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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 정전 세 번째 시간
□ 정전입문 : <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 >
반갑습니다.
지난주에 일원상과 개교의 표어를 했습니다. 오늘은 신앙의 표어, 수행의 표어,
생활의 표어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오늘이 정전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까지 말씀 드린 것이 사실은 다 했습니다.
사실은 정전을 다하였습니다.
맨 처음에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인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 그 다음에는 경전을 어떻게 읽을 것이며, 목적이 무엇이며,
법문을 들을 때는 어떻게 들을 것인가? 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렸고
전서의 차례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었다.
일원은 무엇이며 일원상은 무엇이며 일원상을 모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원상의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지난 주에 설명을 드렸습니다.
일원상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다. 제불제성의 심인이다. 일체중생의 본성이다.
우주만유의 본원은 우리의 신앙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제불제성의 심인과
일체중생의 본성은 우리의 수행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주만유의 본원이 왜 신앙의 대상이며, 왜 그것이 일원상인가? 에 대해서
제가 예를 세 가지를 들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개교의 표어를 했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물질을 구하는 정신, 사용하는 정신을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구할 것인가?
어떻게 쓰는 마음으로 구할 것인가? 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사실 지난 주에 제가 했던 것이 원불교 교리를 제일 쉽게 설명 했습니다.
핵심을.. 지난 주의 영상을 여러 번 보세요.
오늘은 두 가지를 할 것입니다. 신앙의 표어인 처처불상과 사사불공입니다.
그리고 수행의 표어인 무시선과 무처선입니다. 그리고 생활의 표어요 원불교
사상과 특징입니다.
먼저 신아의 대상은 처처불상이다. 신앙의 행위는 사사불공이다.
그럼 신앙의 대상이 어떻게 처처불상이라는 말이냐? 좀 생각해 봐야겠죠?
처처라는 것은 ‘어디나’, ‘누구나’ 도 됩니다. 어디나, 누구나 불상이다.
불상이라는 말이 조금 애매하다. 불상이라면 금, 은, 동, 나무로 되어있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절에 가야 불상이 있지요. 불에 대한, 불상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본래 부처님 당대에는 불상이 없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하도 뛰어나고
훌륭하시고 사람들이 존경하니까 어느 왕이 나무로 5척짜리를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또 어느 왕이 따라서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그 후에는 없었습니다.
한 300년 이후에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에서 불상이 생겼다. 돌, 금, 나무 등
다양하게 만들었다. 채색도 하였다.
불교학을 공부해 보면 무착, 세친이라는 분이 삼신불사상을 이야기한다.
삼신불이란?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법신은 법의 몸, 진리의 몸 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앞에 청정이라는 말을 쓴다. - 청정법신불 -
보신은 부처님의 법을 가져다가 바뀌었다. 그 결과가 부처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보라는 것은 받을 보자입니다. - 원만보신불 -
화신은 백억화신불 이라고 얘기합니다. 응화신불 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몸이 변화 하셨다. 부처님이 백억 가지로 변화 했다고 얘기 합니다.
우리는 일원상을 법신불 일원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때는 이미 법신 보신 화신을
합쳐서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고 진리 자체를 말한다.
원불교의 저저불상 신앙은 진리 자체의 신앙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부처님에 대한 서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신앙이었다면
원불교의 신앙은 진리 자체의 신앙이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어떤 사람이 부처에게 기도하기를 "부처님 금년 여름에 비가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뭐 하는 사람이죠? 우산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부처님 금년에는 비가 적게 왔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도한다.
무슨 장사죠? 염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금으로 된 부처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누구 집에는 비 오게 해주고 누구 집엔 비 안 오게 해주겠다고 하겠어요?
이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서 복이 나오고 죄가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원불교의 처처불상 신앙은 진리 자체 당체에 대한 신앙이다.
그럼 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겠죠?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왜 빌어요?
빌면 어떤 위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빈다는 것은 뭔가 위력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그 위력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느냐?
과거엔 바로 불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원불교는 그 진리 자체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제가 저번에 천도품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겠습니다.
전서 293쪽을 보면 대종사님이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사람의 시체가 손도 묶였고 발도 묶여서 있다고 하자. 이 시체가 바로 여러분이다.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맨 처음 사람이 죽으면 풍 - 호흡이 멈추고, 화 - 몸이 식고,
수 - 물기가 빠집니다. 마지막엔 땅으로 갑니다.
그 기운에 의해서 풀이 자랍니다. 그럼 그 풀이 자라는데 필요한 것은 흙이 있어야
하고, 비가 내리고, 새벽에는 이슬이 맺히고, 바람이 불어야 되고..
이런 것 들이 필요합니다. 또 꽃이 피면 벌이 날라 다녀야 합니다.
비는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는 외국 갈 때 비자를 내고 다녀야 한다.
그런데 비는 비자 없이도 전 세계를 다닌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농부가 풀을 베어다가 농사에 거름으로 씁니다. 곡식이 익으면 베어서 탈곡을 하고
시장으로 보낸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을 합니다.
그럼 아파트나 초가집으로 배달이 됩니다. 그럼 엄마가 가스불이나 전기로 밥짓고,
밥상을 차립니다. 그 밥을 내가 배불리 먹었다.
밥 안 먹고 사는 사람 있습니까? 견성을 하면 밥 안 먹어도 됩니까?
견성을 했든 안 했든 누구나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럼 사람이 때가 되면 노병사해서 갑니다. 이것이 순환이다.
만약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불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탈곡해서 시장에 내 놓았더니 어떤 놈이 쌀을 매점매석해서 비싸게 받으려고 하면
국가에서 가만 두지 않고 세금을 많이 거둡니다.
사람이 나고 죽어서 곡식이 되고 비바람의 영향을 받아서 쌀이 되고 우리는 그걸
먹어서 살다가 또 갑니다. 이 과정 속에서 한 가지라도 없어도 될 것이 있습니까?
비가 많이 와서 홍수 나면 큰일 나니까 비가 없으면 좋을까요?
상인은 도둑놈 같으니까 상인은 없으면 좋겠어요?
컴퓨터는 현대 물질문명이라 귀찮으니까 없앨까요?
국가 법은 구속이잖아요. 없애버릴까요?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착각한다. 본원이라고 하니까
여기에서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안에 이것을 조화롭게
하는 이치가 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 것 하나도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것 하나도 따로 뿌리라는 것이 없다.
이것 모두가 바로 우주 만유의 본원이다. 우주 만유는 서로 뗄 수가 없이 하나로
엮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사람만이
중요하며 자연을 함부로 한다. 우주만유의 본원은 하나로 연결되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요. 나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 만유의 본원. 이것이 일원상이다.
그 동안의 종교가 우주 만유의 본원을 어떻게 생각 했냐면 따로 하늘에 있는 존재,
아니면 뭔가 근간에 뿌리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위력이 아니거나 연관되지 않은 것,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일원상이다.
이것이 엄청난 서로간이 밀접한 연관이 있고 또한 법칙이 있다. 여기에서 사람이
성질 나게 하니 그릇 깨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관계가 서로간에 없어서는
살 수 없지만 동시에 밀접하게 공을 어떻게 들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농사를 지을 때에도 얼마나 공을 들이느냐? 자연환경을 우습게 아느냐 소중히
하는가에 따라서 다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전기나 물 하나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 가까이 이야기하면,
팔뚝이 상처가 났다면 여러분들은 도인이라 "상처가 났구만"하고 말 것인가.
어떤 사람은 계산을 너무 잘하여 치료해주고 돈 내놓으라 한다.
그런데 내 몸에 상처가 나면 동시에 ‘앗!’하면서 바로 피를 멈추게 한다던가
동시에 약을 찾습니다. 그러고서 오른손이 왼손에게 ‘너 약 발라줬다 얼마 내놔’
이렇게 합니까? 아니면 내가 급한 일이 있거든 다음에 치료해 줄게 그럽니까?
천만에 따질 것도 물을 것도 없이 바로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돈도 요구하지 않는다. 왜 그러죠?
이것이 과연 상처 났다고 귀찮다고 잘라내 버릴 것인가?
이것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우주 만유 전체가 나다. 나 아님이 하나도 없다.
여기에 공을 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달라질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원불교의 복과 죄를 불러들이는 원리이다.
육신에 얼마나 공을 불러들이냐 아니냐.
어떤 것도 함부로 할 대상이 하나도 없으면서 어떤 것도 나와 둘이 아니다.
제가 1월에 ‘7일간의 출가여행’ 영산에 훈련을 갔는데, 넝쿨이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데 조금 지나면 소나무가 다 죽는다. 반듯이 자란 소나무가 다 죽어버렸다.
알뿌리식물은 뿌리만 있으면 다시 나오지만 아무리 나무의 뿌리가 튼튼해도 넝쿨이
달라붙으면 죽어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나뭇가지의 잎사귀는 넝쿨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관계가 있다면 잎사귀와 가까운 가지나 줄기 정도라고 생각한다.
속 좁은 놈은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은 아무리 멀어도 태풍에 줄기가 끊어지거나
올라오는 넝쿨 하나가 자기의 생명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또 하나는 나무뿌리만 튼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주만유의 본원은 뿌리가 본원이 아니라 전체가 본원입니다.
잎사귀만 죽어도 나무 전체가 말라 비틀어져 죽습니다. 뿌리까지 썩어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이것이 원불교에서 말하는 하나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처처불상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이것이 다 내 생명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이기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이 어디서 나오느냐? 거기서 나오는지를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특별한 존재에서 보이지 않은 저 하늘에서 복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대종사님은 이것 전체가 하나이다. 그것이 일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일원을 성격적으로 네 개로 나누었더니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다.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를 하나하나 말하자면 복잡하니 묶어버린 것이다.
나무 풀 같은 것은 금수초목이라고 하자. 천지 자연은 천지라고 하자.
사람 관계는 부모와 동포다 그 중에 부모는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쳐준 양반이
부모다. 그리고 사농공상 금수초목을 동포라고 묶은 것이다.
자세히 보면 천지 부모 동포 법률에 흐르는 이치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인과의 이치다. 각각에 공을 들이느냐 안 들이느냐에 따라서 나에게
복이 될 수도 있고 해독이 될 수도 있는 인과의 이치가 명백히 흐른다.
천지는 응용무념의 도. 천지는 이쁜 것. 안 이쁜 것. 기리질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가립니다.
부모는 무자력자 보호의 도.
동포는 자리이타의 도.
법률은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세우는 도라는 그 이치에 따라서 천지가 정말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가 된다.
어느 부부가 자신들의 자부가 성질이 고약해서 부처님께 공양하러 간다고 하니까
대종사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 집의 자부가 권능이 있는 부처’라고 하셨습니다.
위력이 그 자부에서 나오니까 어디에다 돈을 쓰라고 했죠?
‘너희 자부에게 해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잘 몰라요.
다른 종교는 오직 천(하늘)만이 존귀한 존재고 나머진 모두 사탄이요, 마귀요,
죄인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늘에 기도만 하라는 것입니다. 농사를 잘 지으려면
어디다 해야 합니까? 천지와 동포에 잘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렇죠? 나는 부모의
인연을 잘 만나고 싶다. 스승의 인연을 잘 만나고 싶으면 부모에게 잘 해야죠.
무식하면 법률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제가 예전 남산에서 차를 운전하다가 굽은 길에서 노랑불 일 때 갈까 말까 하다가
그냥 갔습니다. 그랬더니 구석에서 경찰 아저씨가 뭐라고 인사를 하더니
‘신호를 위반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노랑불 이었는데?’
그 경찰이 ‘아! 그럼 돈을 내면서 배우셔야 하겠네요.’
노랑불은 원래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그때까지 빨리 지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법률은을 사람들은 우습게 생각 하니까 구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법률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무법천지죠. 질서는 무슨 질서입니까?
이집트를 가면 차선이 없으니까 서로 마주 보면서 성질 내고 있습니다.
법률이 없으니까 어떤 기준이 없는 겁니다.
무식한 사람일수록 법률은에 대하여 우습게 생각하고 당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주만유의 본원은 바로 사은이다. 이 사은을 분해 했더니
좀 전에 말한 우주만유 전체이고 천지만물 허공법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치가 인과에 의해서 불공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복이 되기도 하고 죄업이 되기도 한다.
요즘 한라봉이 싸죠? 왜 싼 줄 아세요? 나주, 해남 같은 데서 합니다.
북극에 빙하 다 녹아버리고 아마존에 나무다 베버리고.. 나중에 내 생각에
우리 후진들이 ‘나쁜 놈의 새끼들이라고 무식한 새끼들이라고.. 우리들 살 길도
남겨놓지도 않고 있는 자원 다 캐내고 환경은 다 파괴했다’고 욕 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만 하면 괜찮은데 내가 갔다 다시 와서 내가 고생한다.
부처가 어디에 있느냐? 위력은 누가 주는가?
지금도 보문사에는 쌀을 올려서 기도를 드린다.
원불교는 불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보이는 세계인 양이요,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인 음이다.
보이는 세계(양)에 하는 것을 실지 당처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음)에게 하는 것을 진리 불공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천(하늘), 보이지 않는 음계에만 계속 불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원불교에서 아침 좌선을 아니하고 기도만 하는 곳이 있다.
사업을 하려면 그 일 그 일에 잘 해서 복록이 나오게 해야지
맨날 기도만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종사님의 법이 아니다.
대종사님은 그일 그일에 일심을 들여서 거기 거기에 공을 사실적이고 실질적이고
진리당체에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 공부하는 사람은 실제로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도 해야 한다. 뭐를 더 많이 해야 합니까?
시험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원불교 다니는 사람은 실지 불공을 더 많이 하고
기도는 짧게 해야 합니다. 대종사님은 조석심고 올릴 때도 1분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원불교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게, 양계와 음계 모두 함께 공을
들여나가는 종교이다.
처처불상은 부처님이 처처.. 곳곳에 다 있다. 그래서 불공은 거기다 불공을 해야
한다. 적소적소에 불공을 해야 한다. 장사가 안되면 손님에게 잘하고 인테리어도
좋게 하고 물건을 잘 정비하고 뭔가 서비스도 잘 한 다음에 월초에 기도를 하던가
해야지..손님에게 엉망으로 하면서 절이나 교회에 교당에 가서 기도만 잘 하면
됩니까? 이것이 아닙니다. 진리불공도 하지만 주는 실질불공 사실불공을.. 왜..?
거기가 진리 당처이다. 거기서 죄와 복의 권능이 거기서 나온다.
그래서 사사불공은 과학적인 방법까지 삼학공부를 잘 들이대서 하는
공부가 사사불공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데
첫째 견성이란 무엇인가? 우주만유가 다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나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요.
일체가 나구나를 깨달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참 지혜요.
그때 비로소 원불교 신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어요. ‘교무님 저 자식이 어떻게 부처님이에요?’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나한테 잘해준 사람은 부처님 같아요.
그런데 나한테 해코지 하고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인연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부처님이냐? 그래서 대종사님이 제불제성의 심인,
일체중생의 본성까지 알아야 토가 떨어진다.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는 것은 나의 본성이 일원상이다. 내 본래가 일원상이다.
그런데 내가 나를 보더라도 때론 어떤 사람을 보니 너무나 불량하고 비양심적이다.
제불제성의 심인이 정화신불(正化身佛) 입니다.
일체중생의 본성 이것을 편화신불(便化身佛)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제불제성의 마음자리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 하게 쓰는 것입니다.
텅 빈 마음으로 진공묘유로 쓰는 것입니다.
진공의 세계와 묘유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이 묘유입니다.
본성으로 볼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얼마든지 변화 할 수 있다. 본성은 부처님이다.
그러니 본성만 가지고 있으면 안되고 심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심인으로 만들려면
수행이 필요하다. 그 수행이 무시선. 무처선이다. 진공묘유의 수행이다.
내가 아무리 불공을 잘 하려 해도 내 마음에 힘이 없으면 안되죠?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적당히 불공하는 것이죠?
법문에 ‘좋은 사람에게 누가 못하냐’라고 이야기했다.
말 안 듣고 때로는 고집 세고 때로는 속타게 하는 그 사람이 부처요.
그 사람에게 삼학으로 연구해서 잘하자는 것이다.
시대가 예전에는 어른들이 아랫사람을 잘 돌봐주는 시대였다. 지금은 시대가
바뀐다고 합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채워주고 더해주고 컴퓨터도 가르쳐줍니다.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서로 채워주는 것이다.
특히 동료들에게 잘 하라. 내가 당하는 그때그때 곳곳마다 불공을 잘 들여야 한다.
참 어렵다. 남의 집 불 난 것보다 내 팔뚝에 상처 난 것이 기분 나쁘죠.
우리가 공부 삼아서 한다는 표현이 있다, 훈련이라는 표현도 있고,
이것은 일단 부처님으로 안 보여도 한번 부처님으로 보아라.
그리고 불공이 안 되더라도 불공을 공부 삼아서 하라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하다 보면 연구가 들어간다.
‘아니, 내 눈에는 부처님으로 안 보이는데 어떤 것이 부처인가?’ 하는 의심이
들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의심이 별로 없다.
저는 처처불상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원불교학과 회장을 하면서 부처님으로
안 보이는 꼴통 때문에 공부 많이 했습니다.
사실 알고 보니까 정화신불, 편화신불. 대소유무 중에 변하는 자리인 것이다.
무시선 무처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원불교의 선법은 무시선법이다, 너무나 빨리 정답을 알려준 것 같다.
대종사님은 선법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했어요? 산에 들어가서 밤을 지새기도 하고,
길에 앉아서 날을 보내기도 하시고, 방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시고,
얼음물에 목욕도 하시고, 때로는 절식도 하시고, 때로는 찬방에서 거처해서
공부길을 잡고자 고생을 했다.
정산종사님 따님 중에
‘제가 생사대사를 연마하는데 잘 모르겠다, 어떻게 공부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산종사님께서 "우리 무시선 무처선 공부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이야기했다.
지금도 종교가에 보면 많은 분들이 자신의 독특한 수행 체험들을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수양만 강조하고, 어떤 사람은 연구만 강조하고,
특히 선한다 하면 정신수양과 사리연구(알음알이)를 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종사님은 작업취사도 선이라고 했다.
또 정신수양 중에서도 또 공부길을 나눈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3000배씩 하라고 한다. 누구는 경전을 달달달 외워라.
또 다른 이는 피를 빼서 경전을 써라. 누구는 의두를 밤낮없이 부려라.
장좌불와-長坐不臥. 드러눕거나 기대지 않고 수행하는 것.-를 하라,
누구는 면벽을 하라. 누구는 계율을 죽어도 지켜야 한다. 누구는 화두만 들어야
한다. 누구는 책을 봐서 원리를 알아야 한다. 등등 온갖 방법들이 난무한다.
결국 무시선 무처선은 수행의 표어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부길을 잡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수행이다. 원불교 수행자가 진공묘유에 가늠을 못 잡고 연구를 하든,
좌선을 하든, 경전 사경을 하여도 사실은 아직 가늠을 못 잡은 것이다.
진공묘유의 체를 잡고 무시선, 무처선을 근간한 상태에서 좌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사경을 하든, 헌배를 하여야 합니다.
물론 헌배를 하면 부수적으로 다이어트도 되고 척추교정도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핵심 공부길을 잡고 해야 합니다. 대종사님은 그 공부길을 몰라서 온갖
고생을 하고 나서 우리에게 무시선 무처선을 제시해 주었다.
무시선 무처선은 진공묘유의 수행이다. 동정간에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삼학 병진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시선이다.
예전에 훈타원님 방에 갔더니 훈타원님이 "사람들이 무시선 너무 쉽게 알아"라고
하였다. 그냥 경계 속에서 마음만 챙기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시선을
안 한다는 것이다. 무시선은 동시선과 정시선 다 합하여 무시선이다.
동시선만 무시선은 아니다.
더 들어가면, 정시선의 체를 잡은 사람이 동시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시선도 못하여 앉아서 헛생각 하고 졸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무시선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앉아서 선을 잘한다. 그런데 경계에서 맘을 놓아버린다.
법당에서는 선 하고 밖에 나가면 물질의 가치관으로 바뀐다. 남에게 질세라.
진공묘유보다 경쟁사회에서 이겨야지 하는 것도 무시선이 아니다.
무시선은 정시선의 힘을 충분히 갖춘 후에 그 정에 바탕 하여 동하는 것이다.
우리 원불교의 어중간한 교도는 정시선을 안한다. 그리고 동시에 일심만 챙기면
된다 한다. 이것은 동정간의 원리를 잘 모르는 것이다. 내가 정시에 마음 하나
조절하지 못하고 진경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한다는 말입니까?
정시 공부는 준비 공부이다. 준비 공부를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동시에 일이
알아서 착착 되겠어요?
아까 바이올린-피아노 다 그냥 했겠는가? 오늘 무엇으로 할 것인지 연습 분명히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 있게 나오지 그냥 되겠습니까? 전공자여도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정시에 준비를 해야 동시에 할 수 있다.
그 다음 동했으면 반드시 정해야 한다. 어떤 경계가 지나면 바로 정해야 한다.
어떤 테니스 선수는 공격 후에 떨어진 공을 주우러 가면서 마음을 챙긴다고 한다.
테니스를 쳐도 그 안에 동정이 있다. 농구도 마찬가지이다. 농구는 백쿼터가 쉬는
시간이다. 백쿼터 하면서 마음을 챙기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 때는 아침에 정을 챙긴다. 그리고 낮에 동했으면 반드시 저녁에는
일기로 참회 대조해서 정해라. 낮에 활동했으면 반드시 하루를 넘기지 말고
때를 벗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시선이다.
동과 정이 주인으로 사는 것이 무시선이다. 어떤 사람은 동할 때만 주인이요,
어떤 사람은 정할 때만 주인이다. 이건 아닙니다. 내가 24시간 일심을 놓지 않는다.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건 가능합니다. 이것에 재미가 붙었습니다.
먼저 정시에 힘을 얻어야 한다. 힘은 마음의 힘이요 호흡의 힘이다. 호흡을 잘하면
무시선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오롯한 일심이 쭉 가는 것이 무시선 이다.
언제 일심되어야 하는가? 좌선할 때, 일할 때, 달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선을 한다고 하면 정시선이 주로 공부라고 생각하였다. 대종사님은 일해도 선, 일
안해도 선이다. 서로서로 도움이 되게 하여 보통 사람 능력의 몇 십 배를 키워내는
것이다. 제대로 무시선을 하면 자기 역량의 몇 배 이상 키워져야 정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서, 부자집 딸이라서,
인물이 좋아서, 학벌이 좋아서, 본래부터 건강해서.. 맨날 어떤 조건과 핑계를
달아서 나와 다른 능력과 직업을 갖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세상의 어떤 성공한 사람도 알고 보면 무시선이 들어가 있다.
즉 마음에 피와 눈물과 아픔이 참 인내가 들어있고, 노력과 정성이 들어 있고
그 안에 말 할 수 없는 마음의 힘이 있는 것이다. 때로는 자기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래서 예전에 좌산님이 법문 하실 때, 이 세상에 이름을 유명하게 남긴 위인들은
다 공도리 한 조각씩 맛 보신 분들이라고 하였다. 그 법문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공도리, 공즉선이다. 그 공도리를 한 조각이라도 맛본 사람이 위인이 된다.
육신의 지배를 받고 끝나거나, 육신이 자기인 줄로 사는 사람은 위인이 될 수 없다.
그 마음의 힘. 진공묘유다.
이 진공을 잘 하도록 공부하는 것이 바로 삼학이다. 실지 공부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수양 연구 취사입니다. 수양 연구 취사는 마음의 원리에서 나온다.
그것을 그대로 회복하여 합일하자는 것이 수양 연구 취사이다.
나는 원래 수양 연구 취사를 잘 하는 사람이다. 나는 수양을 통해서 수양을 잘
하도록 만들고 연구를 잘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자리를 회복하면 된다.
이것이 원불교의 수행이다. 그러자면 동정간에 수양 연구 취사를 잘 공들여야 한다.
내가 초등학교 때 어떤 놈이 나를 하도 성질 나게 해서 패버렸는데,
저녁에 우리 집에 그 애 엄마하고 둘이 왔어요. 팔에 기브스 하고..
낮에 내가 취사를 너무 무리하거나 실수를 하면 마음이 불안해서
아침이나 밤에 수양이 잘 되지 않는다.
내가 저녁 늦게 무엇을 한다 하는 사람은 진짜 급한 일이 있든가 아니면,
아침에 수양을 안 하겠다. 무시선 공부를 안 하겠다는 것이다. 수양을 통해서
내 인격을 변화시키는데 관심이 없고 무늬만 원불교인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하루의 출발은 아침이 아니다. 하루의 출발은 저녁이다.
저녁 시간은 반드시 정하는 시간이다. 그것이 상시응용주의사항에 나와 있다.
무시선법이 상시응용주의사항이다.
저녁에는 반드시 일기 기재하고 시간 나면 내일 계획과 준비를 한다.
그날 것은 깨끗하게 마음의 설거지 하라는 것이다. 저녁 내내 영화를 본다.
게임을 한다. 다른 것 하고 있다면.. 어떤 핑계를 대도 원불교 신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가 깨달음의 선물을 주지 않습니다.
우주 기운도 주지 않는다. (부드럽게 하려고 했는데, 안되네..)
(ㅎㅎㅎ)
일단은 정시 공부를 잘 해야 한다.
수양의 정시 공부는 염불 좌선 기도이다. 헌배도 수양이다.
연구는 경전사경, 봉독, 법회 보는 것, 문답, 화요공부방에 오시는 것도 연구이다.
취사는 계문대조, 솔성요론 대조, 수입지출 기재. 이것이 정시에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서로 엮어져서 수양 연구 취사가 맞물려지는 것이다.
정시에 안된 사람이 동시에 하겠다 이것은 안 된다.
젊은 시절에 때로는 초입교도 일 때나 시간이 날 때는 정시 공부를 충분히 해야
합니다. 실제로 여기엔 원불교를 다닌 지 몇 십 년이 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정전을 이렇게 공부해 보셨어요? 솔직히. 정시에 이런 기초를 안 하니까 세월은
흐르는데 힘을 타지 못하는 것이다.
기초를 공부할 때는 탄탄하게.. 특히 결혼하기 전의 젊은 부처님들 정말로
공부하셔야 합니다. 결혼 전에는 여자에게 에너지 다 뺐기고, 직장 들어가서
에너지 다 뺐기고, 돈 번다고 에너지 다 뺐기고, 남자들 3~40대에 교당에 있어요?
별로 없습니다. 왜? 남자는 돈과 명예의 흡인력이 엄청나다. 무섭습니다. 남들보다
잘나야 하고, 게임에서 이기려고 하잖아요? 똑같아요. 직장에서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제생의세와 사사불공으로 열심히 하면 괜찮은데 그게 아닙니다. 강한 경쟁심,
강한 명예심, 강한 욕심이 들어서 교당을 뒷전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결혼 전에 우리 공부를 진짜 해야 한다. 초입교도 때 해야 합니다.
하라고 하는 것을 해보세요. 내 맘에 안 들더라도 해야 한다.
저는 교무 하면서 괴롭습니다. 내 사종의무 강의를 들었던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직장이나 결혼하게 되면 모른 척 해버린다. 그러면 내가 말을 하지 않는다.
몰랐다면 모르겠는데 다 알면서도 모른척하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한다. 내 마음에서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참 구제불능
이겠다. 정말 불쌍합니다.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대종사님의 법에..
즉 본인의 영생을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려 하는 난데도 포기하고 싶은 맘이 난
사람은 얼마나 업이 두꺼운 사람인가? 얼마나 고생길이 창창할 것인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려야 할 것인가?
동시와 정시의 공부가 차이가 있다. 정시에는 잡념 제거 일심 양성이다.
동시에는 불의 제거 정의 양성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동시에도 일심만 챙기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총부에서 불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얼마나 일심을 챙겼는지
‘지.금. 불.이. 났. 습.니다. 세수. 대야나. 바.케스를 아무.거나. 들고 나오.십시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장난하나? 지금..’
동시에 불이 난 상황에서는 그 일심을 여의지 않고 뭐해야 해요?
‘어떻게 은혜가 될 것인가’, ‘어떻게 은혜를 생산할 것인가’ 그것이 정이다.
내가 아는 어떤 교무가 아침에 좌선하는데 물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좌선을
잘해야 하니까 그냥 계속했어요. 좌선 끝나고 옥상 올라가니 수도가 터져 난리가
나버렸다. 좌선 왜 하는가? 이것이 바로 일심병에 든 것이다. 일심을 위한 일심,
수행을 위한 수행. 수행은 사실은 우리의 삶이요 호흡이에요. 생활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가 있어요. 이것을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한다.
교당에 왔을 때 수행하고, 교무님 볼 때 수행하고, 집에 가서는 안 한다.
수행은 정말로 귀신도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좌선하는데 어떤 사람이 적적성성한 진경에 들었는지 아닌지는
누가 알아요? 자신만이 안다. 소를 끌고 가서 냇가에 가서 물 먹게 해도
소 스스로 안 먹으면 못 먹듯이, 수행이라는 것은 자기 내면에 서원이라든가
구도심 수행에 대한 강한 의지력 그것이 있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무늬만 수행이다.
그렇게 하고는 난 좌선 몇 년 했다고 할 것인가? 교전 몇 권 썼다고 할 것인가?
교당 몇 년 다녔다고 할 것인가? 그것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진짜 실다워야죠.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어야 한다. 그래서 지도자도 책임이 있다. 제대로 알려주고
할 수 있도록, 또 잘못하면 수정해 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앉아서 좌선을 해도 자기가 자기 마음을 끝까지 챙겨나가는 것은
결국 자기 몫이다. 교무님이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버스 안에서는 어떻게 마음을
챙겨야 하는지 알려줄까요? 다 자기 몫이죠. 여기에서 원리 배우고 나면 자기가
해야 한다.
어떤 일이 성공되냐 안 되냐는 삼대력 즉, 무시선을 제대로 했느냐 아니냐에
차이가 있다. 내가 교화를 하는데 안되었다면 유념공부나, 불공에, 또는 연구력이
잘못 되었거나, 취사가 잘못 되었거나, 아니면 수양이 빠졌던가, 무언가 미스한
것이 있다.
물론 초반 유념공부는 마음만 챙겨도 유념이다. 여러분 결가부좌, 반가부좌
해보세요. 발목이 부러지려고 하죠. 허리도 아프고, 그것 참 좋은 현상입니다.
발목이 부러지려고 하는데 번뇌망상이 들 겨를이 있어요. 천만에요 그 생각만
합니다. 그것도 공부요 일심이다. 발목 아프다는 생각에 묶여있는 것도 일심이다.
우리가 무시선 무처선 공부는 유념공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보은공부다.
보은즉불공입니다. 결국은 무시선을 잘하고 더 나아가서 반드시 견성을 하여
불리자성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무시선 무처선을 24시간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가 됩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경계 때
바로바로 챙겨서 다시 원위치 시키는 공부를 잘 시켜야 한다.
그래서 초반에는 유념 공부를 잘 해야 한다. 내가 방심을 잘 한다든가 신용을 못
지킨다든가 지각을 잘 하거나, 술을 못 끊거나, 담배를 못 끊거나, 아님 아침
일어나는 시간이 불규칙하면 그걸 먼저 잡아서 공 들이다 보면 하나씩 된다.
그럼 마음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 몸도 뼈, 세포도 변하는 것처럼 마음도 정말
바뀝니다. 대종사님께서 무시선 무처선 공부를 삼학 팔조로써 다 제시 해 주셨으니
그걸 하신다면 정말로 여분들이 스스로가 자기 능력이 계발되고 자기 스스로
이뻐지는 것을 스스로 체험하고 주위에서 알아본다. 그런데 마음을 욕심에
빼앗기고 살고 마음을 놓아버리고 방심하면 무시선과 거리가 멀다.
잡았다 놓았다, 잡았다 놓았다. 비었다 채웠다, 비었다 채웠다. 이 공부를 잘해야
합니다. 동했으면 반드시 정해야 하고, 정했으면 반드시 동해야 한다.
서가모니 부처님도 7일간 설법 하시면 7일간 쉬셨다고 한다.
저도 사실은 고민이 많다. 우리가 견성 성불 제중 이렇게도 이야기하고,
허령 신명 지각 중화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그런데 허령만 들어도 대접받고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것이 사리가 완전히 뚫리도록 지각으로 가야 한다.
그 다음에 확실하게 통해버리면 신명과 직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서나 덕으로 나타나는 중화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저도 생각해 보면 허령 신명 지각 여기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수행을 통해 허령도 맛보지 않은 사람은 아직 먼 것이다.
허령은 기도나 정시수양만 잘해도 금방 됩니다. 보통 점쟁이나 무당들은 허령
정도는 된다. 그 사람은 반드시 기도한다. 무당도 수양 공부한다. 만약 그 사람들이
산에 가서 기도하지 않으면 그 허령이 금방 매 해져 버린다. 삼 년을 못 간다.
그런데 조금 수양해서 밝아졌다고 써먹고 다니면 안 된다. 무시선은 동정간에
반드시 동 했으면 정으로 보림함축해서 그것을 더 높은 자리로 더 깊은 자리로
더 확실한 자리로 해 나가야 범부의 세계를 넘어서서 항마위, 출가위, 여래위..
이런 삼대력을 갖출 수 있는 그런 도인이 되면 어디 가서나 쓸모 많은 사람이 된다.
항마위는 조금 아집이 있을 수 있으나 충분히 자기 천도는 합니다.
그리고 생사 문제는 본인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만사 성공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출가위만 되면 어떤 일이라도 성공 시킬 수 있어요.
그것은 무시선 공부를 잘 한 것입니다. 정신의 수양력, 사리의 연구력, 작업의
취사력, 실행력이 서로 얽혀져서 제대로 깨쳐서 공을 들일 것 같으면 반드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대종사님 법으로 가능하다. 그 법이 정기훈련 상시훈련에
다 나와 있습니다. 삼학 팔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대종사님의 무시무시한 공부길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쉽게 무시선
공부를 만나게 되었지. 우리가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마음의 진공묘유자리를 깨쳐서
그것을 수 많은 동정간에 경계간에 놓지 않고 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우리가
만났다는 것입니다. 한 번 해보세요. 자기 스스로 자기가 놀랄 정도의 기질 변화,
때로는 자기의 역량이 터짐을 자기가 경험 할 수 있다. 정말입니다.
얼마든지 내 능력이 엄청나게 클 수 있다.
우리의 뇌를 천재가 20~30%를 쓴다. 범부가 10~15% 쓴답니다. 우리의 뇌세포
하나하나가 축전기와 같다. 우리가 호흡만 잘하여도 내 마음이 올바르면 축전지에
잘 축전이 되어 어디서나 20~30%를 쓸 수 있다.
그래서 무시선도 출발지가 어딘지 아세요? 내가 부처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거기에서 출발해야 내가 항마위 출가위 여래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못 났고 바보고 멀었고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든지 부처의 삼대력을 갖출 수 있다는 그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삼학공부의 출발점이 신이에요. 신.
그래서 교리도 전체를 말하면 신이다.
신으로 통해서 돈오를 거쳐 신분의성으로 삼학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 삼학의 취사가 바로 사은보은이다. 사요실천이고, 그것이 다시 신으로 가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원래 부처라는 존재요. 반드시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으로써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무시선 공부입니다. 그러하면 본인의
역량이 엄청난 경계에서 멈출 수 있는 힘. 일과 이치 속에서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정말 컸구나 하고 스스로 느낄 수 있다.
================== 질문 과 답변 =====================
Q_김법준: A와 B 둘 다 저에게 부탁을 했는데 몸이 하나이고 역량의 한계가
있어서 그 둘의 부탁을 다 들어줄 수가 없을 때,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상대와
악연으로 이어질 수 있잖아요? 그때의 인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A_교무님: 그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못
들어준다는 전제 하에서 그리고 못 들어주면 저 사람이 섭섭하고 내가 섭섭하게
했다는 전제에서 하는 이야기잖아요?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절을 해도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A는 들어주고 B는
못 들어주는 방법만 있어요? 그렇지 않죠? 제 삼자도 있고, 내가 역량을 키울 수도
있고, 한 사람을 반만 도와주고 또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미안하다고 하고 내일 도와 줄 수도 있고 얼마든지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거절할 때도 진짜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
꼭 해주고 싶은데 미리 선약이 있다. 아니면 다른 조절할 수 있는 방법 찾아본다.
내가
따라주고 국을 떠주고 정성이 있어요. 그리고 문자를 보내면 바로 답이 와요.
씹질 않습니다. 인과는 거래 입니다. 갔으면 와야 합니다.
갔는데 먹으면 인과가 아닙니다.
그래서 일은 선후가 있고 타력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고 정중한 거절도 있고 반반씩
나눠서 중도를 취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유념공부를 잘 하려면 바로 바로 처리해야
하고, 미루지 아니하고 적어야 한다. 알고 보면 자기가 못해놓고 핑계를 댄다.
나는 역량이 부족하고 바쁘고 잊어먹고 힘이 없고..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역량은 무섭다. 엄청나게 큰 역량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무시선 무처선은
그 역량을 계발해서 이 세상에 크게 보은하자. 다른 이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내가 지혜를 닦아서 어디서나 복을 쌓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히딩크는
역량을 몰랐습니다. 여기에 앉아있는 여러분들도 다 일원상이다. 나는 무한한 보물,
무한한 능력, 무한한 조화를 가진 존재이다. 그걸 믿고 무시선 공부를 동정간에
유념공부를 통해서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계속 하다 보면 이생에 불보살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다. 아니면 내생에 들어갈 수 있다. 이걸 먼저 확신해야 합니다.
내가 일원상이다. 그것에 바탕한 무시선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세상 만사가 얼마나 괴롭던가 얼굴에 주름살이 꽉 찼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의 사은을 공부하니까 원망이 아닌 감사로 바뀌고, 마음의 원리를
알아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텅 빈 마음자리를 쓰니까 나도 모르는 보은의
길로 갈 수 있다.
Q_
A_교무님: 교리적인 이해가 잘 되어야 한다. 대소유무는 유상, 무상, 변, 불변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은 아니잖아요?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유상의 세계, 무상의 세계, 진공, 묘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수양의 세계, 공 원 정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부분을 강조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사은은 진리의 대소유무로는 소자리입니다. 우주만유의 전체 보이지 않는 것뿐
아니라. 보이는 대상까지 넣었습니다. 일원상을 진리의 대자리로 분리해서
설명한다면 그것을 더 자세히 소자리로 나누었더니 사은이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 쪼갰더니 천지만물 허공법계.
그런데 동포은에서 인류, 사람에 대한 불공이 나왔다. 사은에 대한 불공이
우주만물과 인과보응의 이치로써 그것을 조절해 나가지만 우리 사람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불공이 가장 큰 불공 중 하나이다.
자연 스스로 돌아가지만 사람이 천지의 가장 큰 파괴자입니다. 그래서 인류에 대한
불공을 모은 것이 사요입니다. 평등사회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가자는 것이
사요입니다. 다 다음 주에 교리도 할 때 그 설명을 하겠습니다.
Q_
것 같을 때는 솔직하게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그 친구에게 무조건
지지해 주는 것이 좋은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A_교무님: 참 답이 애매하다. 그래서 무유정법이다. 정해지지 않고 상황 따라
다르다. 이치에 맞지 않도록 과도한 목표를 잡았다면 말을 해주는 것이 좋은데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 다릅니다.
Q_
합니다. 저도 예전에 비하여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 하는데 그 과정은 정말 힘들고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그런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면
일에 대한 능력이 커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 쉽게 만족하는데 모든 사람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실력을 키워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A_교무님: 그래서 서원이 중요합니다. 서원이 없는 사람은 좀 고생스러우면 피하고
도망가 버리죠. 어떤 목표, 서원, 비전, 꿈이 확실히 있는 사람은 그 고생을 약을
삼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것을 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걸렸을 때 헌배를 해야 해요? 말아야 해요?
/안 해야 해요.
그럼 더 아픕니다. 퇴행성은 안 해야 됩니다. 퇴행성도 근육운동을 하고 나서 해야
해요. 류머티스 관절염은 진짜 헌배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안 할 것들을 자꾸 찾아낸다. 그래서 이치를 알아야 하고,
대종사님의 자타력을 병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남들은 쉽게 되는 줄 안다. 돈 버는 사람,
성공한 사람. 항마위 올라간 사람, 희사하고 불사하는 것도 쉬운 것 같아요?
동마산교당 교무님에게서 오늘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 훈련 때 같은 단 이었습니다.
‘내가 천연비누 100개 만들었어요. 바자회 때 팔아서 학사에 도움을 줘. 3000원
정도 받는데 알아서 받아.’ 복 짓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종이만 나눠주고 똑같이 설명만 했는데 어떤 사람은 먹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일처럼 나서서 합니다. 그게 아느냐 모르냐의 차이입니다.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것이 힘이다.
알지도 모르면서 시키는 대로 안 합니다. 안 만큼 하겠다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죠? 시키는 것을 하면 빨리 알아진다.
그래서 가장 빠른 길이 믿음의 길이다.
대종사님 법으로 공부하는 것도 있고, 개인 내적으로는 인내력,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는 것. 옳은 일이라면 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을 하다 보니까 그 속에서
역량이 커지는 것입니다. 젊을 때 고생을 많이 해야 한다. 젊을 때 고생 안 한
사람은 크질 못합니다. 내가 볼 때 젊은 사람들이 꾀병이 많다.
Q_
미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본래 마음이 저러지 않다고 생각하면 분별성 있는
마음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A_교무님: 밖으로는 그 사람을 부처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하며, 내가 부처님으로
보지 않는 내 마음을 어떻게 챙길 것이냐? 아무리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있다고
할 지라도 그 사사불공을 잘 하려면 반드시 마음 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 마음의 힘이 없으면 용납이 안 되고, 인과가 신앙이 안 되도 용납이 안 되고,
그 사람의 본성을 신앙하지 못해도 용납이 안 됩니다. 사은의 근원적 은혜를
모르면 용납이 안 된다.
Q_
A_교무님: 100% 비례하지 않지만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 마음에
있습니다. 한 마음에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Q_
정한 것인데, 그 사람이 부처임을 신앙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A_교무님: 그것은 그렇게 말하면 절대 안돼. 자네가 생각할 때 그 사람이 무리라고
생각 되도 할 수도 있습니다. 큰 일 납니다. 저도 상담할 때 조심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변화될지 모릅니다. 사람의 능력은 미리 판단할 수 없다.
주식 정확히 예견한 사람 한 명도 없죠? 누가 100% 장담할 수 있어요?
똑같습니다. 사람도 100% 예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과거 시대도 아니고
미래 사회에는 내 마음을 어떻게 할까 무시선을 잘 하면 불공을 잘 하면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므로 단계적 방법으로 제시해 줄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가능성을 짓밟아버리는 것은 절대 안 된다.
타이핑:
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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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화요공부방 강연 정리가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내용이 많아 읽기에 인내력이 필요하오니 인쇄해서 읽으세요 ^^v
쌩유!
감사합니다 ^^
많이 기다리셨군요. 즐독하시길..^^v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일일이 꼼꼼이 다시 들어보시면서 타이핑하신다는 말씀듣고 감동이.. 넘 감사합니다..~! 나중에 큰 자료가 될 것입니다
늦게 올린다고 구박하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
정원님의 맑은 눈에 '꼼꼼' 그렇게 쓰여있읍디다^^
너무 과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만족합니다. ^^
감사합니다'ㅁ'
전부 다 읽는다면 당신은 용자입니다. ^^
타이핑 감사합니다! 못가보지만 집에서 공부 많이 되네요~
공부도 원래 독학이 더 무섭습니다. ^^
모든 분들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