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트 페터 슈베르트
빈 근교의 리히텐탈(Liechtental)에서 1월 31일에 태어났다.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군과 교전, 캄포포르미오의 평화 조약이 성립된 해이다. 아버지는 농민 출신의 교사로서 후에 학교를 경영했으며,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14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프란츠는 그 네째였다. 처음에 아버지와 형에게 악기의 기초를 배워 일찍부터 재능을 나타내고, 8세 때부터는 출생지 교회 오르가니스트 홀처(Holzer)에게 기초 교육을 받았다.
슈타트콘빅트(Stadtkonvikt)에 입학
1808년(11세) 왕립 예배당의 소년 합창 단원으로 슈타트콘빅트에 입학, 초등 교육에서 고등 학교까지의 과정을 이수함과 동시에 음악 전문 교육을 받았다. 작곡을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배우고 그 밖에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했으며, 학생관현악단에서는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를 맡았다. 또한 슈파운(Spaun) 등의 좋은 친구를 얻은 것도 이 무렵이어서 프란츠의 음악열은 더욱 높아지고, 음악가로서 입신하는 데 강력히 반대하던 아버지도 결국은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변성기에 접어들었는데 아버지의 요청도 있고 해서 1813년(16세) 그리운 슈타트콘빅트를 떠나 아버지를 돕게 된다. 다시 징병을 피하기 위해 사범 학교에 다니게 되고, 한편으로는 작곡 활동도 본격적으로 펼쳐 간다.
테레제의 사모
1813년에는 「교향곡 제1번」을 비롯해서 몇 곡의 실내악과 리트를 썼으며, 1814년에는 리히텐탈 교회를 위해 「미사 F장조」를 작곡했다. 미사 초연 때 소프라노를 맡은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는 그 후에도 자주 슈베르트(오스트리아)의 작품을 교회에서 불렀는데, 그는 어느 사이엔가 이 아름다운 소프라노 가수를 연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슈베르트(오스트리아)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이 사랑은 끝내 결실을 못보고, 테레제는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 버린다. 1815년(18세)은 그의 생애 중 다작의 해로 「교향곡 제2번」, 「교향곡 제3번」,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 등의 기악곡 외에 「마왕」(성악곡)과 「들장미」(성악곡)의 명작을 포함하여 140곡의 리트를 작곡해 나갔다.
보헤미안의 생활
1816년 슈파운이 소개한 시인 쇼버(Franz von Schover)는 슈베르트(오스트리아)를 그의 집에 살게 하면서 보헤미안의 생활을 체험시켰다. 슈베르트(오스트리아)는 이 무렵 국민 학교의 교사를 하고 있었으나 그 수입이 적어서 징병기가 끝나자 그만두었다. 피아노 교사로서 생활할 것을 결심했지만, 원래 피아노도 교육도 능숙하지 못한 그는 여전히 제자나 친구들의 도움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생활을 계속해 갔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쓴 「교향곡 제4번(교향곡)」, 「교향곡 제5번」이나 「음악에 부쳐」(성악곡), 「송어」, 「죽음과 소녀」(실내악곡)(1817) 등의 명작 리트는 어느 것이나 그의 작풍의 완성과 충실을 나타내고 있다.
명가수 포글
1817년 쇼버의 소개로 알게 된 29세 연상의 요한 포글(Johann Michael Vogl, 1768~1840)은 리트 가수로서 활약중인 바리톤으로, 이후 슈베르트(오스트리아)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1819년(23세) 두 사람은 함께 북오스트리아를 여행했는데 이 동안에 피아노 5중주곡 「송어」가 완성되었으며, 또 그의 리트가 포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좋은 벗의 도움으로 그의 명성은 차츰 높아지고, 슈베르트(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친구들의 모임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도 결성하게 되었다. 1822년(25세)에는 드디어 악보 출판의 기회가 찾아와 연주회에서 호평을 받은 「마왕」(성악곡)이 Op.1로 출판되었으며, 그 성공에 의해 다시 19곡이 간행된다.
「미완성 교향곡」
이 해에는 교향곡 제8번(교향곡) 「미완성」(교향곡)도 착수되고 있었다. 슈타이어 음악 협회 명예 회원으로 추천된 답례로 작곡하여 이듬해인 1823년에 협회에 보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제3악장 이하는 도착되지 않았다. 이 해도 또한 다작의 해로서 「로자문데」 음악의 상연 외에 가곡집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성악곡), 「물 위에서 노래한다」(성악곡), 「그대는 나의 안식처」(성악곡) 등을 작곡하여 ‘슈베르티아데’에서 발표되어 갔다.
그의 건강 상태는 이 무렵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었으며 작은 수입으로 생활도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1824년부터 1827년에 걸쳐서는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 「죽음과 소녀」(실내악곡), 가곡집 「겨울 나그네」가 완성되어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1827년 3월, 존경하던 빈의 대작곡가 베토벤(독일)이 타계하여 그도 횃불을 들고 장례 행사에 참가했다.
최초이자 최후의 대성공
9월에는 그라츠를 방문하고 자작의 연주회를 열어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즉흥곡」과 「악흥의 한때」 등 몇 곡을 작곡했다. 이듬해 1828년 3월 자작 발표 연주회는 대성공 이어서 처음으로 큰 돈을 손에 넣었다. 슈베르트(오스트리아)는 그 돈으로 빚을 갚고 친구에게 한턱을 냈으며, 염원이던 새 피아노를 사느라고 돈을 모두 써 버렸다. 보기 드물게 자신감과 힘을 얻은 그는 「교향곡 제9번」이나 「현악 5중주곡 C장조」 등의 대작을 써 내고, 10월에는 하이든(오스트리아)의 묘를 참배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그 후 건강의 악화가 심해져서 11월부터는 병상에 누웠는데, 16일 티푸스라는 진단을 받고 19일 31세의 생애를 마쳤다. 유해는 본인의 유언에 따라 베토벤(독일)의 묘 부근에 매장했으며, 훗날 그 옆에 개장(改葬)했다고 한다.
천성의 리트 작가
슈베르트(오스트리아)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600곡에 달하는 주옥 같은 리트로서, 그의 기악작품도 리트 그 자체 내지는 리트적인 주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많다. 당시는 독일 문학사에 있어서도 서정시의 충실기였는데, 그는 거의 닥치는 대로 시를 작곡해 갔으며, 많을 때는 하루에 8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인정이 넘치는 보헤미안의 생활에 잠기면서 천부의 재능에 의해 빈 서민 생활의 감정을 작품에 반영해 간 슈베르트(오스트리아)는, 베토벤(독일)이 이룩할 수 없었던 일을 거의 무의식중에 성취했다고 할 수 있겠다. 독일 낭만파 음악의 하나의 원천이 된, 리트 정신의 끊임없는 발로를 여기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