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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선법의 마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중해서 보지 말고
억제해서 보지 말고
억눌러서 보지 말고
만들어서 보지 마십시오.
힘을 써서 집중하지 마십시오
원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힘을 쓰게 됩니다.
집중하게 됩니다.
불만족스러운 마음이 들어도
힘을 쓰고 집중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도
무조건 힘을 쓰고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힘을 써서 수행하는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쉐우민에서는 집중하는 대신에 지켜봅니다.
사띠로써 지켜봅니다.
그 어떤 힘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아셔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면
생겨나는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알기 위해서만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저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어떠한 것이 보이기 위해서,
어떠한 것을 보기 위해서,
그러한 마음자세로 수행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알도록만 노력하셔야 됩니다.
생각하면 생각하는 줄 알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각하지 않는 줄
아셔야 됩니다.
고요하면 고요한 줄 알고,
고요하지 않으면, 고요하지 않은 줄
아셔야 합니다.
이 아는 것 만이 중요합니다.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고요해지기 위해서, 고요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띠가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있는 사띠를 유지하도록,
더 발전하도록 노력하셔야 됩니다.
매 순간 순간 사띠, 사마디, 지혜가
생겨날 기회를 허용하도록 하는 것을
키워나간다, 길러나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길러가는 것입니다.
그 아는 것이 오랜 시간 지속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아는 것 속에 바른 견해가 함께 해야 합니다.
그 아는 것 속에 견해가 발라야 하고
보고 들은 정보가 함께 작용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근본이치를 근본이치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적인 이치를 자연적인 이치로
근본이치를 근본이치로 알았을 때
사람이나 중생이라는 개념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자연적인 이치라고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이치라고 생각해주었을 때
사람, 중생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지 않게 됩니다.
몸은 몸의 자연적인 이치,
마음은 마음의 자연적인 이치가 있습니다.
몸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마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은 그것의 이치대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몸은 몸대로 그 성질대로 변해가는 성품이 있습니다.
마음은 마음대로 그 마음의 고유한 성질들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성질,
아는 성질,
주의를 기울이는 성질,
느끼는 성질,
인식하는 성질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몸대로 생겨나게 내버려 두십시오.
마음은 마음대로, 그 성질대로 생겨나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런 것들이 보이도록, 알도록
살펴보는 것입니다.
알기 위해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생겨나는 것들에 대해서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생겨나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지 않는 것이 사라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겨날 때마다, 사라질 때마다
잊지 않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알 줄 아는 성질이 있습니다.
아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 알 줄 아는 성질을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딘가에 주의를 기울일 줄 아는 성질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그 자체의 성질로써
대상을 알 수 있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할 줄 아는 성질도 있습니다.
생각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생각하고 어떤 일을 계획하는 일은 반드시 있습니다.
왜? 그것이 마음의 성질, 마음의 작용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마음이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에.
마음이 있는 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는 일이 바로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생각하지 않고서는 지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도 마음이 생각하는 것이고
형상을 떠올리는 것도 마음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상과 부딪히게 되면 마음은 반드시 의미를 부여하고
뭔가를 떠올리고 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대상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합니다.
사띠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일어나는 쪽은, 생겨나는 쪽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생겨나는 것은 생겨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좋은 것이 생겨나도 그것은 자신과 상관없고,
나쁜 것이 생겨나도 자신과 상관없습니다.
그것의 이치대로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은
자신과 상관이 있습니다.
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서
견해를 바르게 하고
사띠가 있도록 하고
사띠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
그것만이 자신과 상관 있습니다.
그 원인은 갖추어주셔야 합니다.
이 세가지 원인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갖추어줘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속도가 붙으면
그렇게 의도적으로 갖추어줄 필요가 없게 됩니다.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은 자신의 의도가 없어도
이미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가속도가 붙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속도가 붙게 되면 그것의 이치대로
담마가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원인을 갖추어줘야 합니다.
묻는 사띠가 있도록 사띠를 자꾸 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일깨워주고,
자기 자신에게 자꾸 주의를 줘야 합니다.
수행하는 것에 대해 자주자주 생각을 해줘야 합니다.
수행에 대해 생각해주게 되면
사띠의 힘이 더 좋아지게 됩니다.
몸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주셔야 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반드시 해주는 것이 옳은 생각입니다.
해줘야만 하는 생각입니다.
수행하면서, 수행하는 동안에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가면서 하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좋지 않은, 불선한 생각에 대해서는
하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고 몸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에 대해서,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
사띠의 힘이 더 좋아지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늘 함께 있게 됩니다.
사띠도 더 좋아지게 됩니다.
수행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수행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수행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
당연히 마음이 수행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수행한다고 해서 너무 힘들게, 어렵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하게 지내되, 분명한 것을 알아차림하고,
매 순간 순간 사띠가 있도록 하는 것
단지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편안하게 지내되 사띠가 있도록 만 하십시오.
견해를 바르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대상을 관찰하든지 괜찮습니다. 똑같습니다.
들숨날숨도 대상이고 배가 부름꺼짐도 대상입니다.
가슴속의 긴장감을 관찰하는 것도 대상입니다.
머리 위를 관찰하는 것, 그 어떤 부위를 관찰하든,
대상입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대상이던지 어떤 대상을 취하던지
대상은 사띠, 사마디, 지혜를 생기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사띠, 사마디, 지혜가 있도록 하고
사띠, 사마디, 지혜를 키워나가는 것,
그것뿐입니다.
대상을 원인으로
사띠, 사마디, 지혜가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대상을 취하던지
마음속에 신심, 위리야, 사띠, 사마디, 지혜,
이 오력의 힘을 키워나가고 길러나가는 것,
이 것만이 중요합니다.
대상은 알아차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상은 여섯 가지뿐입니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
실재하는 대상은 안이비설신의에서 생겨나는
색성향미촉법의 여섯 가지뿐입니다.
그 어떤 대상을 취하든지 수행할 수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림 한다면
그것은 바로 까야누빠사나, 즉 신념처입니다.
마음이 느끼는 것을 알아차림한다면
웨다나 누빠사나, 수념처가 됩니다.
마음이 편안한가 즐거워하는가 평온한가
이런 마음이 어떻게 느끼는가
그런 것을 관찰하는 것이 웨다나-누빠사나입니다.
마음이 느끼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지
몸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웨다나는 마음의 법입니다.
마음상태,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알아차림 한다면
그때는 짓따-누빠사나, 심념처 수행이 됩니다.
이 몸, 마음이 느끼는 것, 그리고 마음 그 자체 세가지를
실재하는 법, 근본이치의 차원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될 때
담마-누빠사나, 법념처가 됩니다.
사람이나 중생이라는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중생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서 관찰하게 되면
법념처 수행이 됩니다.
그런 앎의 지혜가 작용하는 상태에서 관찰할 때
법념처 수행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법의 이치가 관찰대상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다 법의 이치가 됩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법의 자연적인 이치이다. 근본이치이다. 실재하는 법이다.
라고 관찰할 수 있게 되면 담마-누빠사나수행 법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혜의 힘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법념처 수행을 바로 직접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몸에 대해서 관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대해서도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수행을 하다가 앎의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
그때 근본 이치의 차원에서, 실재하는 법의 차원에서
관찰을 할 수 있어질 때, 그 때 법념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까?
생각 속에 빠져있다면 사띠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띠를 놓치고 있으면 새가 날아와서 살을 물어뜯어서 간다.(미얀마속담)
깨어있다면 새가 날아오는 순간에
살점을 뜯어가지 못하도록 방어할 수 있지만
사띠가 없다면 새가 살점을 뜯어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새가 물어간다는 것은 과보입니다.
사띠가 없다면 과보를 막을 수도,
과보로부터 벗어날 수 도 없다는 뜻입니다.
번뇌의 과보, 업의 과보, 과보로써 오는 과보가 있습니다.
이 3가지가 계속해서 순환되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 속에 빠져있다면
번뇌의 과보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번뇌의 과보가 힘이 강해지게 되면
업의 과보를 가져오게 됩니다.
업의 과보가 되었다면
과보로써 오는 과보는 반드시 오게 됩니다.
최소한 번뇌의 과보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생각 속에 빠져있다는 것은 번뇌 속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생각하면 생각하는 줄 알고 다시 몸으로 돌아오십시오.
생각하는 줄 알았으면 다시 몸으로 돌아오십시오.
처음 수행하는 분들은 생각을 계속해서 관찰할 수 없습니다.
처음 수행하는 분들이 생각을 계속해서 관찰하게 되면
생각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럴 때는 생각하는 줄 인지하는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생각하는 줄 알았으면 다시 몸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냥 알기만 아시면 됩니다.
생각하는 줄 알았으면 다시 몸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렇게 지속적으로 관찰하다 보면
아,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생각을 관찰하면서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빤냐띠, 즉 개념을 대상으로 하게 되면
사띠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내용을 대상으로 알아차림 하게 되면
번뇌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림 한다면
빠라맛타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을 관찰하면서 사띠, 사마디,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생각은 마음의 법 중의 한가지입니다.
생각할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알아차림 하는 것만이 필요합니다.
생각하고 있구나 라고 아시면 됩니다.
생각을 할 때 생각과 함께 수반되는 느낌이 있다면
그 느낌을 알아차림하시기 바랍니다.
느낌은 분명합니다. 선명합니다.
함께 수반되는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도 알아차림하고
함께 일어나는 느낌도 알아차림하신다면 더 좋습니다.
이것은 사띠의 힘이 좋을 경우에 가능합니다.
사띠의 힘이 좋을 때는 생각도 알 수 있고
생각과 함께 일어나는 느낌도 알 수 있게 됩니다.
몸을 긴장되게 하지 마십시오.
마음도 긴장되게 하지 마십시오.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하시고 수행하십시오.
수행을 하면서 몸이 피곤해지고 마음이 피곤해진다면
그것은 수행하는 속에 뭔가 한 가지는 잘못되어 있습니다.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존다는 것은 마음에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피곤하게 만들어서도 안되고,
깨어있도록 늘 깨어있는 상태가 유지되도록 하셔야 합니다.
너무 느슨해져도 안되고, 너무 긴장 되서도 안되고
어떤 적정선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매 순간 수행해야 합니다.
매 순간이 수행해야 할 시간입니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잠에 드는 순간까지
모든 순간이 다 수행해야 되는 시간입니다.
진짜 시간표는 매 순간 사띠와 함께 해야 한다는
그 말이 진짜 시간표입니다.
그냥 벽에 붙어있는 좌선시간, 먹는 시간, 행선시간
이런 것은 수행처가 원만하게 굴러가도록
형식적으로 붙여놓은 것일 뿐입니다.
실제 스케줄은 매 순간 사띠와 함께 해야 한다는
그 스케줄 하나뿐입니다.
손을 움직이는 것부터 발을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디를 가든 어떤 조건에서든지 알아차림 하셔야 합니다.
화장실에서조차 알아차림 해야 한다는 것은,
매순간 확실하게 분명하게 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법당에서만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든 어떤 조건에든 확실하게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방에서도 알아차림 해야 되고
화장실에 가더라도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그냥 한가하게 가볍게 지내도 되는 시간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항상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한가롭게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하여금 늘 일을 시켜야 합니다.
매 순간순간 좋은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수행처에 왔습니다.
매 순간 키워나가십시오. 좋은 마음을...
지금 수행자들은 좀 시간이 있다, 한가하다 하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대화하지 마십시오.
대화 대신에 그 시간에 자기 자신을 알아차림 하십시오.
선업과 불선업은 그렇게 차이가 납니다.
바로 그 차이입니다.
무의미한 대화를 한다면 그것은 불선업이 됩니다.
그 순간에 알아차림을 하고 있다면 선업이 됩니다.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십시오.
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면 대화하지 말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늘 함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순간에 몸의 상태는 어떠하고 마음상태는 어떠한가
그러한 것들, 여러가지를 알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키워나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한가하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키워나가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길러나갈 때 법의 맛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냥 의미없는 대화를 해도 되는 시간은 주지 않았습니다.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사띠가 있는 분,
사띠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분에게만 대화하는 것을
사야도께서는 허용하신답니다.
그렇지만 처음 수행하는 분들은 사띠와 함께 대화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연습이 되었을 때
사띠, 사마디, 지혜가 길러졌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사띠로써 말해야 하고,
사띠로써 해야 하고,
사띠로써 무언가를 잡고 움직이고 행해야 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사띠가 있다면,
그때는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띠없이 말을 한다면
그 말을 하는 대부분이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로 필요해서 말을 해야 한다해도
꼭 필요한 것만, 정말 말을 해야될 경우에만 말을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띠가 있는 사람이 말을 한다면
말을 하고 나서의 마음 상태도 깨끗하게 됩니다.
중요하면 말을 하고 중요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필요하면 말을 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사띠가 있기 때문에 지혜가 위에서 작용하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모든 행위,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할 가치가 있으면 생각하고 생각할 가치가 없으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하고 해야 할 필요가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지혜가 앞장서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사띠, 사마디, 지혜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범부라면 대부분의 경우에 번뇌가 앞장섭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 대신에
사띠, 사마디, 지혜가 앞장서도록 수행하는 것입니다.
범부는 모하가 앞장서게 됩니다.
모하가 앞장서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 모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 생각하는 대로 하고 사는 것은
다 모하로써, 로바로써, 도사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수행한다는 것은
사띠, 사마디, 지혜를 앞장세우는 것이 됩니다.
이 삶 속에서도 사띠, 사마디, 지혜를 앞장세우게 되면
현실 속에서,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삶 속에서 사띠, 사마디, 지혜가 함께 된다면,
말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마다 늘 지혜가 함께하게 됩니다.
그때는 지혜가 앞장서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삶이 자유로워지고 의미가 있습니다.
허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평온하게 됩니다.
그것은 수행이 삶 속에 함께하는 것이 됩니다.
번뇌가 앞장서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고 이익이 없습니다.
생겨나고 싶은 대로 생겨나도록 내버려둔다면
괴로운 것이 항상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둑카, 즉, 고와 번뇌가
늘 자기 자신을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띠와 지혜가 번뇌를 제거하고
자신의 삶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매 순간 순간 수행을 지속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 역시 번뇌의 가속도와 힘이 아주 강하기 대문입니다.
그 집착이 아주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띠, 사마디, 지혜의 힘이 번뇌의 힘보다 더 강해졌을 때
삶 속에서 사띠, 사마디, 지혜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번뇌보다 사띠, 사마디, 지혜가 생겨날 기회를 더 허용했을 때,
사띠, 사마디, 지혜를 더 이어나갔을 때
그때 사띠, 사마디, 지혜가 삶 속에서 앞장서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순간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냥 대충 수행하지 마십시오. 몸만 피곤합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진심으로 이 담마를 주의해서 보유하시기 바랍니다.
매 순간 순간 확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사두사두사두!!()
감사합니다 _()()()_
감사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