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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셋 10년을 말한다
“남이 가지 않는 곳을 뚫어 성공한 무서운 아이들(Enfant Terrible)이다.”
“펀드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압도적 1위를 차지한 결과가 말해주지 않는가. 미래에셋의 경쟁력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제 미래에셋 주식형펀드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가구 1펀드 시대를 앞당긴 것도 미래에셋이고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곳도 미래에셋디다.”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언뜻 낯간지러울 수 있는 이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은 그 주인공이 미래에셋이기 때문입니다. 은행을 중심으로 한 간접금융시대에서 자본시장을 뼈대로 하는 직접금융시대로의 ‘Paradigm Shift’의 주역이라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습니다.
1997년 7월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한 後 미래에셋은 계열사를 8개나 거느린 금융그룹으로 가파른 성장가도를 숨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자산운용사, 증권사, 캐피탈은 직접 설립해 업계 선두 그룹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생명보험 분야에서는 SK생명을 인수해 변액보험시장에서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싱가포르와 홍콩, 인도에는 현지 자산운용사를 설립했습니다. 창립자인
창업 10여 년 만에 한국 자본시장에서 선두로 뛰어오른 미래에셋그룹의 경영지표는 눈부십니다. 미래에셋그룹 8개 계열사의 자기자본은 2조원을 넘어서 불과 10여 년 만에 창업 당시(미래에셋캐피탈의 100억원)보다 200배를 넘게 키운 것입니다. 미래에셋 금융계열사가 갖고 있는 고객자산은 전체 개인금융자산의 5%가 넘는 규모입니다. 주식형펀드 설정잔고는 전체 주식형펀드의 30%를 넘어섭니다. 이쯤 되면 미래에셋을 제외하고 한국의 자본시장을 논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미래에셋증권의 주가는
성공의 방정식
미래에셋의 성공요인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운(運)이고, 둘째가 미래의 변화흐름을 정확히 내다보고 대응해 온 CEO, 즉
우선 운부터 짚어봅시다. 미래에셋의 빠른 성장에는 확실히 운의 요소가 적지 않게 작용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정권교체를 들 수 있습니다. 1997년 12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야당이던
또 하나의 운은 경쟁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3대 투신’으로 자산운용시장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한국-대한-국민투자신탁이 사실상 부도를 내고 쓰러졌습니다. 업계 1위로 부상한 삼성투신운용도 리스크 관리 등 ‘몸조심’에 바빴습니다. 경쟁자는 있으나 경쟁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미래에셋의 독주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박 회장 본인도 미래에셋의 성공이 100% 운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농담이 섞인 말이지만, 30년 全에 창업했더라면 100% 실패했으리라는 것입니다. 부동산 중심의 가계자산이 주식시장으로 이동해 자산운용 중심의 미래에셋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건이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호조건은 다른 자산운용사나 증권사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온라인 증권사 가운데 키움증권이 2위와의 격차를 벌이며 크게 앞서 나간 것은 키움만의 독특한 성장 DNA가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래에셋이 다른 자산운용사나 증권사보다 빠르게 성장한 것을 운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미래에셋자산운용 펀드매니저 3인방’ 중 한 명으로 ‘박현주펀드’를 운용한
“승부처에서 과감하게 지르는 킬러 본능은 아무나 갖고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박 회장은 의사결정을 즉흥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일단 결론이 나면 과감하게 실행한다. 지금 미래에셋그룹 본사 건물로 쓰고 있는 한국유리빌딩을 매입하던 2000년 당시를 돌아보자. 주위에서는 모두 부동산경기가 어렵다며 말렸지만 박 회장은 수 개월 고민한 뒤 결단을 내렸다. 나중에 보니 당시 매입가격은 최저가였고, 잔금을 치를 때는 이미 많이 올랐으며, 현재는 매입금액의 3~4배 이상으로 올라 있다.”
‘군주론’과 ‘제3의 물결’
미래의 변화흐름을 정확히 내다보고 대응하는 CEO
미래에셋자산운용은 1998년 末 국내 처음으로 뮤추얼펀드를 선보였습니다. 지금은 박 회장이 로비를 해서 뮤추얼펀드 인가를 받았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당시에는 뮤추얼펀드가 잘 안 될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펀드에 가입한 뒤 1년 동안 돈을 찾을 수 없는 폐쇄형 뮤추얼펀드는 단기투자에 익숙한 고객들의 니즈(Needs)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박 회장은 “당시 주가지수가 충분히 낮고 운용시스템을 잘 짜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고, 결국 성공시켰습니다.
국내 최초로 해외 현지법인을 설립한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산운용업은 한국회사들이 선진외국회사들의 운용노하우를 배워 한국에서 영위하는 ‘내수산업’이라는 인식을, 해외로 나가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출산업’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2005년 6월에는 SK생명도 인수했습니다. 생명보험이라는 업종 자체를 단순히 보험료를 받아 사고를 당했을 때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에서 벗어나 투자회사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는 시각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습니다. 변액보험과 퇴직연금 등에서 우수한 투자성과를 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미래에셋의 母기업인 미래에셋캐피탈 설립에 결정적 구실을 했던
박 회장 자신은 이런 능력의 원천이 독서라고 말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건강하던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삶과 학과공부에 회의를 느낀 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케네디와 키신저의 자서전을 대여섯 차례 읽으며 전략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십 수 차례 읽으며 미래흐름을 읽어내는 눈을 키웠다는 것입니다.
‘左재상 右현만’
박 회장은 대학교 2학년 때무터 주식투자에 눈을 돌렸습니다. 모친이 1년 생활비를 한꺼번에 보내주면 그 돈으로 명동 증권가를 돌아다니며 주식투자를 익혔습니다. 26세이던 1984년에는 사설투자자문회사인 ‘내외증권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남보다 일찍 주식투자를 시작했고 누구보다 먼저 주식투자에 분석을 도입했던 박 회장은 동양증권과 동원증권(現 한국투자증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업실력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결정을 믿고 따르는 많은 인재를 이끄는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능력이 있으면서 로열티도 강한 인재를 확보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선보인 뮤추얼펀드를 운용하기 시작했을 때 미래에셋의 인력구성을 보면
1990년대 初 박 회장은 33세의 나이에 동원증권 중앙지점 최연소 지점장,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 등을 거치며 전국 증권사 중 약정 1위를 기록한 신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했습니다. 여기에 박 회장의 오른팔로 불리는
게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금은 미래에셋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는
박 회장이 미래에셋캐피탈을 창업했을 당시에는 ‘박 회장보다 한참 앞섰다’고 한
미래에셋 안팎에서는 박 회장의 ‘사람 욕심’에 관한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당시
현재 미래에셋증권의 인사 및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변재상 이사도 박 회장이 투자자문시절 거래하던 삼성증권 과장이었습니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것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도전정신도 성장을 이끈 주요인으로 꼽힙니다. 첫걸음부터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 그간의 역사가 이를 말해줍니다.
1998년 9월 뮤추얼펀드가 허용되자마자 3개월도 지나지 않아 국내 최초로 뮤추얼펀드인 ‘
올바른 투자분화를 정착시키고 확산시키기 위해 투자교육연구소를 설립했고, 적립식펀드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다른 증권사들이 비용을 축소하기 위해 지점을 줄여 나가는 동안 지점 수를 확대하는 차별화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앞으로도 증권지점을 200개까지 확대할 방침입니다.
도전정신과 함께 후발주자인 미래에셋을 업계 선두로 끌어올린 힘으로는 철저한 일등주의 경영전략과 기업문화를 들 수 있습니다. 과거 미래에셋에 몸담았던 한 임원은 “외부에서 볼 때나 새로 입사한 직원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놀랍게도 미래에셋 내부에는 ‘1등은 당연한 것이고, 2, 3등을 하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돼 있다”고 회고했습니다. 한동안 미래에셋의 광고카피로 사용되던 ‘보이는 것만 믿으세요’라는 문장도 수익률 1등에 대한 자신감과 1등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담고 있습니다.
고속성장 후유증 우려
미래에셋이 창업 後 10년 동안 이룬 성과는 엄청납니다. 누가 ‘
한 증권사 사장은 “지금 추세대로 나간다면 미래에셋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금융그룹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도 “재벌이나 은행의 후광 없이 자생적으로 급성장했다는 점에서 박수 받을 만하다”면서 “생보사을 인수해 증권-자산운용-생보사-캐피탈로 연결되는 비즈니스 포트폴리오를 완성한 것은 획기적”이라고 평했습니다.
여기에 국내 주식형펀드로의 쏠림현상에 따른 후유증에 대비하기 위해 해외펀드로 돈의 물꼬를 튼 것도 새로운 블루오션의 창출과 리스크 분산을 함께 추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합니다.
이렇듯 미래에셋의 성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입니다. 이를 시샘하는 경쟁사들조차 미래에셋의 성공 DNA를 치밀하게 연구해 벤치마킹에 나설 정도입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별도의 팀을 구성해 미래에셋의 성장과정과 펀드운용 노하우 등을 장시간 연구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제 미래에셋을 무시하고서는 한국 자산운용업계를 논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에세세의 성장속도가 빨라질수록, 웃자란 벼가 비바람에 힘없이 쓰러지는 것처럼 ‘고속성장 후유증’에 시달릴 우려도 적지 않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판매·운용전략과
특히 미래에셋의 ‘공격적인 운용 및 판매전략’은 자주 비판의 대상에 오릅니다. 수탁고 확대와 수익률 올리기에 급급해 단기매매 등 대형 기관투자자답지 않은 운용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입니다.강세장에서는 수익률 상승효과를 보지만 하락장을 만나면 타격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1998년 선보인
다른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도 “미래에셋 주식형펀드가 20여 조 원을 넘어서고 지분율이 5%를 넘는 종목이 30여 개나 될 정도로 증시영향력이 커졌는데도 운용전략은 여전히 과거처럼 공격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운용규모가 커질수록 수익률 극대화보다는 수익률 변동성 최소화에 중점을 두어야 증시안정에 도움이 되는데, 아직도 수익률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증시변동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조국준 대한생명 부사장(前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거론하는 ‘연못 속 고래’ 이론과 연결됩니다. 고래가 작을 대는 연못에 미치는 영향이 작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지만, 고래가 커짐에 따라 더는 그 연못에서 살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펀드규모가 작을 때는 주가가 오르면서 수익률도 높아지고 다시 자금유입이 늘어나는 선순환이 나타나지만, 펀드규모가 커질수록 투자대상도 줄어들고 수익률을 실현하기 위해 주식을 팔 경우 주가를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하므로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날의 칼, 1인 체제
강점으로 통하는
박 회장은 지금까지 중요한 고비마다 탁월한 선택으로 미래에셋의 급성장을 일궜습니다. 하지만 박 회장 한 사람에게 집중된 과도한 영향력은 자칫 화를 부를 수 있습니다. 1999년 하반기부터 2000년 상반기에 걸쳐 미래에셋이 통신주와 IT주에 과감하게 투자했다가 손해를 본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당시
“1999년 12월
당시는 김 본부장이 시장을 보수적으로 보고 주식투자를 자제하던 시기였습니다.
“
만일 이 무련 박 회장이 김 매니저의 의견을 받아들여 펀드판매를 늦추거나 판매규모를 줄였더라면 2000년 末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는
미래에셋은 2000년 IT버블 당시 라이코스코리아와 인젠 등에 투자해서 수백억원의 손실을 입혔습니다. 이 결정도 다음커뮤니케이션에 투자했다가 1,000억원 대의 이익을 올렸던 박 회장의 결정에 대해 아무도 ‘안 된다’는 의견을 내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박 회장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한 적이 있다.
“포털이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다음을 팔아 차익을 남긴 뒤 라이코스에 투자했다. 포털에서 철수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CEO인 정문술 씨를 보고 투자결정을 내렸는데 그가 중도에 그만두는 바람에 손실을 입게 됐다.”
박 회장의 인재등용방식에도 빛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창업 동지인
하지만 많은 사람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짐을 싸서 미래에셋을 떠났습니다.
“창업 때 함께 한 사람들처럼 이너서클(Inner Circle)에 포함되지는 않더라도 특별한 차별은 없었다. 부부동반 야유회를 가거나, 회식도 바를 전세 내어 모두 한가족처럼 지냈다. 그런데 2000년 末에 자산운용사 대표를 맡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운용을 더 하고 싶었기 때문에 대표를 맡지 않겠다고 했다. 회사가 어려울 때 ‘No’한 것에 대해 섭섭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1999년 末 부부동반으로 제주도에 갔다. 그 때 집사람이 박 회장에게 ‘이 사람이 지금 잘 하지만 슬럼프에 빠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박 회장은 이에 대해 ‘쉬게 해주고 유학도 보내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2000년에 펀드수익률이 마이너스 30%를 넘자(이것도 종합주가지수 하락률에 비해선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유학을 6개월만 보내준다고 하길래 가지 않았다. 2001년에는 임원 연봉도 50% 삭감했다. 박 회장은 그렇게 비즈니스맨으로서 철저한 사람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 매니저들은 휴일이 거의 없습니다. 박 회장이 휴일에 수시로 회사에 나와 증시동향과 향후 전망 및 투자전략 등에 대해 물어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일등 자산운용회사로서 22조원이 넘는 주식형펀드의 수익률을 업계 선두수준으로 유지하려면 휴일도 쉬지 않고 연구해야 한다’는 박 회장의 원칙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습니다. 휴식 없이 이어지는 과중한 업무는 과로를 유발하고 과로는 자산운용의 안정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분위기가 못 되는 것입니다.
펀드운용과 지배구조의 투명성
‘참외밭에서는 신발 끈을 고쳐 매지 않고, 배나무 밭에서는 갓끈을 다시 매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쓸데 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으로 공연한 시비에 휩싸이는 것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요구되는 도덕수준이나 책임은 훨씬 높아지고 커집니다. 미래에셋이 자산운용과 관련해 심심치 않게 시비에 휘말리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분율 5%가 넘는 기업이 30여 개나 되고 주식형펀드 수탁고가 20여조원에 이르는 업계 최고의 현금동원력을 무기로 브로커와 애널리스트들에게 자사의 펀드 수익률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지적입니다. 미래에셋이 산 종목에 대해 유리한 분석보고서를 내도록 종용한다는 의혹도 자주 제기됩니다. 펀드매니저들 사이에서는 ‘미래에셋이 사면 주가가 오른다’거나 ‘미래에셋이 어느 종목의 주가를 관리한다’는 소문이 빈번하게 흘러 다닙니다.
이런 의혹과 소문은 그 근거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미래에셋의 성공을 시기해 나오는 ‘유명세’ 탓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심의 눈초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에셋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래에셋의 지배구조가
박 회장이 미래에셋캐피탈 및 증권과 자산운용을 창업했고 생명보험 등을 인수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에셋의 급속한 성장에는 박 회장과 미래에셋의 노력 외에도 고객과 한국사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미래에셋 성장의 과실과 미래의 추가적인 성장의 리스크는 박 회장 혼자가 아니라 사회와 고객이 함께 나눠야 한다는 지적에는 분명 타당성이 있습니다. 다음은 금융 애널리스트 출신의 한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가 소개한 미래에셋증권의 공모가에 관한 일화입니다.
“2006년 2월에 상장된 미래에셋증권 공모가는 4만8,000원으로 결정됐다. 당시 공모가 산정을 위해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기업설명회(IR)를 열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미래에셋증권 적정주가가 적어도 8만원은 넘어야 한다고 분석하던 때였다. 하지만 나는 공모주 청약을 하지 않았다. 미래에셋증권이 갖고 있던 미래에셋자산운용 주식을 모두
‘아시아 대표 자산운용회사’
사람과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천양지차로 달라집니다.
현재로선 긍정적인 평가가 부정적인 평가보다 훨씬 강합니다.
빛이 강할 때는 그림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이 약해지기 시작하면 그림자는 점점 커지고 짙어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빛이 약해질 때 그림자를 짧고 옅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노하우입니다.
박 회장은 “한국에서 자산운용회사의 리더가 되겠다”는 꿈을 지난 10년 동안 이뤘습니다. 이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산운용업계를 이끄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1년 중에 절반은 중국, 홍콩, 인도, 싱가포르 등에서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다 할 술집이 없는 인도에서는 공항 면세점에서 산 양주로 호텔 방에 앉아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며 ‘왜 이런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박 회장이 고된 과정을 거쳐 아시아를 대표하는 자산운용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과거의 성공 경험이 미래의 실패원인으로 작용하는 오만(Hubris)과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신이 불가피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
카네기 자서전에 나오는 이 글귀는 박 회장이 동원증권 중앙지점장 시절 지점훈(訓)으로 내건 말입니다. 박 회장은 이 교훈에 따라 지금까지 바람개비를 돌리기 위해 앞으로만 달려왔습니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도록 계속 페달을 밟은 셈입니다.
양(量)과 질(質)은 대체관계이면서도 보완관계입니다. 질이 뒷받침되지 않는 양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고, 양이 따라붙지 못하는 질은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양과 질이 조화롭게 공존해야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박 회장의 꿈이 실현되는 것은 단순히 미래에셋이 성공하는 것뿐 아니라 한국 자본시장이 한 단계 도약하는 데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박 회장과 미래에셋이 자꾸 구설에 오르는 것에 대해 박 회장은 몇 안 되는 세 가지 실패 중 하나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젊을 때는 이런 구설에 발끈했지만 요즘은 그런 견제와 감시가 오히려 약이 된다고도 했습니다. 박 회장이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과 미래에셋에 제시되는 비판의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아시아 대표 자산운용회사로 도약할 수 있는 액션플랜을 세워 실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창업 後 10년의 성공을 앞으로 10년, 100년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초석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