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사나이 1
3월의 밤바다는 아직도 차고 매서웠다.
하늘엔 달마저 뜨지 않 아 캄캄했고, 별들만이 여기저기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이따금,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 오기는 했지만,
좋은 날씨를 보일거라는 기상청 예보는 오랜만에 적중한 듯 정적을 유지하고다.
이 때, 바다의 물살을 가르며 소형 어선 하나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어선은 보기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달려오던 어선이,
눈에 보일 만큼 급격히 속도를 줄여 가기 시작했다.
갑판 위로 두 명의 사내가 올라왔다.
그들은 한동안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3킬로 전방에서 멈춰 드립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코밑에 수염을 기른 사내였다.
그의 굵은 팔뚝엔 푸른 문신이 가득했다. 그는 일본어로 말했다.
코밑에 수염을 기른 이 장대한 체격의 사내 옆에 또 하나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키는 어림잡아도 1백68센티를 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체구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 사내였다.
"몇 시면 도착하겠습니까?"
키 작은 남자가, 긴장되는지 계속 손가락의 관절을 꺾어 대고 있었다.
"앞으로 20분이면 도착합니다. 더 이상은 가지 못합니다.
도착시간은 새벽 3시 정도가 될 겁니다."
두 사람은 다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선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엔진의 소음이 좀더 크게 들려 왔다.
이윽고, 물살을 가르던 어선이 바다 한가운데서 멈춰섰다.
키 작은 사내가 선실로 뛰어내려가,
비닐로 단단히 포장된 작은가방 하나를 들고 올라왔다.
그리고 코밑 수염의 건장한 사내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밀은 꼭 지켜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사람은 악수도 나누지 않았다.
"텀벙--."
키 작은 사내가 갑자기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물 속으로 뛰어든 사내가 푸르르 몸을 떨어 댔다.
바다의 냉기가 온몸을 엄습해 왔다. 일단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던 사내가,
'푸우--'하며 몸을 솟구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내를 이 곳까지 태우고 왔던 어선 마루이치(丸一)호는,
뱃머리를 돌려 대마도(對馬島)를 향해 쏜살같이 도망치고 있었다.
마루이치 호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내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본 후,
어선이 사라진 반대 방향을 향해 천천히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이따금 바람이 물결을 일으켜 세워 사내의 얼굴을 갈겨 댔고,
그럴 때마다 그는 가방을 든 왼손으로 얼굴을 막으며 한쪽 팔로 물살을 헤쳐 갔다.
그렇게 1킬로 정도 헤엄쳐 간 것 같았다.
팔에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헤엄을 치는 오른손이나 가방을 든 왼손이,
추위에 얼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턱이 턱, 턱 부딪쳤다.
체력마저 엄청나게 소모되어 갔고, 콧구멍은 바닷바람에 금방이라도 찢겨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어림잡아 1.5킬로 정도는 헤엄쳐 온 것 같다.
자신 있다고 판단했던 폐활량도 한계를 느끼는지 숨이 가빠 오기 시작했다.
"푸우-- , 푸우--."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호흡을 가다듬던 사내가 경악에 찬 얼굴로 밤바다 한 곳 을 응시했다.
밝은 빛 줄기 하나가 어둠을 가르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속력으로 보아 쾌속정이 분명했고, 눈부신 불빛은 그것이 해양 경비선임을 증명했다.
사내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피부었다.
"개자식들, ...마루이치 호를 발견한 게 틀림없어."
그는 절망감에 휩싸인 채 몸을 떨었다. 10분만 열심히 찾는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잡히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물 속 깊이 가라앉았다.
한손으로 가방을 단단히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코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개구리처럼 두 다리를 허우적대며 시간을 끌었다.
2분의 시간이 지났다. 심장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잠시 고개를 내밀어 숨을 돌린 후,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안 돼. 여기서 잡히면 안 된다구. 버텨, 버텨 봐. 참는 데는 이골이 난 놈 아냐?'
사내는 자신을 향해 끝없이 채찍질했다.
'윙-- .' 모터 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 왔다. 다시 1분이 지났다.
그의 뇌리에 문득 8년 전 어느 날이 스쳐 갔다.
'그 때도 절망적이었지. 그래도 난 참고 견뎠어.
그 때 견디지 못 했다면 난 틀림없이 죽어 버렸을 거야.'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참고 견디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기어이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푸-- 우."
참았던 숨을 내쉬고, 이내 다시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행히 탐조등 불빛을 피해 냈다.
경비선의 속력이 좀더 빨라졌다. 모터 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귀를 찢는 듯했다.
그뿐 아니라 경비선의 하체 부분이 물 속을 휘젓고 다녀, 자칫하면 머리가 깨질 지경에 이르렀다.
잠시도 머리를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
이 때, 기적이 일어났다. 머리 위를 배회하던 경비선이 뱃머리를 돌려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는 불쑥 일어났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았다면 그를 초인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사내의 눈동자는 증오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 불꽃 같았다. 그 불꽃이 사내의 팔뚝을 피스톤처럼 휘젓게 만들었다.
"녀석들, 모두 없애 버릴 테다."
그는 바다를 향해 '카악'침을 뱉었다. 그러나 증오심만으로 슈퍼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육지를 바로 코앞에 두고 탈진되어 갔다.
사내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하늘마저 자신을 버린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식이 아득히 멀어져 갔다.
"아 -- 아 -- !"
그는 절망적인 비명을 지르며 물 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철썩."
파도가 모래톱을 훑어 갔다. 그 파도 한 조각이 사내의 얼굴을 때렸다.
부르르--. 사내의 볼이 경련을 일으키며 떨어 댔다.
그리고 눈을 떴다. 의식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자,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팽창된 눈으로 왼손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지, 다시 모래톱에 얼굴을 파묻었다.
억샌 물결에 쓸리면서도 가방만큼은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파도가 사내를 실어 육지에 옮겨 놓은 것이다.
물에 흠뻑 젖은 채, 모래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식은 또렷했다.
그는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10분만 지나면 조금씩 체력을 회복할 것이다.
그는 단전 호흡을 하듯 일정한 양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가는 내뿜고,
내뿜었다가는 다시 들이마셨다. 그렇게 10여 분이 흘러갔다.
손과 발의 느낌을 알 수 있었다.
꼼지락거리며 손가락도 움직여 보고 발가락도 움직여 보았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옷이며 가방이며 모두가 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머리결에서 바닷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머리결을 쓸어 올리며 허리를 폈다.
허리를 펴던 그가 깜짝 놀라 머리를 들어올렸다.
마치, 히틀러의 게슈타포들이 신고 다니는 것 같은
그런 높다란 가죽 장화 두 개가 버티고 서 있었다.
다시 시선을 더 높이 들어올렸다.
흰색 헬멧을 쓴 정복 경찰이 서 있는데,
길 저 위에는 하얀 오토바이 한 대가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순찰대 순경에게 발각된 것이다.
사내는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옆으로는 험악한 바위들이 거칠게 널려져 있고,
그 뒤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사내의 최초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그러나 이 곳이 부산 어디 쯤인지,
이 순찰 순경이 어떻게 자신을 발견했는지는 도무지 알수 가 없었다.
아무튼, 사내의 목적은 탈주다.
지난 8년간 그는 개처럼 도쿄거리를 헤매며 살아왔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밀입국했다.
'밀입국하다니,
내가! 내가 내 조국에 돌아오는데도 어둠을 이용해 밀입국해야 하다니
어쨌든 지금은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일어서, 두 손 머리로 올리고."
경찰의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총구가 사내의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었다.
이 순찰대 순경은 두 명이서 한 조를 이루고 있었다.
갑자기 일주일 전부터 전국 경찰에 갑호 비상이 걸렸다.
앞으로 3개월 동안은 집구석 여편네 엉덩이도 못 두드리게 됐다며 푸념을 늘어 놓던 순경이다.
그는 새벽 순찰을 돌다가 교대 시간이 되어 돌아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그래서 동료 순경의 오토바이를 먼저 보내 놓고 바다를 향해 오줌을 갈기던 중,
이 커다란 물체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무장 간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총구를 사내에게 들이대기는 했지만,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훈련용 실탄은 여러 번 쏘아 보았지만, 실제 사람을 쏘아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일은 권총에 탄환이 없다는 것이다.
당국에서 안전 사고를 우려해, 빈 권총을 지급했던 것이다.
다행히 사내는 기진맥진한 채 쓰러져 있고, 채구도 자신의 반도 안 되어 보였다.
비닐로 감싼 작은 가방 하나만이 휴대품의 전부 같았다.
다급하면 발길로 걷어차도 한 방이면 끝날 것 같았다.
사내가 어기적대며 허리를 폈다. 그는 발을 다쳤는지,
오른손으로 발목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쓰러지며 왼쪽 발목에서 잭 나이프를 빼들었다.
순경은, 이 사내가 발목에서 섬광을 일으키며 꺼내는 잭 나이프를 미처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선제 공격으로 상대의 기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기적대며 일어서는 사내의 턱을 오른발로 힘껏 내질렀다.
"아이쿠!"
사내가 저만큼 나뒹굴었다.
순경은 무장 간첩이 독침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교육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왜소한 채구의 사내는 구둣발 한 방에 나가떨어진 채 일어설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무장 간첩 같지는 않았다.
가방으로 보아, 밀수꾼이거나 마약 운반책일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잘 하면 일 계급 특진이거나, 휴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옆구리에서 절그렁대고있는 수갑을 꺼내 들고, 쓰러진 사내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발로 옆구리를 또 한 번 걷어찼지만, 사내는 괴로운 신음 소리만 지를 뿐,
움직일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있었다.
"됐어. 자식, 아주 약골이구만."
순찰대 순경이 수갑을 열며 사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때다.
늘어져 있던 사내의 손이 번개처럼 스쳐 갔다.
'따금'한 아픔이 목을 스쳤다.
마치, 처음 마셔 보는 독한 양주가 목으로 넘어갈 때의 그런 쾌감 같은 아픔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이 거구의 순경이 무릎을 꿇으며 모래 바닥에 얼굴을 쑤셔 박았다.
바닥 틈에 고여 있던 바닷물이 철썩 튀겼고,
그의 목에서는 펌프질하듯 검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꿈틀' 하고 순경이 마지막 용틀임을 쳤지만, 이내 잠잠해지고 말았다.
단칼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내는 허리를 굽혀, 죽은 순경의 제복에 피 묻은 칼을 닦았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발목의 칼집에 다시 꽂았다.
옆구리가 저렸지만,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목격자는 없었다. 서두를 이유도 없다.
그는 순경의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에서, 경찰 공무원 특수 신분증과 약간의 돈, 그리고 여자 가수 사진이 나왔다.
그는 돈과 경찰 신분증을 꺼내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다시 경사진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반대쪽 숲속에서 옷을 갈아입을 작정이었다.
큰길로 올라섰다. 주인 잃은 오토바이가,
자신의 주인이 살해된것도 모른 채 마냥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는 그 오토바이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 복장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 길 저 끝에서 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불빛이 달려오고 있었다.
엔진 소리로 보아 오토바이가 분명했다. 먼저 갔던 동료가 찾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는 순경이 죽어 넘어진 곳의 반대쪽 숲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 해 들어갔다.
불빛이 오토바이 옆에서 멈추었고, 신경질적인 엔진음이 꺼지기도 전에
한 명의 건장한 순찰대 순경이 시트에서 뛰어내렸다.
어둠 속을 둘러보던 그는 벼랑 저 아래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하얀 헬멧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탄환도 없는 권총을 뽑아 들었다.
사내는 재빠른 솜씨로 길을 건너, 곧장 숲으로 뛰어들었다. 숲으로 들어서자,
그는 다리의 힘이 모두 풀려 쓰러질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때로는 나무에 부딪히기도 하고,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무릎이 찢어지고 손에서 피가 홀렀다.
숨이 차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뛰고 또 뛰었다.
숨이 차면 뜀박질을 멈추고, 잠시 폐부 깊숙이 공기를 집어 넣기도 했다.
만일 누가 봤다면 그는 포수의 총알을 맞은 상처받은 토끼로 알아보기 딱 알맞은 모습이었다.
어느 새 여명이 밝아 왔다. 사내는 웅덩이를 찾아 그 속에 숨어 들었다.
그리고 바닷물에 젖은 옷을 벗었다.
손과 무릎의 상처가 몹시 쓰라렸지만, 그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옷을 모두 갈아 입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고, 불안한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갑을 꺼내 보았다.
도쿄에서 만든 위조 주민등록증과 8백 달러, 조금 전 순경 지갑에서 꺼낸 8만원이 전부였다.
지갑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의 위치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숲뿐이었다.
부산에 이렇게 큰 숲이있는 곳을 그는 일찍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는 벗어 놓은 옷가지를 땅에 묻고, 가방을 움켜쥔 채 웅덩이를 빠져나왔다.
숲에서 동쪽으로 10여 미터를 더 걸어갔다. 숲의 경사가 완만해졌고,
나무들 사이 저 쪽으로 도시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저 쪽 멀리에는 방금 헤엄쳐 나온 부산 앞바다가 낮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홀렸다. 마침내 부산에 도착한 것이다.
해운대 백사장이 보였다. 이 곳은 바로 동백섬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걸었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도 채 안 되어 보였고, 작지만 야무진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눈이 섬광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도심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극심한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힘이 없었다.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었지만, 결코 여관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쯤 순경의 피살 사건이 상부에 전달되어,
전 여관과 호텔을 검문 검색할지도 모른다.
그는 해운대를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비상망이 쳐지기 전에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
새벽부터 달려나온 부지런한 영업용 택시 하나가 굴러왔고, 그는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어디로 모실까요?"
"부산역으로 가고 싶은데요. 서울 가는 열차와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택시 뒷좌석에 올라 앉았다.
옆에 앉으면 아무래도 얼굴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백미러로도 잘 보이지 않는 사각 지대를 찾아 엉덩이를 걸쳤다.
"한 시간 있으면 통일호 첫 차가 떠날 겁니다. 역으로 갈까요?"
택시는 이미 출발했다.
벌써 다섯 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사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누, 누구야!"
"허허 손님,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부산역입니다."
어느 틈에 잠에 곯아 떨어졌고, 그 사이 부산역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사내는 택시 요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역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광장으로 들어섰지만, 이 시간 서울을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 같았다.
긴장과 3킬로 가까운 바닷물과의 싸움, 순경 살해, 그리고 도주로 이어지는
몇 시간 동안 그의 몸에는 한 푼어치의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터미널 벤치에 쓰러져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싶었지만 그는 두리번거렸다.
8년 세월이 길기는 하지만, 부산역은 그다지 변한 것 같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 가면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술집과 여자들이 즐비하고.
그 주변에는 싸구려 창녀들이 득시글거린다.
이 새벽 시간에는 서울과 지방에서 오는 손님을 잡기 위해
펨프 여인들이 골목길서 남자들의 팔뚝을 잡아 끈다.
사내는 부산역 맞은편 길로 건너갔다. 몇 개의 포장 마차에서
구수한 곱창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계속 앞만 바라보며 걸었다.
큰길을 벗어나 골목길로 접어들자, 골목 여기저기서 나이 든 여자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이 사내의 팔뚝을 잡아 끌었다.
"괜찮은 애 있어요. 신페이(새것)라구요. 조금만 내요."
"독방 있어요. 어제 왔는데 아주 예뻐요."
"주무시고 가세요."
뚱뚱한 여자 하나가 사내의 허리를 휘어잡았다.
"열여덟 살이에요. 어제 왔거든요. 5천원만 내요.
깨끗한 독방에서 재미 좀 보라구요. 방도 따뜻해요."
사내가 여인을 따라갔다. 방이 따뜻하다는 데 이끌린 것이다.
골목길을 두 번이나 더 꺾어서야 그녀의 걸음이 멈추었다.
낡은 한옥이었다. 그녀가 손짓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방은 두평이 겨우 넘을까 말까 했는데,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자가 허리춤에서 담배를 꺼내 사내에게 권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 같았다.
"웬놈의 사내 새끼가 담배도 못 피워!"
오천 원을 받아 허리춤에 꽃고는 웃으며 돌아갔다.
그녀가 돌아 간 지 2분도 안 되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문이 열렸다.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짙은 니코틴 냄새와 어울려 역겹기 짝이 없었다.
초봄인데도 그녀의 셔츠는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열여덟 살이라던 여자는 아무리 보아도 서른은 넘어 보였다.
사내가 웃으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돈은 받았소?"
"왜, 팁을 더 주려구?"
"아니오, 그냥 가시오. 졸려 죽겠소."
"흥. 좋을 대로."
가랑이를 벌리지 않고 돈을 벌었다는 기쁨 때문인지, 그녀는 말 한 마디에 돌아서 가 버렸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그녀의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를 들으며. 사내는 펴놓지도 않은 이불 위에 코를 쑤셔 박았다.
백수웅(白秀雄)은 도쿄 타워 서남쪽에 위치한 다이몬(大問) 지하철역 부근의
작은 독신자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떤 때는 풍족하게 돈을 쓰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관리비도 내지 못해 쩔쩔맸다.
키 작고 다부지게 생긴 이 한국 청년이 어떻게 해서 도쿄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의 가족들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에도 영주권을 가진 제일 동포로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다이몬 역 대합실에서 심야에 살인 사건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너무나 참혹하게 살해되어, 수사하기조차 끔찍할 정도였다.
도쿄 경시청 수사관들은 백수웅이라는 한국 청년에게 의혹을 품고
수사했지만 정확한 증거를 잡지 못했다.
그는 1968년까지 한 철강 회사에 적(籍)을 두고 있었지만,
그 후로는 무엇으로 생활해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살인 사건 이후, 청년은 또다시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지만,
그를 살인범으로 체포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따금 일본 전역을 뒤덮었던 과격 급진파 대학생들과도 어울렸지만,
그들과 어울린다고 잡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일본에서의 법적 서류는 전혀 하자가 없었다.
수사 당국에서 백수웅이라는 한국 청년에 대한 신원 조회를 하기 위해
국제 제철(國際劑鐵)을 방문했지만, 곧 지휘관들로부터 수사 중지 명령을 받았다.
실력 있는 한 자민당 의원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것이다.
그 때 경시청 사람들은 백수웅이, 제철 회사 사장이며 자민당 의원인 그 실력가가
한국 여인을 통해 낳은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추리했지만, 그것 또한 증거가 없었다.
백수웅이 사는 독신자 아파트 맞은편에 일본식으로 지은 깨끗한 단독 주택이 한 채 있었다.
그 주택에는 두 명의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하나는 젊고 아름다웠고,
또 한 명의 여인은 사십이 넘어 보였는데 늘 집안 일만 돌보고 있어 가정부로 볼 수밖에 없었다.
백수웅은 그 젊은 여자와 가끔 근처의 경양식집에서 부딪치곤 했는데,
그 여자 역시 한국인 2세로 밝혀졌고,
두 사람은 이따금 만나 조국이나 일본 정부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웬일인지 그 여자는 백수웅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같은 한국 민족이라는 동질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자측은 그렇지 않았다.
이 이상한 사내의 사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 여자의 직업이. 긴자 중심가에 있는 '송죽'이라는 요정에서
술을 따르는 고급 창녀라는 것을 백수웅은 뒤늦게 눈치챘다.
이름은 '히데코'라고 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히데코가 집에서 쉬는 날이었다.
히데코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식사라도 같이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날 같이 식사를 나누며, 백수웅은 또다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나는 예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죠. 그 사람은 난데없이 '예수 얘기가 나왔다.
히데코가 웃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수웅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만 갔다.
"예수는 집도 없고 재산도 없었죠.
배고프면 밭의 밀을 까먹고 길가의 포도를 따먹었습니다.
밀이나 포도는 인간 개인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것이죠.
누구에게나 먹을 권리가 있는 겁니다. 사유재산을 갖는 건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사유 재산이 인정되기 때문에, 있는 사람은 더 갖기 위해,
없는 사람은 최소한의 재산을 위해 악다구니 끓듯 싸워 댑니다.
이게 인간입니까? 예수를 보십시오,
집도 없고 재산 한 푼 없이도 얼마나 행복했던 사람입니까.
그렇다고 내가 공산주의라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계급 투쟁을 하고 있으니까요."
히데코는 이 사내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참으로 희한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무산자주의)였고 무정부주의자였다.
사람은 원래 자연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는 청년이었다.
"당신은 조국을 생각해 본 일이 있소?"
백수웅은 느닷없이 조국 얘기를 꺼냈다.
"조국요? 난 조국보다 돈 버는 일에 더 바쁜 여자예요. 그런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럴 테죠."
그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나는 대한 민국 삼천리 강산을 유토피아로 만들 겁니다."
"당신이?"
히데코가 웃으며 백수웅을 바라보았다.
자칭 이 스물여덟 살의 사나이는 도쿄에서 건달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조국을 유토피아로 만들어 놓고야 말겠다며 큰소리치고 있었다.
첫댓글 잘 읽었읍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잘 읽어습니다 감사함니다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괴눌
유토피아같은 나라?
조국???
감사
좋아요.
감사합니다.
ㅈㄷ
즐겁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