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굴머리에서 바라 본 신감 삼거리의 요즘 모습입니다.
찌푸린 날씨 탓인지 어째 거리가 고요하다 못해 음산한 느낌까지 주는군요.
저의 뇌리엔 지금의 모습은 생소하기만 하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60년 대 후반과 70년 대 초반의 활기 넘치던 그 시절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그럼 그 시절의 모습을 그려볼까요.
제가 그림을 잘 그린다면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겠지만 재주가 없으니 글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드레일이 쳐진 왼쪽으로는 굵은 플라타너스 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습니다.
더러 화목장 보러갔던 말구루마 주인이 말을 매어 놓고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는데요.
무료했던 우리들은 돌팔매로 축 늘어진 말 거시기를 맞히는 것을 재미로 여겼습니다.
무심코 던진 돌팔매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어린 우리 장난에 거기를 맞은 말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_-;
도로보다 약간 내려앉은 터에 위치한 '담배집'은 한때 자전거방과 철공소를 겸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집집마다 쇠창살 뾰족한 녹색 철대문을 다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었죠.
오른 쪽 트럭이 서 있는 곳은 '둑 너머집'으로 불리기도 했던 악명 높은 '신감옥'이었습니다.
색시집이던 저 곳 노름판에서 논밭 재산 다 탕진하고 식솔들을 데리고 고향을 뜬 이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저 자리는 원래부터가 터가 센 곳이었다고 합니다.
6.25 때, 저기 살던 집 주인이 지역 빨갱이들의 밀고로 인민군에게 악질지주로 몰려 즉석에서 총살을 당했답니다.
그 곳을 귀천 하천제방 공사장을 따라 다니며 함바집을 하던 군위 우보 출신 박O갑 씨가 사들여 술집을 열었다고 했는데.
마을에는 대단히 암적인 존재로서, 울 아부지는 생전에 박O갑 씨를 평하기를 단적으로 '악인(惡人)'이라고 규정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랬는지, 도로가 포장되면서 도로를 넓히려고 그랬는지 그 집은 매립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연도 많고 사건도 많이 벌어졌던 '신감옥'은 이제 흔적도 없어지고 마을 회관 옆 공터로만 남아 있군요.
그 다음 중앙으로 보이는 신감 '점빵'입니다.
제가 기억을 하지 못할 어린 나이부터 저기 가서 과자를 사먹었으니 점빵의 나이는 오히려 저보다도 많을 지 모를 일입니다.
역시 도로가 넓어지면서 건물이 뜯겼는지 많이 축소됐습니다.
옛날에는 육소간도 겸해서 했는데, 돼지가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 아이들은 저 집 안 우물가로 모여들곤 했습니다.
한때, 저 신감 삼거리는 사곡면에서도 알아주는 다운타운 街였습니다.
하루에 몇 안되는 버스가 서는 곳이라 차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배골재를 넘어온 전풍 신리 사람들, 토현 작승 오동 귀천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저 점빵 앞에서 즐비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떡방아간을 하던 우리집은 저 점방 남쪽 맞은편에 있었는데,(사진 상 교통 표지판에 가려 안보이는군요.)
추운 날이면 승객들이 우리집 방에까지 들어와서 기다리기 일쑤였습니다.
당연히 프라이버시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겠죠.^^
책꽂이의 책은 마음대로 뽑아보았으며 때로는 남의 공책까정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의 한편의 기억, 기억들 하시죠? 까만 교복에 흰 카라의 의성여고 교복. (그 당시는 여고생이 참 귀했습니다.)
그 교복을 입은 여고생 한 사람이 우리 방에서 차를 기다리다가 초딩이던 제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너 죽음과 주검이 무엇인지 아나?"
"잘 모르겠구마"
"죽음은 그냥 죽는 것을 말하고 주검은 죽은 이의 시체를 말하는 것이란다"
그 여고생은 그 무렵 국어 시간에 그것을 배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렸던 나에게 써 먹었을 것이고요.
덕분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를 일찍 깨닫게 됩니다.^^
학교길이기도 했던 신작로 길을 걸어 저 풍경이 보이는 신감다리에 다다르면 우리집에 다 온 셈입니다.
방아간 일을 하느라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눈길도 오래 주지 못했지만 아이는 꼭 엄마를 보고서야 책보를 풀었습니다.
추억이란 지극히 주관적이라 자칫하면 사적인 이야기로 흐르기 쉽지만 고향과 어머니에 대해서만은 예외일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고향은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곧 그리움이란 걸 느끼게 됩니다.
첫댓글 신감옥 벽에 크게 한문이 세로로 쓰여져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대감천에서 내려 오다보면 보였었는데..저희 선친이 쓰셨다던데..확인 할 길은 없습니다...
사진한장에 너무나 많은 글이 엮어져 있네요...공무원,동네선배님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는 신감리의 유흥사는 사곡민의 애환이 서려있다고나 할까...
대감천 님, 저는 그 글을 본 기억이 없군요.^^ 우리가 이사 가고 난 후에 쓰여진 지 모르겠습니다만. 지킴이 님이 사진을 올려준 덕분에 저도 추억여행 잘 하고 있습니다. 동기유발 혹은 동기부여란 말이 있잖습니까? 어떤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 일지도 모릅니다. 가끔 사진과 관련 된 글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