을 제시하며 반(反)노동기업을 고발하고 있다.
평화시장 내가 떠난 그곳으로 들어와
시다가 된 14살 완희*는
태백 탄광에서 시퍼렇게 져버렸고
그게 마지막이길 두 손 모았으나
이 길에는 왜 끝이 보이지 않는지
마트 계산대 반도체 공장에서
12시간 16시간
잔업으로 쓰러지거나
병들어 서서히 죽어가거나
무너진 비계 더미에 깔리거나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끼이거나
시멘트회사 발전소
끼인 컨베이어 벨트에 또 끼여
마지막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져버린 내 누이여 아우여
너희들만은 어두운 곳
환하게 밝히는 구절초처럼
산허리 붉게 물들이는
꽃단풍으로 살라 하였으나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멈추지 못하는 배달 라이더들처럼
반세기를 돌고 돌아
22살 그날 그 자리
오늘 나는 불길 속으로 던졌던
근로기준법을 꺼내 다시 펼쳐 든다
저 먼 곳 꽃단풍이 걸어온다
* 성완희 열사(1959∼1988)
―「너희들은 꽃단풍으로 살라 하였으나- 전태일 열사 50주기에 부쳐」 전문
위의 작품은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을 외치며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을 집행한 전태일 열사의 시선으로 오늘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태백 탄광에서 시퍼렇게 져버”린 “완희”의 길이 “마지막이길 두 손 모았으나” 그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마트 계산대”며 “반도체 공장에서” “12시간 16시간/잔업으로 쓰러지거나/병들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또한 “무너진 비계 더미에 깔리거나/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끼이거나/시멘트회사 발전소/끼인 컨베이어 벨트에 또 끼여/마지막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전태일은 “불길 속으로 던졌던/근로기준법을 꺼내 다시 펼쳐 든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등을 또다시 외치는 것이다.
위의 작품에서 소개된 “성완희”는 1959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강원도 태백시에 위치한 강원탄광 광부였다. 그는 작업장 동료인 이기만과 파업을 주동한 뒤 회사 측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두 차례나 부당해고를 당했지만, 동료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복직했다. 그의 복직을 도와준 혐의로 이기만이 해고되자 다시 투쟁을 전개해 노동부와 지방 노동위원회로부터 복직 판정을 받아냈다. 그렇지만 강원탄광은 판정을 무시하고 그의 복직을 거부했다. 이에 이기만은 단식에 돌입하였고 동료들도 투쟁에 참여하였다. 성완희는 이기만이 단식 투쟁을 시작한 지 8일째 되는 날 동료 5명과 함께 휘발유 1통, 석유 1통을 들고 노조사무실에 들어가 문을 못질하여 폐쇄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구사대원들이 문을 뜯고 창문을 깨고 진입을 시도하자 그는 “들어오면 분신하겠다”고 외쳤다. 구사대원들이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하자, 그는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그었다. 전태일 열사가 앞서 했듯이 그는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라고 절규하며 29살의 청춘을 불사른 것이었다. 그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음과 싸우다가 1988년 7월 8일 운명하였다.
김용아 시인은 위의 사례들뿐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또 다른 노동자들을 품었다. 일용직이라고, 일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또 비정규직이라고 안전화를 지급하지 않아 공사장에서 “미끄러지고 떨어져/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감색 안전화 한 켤레」), 배를 만들고 공장의 기둥을 세우고 다리를 세우는 용접공들 중에서 “깔리고 눌리고 떨어”지거나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용접공」)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 “거대한 부조리의 단단한 벽을/짧은 연필 하나로 허물”다가 “급성 스트레스증후군”(「르뽀가 되어 버린 르뽀 작가」)을 털고 일어나지 못한 르포작가 등이다.
안전사고를 당하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외면하지 않았다. “강과 가장 가까운 계단에 앉아/영상통화를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들은 강물처럼 낮은 식구들의 목소리를 통화로 들을 뿐 “끝내 어두워지는 강을 넘지 못”(「저물녘의 강」)했다.
시인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집으로 돌아온 노동자의 손도 잡았다. “마흔 넘어 뒤늦게 결혼해서/아이도 낳았다는데” “프레스에 오른 손가락/네 개가 달아”(「돌아온 손」)난 노동자나, “20대 중반도 되기 전에/날선 프레스에/두 팔을 바”(「행진」)친 노동자 등이다. 작업장으로 돌아온 노동자도 호명했는데, 작업장은 노동자의 삶을 영위하는 또 다른 집이라고 볼 수 있다. “태백 공무원노조 지부장이”던 “조규오 위원장”은 공무원의 노동 기본권을 주장하다가 “해고된 지 17년 만”(「어떤 복직식」)에 복직했다. “영원한 해고노동자로/남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있어야 할 곳에/자신의 두 발을/내려 놓”(「리멤버 희망버스」)으려고 복직 투쟁하는 노동자도 있다. 시인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노동자들을 포옹한 것이다.
3.
서울에서 151번 버스를 타고
다니던 소녀상
영월까지 내려왔다
라디오스타 야외 박물관
동해 바다를 뒤로 한 채
앉은 소녀는
곧 건너야 할 바다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듯
의자에 앉아 있다
그날 이후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먼 길 돌아
이곳에 다시 앉은 이유는
단 하나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집으로
―「먼 길」 전문
위의 작품은 강원도 영월에 소재하는 “라디오스타 야외 박물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고 있다. 소녀상이 세워진 “그날 이후/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소녀상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안타깝고 슬프고 분노가 인다. 조선 여성들이 일제의 만행으로 인권을 유린당하고 목숨을 잃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는 정신대를 통해 조선 여성들의 노동력을 수탈했을 뿐만 아니라 위안부를 통해 성을 착취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조선 여성들을 징용, 납치, 매매 등의 방법을 동원해 전선으로 수송한 뒤 성노예로 삼은 것이다. 조선 여성들뿐만 아니라 중국, 필리핀,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일본이 점령한 국가의 여성들도 착취당했다. 피해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폭행뿐만 아니라 구타, 가해, 굶주림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받았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문서상 근거가 없다거나,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거나,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등으로 왜곡시킨다. 일본군 위안부로 징집된 조선 여성들의 전체 인원은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 많은 여성이 위안부로 동원되는 과정에는 친일 조선인들의 조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 조달에 나선 조선인은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고, 양심선언이나 사죄한 사람도 없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의 문제에 얼마나 소극적으로 대처했는지를 알 수 있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일본이 반인륜적인 범죄를 합법화하는 데 맞선 시민운동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일본 정부에 의해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1992년 1월 8일 일본 정부의 사과, 책임자 처벌, 진상 규명, 적절한 배상 등을 요구하며 첫 수요집회를 시작한 지 1,000회째인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그 이후 국내의 여러 장소와 해외 각지에 세워졌다. 짧은 단발머리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손을 움켜쥔 소녀가 의자에 앉은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눈빛은 간절하다. 화자는 그 소녀가 “먼 길 돌아/이곳에 다시 앉은 이유는/단 하나”라고, 즉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새들은 영월 서강(西江)에 와서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
검은 새벽
도시의 새들이 서강의 강변에 다다른 이유는
발자국의 숫자만큼이나 다르다
어디로든 이어져 있으리라
아득한
산맥을 넘고
수계를 달리하는 동안
접히고 접힌
펼쳐보지 못한 책의 문장들처럼
떠나보내지 못한 시간들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날개만이 아니다
마지막 발자국
새들이 모두 떠난 아침
여름이 시작되었다
이팝꽃
무리지어 졌다
―「이팝꽃― 2022. 10. 29. 이태원으로부터」 전문
위의 작품은 부제에서 보듯이 2022년 10월 29일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 골목에서 발생한 참사를 담고 있다. 사고 당일 이태원에는 핼러윈 축제를 맞이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특히 해밀턴호텔이 있는 좁은 골목길 경사로에 인파가 밀리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2014년 304명이나 사망한 세월호 침몰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일어난 참사여서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시민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도심 한복판에서 159명이나 사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경찰은 핼러윈 축제에 10만 명 정도의 시민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137명의 경찰을 현장에 배치했지만, 실제로는 30만 명가량이 몰려들었다. 그에 따라 행사의 질서 유지와 안전 지키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참사 발생 전에 압사 위험에 대한 시민들의 신고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은 무시했다.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진행된 시민들의 집회에 대처하기 위해 많은 경찰들이 파견되어 재배치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경찰의 인력 부족과 안일한 대응으로 말미암아 시민들이 희생된 것이었다.
이태원 참사에 희생된 시민들을 “새들”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화자는 그 새들이 “영월 서강(西江)에 와서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고 인식한다. “검은 새벽//도시의 새들이 서강의 강변에 다다른 이유는/발자국 숫자만큼이나 다르”지만, 공통점을 발견한다. 새들에게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날개만이 아니”라 “떠나보내지 못한 시간들”이라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은 20대(67%)와 30대(19%)가 압도적이듯이 그들이 떠나보내지 못한 시간이 많다. “접히고 접힌/펼쳐보지 못한 책의 문장들” 같은 시간들인 것이다. 화자는 “마지막 발자국”에 그들의 시간을 모으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을 깊게 애도하는 것이다.
국가폭력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한 또 다른 사례는 “미국 미네소타주에서/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이/비무장 상태인/흑인 조지 플로이드를/바닥에 쓰러뜨린 뒤/목을 누른”(「8분 46초」) 사건을 들 수 있다. 실제로 백인 경찰관이 흑인 시민을 누른 시간은 9분 29초로 밝혀졌지만, 8분 46초는 검찰이 쇼빈을 기소한 공소장에 적시했듯이 플로이드 사건을 상징한다.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백인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얼마나 여실한지 잘 보여준다. 조지 플로이드가 마지막 순간 “엄마,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말한 장면이 그지없이 슬프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 역시 산업재해자와 마찬가지로 집으로 돌아와도 생애가 평탄하지 못하다. “아버지는 밀양 피난터에서 집안 또래들과 함께/군대에 끌려갔”다가 그만 “눈을 다쳐 전역”했는데, “의안인 한쪽 눈을 가리기 위해/평생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다니셨”(「아버지의 눈」)던 것이 그 여실한 모습이다.
4.
너는 돌아올 것이라는 할머니의 말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쓴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편도 비행기
네팔행 아이의 엄마에게 믹스 커피를 드리며
아이는 엄마를 기다릴 것이라고 말한다
떠나는 엄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마른 우물처럼 비어버린 눈동자의 바닥은 하늘이다
그곳에 가 닿는 일
기도하겠다는 말만 덧붙인다
네팔로 간 아이의 엄마로부터
달빛 소식이 도착한다
지구의 그림자에 서서히 먹히는 달
할머니의 말 그대로
당신은 돌아올 것이라고 수정을 한다
아이에게 검은 어둠보다 빛이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한 저녁이기도 했다
*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서 빌려옴.
―「가까운 세계」 전문
“너는 돌아올 것이라는 할머니의 말”은 전쟁터에 징집되어 가는 손자가 살아서 돌아온다는 근거가 없다. 그렇지만 살아 돌아왔으므로 그 말의 영험함을 무시할 수도 없다. 헤르타 뮐러(Herta Müller)의 『숨그네』에서 강제수용소로부터 살아서 돌아온 주인공이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고 고백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숨그네(Atemschaukel)는 숨(atem)과 그네(schaukel)라는 독일어를 합쳐 만든 작가의 조어인데, 사람의 숨결이 그네처럼 죽음과 삶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흔들림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말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네팔행 편도 비행기 표를 끊고 집을 떠나는 “엄마에게 믹스 커피를 드리며” “엄마를 기다릴 것”이라는 아이의 말도 그러하다. 아이의 말에 “떠나는 엄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엄마가 자식을 버리고 모국으로 되돌아가는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아이에게 돌아와야 할 이유는 그 사연보다 많고도 무겁다. 그리하여 아이의 말이 엄마에게 힘을 준다. “네팔로 간 아이의 엄마로부터/달빛 소식이 도착”하고, 마침내 “할머니의 말 그대로/당신은 돌아올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친기즈 아이뜨마토프(Chingiz Aitmatov)의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44년 동안 철도 노동자로서 함께 일해 온 까잔갑이 세상을 떴다는 얘기를 들은 예지게이는 빨리 그의 곁으로 가려고 한다. 후배 동료들은 작업장에 사람이 부족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도 않는데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며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예지게이는 평생을 함께해온 친구를 텅 빈 집에 놔둘 수는 없다고 단언하고 찾아간다. 또한 친구의 유언을 지켜주기 위해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으로부터 30킬로미터나 떨어진 아나-베이뜨 묘지로 간다. 그곳은 만꾸르뜨(mankurt)가 된 자식을 구하러 갔던 어머니가 오히려 아들이 쏜 화살에 맞아 묻혔다는 전설의 장소이다. 츄안츄안족에게 정복당한 선조들이 포로가 되어 잔인하게 묻힌 장소이기도 하다. 예지게이는 친구가 조상들과 영원히 살고자 하는 그 집으로 돌아가는 데 최선을 다했다.
김용아 시인 역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사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염원하며 그들의 손을 잡는다. 시인의 행동은 자본주의 시장의 가치 기준으로 보면 이윤이 없다. 기회비용으로 보면 손해가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그들을 부르며 포옹하고, 그들의 귀가를 가로막는 세력에 맞선다. 개인적인 슬픔을 토로하는 차원을 넘어 그들의 사회적 존재성을 인식시키고, 그들의 불귀에는 국가와 역사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제시한다. 시인의 자세는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질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적 존재자들에게 귀서는 의무이기도 하지만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 권리를 박탈당했고, 지금도 빼앗기고 있다. 시인은 그들을 인간적인 도리로는 물론 사회적인 책임감으로 껴안는다. 아픔에 함몰되지 않고 귀가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연대하는 것이다.
맹문재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첫댓글 교수님 모셔가서 잘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