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이들은 유사한 발음의 단어들을 활용하여 농담하기를 즐긴다. 밤중에 강도가 들어와서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는 사오정에게 "닥쳐!" 하고 협박을 했더니 사오정이 마당으로 뛰어나가 닭을 치기 시작했다는 재담 유의 말장난이다. 이것을 영어권에서는 '펀'(pun)이라고 한다. '펀'은 전달되는 교훈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며 기억을 오래 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에 설교자들도 즐겨 사용한다. 성경도 종종 이런 단어의 유희를 즐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와 중생(重生)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니고데모에게는 구약에서 쉽게 찾아지지 않는 '거듭난다'는 개념이 생소했던 모양이다. 의아해 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육체적인 재 탄생이 아니라 영적인 신생(新生)을 뜻했다는 것을 재미있게 설명하면서 약간의 말장난(pun)을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희랍어가 아닌 현대의 타 언어로 이 구절을 읽는 우리들에게는 예수께서 왜 성령을 하필 바람에 비교했는지 모르고 넘어가기 쉽다. 실제로 예수의 말씀을 잘 새겨보면 성령의 역사에는 바람의 움직임과 유사한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바람'의 개념이 사용된 것은 내용의 유사성 뿐 아니라 발음의 동일성 때문이기도 하다. 헬라 원문을 살펴보면 현대 성경의 '바람'과 '성령'에 사용된 단어가 동일하게 '프뉴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본문을 읽으면, "프뉴마가 임의로 불매… 알지 못하나니 프뉴마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가 된다. 희랍어의 '프뉴마'는 영, 바람, 숨결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펀'이다. 그렇다. 이것은 예수의 어록에 담겨있는 말의 지혜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구절을 대하면서 우리 젊은이들이 개그맨의 말장난에 넋이 빠져 자기도 모르게 암기하고 흉내내던 것처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어 그 내용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 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현상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바람이 그렇듯이 말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영향력을 행사하며 우리 주변에서 엄연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바람은 우리의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 자기의 주권으로 자유롭게 운행한다. 우리는 바람을 가둘 수 없다. 바람이 우리를 스쳐갈 뿐이다. 성령도 그렇게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주권적 자유로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여 거듭남을 체험하게 한다. 당신에게는 언제 그 프뉴마가 불어와 당신의 영혼에 거룩하고 신선한 프뉴마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