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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8:1-34
▣ 기적을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마태복음 8장-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의 새로운 부분으로 옮겨가는데, 여기서는 왕이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다(8-10장).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가 어떤 능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약속들이 있는데, 마태는 열 개의 기적을 한 곳에 모아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왕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입증한다.
주님은 그의 첫 설교에서(눅 4:18-19) 무리들의 병을 고치시고 도와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자신에게 임하여 있음을 증명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이사야서 35장에 보면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걷는 왕국시대를 약속하고 있다(5-6절). 이러한 기적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신임장이었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 4장 23-25절과 연결된다.
1. 질병을 정복하는 능력(8:1-17)
1)문둥병-예수님 시대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으며 치료법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들을 만져 자신을 더럽히셨다. 그러나 그의 어루만지심은 치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말씀으로 고치기도 하셨다(“깨끗함을 받으라 !“). 레위기 13장에 보면 문둥병을 제사장이 검사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문둥병이 죄를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문둥병은 피부 아래로 깊숙히 스며들며(13:3), 퍼지고(13:7), 썩게 하며(13:44-45),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킨다(13:46). 그리고 불로 처리가 된다(13:52). 이스라엘 국가는 문둥병으로 썩어 가는 것으로 상징되었다(사 1:5-6).
2)중풍병(8:5-13)-여기서는 한 이방인이 도움을 받고자 그리스도께로 나아온다. 마태복음에는 이방인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경우가 두 군데 있는데 이곳과 15장 21-28절이다. 주목할 것은 두 경우 다 그리스도께서 먼 거리에서 고쳐 주셨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에베소서 2장 12-13절에 언급된 대로 “멀리 있던“ 사람들이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그리스도께서 두 경우 모두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리고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러한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리스도는 8장 10-12절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경고하신다. 그들은 왕국을 잃을 것이며, 그들 대신 이방인들이 받을 것이다.
3)열병(8:14-17)-무서운 질병인 문둥병에서 일반적인 병으로 상황이 바뀌어 졌는데, 그리스도는 이들을 모두 정복할 힘을 가지고 계신다. 만일 베드로가 아내가 있었는데 이것을 나쁜 본보기라고 하여 “그의 후계자들“인 교황들이 따르지 못할 일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누가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고전 9:5 참조) 주님께서 그녀를 고치시자 그녀는 주님께 봉사하였다. 이것은 완전히 치료되었음을 뜻하며, 주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그녀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마땅하다.
마태가 이사야 53장 4절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구약의 증명으로 삼고 있는 데 유의하자.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 53장 4절을 들어 “구속에는 치료가 따른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육신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태가 여기서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지칭한 것이다! 이사야 53장 4절은 갈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치료하시는 지상 사역을 하실 것임을 뜻한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이사야 53장 5절을 우리의 죄에 대한 치료의 의미로 적용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질병을 치료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가 어느 날 육신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롬 8:18-24). 그러나, 이 구절을 오늘날 신유를 뜻한다고 적용시키지는 말자. 마태는 이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며 우리도 또한 그러해야 한다."
2. 자연을 정복하는 능력(8:18-27)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 그들을 떠나셨다 ! 군중들에게 호소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를 좋아하는 오늘 날의 “그리스도인의 명성“과는 얼마나 다른가 ! 19-22절은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적에는 흥미가 있었으나 자신을 모두 바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폭풍을 사단이 일으킨 것이라고 믿기도 하는데, 이는 바다에 대해 전문가들이었던 제자들이 무서워 떨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리스도를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공격이었을 것이다. 갈릴리에는 갑작스런 폭풍이 자주 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험한 폭풍 중에서도 주무실 수 있는 주님의 평화로우심을 보자!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알때에 우리도 역시 가질 수 있는 평화이다. 주님은 다시금 그의 말씀으로써 바람과 바다를 조절하셨고, 즉시로 잠잠해졌다. 우리는 위대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나운 비바람을 벗어나(24절) 고요함에 이를 수가 있다(26절).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폭풍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것에 참으로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시 107:23-31 참조)."
3. 사단을 정복하는 능력(8:28-34)
그리스도는 다시 한 번 그의 원수를 묘지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 1-3절을 예화로 보여 주는 것이다. 죽음(묘지)이 있고, 귀신들림으로써 사단의 소유이며, 육신이 불결하고,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을 무섭게 연출하고 있다 ! 마태는 두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다른 복음서들에는 한 사람으로 나온다. 아마도 보다 뚜렷하게 나타나는 한 사람을 언급한 경우일 것이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우리는 사단의 능력의 실재(엡 6:12)와, 인간의 육체를 멸하려 하며, 영혼을 정죄하여 지옥으로 보내려고 하는 사단의 욕구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기도 전에 그들을 괴롭히신다“는 귀신들의 두려움은(29절) 사단과 그의 군대들이 앞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귀신들이 이 세상에서 그들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몸을 지녀야 했다. 이것은 마치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몸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롬 12:1-2). 귀신들이 돼지떼에게 들어가기를 간청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사단의 눈에는 돼지도 인간과 같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 탕자가 어디서 종말을 짓는지를 보라. 돼지와 함께 있을 때이다 !
귀신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주님의 “가라 !“는 한 마디의 말씀이 사람들에게서 그들을 쫓아 냈다. 사단은 살인자이기 때문에 돼지들은 멸망을 받았다(요 8:44).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하려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들을 사단에게서 구하시려고 폭풍을 뚫고 가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또한 우리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인간들의 미움과 갈보리라는 폭풍을 뚫고 기꺼이 가려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 떠나라고 말한 시민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 이 사건을 누가복음, 마가복음과 비교하여 보면 그 묘지에서 세 가지 기도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고 고침을 받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며, 시민들은 예수께서 떠나실 것을 구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사단을 정복할 힘을 가지고 계시다(요 12:31/요 14:30/골 2:15). 귀신의 세력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한다. 그러나 그들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사람은 교만의 귀신이 들렸고 다른 이는 육욕의 귀신이 들려 있다. 또 어떤 이는 돈을 사랑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구하여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
이 장에 나오는 말씀의 능력에 주의하자(8:8/8:16/8:26/8:32), 하나님의 말씀은능력이 있다(히 4:12). 우리는 설교를 함에 있어서나, 전도를 함에 있어서나 일상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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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1-38
▣ 가버나움에서의 사역-마태복음 9장-
이 장에서도 왕의 능력을 계속해서 제시하고 있다(8-10장). 앞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병을 정복하시는 능력(8:1-17), 자연을 정복하는 능력(8:18-27), 그리고 사단을 정복하는 능력을 보았다(8:28-34).
1. 죄를 정복하는 능력(9:1-17)
1)기적(9:1-8)-중풍이란 반신불수의 한 형태로서, 그 사람을 폐인이 되게 한다. 예수님을 믿는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 왔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 주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에 응답하셨다. 그런데 주님은 그보다 훨씬 더한 일을 하셨다.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 ! “인자(人子)는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그리스도를 비판하는 자들은 주님께 신성 모독의 죄가 있다고 고발하였으며, 이로써 그들은 주님의 왕이심과 인자되심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2)결과(9:9-17)-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고발하고 반대할 이유를 찾기 시작하였다(9:3/9:11/9:34 참조). 마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찬을 베풀고 그의 “동료 죄인들“을 초청하였을 때 바리새인들은 문제를 일으키려고 참석하였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죄악된 마음을 고치는 의사로 비유하며(9:12) 또한 사람들의 생활에 기쁨을 가져다 주는 신랑으로 비유하신다(9:15).
오늘날은 우리의 임무가 교회의 문을 열고 죄인들이 우리에게 오도록 초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교훈하시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로 복음의 멧세지를 들고 가라고 하신다. “분리“(separation)가 “고립“(isolation)이 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람들과 접촉해야 하는 일에 실패하게 될 위험이 있다.
세례(침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요한의 제자들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후로 계속해서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좀더 알기를 원해 왔었다(11:1-6). 예수님의 사역은 자주 금식하는 바리새인들의 행위와는 달랐으므로(눅 18:12) 요한의 제자들은 설명을 듣고 싶어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것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새 옷과 새포도주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율법“이라는 오래된 그릇에 “복음“이라는 새로운 멧세지를 부을 수는 없다. 율법과 은혜를 섞는 것은 혼란과 양자의 파멸을일으키게 될 따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은 새로운 형태를 취해야하는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혼합하는 일은 신앙의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2. 죽음을 이기는 능력(9:18-26)
1)욕망(9:18-19)-이 사람은 종교적이었고 율법에 순종하고 있었으나 죽음이 닥치자 그의 종교는 아무런 도움을 줄 능력이 없었다. 율법은 죽이지만 성령은 살린다. 상세한 내용을 위해서는 누가복음 8장 41-56절과 마태복음 5장 22-43절을 보라.
2)지체됨(9:20-22)-피의 문제를 가진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님의 발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기를 원하였다. 세상의 의사들은 그녀를 고칠수 없었기 때문에(막 5:26), 그녀는 크신 의사에게로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길을 늦추었다. 야이로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지체됨은 언제나 보다 큰 축복을 가져왔다(요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경우를 참조하라). 단지 그 소녀를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
3)조롱(9:23-24)-죄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그 소녀가 정말 죽었음을 입증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죄인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려 할 때에 세상이 우리를 조롱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엡 2:1-10).
4)증거(9:25-26)-주님께서 소녀에게 손을 대고 말씀하시자 소녀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세 사람을 살려내셨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성경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소녀-이 부분/ 젊은이-눅 7:11-16 / 노인-요 11 장). 죽음은 영적인 죽음을 상징한다(엡 2:1/요 5:24-25). 이처럼 죄는 모든 세대에 이르며, 더 나아가 모든 죄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지만 부패한 정도는 서로 다르다. 어린 소녀는 방금 죽었고 젊은이는 아마도 하루쯤 되었을 것이며, 나사로는 4일 동안 무덤에 있었다! “도덕적인 죄인“은 소녀와 같다. 부패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죽어 있다. “부도덕한 죄인“은 나사로와 같다. 그의 죄는 냄새가 난다. 세 사람 모두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났으며 이는 요한복음 5장 24절을 잘 표현하고 있다."
3. 어두움을 정복하는 능력(9:27-31)
우리는 이들이 어떻게 해서 소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질병으로 인해서 또는 나면서부터, 또는 사고로 소경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예수를 다윗의아들로 인정하였으며(1:1) 그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음을 가졌는지 물어보셨고, 그들은 믿었으므로 고침을 받았다.
8장과 9장에서 믿음을 어떻게 보여 주는지 주목하자. 백부장은 큰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8:10), 폭풍 속의 제자들은 믿음이 적었다(8:26). 친구들의 믿음은 중풍에 걸린 사람을 구원하였으며(9:2), 여자의 믿음은 병고침을 받게 했다(9:22). 야이로의 믿음은 길에서 지체함으로 시험을 받았고, 소경들은 믿음을 보상받았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이사야 61장 1-2절에 의하면 소경을 고치신 것은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4. 귀신을 정복하는 능력(9:32-38)
이 기적은 큰 소동을 야기시켰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도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시하며 왕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종교적 지도자들은 주님을 거절하였으며, 사단과 동맹하고 있다고 그를 비난하기조차 하였다. 미래의 어느 날 이스라엘은 사단에게 능력을 받게 되는 거짓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이다(요 5:43). 이 비난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12장 22-37절에 나오는 공개적인 반역으로 변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논쟁하지 않으셨음에 유의하자. 그보다는 그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도우러 가셨다. 주님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는데, 이 말은 핍박이 있어도 여전히 그들의 왕으로서 자신을 드려 그 민족을 위하여 일하셨음을 뜻한다. 나중에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똑같은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똑같은 기적을 이루게 하셨다(10:5-8). 이 사명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은 아니다. 또한 감히 기적을 베푸는 능력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 일들은 교회가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과 연관된 일들이다.
오늘날의 대중은 여전히 목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만이 이들을 인도하고 먹일 수 있으시다(겔 34장). 그리스도는 자신을 목자로, 추수하는 사람으로, 추수의 주인으로 비유하신다. 추수는 주님의 일이다(38절). 영혼들을 구원받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요한복음 4장 31-38절을 보고 이와 비슷한 교훈을 살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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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0:1-15
▣ 첫 선교사들의 파송-마태복음 10장-
이 장은 마태복음의 첫 부분인 왕의 출현(1-10장)을 다루는 마지막 장이다. 1-4장에서 주님은 그의 인격을 나타내셨고, 5-7장에서는 주님의 원리를, 8-10장에서는 주님의 능력을 계시하셨다. 8-9장에서 그리스도는 연속된 기적을 통하여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는데, 이 장에서는 그의 대사들을 파송하여 기적들을 이루게 하시며 천국의 멧세지를 전하신다. 표적이 생길 때는 반드시 유대인과 천국의 멧세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기“ 때문이다(고전 1:22).
이 장을 읽다 보면 16절과 24절의 교훈들에 변화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본 장을 모두 열 두 사도에 적용시킨다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15-23절에서 예수께서는 수 세기를 뛰어넘어 대환란 기간 중의 왕국 멧세지를 다루시기 때문이다. 본 장은 과거에 살았던 사도에게 주는 교훈(1-15절), 미래의 환란기에 살 사도들에게 주는 교훈(16-23절), 오늘날의 제자들과 종들에게 주는 교훈으로(24-42절) 되어 있다.
1. 과거의 사도들에게 주는 교훈(10:1-15)
그리스도는 9장 36-38절에서 추수에 대하여 기도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을 추수에 봉사하도록 파송하신다. 잃어버린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하심에 있어서 당신을 사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1절의 “제자“(배우는 사람들)란 말이 2절에서 “사도“(보냄을 받은 사람들)로 변화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이들 열 둘은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신적인 능력을 주셨다. 주님은 언제나 봉사 사역에 부르신 사람들에게 준비를 갖추게 하신다. 배반자 유다를 포함하여 인간이란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일을 성취하시는 데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신다(고전 3:4-9/롬 12:3-8).
그들의 사명은 명백하였다. 왕국을 전파하며 오직 유대인에게만 가는 것이었다. 세례(침례)요한도 이같이 했으며(3:2), 예수께서도 이렇게 하셨고(4:17), 이제 그의 제자들이 전국으로 다니며 멧세지를 퍼뜨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일으키는 기적들은 그들이 왕을 대리하고 있다는 신임장이 될 것이다.
이 사명은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오늘날의 각 선교사들에게 해당되는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의 나라를 허락하신 동안에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이 물질적인 일들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멧세지를 전하려고 한다면 자신과 가족이 쓸 것을 준비하고 제공해야 한다(딤전 5:8).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10장 9-10절의 교훈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오늘날 선교사들이 하듯이 교회들이 자신을 후원해 준 일에 감사를 표했다.
끝으로, 우리는 왕국 복음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며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청한다. 이 부분의 영적인 원리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이 될지 모르나, 특정한 교훈들로서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2. 미래의 사도들에게 주는 교훈(10:16-23)
성경에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도약“하는 일이 흔치 않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역사를 내려다 보며 대환란 기간 중에 주님의 증인이 될 유대인들을 보고 계신 것이다. 이 구절들은 열 두 사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5절에 보면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 18절은 이방인들에게 증거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2)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시기 전에는 성령이 그들 안에서 말씀하실 수가 없다(요 14:17).
3)열 두 사도들이 박해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누가복음 9장 10절과 마가복음 6장 30절은 그들이 성공적인 사역을 했으며 즐거워했음을 시사한다.
4) 22, 23절은 마태복음 24장 9, 13절과 비슷한데, 이 구절들은 명확히 말세에 해당되는 구절들이다.
이 부분은 “사도행전“ 시대 동안에 있을 사도들의 사역, 특히 사도바울의 사역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대환란 기에 적용시키는 것이 옳다. 22절에 보면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 유의하자. 이 구절은 대환란 시기의 박해 기간 동안 그의 대사들이 믿음으로 인내해야 함을 말한다. 이러한 박해는 주님의 재림으로 종말을 고할 것이다."
3. 현재의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10:24-42)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계신 데에 유의하자. 이 단어는 유대인에게만 제한하여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는 오늘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격려와 교훈이 들어 있다. 우리는 배우는 사람들(제자)이며 일군들(종)이다.
1)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경고(25-31절)-주님도 그런 취급을 받으셨음을 말씀하시며 그들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의 특권이라고 확신시키신다(빌 1:29/행 5:41). 28절은 사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지옥에서 몸과 혼을 멸망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심에 대한 확신을 주신다. 하나님은 참새들조차 돌보시는 분이다.
2)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의 중요성(31-33절)-이것은 그의 종들과 그들로 말미암은 개종자들에게 적용된다(롬 10:9-10/딤후 2:12 참조). 고백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고백은 구원의 자연적인 결과이다.
3)복음은 사람들을 갈라놓는다(34-39절)-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며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지만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고백한 그 순간부터 적들이 생긴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리시키시며, 가족과 친구라는 가장 강력해 보이는 자연적인 연관마저도 별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여기게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짐으로써, 십자가에 달려 그의 수치와 비난을 감수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섬길 수가 없다. 우리의 생명을 이기적으로 구하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잃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지면서도 다음 세상에서는 조금밖에 갖지 못하는 예가 얼마나 많은가!
4)그리스도인의 종됨의 중요성(40-42절)-그 종은 그리스도를 대리한다. 종을 거절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가 왕 중의 왕을 대리하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에 주께서 우리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을 아는 일은 참으로 큰 격려가 된다.
이 부분에서(24-42절), 그리스도는 종의 지위(24-25절), 보호(26-32절), 특권(33-38절), 약속(39절), 그리고 실천할 사항(40-42절)을 요약해서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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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적인 면
1)현대의 “신유주의자들“은 마치 마태복음 10장 8절이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들이 “죽은 자들을 일으킨 일“이 있는가? 만일 이 구절이 오늘날의 “신유주의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전도를 해야 하고 헌금을 받아서도 안된다! 이렇게 하고 있는가? 아니다!!!
2)하나님의 종을 거절하거나 잘못 취급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종이 주인보다 높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인을 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