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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15 - 소련은 2차대전에서 군인 1144만과 민간인 1690만이 죽다!
우리 한국인들은 미국의 허리우드 전쟁 영화와 AP, UPI, AFP 및 로이터 통신등 서방 매체들을
통해 오랫동안 세계 뉴스를 받아보며 살아온지라 2차 세계대전..... 하면 영국군 및
미군과 독일군의 전쟁 또는 미군과 일본군이 싸운 전쟁으로 기억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하지만 2차대전 사망자는 미국 29만명, 영국 35만명, 프랑스 56만명, 일본 (조선인 약간 포함)
군인 130만 + 민간인 67만명, 중국 군인 205만 + 민간인 775만, 독일 군인 350만
+ 민간인 280만명 에 폴란드인 300만명인데 비해........ 소련은 군인 1,144만 +
민간인 1,690만명으로 전세계 희생자의 무려 60% 를 차지하니 "독일과 소련의 전쟁" 입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서유럽은 영국만 빼고는 다 점령한지라... 바르바로사작전 을 개시하여
불가침협정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니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3년간이나 포위 했고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및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해 격전을 벌여 쌍방간에 수천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독소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1년 6월 22일부터 1945년 5월 9일까지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발발한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니 양측 합계 3500만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인종과 이념 문제가 겹치면서 참혹하고 비인륜적인 전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원인으로는 독일의 석유자원 부족과 공산주의 경쟁자 제거, 미국과 전쟁 대비등
여러가지 배경이 꼽히나, 공통적으로 레벤스라움(생존권) 의 확보와 영국의
굴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아돌프 히틀러의 강력한 의지가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게르만-아리아인의 '동방생존권' 인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 유대-
볼셰비즘(Judeo- Bolshevism) 을 제거하고 열등인종인 슬라브족을 정복한후 추방,
노예화시킴으로서 '천년제국' 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는 소련을 격파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영국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특유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히틀러의 의중
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컸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자료가 밝혀질수록 논란만 가중됩니다.
히틀러는 집권전부터 공산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 원인중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었으니, 궁지에 몰린 독일은 '오히려' 공산주의자 블라디미르
레닌을 러시아로 가도록 도와주는 대가로 레닌이 정권을 잡으면 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약속합니다.
이후 진짜로 레닌은 전쟁에서 발을 뺐고 그 덕에 독일은 여력을 서부로 집중시킬수 있었으니 히틀러
의 주장과 다르게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소련은 다 죽어가던 독일이 조금이라도 더 버틸수
있었던 단초를 제공해 준 셈인데도..... 공산주의 때문에 1차 대전에서 패배했다고 말하는 것이네요?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 독일이 군비를 증강하며 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위협을 느낀 소련은 소련 -
영국 -프랑스 - 폴란드 4자 안보 체제를 구상하지만 서방측의 불신에 의해 난관에 봉착
하자,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군사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1938년 나치 독일에 합병돼버립니다.
1939년 4월 17일 소련은 '발트해- 지중해 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이 전쟁에 돌입한다' 는 동맹관계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지만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는데 예비 회담을 열자는데 동의한 것입니다.
8월 12일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영국 대표는 전권이 없었으며,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수 있도록 폴란드가
길을 내줄수 있는지를 질문했는데, 폴란드는 독일과의 갈등이 끝나더라도 소련군이 순순히 철군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소련군을 영토에 들일수 없다고 하는지라 다자 안보 체제는 결렬됩니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영국- 아일랜드나 이란- 이라크 처럼 좋지 않으니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러시아 또한
국가적 대혼란 시기를 노리고 침략한 폴란드에 모스크바 입성까지 허락하며 땅을 떼어준 역사가 있습니다.
1919년과 1921년 사이 동유럽의 신생국들을 재점령하기 위해 침략한 볼셰비키 러시아와 폴란드는
전쟁까지 벌어졌으니, 폴란드와 소련은 불가침조약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으니 폴란드가 독일과 홀로 싸울지언정 러시아와는 손을 안잡는다는 반응이 나올만 했습니다.
전쟁 발발시 동원할수 있는 병력으로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 야포 5천여문, 전차 9천여대,
항공기 5천여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소련은 독소전쟁 때 수백 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1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한 소련의 호언장담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대를 파병한다고 답했으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
가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 라는 반응을 보였는데, 캐묻자 영국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으며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묻자, 2개 사단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에 가서 불가침협정을 체결하니
소련은 폴란드를 독일과 나눠먹고,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이 약소국 (발트 3국, 루마니아 등) 들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하며, 독일은 소련에 기계류를 소련은 독일에 자원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합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9월 17일 소련이
참전해 폴란드 동쪽을 침략함으로써 폴란드 제2공화국은 멸망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게 되었으며 1940년 6월 소련이 발트 3국을 합병합니다.
1940년 12월 18일 히틀러는 국방군에 소련 공격계획을 작성할 것을 명령하니 1941년부터 침공
징조가 나타나는데, 영국은 독일 암호를 해독해 처칠이 스탈린에게
경고하기도 했고, 1941년 봄에만 180건의 독일 항공기 소련 영공 침범 사례도
있었으며, 일본에 상주하던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독일의 침공이 개시될 것을 소련에 알립니다.
하지만 스탈린과 소련 정보국은 무시했으며, 공산주의자였던 독일의 한 인쇄업자가 독일군
에 납품한 숙어집을 소련 영사관에 보냈는데, "항복하라", "손들어", "집단농장
의장 어디 있나", "공산주의자냐?", "발포한다" 따위 러시아어 표현이 실려 있었습니다.
6월 16일 베를린에 파견된 소련 간첩들도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하루전인 6월 21일 독일군 탈영 병사 알프레트 리스코프는 독일군 내에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였는데, 그가 "독일이 내일 공격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징후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은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 공격하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
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이는 전쟁초기 소련 공군이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임박했음에도 손놓고 있다가 이륙조차 해보지 못한채 대거 궤멸되는 참극을 초래합니다.
소련은 독일이 서부에서 영국과 전쟁을 치르는 내내 독일에 물자를 제공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하루 전에도 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으니..... 물자를 실은 기차와 또
하나 기차가 베를린- 모스크바 선로를 왕복했는데 그 기차에는 독일과 소련 민간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장성들이 소련 침략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히틀러 처럼 소련의 군사력과 역량을 턱없이 얕잡아
보았기 때문인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지만 염려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영국이었으니, 세계의 패권국
영국을 미국이 무한 자원으로 지원할 가능성이 높아지는지라 도박을 군사전문가들이 군소리 없이 따랐습니다.
도박이 성공하려면 4~5개월 안에 소련을 때려눕혀야 했는데,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에
발이 묶여있으므로 소련만 무너뜨리면 독일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고
미국도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해야 하니 유럽까지 넘볼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무너진 상황인데다가, 영국은 섬나라니 육군이 약했으며 장비 상당수를 영국
원정군으로 파병했다가 프랑스 침공때 날려먹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면서 자원을
공군 강화에 투자해야 했던 상황이라 유럽에 상륙해 독일 육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독일 육군은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때문에 발칸반도에 빨려들어갔지만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종결시켰고, 영국군에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전역이 밀려나자 독일은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북아프리카 군단을 보냈지만 군단 규모였고 지중해-북아프리카의 주력은 이탈리아군 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했는데, 정복을 위해서는 강력한 해군이나 공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히틀러는 수십개 사단을 해체하고 해군과 공군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400만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유사시 천만의 병력을 동원할수 있는 소련을 앞에 둔 상황에서 육군을 줄이기는 부담스러웠습니다.
독일과 소련의 인구비는 1937년 기준으로 1: 3이었고 유사시 동원 능력도 큰 차이가 났는데, 바르바로사
작전시 독일군과 소련군의 병력 전투 손실 차이는 1: 5 로 압도적이긴 했지만, 스탈린의 후퇴
금지로 3백만명이 포위되어 섬멸되거나 항복해 전체 병력 손실비는 1: 20 의 재앙적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소련군의 회복력을 과소평가했고 소련군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량뿐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
의 성공에서 독일군을 따라잡으면서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는 오히려 일방적 공격으로
독일군을 포위섬멸하고 십만 단위의 포로를 획득하며 회복 불가능한 병력 손실비에서 경합우세가 되었습니다.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을때 절대 손을 잡을 것 같지 않았던 두 나라가 손을 잡은 것이라 결코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었고 언젠가는 서로를 침공할 것이라 예측하는 상태였으며 스탈린은 독일과
서유럽이 소모전을 벌여 만신창이가 되었을때 침략해 유럽을 공짜로 먹을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일로서는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해 두지 못한다면
영, 미를 막느라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소련의 침공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어느정도 필연적 선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제정 러시아의 무능함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성공을 확신했으니 대 미국전에서
배후를 노릴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하고 자원문제도 해결할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었으니
동시에 이념, 정치적 목표인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존권 生存圈) 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석유가 독일엔 항상 부족했으니, 미국이 1941년~1945년까지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선의 연합국에 제공한 석유는 60억 배럴이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은 13억 배럴도 되지 않았으니 부족한 석유를 소련에서 얻어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잘못될 경우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될수도 있었지만, 누구도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군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독일 장성들은 소련군의 역량을 얕잡아 봤고 모스크바 공방전때 독일군의 동계
장비가 허술한 것도 이런 이유니, 1차 세계대전 악몽이 재현됨과 동시에 한술 더 떠 본토까지 침공당합니다.
전선에서 싸우는 수백만명의 군인을 비롯 대다수 독일 국민도 '볼셰비즘과 겨루는 성전' 이라는
나치 선전기관이 주입한 논리를 받아들였으며 광적인 볼셰비키가 서양 문화를 파괴하는 것을
막으려는 예방전쟁이니 '유대 볼셰비즘'을 없애지 않는한 유럽의 해방은 기대할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시작
했으니 독일이 굳이 미국에 선전포고할 의무는 없었지만 히틀러의 노림수와 달리 독일의 대미 선전
포고가 일본의 대소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일본은 독일이 패망한 후까지 대소 중립을 고수합니다.
선전포고는 일본이 중국을 그만 공격하고 소련을 공격하라는 의미도 있었는데, 6개월 전에는 해상 보급에
연명하는 영국이 독일의 유일한 상대였으나, 이젠 양면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동쪽에선 소련,
서쪽에선 미국으로 훗날 냉전시대의 양강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소련 침공은 독일의 멸망 신호탄이라?
독일의 부채 경제는 1938년에 190억 마르크에 이를 정도로 감당할수 없었으니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 독일은 금을 악착같이 긁어모았으니 약탈경제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안슐루스, 뮌헨 협정,
프랑스 침공, 유고슬라비아 침공 에서 수많은 금을 갈취했지만 국가 부채를 한순간에 갚을수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쳐들어가기만 하면 강압적 공산 통치에 염증을 느낀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해
소련 체제는 공격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니, 히틀러가 소련을
두고 한 말입니다.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저 엉터리 건물은 스스로 무너진다."
소련을 과소평가한 것은 히틀러만의 오만이라고 할수는 없고 예외가 소련과의 러일전쟁을 겪은
일본인데, 일본은 미국의 요구대로 중국에서 철수해 소련을 공격하자는 북방파와 중국 및
동남아로 진출하자는 남방파로 팽팽하게 대립했다가 남방파가 이겨 진주만을 공격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 등은 독일군을 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 준
군대로 환영했지만 그에대한 독일군의 보답은 학살, 파괴, 약탈뿐이었으니,
독일이 이러한 짓을 저지른 것은 열등한 슬라브족을 멸살시키기 위해 취한 학살이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본토 방어전으로 밀린 이후에야 끔찍한 전쟁범죄 행위가 멈췄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독일군의 협력자가 될 뻔했던 우크라이나인이나 발트
3국 모두 독일군에 등을 돌렸고 후방에서 빨치산을 하든지 소련군에 앞장서 입대합니다.
히틀러와 독일군은 침공에 낙관적이었는데, 소련이 거대한 육군을 보유하지만 프랑스도 파리가 함락
되자 무너진 전례가 있는만큼 소련도 그렇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며 또 대숙청으로 소련군이
반신불수된 상태이기에 군사 작전을 펼쳐 봤자 범위만 컸지 프랑스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방에 공업시설 생산능력이 증명되고 극동에 있던 정예 병력이 집결하기 전까지는 소련군이 연전연패
했으니, 독일은 후방 견제는 일본이 해줄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일본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있었으니..... 체결 시점이 독소전쟁 발발 2개월 전이었습니다.
일본군은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이었는데 독일이 일본과 아무 의논도 없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식으로 일본의 뒤통수를 치자..... 일본 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히라누마 기이치로 총리대신과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습니다.
그런데도 2년후 바르바로사 작전을 일본에 알리지 않았으니, 일본 외무장관이 조약을 맺기 한달전 베를린을
방문해 일본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추진중이라는 상황을 알렸는데도 저랬으니 일본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히틀러의 장단에 맞추어 2달 정도밖에 안된 대소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을 도울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을 침공해 온 독일군과 전투를 한번 했다하면 수십만씩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저력으로 결사적으로 저항하며 결코 무너지지
않았으며...... 소련군은 독일군 비행기가 정찰을 하는데도 별다른 정보 수집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기사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주는 일본군의 침략이 곧 있을 것이니 사전에 외교적으로 대응해 달라고
조선에 몇차례나 요청했고, 북규슈 가라쓰에 전진기지인 나고야성을 쌓고 20만 왜군이
집결했으며 부산 왜관에 거주하던 수백명의 일본 상인들이 단 한명도 남지 않고 황급히 돌아갔습니다.
대마도에 천여척 왜선이 집결했음에도 부산 경상좌수사 박홍은 단 한척의 정찰선을 띄우지 않았으며 30척 판옥선
이 여러 진에 분산돼 있었으니 일부라도 모아 단 한차례 훈련도 실시하지 않았고 4월 13일 왜선 700척이
수평선에 나타나자 사냥중이던 부산진첨사는 세견선 상선이 많이 온다고 생각했으니... 당시 소련이 그러했습니다.
일단 이러한 파멸적인 상황은 조선인들 처럼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쉬운데.... 그가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동래부사 송상현
이나 경상좌수사 박홍 처럼 적의 공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하는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됩니다.
1940년 11월 12일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
는 몰로토프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는데..... “대영제국은
이미 망했소. 소련이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 동맹에 가입하면 인도 제국을 나눠 주겠소.”
그날 영국 공군이 베를린을 폭격해 몰로토프는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함께 방공호로 대피했는데
몰로토프가 한 말이 걸작이니 "대영제국이 망했다면 지금 떨어지고 있는 폭탄은 누구의 것이오?"
소련은 하루전인 6월 21일에야 경계령을 내렸으나 이미 독일군 특공대가 소련군 제1선 부대 통신망을 절단해
놓은 상태라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으니 스탈린은 히틀러가 정상적이라고 믿었기에 전쟁의 빌미가
될수있는 명분이나 우발적 충돌만 억제하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스탈린은 독일 정찰기나 부대에 대응 하지말라 했으니, 소련군의 참패를 초래하는데, 청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지 않을려고 정성들여 육성한 해군함대를 프랑스군이 공격하자 대응하지 말라고 했다가
청나라 남방 해군이 소멸한 후에야 프랑스군에 맞섰지만... 해군이 사라졌으니 막지 못한 일이 떠오릅니다.
이탈리아군을 보조하면서 영국군을 격퇴하라고 보낸 에르빈 롬멜은 독일군을 주력으로 몰아쳐 영국군
제8군을 격퇴하고 토브룩을 향해 공세를 펼치고 있었고 바르바로사 작전 한달 전까지 독일군은
크레타섬과 발칸 반도를 공략하였으니 잔존 영국군과 게릴라 소탕작전은 6월 초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천년 역사에 한번 나올까 한 또라이니 스탈린 뿐만 아니라 영국 체임벌린이나 프랑스의 달라디에도
오스트리아 병합이나 뮌헨 협정의 주데텐란트 강탈에서 1차대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독일측
요구사항을 받아주었으나 히틀러의 전쟁광 기질에 폴란드까지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북한에 넘어온 중공군 포로들을 보고도 중공군이 한반도에
올리없다면서 소구모 정찰대라고 부정했던 맥아더 처럼 그럴리없다며 현실을 부정했고 노발대발 화를
내기도 하고 독일이 왜 침공하겠냐며 전전긍긍한 것을 보면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맥아더 처럼....
1941년 6월의 신문 기사에는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영국 침공이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으며, 물론 괴벨스는 배포된 신문을 소련이 보란듯이 회수해 버렸는데,
이 행동의 목적은 자신들이 정말로 영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역정보를 흘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침공 또한 스탈린의 오판에 기여했으니 그리스는 히틀러도 의도치
않은 이탈리아의 짓이었는데, 동부에서 독일의 새로운 부대가 편성된 이유를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바로사 작전을 연기시킨 원인으로 원래
독일의 계획이었던 1941년 5월 15일 공격 없이 그냥 지나가니 스탈린은 정보원들을 불신합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보듯 광활한 영토와 막장스런 기후덕분에 공격자에게 불리하니
침공하려면 러시아의 라스푸티차(진흑탕 길) 와 동장군을 피해 봄, 아무리 늦어도
초여름에 침공해야 하지만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발칸반도에서 시간을
허비해 한여름이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독일군이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스탈린은 판단했습니다.
1941년의 소련의 육군과 공군은 막 전환기를 맞고 있었으니 조직과 지휘부, 장비, 훈련 병력 배치, 방어
계획 모두가 바뀌던 중이었는데, 대숙청을 통해 군대 내부에 있는 '인민의 적' 을 잡아낸지라 교리가
바뀌는 시기였으니 가장 취약해져 있던 소련군을 기습한 것은 독일군도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이었습니다.
독일군 진격 속도는 예상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키예프에서 소련의 남서 방면군을 전멸시킨 것이 최후의
영광이었으니.... 소련군은 기습으로 와해된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해 독일군을 소모시켰고,
겨울이 오기 전까지 독일군은 아르항겔스크 까지 진출하기는 커녕 모스크바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당초 계획대로 소련군 180개 사단을 격파하였으니 잔존 소련군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고 모스크바를 향해 공세를 지속했지만, 소련군은
373개 사단을 전개하고 있었으니 정보전에서 독일은 소련에 처절하리만큼 참패했던 것입니다.
서구권에서는 '동부전선' 이라고 칭하지만 하나의 '전선' 으로 치기에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단일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대부분의 군인들이 독소전쟁에
동원되었으며 사상자 비중도 독소전쟁이 60%이니 유사 이래 모든 전투의 규모
순위는 상위 10개 중에 7개, 특히 1위 부터 5위가 전부 독소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들 입니다.
서구권 위주 전쟁관에 서구 매체들 파급력으로 서부전선이 조명받는 경우가 많으며 호칭도 '동부전선' 정도로
일컬어지지만 투입된 규모와 인력을 고려하면 일개 '전선' 으로 불리기 힘든 대규모로 서유럽, 북아프리카
는 물론 태평양과 중국, 동남아 전선까지 포함한 전체 2차 대전의 총 인명피해 중에 60% 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독소전쟁이 없었더라면 독일이 대(對) 소련 전선에 퍼부었던 400만 대군이 오롯이 서부에 집중
되었을 것이고 영국과 미국의 베를린 까지의 진격은 더 많은 물자를 소모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적인 인명 피해를 냈을 것이니 2차 대전의 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전쟁입니다.
독소전쟁 직전까지는 중일전쟁이 가장 넓은 판도에서 치러진 전쟁이었고 인명 피해도 그나마 독소전에
준하는 수준이지만, 당시 중화민국은 지방 군벌이 강력하던 시기로 중앙 집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병력 동원력이 좋지않아 거대한 인구에 비해 의외로 전체 병력이 얼마 안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 제국도 중국군과 싸우는 동시에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면서 태평양은 물론 동남아시아 전선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중국 본토로 병력을 동원하지 못한 관계로 중일전쟁에서 일어난 양군간 교전의
규모는 작았으니 제2차 상하이 사변, 우한 방어전등 가장 큰 전투들도 양군 합쳐 100만명도 동원되지 않았습니다.
최고 인명 피해인 대륙타통작전이 양군 합쳐 60만 전사자가 나왔는데 일반적인 전쟁과 비교하면 매우
큰 수치지만 독소전쟁과 비교하면 많은 수치가 아니니 중국인의 희생은 기아나 한파, 전염병,
일본군의 학살로 죽은 민간인이었고 군 병력 손실은 일본군의 3배가 조금 안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소련은 중화민국보다 훨씬 강력한 중앙 집권화된 열강이었고,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포병 전력에서 한참 앞서 있었으니, 일본도 독일보다 경제력, 군사력을 비롯한 국력
에서 열세였던 것은 마찬가지니 국가의 체력 부터 독일과 소련이 일본과 중국
보다 훨씬 튼튼했는데 당시 독일과 소련은 미국 아래 GDP 2, 3위를 다투는 국가들이었습니다.
프랑스 침공 당시 양 측은 총 300만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전투마다 사단- 군단급 위주의 규모로 교전이
벌어졌으며 독일군의 전광석화 같은 전격전에 연합군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파리가 함락되었고
노르웨이 침공도 1개 군단급 병력이며 북아프리카 전역도 군단급에서 야전군급 병력 정도 동원했습니다.
독소전쟁은 양 국가, 동부 유럽에서 세력 다툼을 해오던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두 악명 높은 독재자, 나치 독일을 대표로 하는
파시즘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라는 거대 이데올로기의 흥망을 건 총력전이었으며
양측 모두 집단군 단위에 총계 수천만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어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강대국의 총 병력 숫자에 맞먹는 100만명 군인들이 단 한개 전투의 사상자인 경우도 있었으며, 이 전쟁의
패전으로 독일은 민족중흥의 발흥지 동프로이센을 상실했을 뿐만아니라 히틀러와 파시즘, 동게르만
민족과 프로이센주의 전통들이 도태되고 스탈린과 공산주의가 지구의 절반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됩니다.
나치 독일은 서부전선에서는 이미지 관리를 했으니 서/북유럽과 미국이 나치 사상에서 서열높은 인종에
해당되는 나라들이었기에 나름 전쟁포로들을 대우해준데 비해 운터멘쉬(하등인간) 로 규정한
동부전선 슬라브족에게는 잔인하게 굴었으며 소련도 독일보다는 덜했지만 절멸전을 치르며 포악해집니다.
독일군은 대부분의 전차와 항공기를 동부전선에 투입했으며 소련은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에
렌드리스로 마련한 전차와 항공기를 전부 독일전선 방면으로 투입했으니, 중일전쟁이나
서부전선에선 꿈도 못꿀 수천대 단위의 전차들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차전이 여러번 벌어졌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시 독일군은 400만명의 소련군을 섬멸하며 1,500km 의 거리를 진격해
모스크바 코 앞까지 도달했으며.... 바그라티온 작전시 소련군은 2개월 만에
집단군 단위의 독일군 병력들을 몰살시키며 700km를 주파했으니 수백만이 죽어나갔습니다.
독일은 소련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항공기들을 총동원해 초토화시켰고,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를 비롯 도시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구스타프 열차포와
칼 자주박격포를 비롯한 수천개의 화포를 동원해 세바스토폴 요새를 공략하기도 했습니다.
대도시 전투마다 소련 인민들이 방어진지 공사를 도왔으며 청야전술을 실시해 수백년을 고향 마을을 스스로
불태워버려 독일군이 물자를 현지 조달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소련군 패잔병과 민간인들은 총기를 들고
빨치산이 되어 독일군을 괴롭혔으며 우랄로 이전된 군수공업단지에선 총동원되어 군수무기들을 생산했습니다.
여군들도 100만 이상이 동원되어 지원 부대뿐만 아니라 저격수, 전차병, 조종사 등 일선 전투병과에
배치되어 맹활약했는데, 심지어 범죄자들도 형벌부대에 배치되어 독일군의 총알받이가
되었으며 독일의 공습을 피하고자 서부 공업지대를 통째로 뜯어가 우랄 산맥 동쪽으로 이전시켰습니다.
독소전쟁은 게르만족이 슬라브족이 사는 동유럽역을 정복하고 노예로 삼는 정복전쟁 수준이 아니라,
아예 민족을 말살하여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려는 절멸전쟁이었기에 잔혹한 일들이
벌어졌으니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후 포로로 잡은 수백만명의 소련군 병사들을 굶겨 죽였습니다.
또는 강제수용소로 보내 가스실에서 죽이거나 건물에 포로를 무더기로 집어넣고 입구를 막은뒤 산 채로
불태워 죽이거나 쪄 죽였고, 소련군이나 빨치산 포로에게 분풀이로 산 채로 내장을 뽑거나
톱으로 사지를 자르고 신체를 훼손하는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니 친위대와 국방군 모두 그랬습니다.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민간인들이 파르티잔 운동을 벌이자 민간인을 상대로도 보복
학살을 수행했는데, 만행에 분노한 소련군과 빨치산은 독일군 포로를 잡으면,
똑같이 신체 가운데 중요부위를 잘라내거나 십자가에 팔다리를 못박거나 안구를
녹여버리고 망치로 이빨이나 턱을 박살낸뒤 죽이는등 보복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독일군 포로들은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혹독한 환경속에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으니,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 민간인에 대한 약탈, 학살, 감간을 저지르기도 했으니
상호보복의 특성을 띤 전쟁이었기에.... 독소전쟁은 잔혹함과 비극의 극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소련 측 피해중 군인은, 동원군인 총수 29,574,900 (기타 정부부처 포함 34,476,700) 중 총
손실 (사망/전쟁포로/행방불명) 11,444,100, 전사, 부상으로 인한 총 사망자 수는
688만명에 행방불명/전쟁포로 총수 4,559,000 이고 민간인은 사망자 총 수 16,900,000 입니다.
이후 독일군의 힘이 빠지자 소련군은 대 반격을 개시해 베를린을 함락시켰으니... 이후 발트
3국을 자기 영토로 만들고 동독,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를 위성국가로 만들자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에도 독자적인 공산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미국은 일본과 싸우면서 피해가 너무 심하게 나자 유럽전선에서 소련을 독일과 전쟁을 시켜 재미를
보았듯..... 불가침조약 중인 소련에게 일본전 참전을 종용하니 결국 소련군이 찬전했고
그 대가로 소현은 알루샨열도와 사할린에 한반도 북부를 보상으로 받았스니 한반도는 분할됩니다?
일본의 군부와 정가에서는 온건파인 북방파와 강경파인 남방파가 권력 투쟁끝에 남방파가 승리해 미국
하와이를 습격했다가 패전해 망하는데.... 북방파는 일본은 1900년 의화단때 베이징을 함락한
서방 8개국의 일원이었고 1905년 러일전쟁때 영국과 동맹국이었으며 1914년 1차대전때
영미와 동맹국이고 1918년 시베리아 출병때 미국과 동맹국이니 2차대전도 미국편에 서자는 것입니다.
북방파는 미국의 요구대로 일본이 영국과 프랑스에 미국등 서방 국가들의 사실상 식민지인 베트남
과 중국에서 철수해 남방진출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대응을 명분으로 소련으로 진격해 알루샨
열도와 사할린에 하바로프스크 까지 연해주를 손에 넣고는 서북쪽으로 몽골을 점령하자는 것입니다.
북방파의 주장대로 일본군이 하와이와 중국에 남방으로 진격하지 않고 소련을 침공했으면, 소련은 서쪽
독일군과 동쪽 일본군을 맞아 패망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고 독일은 건재할 것이며, 일본 영토는 미국
보다 커졌을 것이고, 한국인은 해방과 독립은 커녕 만주와 연해주에 몽골로 강제 이주당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