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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산 7단지코오롱아파트 원문보기 글쓴이: 몽구스
작가 김홍신의 행복 담론
“인생을 허비하는 건 가장 큰 직무 유기”
굴곡 없는 평탄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픔이나 좌절, 슬픔은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반대 경우도 사실이다.
고통은 때론 사람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요,
인생의 감칠맛을 더하는 양념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고?
김홍신 작가는 “편안하고 아늑한 것은 결국 고통에서 나온다”고 일축한다.
힘든 상황을 딛고 일어섰기에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는 소리.
그래서일까? 김홍신 작가는 굴곡 많은 인생을 두려워하며 피하기보다
있는 힘껏, 온몸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결코 말랑하지 않은 작품을 쓰는 그가
오랜 세월 대중을 끌어안은 비결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간이 되지 않은 음식을 싫어하잖아요. 삶도 마찬가지예요.
좌절이나 근심, 열등감 등은 무조건 터부시할 게 아니라
인생살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양념이죠.
이런 것들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할 겁니다.”
1980년대 초 어두운 사회상을 다룬 소설 〈인간시장〉으로
일대 파란을 일으킨 작가 김홍신(63).
대한민국 최초 밀리언셀러 작가로 등극한 이후에도
대하소설 〈김홍신의 대발해〉 〈바람 바람 바람〉 〈칼날 위의 전쟁〉 등
선 굵은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해왔다.
한국소설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통일문화대상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한때 정치인으로 잠시 외도(?)해
8년 연속 ‘의정 평가 1등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유명세만큼 그가 감내해야 할 고통도 만만치 않았는데….
자녀 유괴 협박, 인신공격 등 각종 위협을 받는 건 비일비재.
작품을 쓰기 위한 취재 과정 중 위험한 고비를 넘긴 적도 숱하다.
그러나 김홍신 작가는 “그 과정이 있기에 현재의 나도 있다”고 단언한다.
아무리 힘든 순간이라도 모두 의미가 있다는 소리.
그는 오늘도 힘주어 말한다.
“세상은 늘 고통을 나눠준다.
그러나 그 고통은 사람에게 강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무기 ‘열등감’
때늦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봄날 오후,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김홍신 작가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인사말 삼아 ‘요즘 남부러울 게 없겠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드러내고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자신처럼 열등감투성이도 없을 거라고.
“남들처럼 키도 크고 싶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학창 시절을 보내길 원했죠.
세속적인 의미의 일류 대학도 다니고 싶었고요.
하지만 현실은 뭐 하나 녹록한 게 없었습니다.
대학도 사수 끝에 합격했잖아요.
4전 1승 3패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4전 4패예요.
당시 2차 대학이었는데, 스무 명 정원인 국문학과에서 21등을 했죠.
그런데 앞에 두 친구가 등록을 하지 않은 덕분에 겨우 들어갔어요.
이러니 제가 어떻게 열등감이 없겠어요.”
하지만 김홍신 작가는
‘열등감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무기’라고 강조했다.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그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을 예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안데르센은 ‘가난, 못생긴 외모’ 등 지극한 콤플렉스에 시달렸지만,
오히려 이 같은 상황이 그가 대문호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고,
못생겼다고 놀림을 당했기에 〈미운 오리 새끼〉가 탄생할 수 있었단다.
“돌아가신 성철 대선사님께서 한창 힘들어하던 저에게
‘대나무처럼 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죠.
속이 비고 마디가 있어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처럼
가볍고 소박하게 살라는 뜻이에요.
대나무의 마디는 사람에겐 좌절이나 고비인 셈이죠.
제가 고통을 인생의 양념이라 표현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김홍신 작가는 대학에서 교내 문학상을 휩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순탄하지 않았다.
2학년 때는 집안이 망해 휴학해야 했고, 한참 뒤에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계주를 했는데, 계가 잘못돼 한순간에 집안이 빚더미에 오른 것.
갑작스럽게 집안이 망해 감내해야 하던 배고픈 시절,
책상도 없이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서 지칠 때까지 글을 쓰던 일 등.
그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마디’들이 차곡차곡 쌓였기에
정말 힘겹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소신 있는 삶의 원동력 ‘어머니’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치열한 시대정신을 유지하고, 할 말은 하는 올곧은 성격도 어머니 덕이라고.
급기야 우리 시대 ‘어머니’에 대한 예찬론까지 펼쳤다.
“아이를 낳아 길러보면 어머니의 수고가 얼마나 위대한지
뼈저리게 공감할 수 있어요.
이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열정’입니다.
오죽하면 ‘어렵고 힘든 현실을 견디기 위해 신이 필요한데,
신 대신 어머니를 보내줬다’는 말이 있겠어요.
(쑥스러운 듯) 소신 있게 사는 태도는 어머니께 배운 거 같아요.
‘당당하게, 불의에 굴하지 말고 할 말은 하라’는 걸 어려서부터 체득했죠.
저희 집은 오히려 어머니가 매섭고, 아버지는 인자한 편이었습니다.
외아들이라 당시엔 애지중지하실 법도 한데,
‘주워 온 자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냉정하게 가르치셨죠.
집안이 망했다고 해서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언제나 당당하게 살라’고 신신당부하던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
속 한 번 썩이지 않았겠다고 묻자 그는 겸연쩍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웬걸요, 속도 많이 썩였죠. 소설가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건
재수할 때지만, 어렴풋이나마 ‘글은 내 운명’이라고 느끼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시절입니다.
작문 선생님께서 글을 잘 쓴다며 문학의 길을 가라고 독려해주셨죠.
한때 신학반에 들어가 신부가 되길 원했지만,
작문 선생님 덕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키워갈 수 있었어요.
어머니의 간곡한 청으로 의대 입시 준비를 할 때도 마음은 딴 곳에 있었죠.
늘 책상에 앉아 있었으니 어머니는 제가 열심히 공부한 줄 아셨을 거예요.
사실은 소설 쓰고, 소설책을 읽었는데 말이죠.
” 타인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자녀로 키워라 "
고인이 되신 어머니껜 죄송하지만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 우리에겐 행운이다”라고 농담을 건네자,
그는 “나에게도 다행”이라며 껄껄 웃었다.
운 좋게 의과대학에 진학했어도 좋은 의사가 될 순 없었을 거란다.
오히려 전공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중퇴했을 확률이 더 높다고.
“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자녀는 부모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자녀 인생을 부모 계획대로 이끈다고 반드시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고요.
제가 소설가 대신 의사가 됐다면 이른바 세속적인 명망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부모가 자녀의 개성을 볼 필요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자녀의 개성을 찾아 그 길로 가게 해줘야 훌륭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
궁극적으로 남을 기뻐하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는 물론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김홍신 작가 역시 아이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부모였다고.
하지만 요즘에야 다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절감한단다.
“아내가 예술이라면 질색을 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원고지에 낙서를 하면 버럭 화내며 뺏을 정도였으니까요.
하루가 멀다고 각종 협박에 시달리고,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이들이 저와 같은 길을 가길 원하지 않았죠.
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딸아이의 청을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대학 때 미술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 미국 유학 중인 딸아이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고.
괜히 부모 욕심에 아이를 한참 돌아가게 한 건 아닌지 요즘도 후회가 된단다.
사회적 약자, 그들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다
사별한 아내 얘기가 나오자 김홍신 작가는 잠시 먼 산을 바라봤다.
무명 시절부터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던 아내를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인간시장〉은 사람들의 과분한 사랑으로 명망과 성공을 안겨줬지만,
그만큼 아픔도 있었다.
“살얼음 걷듯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죠.
한때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에 피신까지 가야 했습니다.
엄마들은 본인을 죽이겠다는 말은 견디지만,
자녀의 안위를 위협하는 건 참지 못해요.”
심장병을 얻을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아내는 아무런 불평 없이 늘 그를 지지했다.
선천적으로 천식을 앓아온 아내는
10년간 투병하다가 지난 2004년 세상을 떴다.
“가족에게 미안하지만 글 쓰는 걸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서울역 앞 옛 대우빌딩 뒷골목에서 인신매매 현장을 취재한 적이 있어요.
갓 상경한 시골 소녀들을 납치해 물건처럼 팔아넘겼죠.
당시 굉장히 위험했어요. 인신매매 일당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빠져나왔죠.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개할 일이에요.
기자님이라면 그 소녀들의 눈을 외면할 수 있겠어요?”
김홍신 작가는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적 약자의 실상을 체감하면
없던 휴머니즘도 절로 생긴다고 했다.
요즘은 덜하지만 1980년에만 해도 권력층이나 가진 자의 횡포가 심각했다고.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그는 ‘글쓰기’를 택했고,
〈인간시장〉이 그 신호탄인 셈이다.
김홍신 작가가 국회의원 시절 ‘소신 발언 정치인’이라는 수식어를 얻은 것도
이 같은 의식이 밑바탕이 됐기 때문.
1996년 민주당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
1997년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하면서
한나라당 소속 15, 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상습 당론 거부자’로 낙인찍힐 정도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몰입의 즐거움에 오늘도 펜을 들다 하지만 그는 천생 ‘문학인’이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훌훌 벗어버리니 이토록 평온할 수가 없다고.
환갑이 넘은 나이건만 어느 때보다 작품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8년 남짓 구상·집필한 〈김홍신의 대발해〉를 내놓는가 하면,
정치계의 실상을 고발하는 <신인간시장〉(가제)을 선보일 계획이다.
시놉시스가 거의 끝나간다며 두툼한 종이 뭉치를 기자에게 내밀었다.
김홍신 작가는 아직도 수기를 고집한다.
〈김홍신의 대발해〉를 집필할 당시 2년 동안 칩거해
하루 20매를 써 내려갔다.
덕분에 햇빛 알레르기가 생기고 심신도 쇠약해졌다고.
다행히 요즘은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탈고한 뒤 홀로 등산을 하다가 얼마 가지 못해 쓰러진 적이 있어요.
그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죠. 〈김홍신의 대발해〉를 쓸 당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아요.
오늘은 또 어떻게 20매를 채우나….
일부러 분량을 채우려고 막 늘려 쓰기도 했죠.
결국 나중에 쓸데없는 표현을 다 없애지만요.(웃음)
그래도 제가 펜을 드는 건 즐겁기 때문이에요.
저는 몰입할 때가 가장 평온해요.
지금도 기자님과 얘기를 하니까 잡념이 사라져서 즐겁잖아요.
박사 학위 논문이나 내일 할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몰입의 즐거움이죠.”
그는 조만간 인도에 다녀올 예정이다.
붓다에 대해 제대로 쓰고 싶기 때문. 자료 조사 차 세 번 정도 방문했지만,
이번에는 붓다의 고행 길을 쫓아가고 싶단다.
그의 정신적 지주인 법륜스님과 함께 떠날 계획이다.
발해보다 앞선 우리나라 고대사나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쓰고 싶단다.
김홍신 작가는 이외에도
하고 싶은 얘기가 무궁무진하다며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펜을 놓고 나면 늘 아쉬워요. 끝나고 나면 ‘아, 좀더 잘 쓸걸…’
‘더 근사하게 쓸 수 있었는데…’라며 탄식하죠.
그러니까 끊임없이 글을 쓰는 거예요.
100퍼센트 만족했다면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겠죠.”
김홍신 작가는 작품에 대한 쓴소리는 두렵지 않다고 했다.
의심스런 기자의 눈초리를 인지한 듯
에세이집 〈인생사용설명서〉에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인생사용설명서〉는
맏아들 결혼 선물 겸 집필한 책으로, 행복한 인생이 주제다.
“한 여자 피아니스트가 사고로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다른 손가락들이 없어졌대요.
피아니스트로서 인생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거죠.
그분이 제 책을 읽고 사고를 일으킨 버스 기사를 용서하셨대요.
그러곤 저에게 ‘용서의 미학을 가르쳐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바뀌었다니, 그보다 큰 행복이 있을까요?”
그는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남을 기쁘게 하며 세상에 보탬이 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선 ‘나’의 소중함을 아는 게 첫걸음이라고.
자신의 존엄함을 인정한 자존심이 있는 사람만이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가. 그동안 삶이 고되고 팍팍하다 목소리를 높여왔다면,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 번뿐인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마법의 주문은
우리 속에 있으니 말이다.
김홍신 작가는…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건국대 국문학과 졸업,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와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장편소설 〈인간시장〉은 국내 최초로 밀리언셀러가 됐다.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8년 연속 의정 평가 1등을 기록했다.
〈칼날 위의 전쟁〉 〈바람 바람 바람〉 〈내륙풍〉 〈대곡〉
〈인생사용설명서〉 등 에세이를 포함해 120여 권을 출간했다.
한국소설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통일문화대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