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의 6.25전쟁영웅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내일이면 6.25가 발발한지 72주년 되는 날입니다. 한국전쟁 시 미국은 전사자만 3만 6595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데, 이들이 흘린 피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는 4대에 걸쳐 한국에 뼈를 묻은 윌리엄 쇼 가문의 헌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50년 9월 서울수복작전 때 녹번리에서 29세에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일제강점기에 한국 선교사로 와 목원대를 설립한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입니다.
1939년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시 찍은 윌리엄 쇼(왼쪽)와 아버지 윌리엄 얼(오른쪽)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웨즐리대를 졸업 후 미 해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하였고, 1947년 전역 후에는 늘 그리워하던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하고 해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생도들을 지도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가 터지자 아내와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긴 채 참전하기 위해 미 해군에 재입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참전을 만류하는 가족들에게는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라며 짐가방을 쌌습니다. 이렇게 해밀턴 쇼 대위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생각했고 한국을 조국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던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피 흘리고 있는데 제가 흔쾌히 도우러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선교사로 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이 위기상황에 놓여 있을 때 저의 지식과 경험을 갖고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라는 심경을 밝혔습니다.
1956년 녹번리 전사 지점서 치러진 쇼대위 추모비 제막식 모습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쳐 한국어가 유창한 그는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보좌관인 해군 정보장교로 임명되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또 작전 완수 후에는 자원해 미 해병대 5연대에 배속되어 서울 탈환작전에 직접 참전하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9월 22일 적 후방 정찰을 위해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근처에 접근하던 쇼 대위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적 매복조의 공격을 받아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사하고 일주일 후 유엔군은 서울 탈환에 성공하였습니다.
은평구 평화공원에 있는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동상
그의 부인은 남편 잃은 슬픔 속에서도 서울로 와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도 한국에서 장학사업과 한·미 학술교류에 힘을 썼습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대를 이은 한국 사랑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평생 한국을 위해 봉사한 부모와 함께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된 그의 묘비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1956년 그가 전사한 자리에 추모비를 세웠고, 2010년에는 서울시 은평구 평화공원과 대전 목원대, 2014년에는 해군사관힉교에 동상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각각 충무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국가보훈처는 2015년 9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하였고 우정사업본부에서는 기념우표를 발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평생을 헌신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와 그 가족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출처] 대를 이은 한국 사랑, 한국전 참전용사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작성자 해븐하선
첫댓글 한국을 조국으로 여겼던 해밀텀 쇼 대위의 영웅담 잘 읽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