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연기설(緣起說)>
12 연기설(緣起說). (1) 연기(緣起)의 원리
연기는 산스크리트어 ‘Pratitya-Samutpa-da’의 번역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 ‘조건으로 생기는 것’,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어 ‘Pratitya’는 서로 관련된다는 뜻이며,
‘Samutpa-da’는 함께(Sam) 일어난다(utpa-da)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起)’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緣) 형성되는 것’이며,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의지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
일체의 현상은 원인과 그에 따르는 결과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말인데,
존재하는 모든 현상계는 상관관계(相關關係)속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부모님들의 인연의 부산물이다시피
우리가 나고 죽는 것은 다 이러한 인연에 따라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연기법(緣起法)은 불교의 중심사상으로
모든 현상계의 이치를 밝히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붓다가 깨달았다는 내용이 바로 12연기의 도리이다.
따라서 연기법은 모든 불교철학의 이론적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아무리 복잡한 불교교리도 연기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같아서 연기의 이론은
불교전반에 걸쳐 있는 일관된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연기법은 모든 현상계의
일체법(一切法)이 서로 관계돼 조건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불변적⋅고정적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공(空)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깨닫는다’는 말은 새로 말들어낸다는 어떤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있어왔던 진리에 대한 발견이라는 의미이다.
붓다께서는 “연기의 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해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 - <잡아함 권12>.
여기서 “상주(常住)와 법주(法住), 법계(法界)”라는 말이 나왔다.
모든 것은 무상하지만 덮어놓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있고,
사물의 생멸변화에는 인연화합(因緣和合)의 조건이 있으며,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 있다.
무상한 것들 속에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상주(常住)하고 있다.
이것을 ‘법주(法住, dharma-sth-iti)’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로 해서 성립하고 있다.
물이 산소와 수소로 성립하듯이
모든 존재는 어떤 법칙을 요소로 하고 있다.
이것을 ‘법계(法界dharma-dhatu)’라고 한다(잡아함경).
여기서 ‘계(界)’는 구성 요소나 층을 나타내는 말이다.
연기법은 붓다뿐만 아니라 붓다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이것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 [법계상주법(法界常住法)]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붓다와 같은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붓다는 단지 이 법칙을 발견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연기법의 발견자이지 발명자는 아니다.
그리고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이 연기법을 관찰함으로써
붓다가 됐던 것이므로 연기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면
붓다의 가르침 전체를 이해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하셨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붓다]를 보며,
나를 보는 자는 곧 법을 본다.”라고도 하셨다.
즉, 연기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법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붓다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붓다는 이러한 연기법을 발견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리고 중생들의 문제를 위해 응용하고 실천했다.
붓다가 전 생애에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苦, dukkha)’에 관한 문제였다.
그가 출가한 것도, 6년에 걸쳐 힘든 수행을 한 것도,
그리고 성도(成道) 후 45년간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사람들을 가르친 것도 결국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붓다 가르침의 처음과 끝은 ‘고와 고에서의 해탈’이었다.
연기법 입장에서 보면 고(苦)의 고유성(固有性)
또는 실재성(實在性)은 인정될 수 없다.
‘고(苦)’는 신(神)이나 절대자와 같은 어떤 존재가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을 제거해버린다면
고(苦)도 사라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 고(苦)에 대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붓다의 설법 태도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붓다가 연기설을 설한 본래의 목적은 우리들 인간존재의
근저에 뿌리박고 있는 ‘고(苦)’ 문제를 어떻게든지 해결하려고 설한 것이었다.
즉, ‘고(苦)’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상황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과 고의 문제가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제시한 가르침이 12연기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