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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순절 운동의 뿌리
순교자 박헌근 장로는 전남 무안군 몽탄면 봉산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를 따라 가 일본에서 고등학교 재학 중 예수님을 영접한다. 졸업 후 소명 받아 일본 이코마 성서신학원을 졸업했다. 1942년 귀국하여 대전에서 삼성교회를 창립하고, 이후 장로로 임직 되었다. 1948년 호남지역의 성령 운동을 주도했던 박귀임 전도사가 순천에 ‘대한기독교 순천오순절교회’(현재 순복음 오순절교회의 전신)를 설립하고, 교회가 성장해가자 1948년 11월 박헌근 장로를 초대 교역자로 청빙 하였다. 박 장로의 성실함과 열정적인 헌신을 통하여 1년 만에 35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했다.
순교자 박헌근 장로
교회가 부흥하자 일제의 핍박으로 흩어졌던 오순절교회들이 재건을 꿈꾸며 한자리에 모였다. 1950년 4월 9일 순천 순복음오순절교회에서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 대회’가 열렸다. 현재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설립의 초석이 된 허홍, 박성산, 김성환, 윤성덕, 박귀임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200여 지도자들이 모여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 부흥회를 개최한 것이다. 제1회 오순절대회 설교는 박헌근 장로가 맡았다.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은 한국전쟁 중에도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하는 동기가 되었다. 순복음 순천오순절교회에서 일어난 성령 운동은, 한국교회 오순절 성령 운동의 불씨가 되었으며 현재의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공산군이 순천으로 밀어닥쳤다. 사람들은 박헌근 장로에게 피난 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양들을 사지(死地)에 버리고 혼자 살 수 없었다. 결국, 교우들을 심방 하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는 고통 중에 있는 재소자들을 돌보았다. 당시 함께 감금되었던 순천중앙병원 원장에 따르면 그는 가족들과 교우들이 보내준 음식과 옷을 재소자들에게 나눠주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전도를 쉬지 않았다고 전한다. 순천오순절교회가 순천경찰서 북쪽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박헌근 장로가 고문당하며 부르짖는 비명과 신음소리를 교우들도 들을 수 있었다. 1950년 9월 17일. 급히 퇴각하는 공산군은 박 장로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최예임 사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웃음 띤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때 나이 36세였다.
몽탄면 박헌근 장로 묘소
박성산 목사는 이러한 박 장로의 순교 소식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 시의 손종영 목사에게 전했는데 이 편지가 1951년 10월 28일 자 미국 하나님의 성회 주간지(The Pentecostal Evangel) 기사로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공산당이 순천에서 철수하면서 100명이 넘는 민주인사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공산당이 총격을 가하려 하자 박헌근 장로는 공산당의 책상을 치면서 “당신들 모두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나갈 때 그는 총격을 받았다. 그는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순교였다. ’ 라고 기록되었다.
박헌근 장로의 순교의 피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어(요 12:24)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통하여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에 이바지하고 있다. 유족으로는 네 딸과 사위 정진일 목사가 있다. 순천 오순절순복음교회를 담임하는 김동혁 목사는 교회의 위기라고 말하는 이 시점에 박헌근 장로의 순교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이 본받고 따라가야 할 발자취라고 강조한다.
현재 순천 오순절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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