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믿음} 김대운 [몽학선생 율법은 구원받은 자의 성화의 열매의 척도]
https://archive.md/hur82
※) 참 귀한 글임에도, 아래 본문에서 [까마귀 고기를 먹은 김대운]으로 적는다.
도날드 맥클라우드 [‘조엘 비키 & 폴 스몰리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 김대운 역 (2023.08.22.11:49)
https://archive.md/etbWY
※) 아래 본문에서 [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으로 적는다.
{바른 믿음} 림헌원 <예장 합동을 혼란케 하는 서창원 김효남 교수 등은 참고하기 바랍니다.>
https://archive.md/OFCgT
※) 아래 본문에서 <예장 합동 꼴뚜기 Wolf험원>으로 적는다.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은 개혁 교회 정통 교리 준비은혜론을, Wolf이철처럼 ‘완전 부정’이 아닌, ‘반半 부정’한 글이다. 그래서 Wolf이철 글을 분별하는 것보다 오히려 분별하기 어려운 글이다. 그러므로 ‘반半 부정’한 부분1)만 두고 비평문을 쓰려고 한다.
‘만물에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님께서 아담(사람) 마음에 새기신 율법’은 개혁교회 조직신학 용어로 ‘일반계시’다. 물론, 이 일반계시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1장: 성경] <1항>에 적힌 대로 ‘하나님을 몰랐다고 아무도 핑계를 댈 수 없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아래는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에서 또 인용하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심지어 규범적인 율법의 예비적 역할 교리를 지지하기 위하여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신약 성경의 많은 본문이 실지로는 겉보기와 달리 그들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용하는 가장 유명한 본문이 갈라디아서 3장 24절이다. {KJV}는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선생(Schoolmaster)으로 부른다. 그러나 헬라어 파이다고스는 학교 선생이 아니다. 그는 아직 어린 주인 아들의 양육 책임을 맡은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 아들을 맡은 동안 그의 의무는 주인 아들을 데리고 등교시켰다가 하교시키는 일이다. 그는 선생이 아니란 말이다.
“파이다고스”에 탈자가 있다. 즉, ‘파이다고고스’다.
맥클라우드 목사님이 개혁 교회 정통 교리 준비은혜론을 반半 부정한 근거 하나는 우리말로는 ‘초등교사(몽학선생)’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는 선생이 아니다.”는 것이다. 즉, 파이다고고스는 주인 아들의 노예로서 주인 아들 등하교 시 경호원 정도이지 선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율법은 불신자들 양심을 가시 채로 치는 몽학(훈육) 선생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적힌 ‘행위언약’을 이단시한 Wolf이철 주장대로 ‘행위언약과 관련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적힌 개혁교회 교리들’을 삭제해야 한다. 혹은 “칼빈도 깨닫지 못한 성화론”, ‘선포로 이루는 저절로 성화론’에 맞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수정하신 이른바 “세계적인 신학자” 서철원 목사님처럼 수정해야 한다. 다음은 수정하거나 삭제해야 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6문답>이다.
문: 도덕법이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답: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도 소용이 있습니다. 그들 양심을 그것으로 일깨워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하려고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나아가게 하거나, 혹은 죄의 상태와 죄의 길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경우, 그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해 그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비평문을 쓰기 전, 머리를 감아야겠다.>2)에서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으니,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관한 기독교 정통 해석을 버리고 새 관점 신학 성경 해석에서 (확증편향에 따른) 그 일부만 내세워 개혁 교회 정통 교리 준비은혜론(회심준비론)을 반대한 도날드 맥클라우드 목사님 글을 비평하는 글, 아래에 링크하는 글을 비평하는 글을 산책을 다녀와 목욕한 뒤 간단하게라도 일단 한 편을 써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새 관점 신학 성경 해석에서 (확증편향에 따른) 그 일부만 내세워”는 온전히 정신을 못 차린 데서, 조금 정신을 차린 데서 나온 그릇된 문장이다. 새 관점 신학 대표 신학자 제임스 던도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는 선생이 아니다.”고 해석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그릇된 주장이다.
성경에서 로마서 2장 13절 같은 여러 구절을 삭제한 예장 합동 꼴뚜기 Wolf이철은 주야장천 “율법준수와 영생을 얻는 것 사이에 관련성이 0.0000000도 없다.”고 주장하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적힌 ‘행위언약’을 이단시했다. 다음 글은 이단 김대운 목사 글에서 옮기는 글이다. 즉, “사실, 율법은 완벽히 지킬 때 의롭게 될 수 있는 법이었다.”는 주장, 이단의 주장이 적힌 [까마귀 고기를 먹은 김대운]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몽학선생의 의미
몽학선생(παιδαγωγος)은 헬라어 사전에서 “아이의 인도자”, “주인의 자녀를 학교에 등하교시키는 책임을 맡은 종”, “가정교사” 등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관습을 조금 더 살펴보면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초적인 내용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학교에 등하교를 시키며 후견인의 역할을 맡기던 당시 관습에서 사용한 용어였다. 주인의 아들이 주인이 정한 때까지만 몽학선생으로서 가르칠 수 있었고, 그 기한이 끝나면 이제 완전한 종으로 주인의 아들을 섬겨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몽학선생은 그 목적과 한계가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하략)…
“주인의 아들이”는 ‘주인의 아들을’ 오타다. 다음은 새 관점 대표 신학자 제임스 던, ‘제임스 던 {바울신학}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2003)’ 225쪽~226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이와 같은 혼합된 메시지는 그 다음에 나오는 이미지, 즉 “파이다고고스”라는 이미지에서도 나타난다. …(중략)… 잘 알려져 있듯이 ‘파이다고고스’는 집주인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오는 역할을 맡은 노예였다. …(중략)…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교사의 역할이 원칙적으로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 양육을 맡아 훈육을 담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맡은 아들들이 나중에 어느 정도 불유쾌한 기억들을 갖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나쁜 개인교사나 나쁜 ‘파이다고고스’가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역할 자체는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행실을 바로잡고, 필요한 경우에는 보호를 해 주는 등, 그 본질은 긍정적인 것이었다. …(중략)… 이러한 보호와 훈육의 역할이 바로 ‘파이다고고스’에 비유된 율법의 역할이었다.
위에서 보는 대로 ‘파이다고고스’에 관한 김대운 목사 해석과 제임스 던 해석은 똑같다. 물론, ‘김대운 목사와 제임스 던 해석’은 ‘맥클라우드 목사님 해석’과 완전히 다르다. 즉, 세 사람 모두 똑같이 ‘파이다고고스’를 등하교 시 동행하는 경호원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는 절반은 같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다르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해석이다.
사실이 이렇다. 즉, 김대운 목사는 “몽학선생(παιδαγωγος)은 헬라어 사전에서 ‘아이의 인도자’, ……, ‘가정교사’ 등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사실, 율법은 완벽히 지킬 때 의롭게 될 수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은 구원에 대한 소망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 언약으로 약속하신 메시아를 고대하도록 만들 뿐이었다.”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행위언약’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6문답>을 벗어나지 않은 해석을 했다. 그러함에도 까마귀 고기를 먹은 김대운 목사는 ‘그리스도 능동 순종 문제에서나 준비은혜론 문제에서나 예장 합동 꼴뚜기 Wolf이철과 함께 했다. 김대운 목사는 꼴뚜기와 함께 뛴 망둥이로서 자신의 처지가 웃프지 아니한가?
Wolf이철에 따르면, 예장 합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행위언약’을 두고 공청회를 연다고 한다.3) 이 공청회를 앞두고 김대운 목사는 또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예장 합동 대표 꼴뚜기 Wolf이철 입맛에 맞는 외국 신학자 글을 발췌해 망둥이처럼 뛸 것인가? 아니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후예로서, 이른바 “장로파” 목사로서, “율법준수와 영생을 얻는 것 사이에 관련성이 0.0000000도 없다.”고 주장한 이단 Wolf이철에게 저항(Protest)해 “사실, 율법은 완벽히 지킬 때 의롭게 될 수 있는 법이었다.”를 강력히 주장하며 이단 Wolf이철과 손을 끊을 것인가?
이른바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대표 Wolf험원은 <예장 합동 꼴뚜기 Wolf험원>에서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에서 핵심이 되는 글을 인용한 뒤, “맥클라우드 박사 가르침을 제대로 연구 묵상하여 주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은혜’를 입어 진짜 ‘회심’이 일어나는 기쁨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며 맥클라우드 목사님 제자 서창원 목사님과 조엘 비키 목사님 제가 김효남 목사님을 조롱했다. 다음 비평문은 <예장 합동 꼴뚜기 Wolf험원>에서 Wolf험원이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에서 옮긴 글을 다루는 글이 될 것이다. 즉, ‘복음주의적 회개’는 항상 하나님께로 돌이킴을 포함합니다. 위대한 청교도 모음집인 {현대신학의 정수}(에드워드 피셔, 1645년)는 ‘회개’는 ‘믿음의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는, 맥클라우드 목사님 주장을 텍스트 비평하는 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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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半 긍정’한 부분 그 예 하나는 다음과 같다.
비키와 스몰리가 인정했듯, 율법의 예비 역할이 모든 회심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하나의 견본으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2) <비평문을 쓰기 전, 머리를 감아야겠다.>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L/502
3) {바른 믿음} 정이철 <합동, 웨신서의 ‘쥐약’이라는 말 듣는 행위언약에 대한 공청회 연다.>
https://archive.md/bbCuz
<예장 합동, 나에게 “쥐약”이라는 말을 들은 ‘{웨신} 행위언약’을 두고 공청회 연다.>나 <합동, “쥐약”이라는 말 듣는 {웨신} 행위언약에 대한 공청회 연다.>로 제목을 쓰면 될 걸, 일제 강점기 잔재, 일본 어투 “의”를 못 버린 Wolf이철을 보노라면, ‘예장 합동 꼴뚜기파 목사들은 왜 한결같이 비문非文의 왕자들일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한글 문서창에 치면 “나의 살던”에 밑줄이 그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고치면 된다.
“의 ~의 ~의”로 이어진 김대운 목사 글 제목, [몽학선생 율법은 구원받은 자의 성화의 열매의 척도]도 역시 마찬가지다.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기능은 중생(회심) 전에 작동하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몽학선생”은 삭제하고 [율법은 구원받은 자가 성화 과정에서 맺는 열매의 척도]로 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