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돈목재 복원·문화재 추진…천년가문 전통 되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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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함평이씨(咸平李氏) 참판공파 종가/함평종중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함평천지 토박이 성씨 시조 이언 후손
나주 회진 입향한 함평군 이극명 장군
왜구 격퇴 이종인 소요정서 호남명사 교유
돈목재 영목재 죽담재…원형 복원에 심혈
함평이씨 재실 전경
영산강이 굽이치는 죽산보를 마주보고 죽지마을과 신석리 배후에는 나주 8명당 중 하나인 연화도수형 명당이 있다. 함평이씨 이극명과 후손들의 묘역이 그곳이다.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전라도 토착성씨 함평이씨가 수많은 무관을 배출하고 명가를 유지하는데에는 친족간에 돈독하도록 마련한 선조 추모의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문 후손들은 최근 적지않은 재원을 투자해 200년 전의 건축 원형을 복원시켜 새로운 가문의 역사를 꿈꾸고 있다. 함평이씨 함평종중과 참판공파·자양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천년 역사의 함평이씨
함평이씨는 고려 광종(재위 950~975) 때 신호위대장군 이언이 함풍군(함평의 옛이름)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을 함평이씨라 하고 1천년을 이어온 전라도 토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영풍향과 해제현, 함풍현의 토성으로 이씨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시조묘는 옛 영풍향 치소가 있는 함평읍 성남리에 있는데 1811년 일가들이 봉향하는 곳에 봉심을 찾아 구전 고증으로 시조묘를 복원했다고 한다. 시조묘 아래 골샘 주위에서 기왓장이 다량 발견돼 치소의 존재가 확인됐고, 인근 초동에 고인돌 4기가 발굴돼 선사시대부터 주거했던 것이 확인됐다. 지리지에 기록된 이씨 유씨 정씨 박씨 중 정씨가 1126년에 입향했고 유씨는 함평 본관이 없고, 함평 본관의 박씨는 현재 관내에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함평이씨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이 일대에서 세를 이루며 살았던 함평천지의 토박이 성씨로써 1천년 가문 역사와 그 이상의 선계 뿌리를 가진 전통 명가라 할 수 있다.
10세 이극명은 모평감무를 역임한 이자보의 아들로 나주 다시면 회진에 입향했다. 그는 선략장군 호분위호군을 지냈고 순충적덕보조공신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함평군에 봉군됐다. 그의 아들인 이종생(1423~1495, 호는 자양)은 무과에 급제해 신숙주의 군관으로 북방에서 공을 세웠고 절충장군으로 이시애의 난을 선봉에서 평정하여 적개공신 2등 함성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인 이량(1446~1511)은 출중한 무예로 무과 급제해 왜구를 대파하고 함경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여수 장군도 주위에 세계 유일의 수중성을 쌓았으며 1710년 여수이량장군 방왜축제비가 세워졌고 함천군에 봉군됐다.
돈목재. 이극명과 이종수를 추모하는 공간
◇왜구 격퇴의 무관 배출
이종생의 동생인 11세 이종수(1424~1483)는 충좌위 부사정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증직돼 참판공파를 열었다. 그의 아들 이종인(1458~1533, 호는 소요당)은 무과에 급제해 해랑도 초무사 종사관으로 해랑적을 사로잡은 공을 세우고, 전라도수사로서 왜구를 격파했으며, 추자도에 출몰한 왜구를 격퇴한 후 벼슬을 사양하고 소요정을 짓고 호남 명사들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눌재 박상, 고봉 기대승, 백호 임제, 옥봉 백광훈 등 대학자들이 소요정에 시를 남겼고 영목재에서 추모한다. 이종인의 손자인 14세 이유근(1523~1606, 호는 죽담)은 눌재 박상의 문하에서 학문하며 기대승과 교유했고 문과 급제해 예조정랑, 지제교, 대구부사 등을 역임했고 명나라에 사장관으로 다녀와 명시로써 황제를 감복시켰다. 낙향해 보산정사(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31호)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영산강 죽산보 앞에 있는 죽지마을에 죽담지 연못을 만들었다. 그가 황제에게 하사받은 연주옥패가 후손에게 전승되고 있으며, 보산8현의 한사람으로 보산사와 죽담재에서 추모한다.
분토동 연지
◇명당 아래 연지와 돈목재 등 복원
나주시 다시면 신석리에는 면당 배후 선산에서 흘러내리는 좌백호 언덕 아래 방축을 쌓아 만든 연못 ‘분토동 연지’가 있다. 가문 후손인 17세 이초로의 외증손 권혁(1694~1759)은 영조 때 문과급제해 이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함평군 이극명의 묘소에 성묘한 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했고 나주의 8대 명당(연화도수형 명당)이라고 알려진 이곳에 분토(흙가루粉土)가 일어나면 지세상 정기가 발산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어야 지세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다며 연못과 돈목재를 조성했다고 한다. 풍수에서는 옥녀분토형 명당에 감응하는 거울로서 연못을 조성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연지는 1740년 권혁이 사비로 정미 10석을 헌납하고 부족금은 문중이 부담하면서 마을민과 합심해 방축을 축조하면서 세워졌고 300여년 동안 언제나 맑은 물로 적정수위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일가친척이 사이좋고 화목함(돈친목족敦親睦族)을 의미하는 돈목재는 입향조 이극명과 참판공파 파조 이종수를 모시고, 영목재는 이종인을 모시며, 죽담재는 이유근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돈목재, 영목재, 죽담재 1844년 중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190여년 풍상을 이겨내며 시멘트나 양철 등으로 덧붙이고 변형된 건축물을 문화재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복원한 것이다. 함성군 이종생의 20대 종손 이건일씨는 가문 친족 간의 돈목을 위해 11억을 헌납함으로써 선조가 남긴 가문 전통을 오늘에 되살렸다. 함평종중은 역사 인물 행적과 향토사 현장을 시도민에게 공개하기 위해 돈목재와 연지를 문화재로 등록신청하고 시설 일원의 추가적인 조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죽담재
영목재
돈목재 현판
황제에게 하사받은 연주옥패. 참판공종가 사진제공
보산정사
소요정
첫댓글 함이의 자랑입니다. 개인의 사재를 희사해 주신 건일종손의 뜻이 후대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돈목재는 선조의 그리움으로 항상 기억하게 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