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홍철(蔡洪哲)은 자가 무민(無悶)이며 평강현(平康縣) 사람이다. 충렬왕(忠烈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응선부녹사(膺善府錄事)에 보임되었으며, 차츰 자리를 옮겨서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장흥부(長興府)의 수령이 되어서 선정을 베푼 것이 있었다. 얼마 뒤에 관직을 버리고 한가히 지내기를 14년 동안 하면서 스스로 중암거사(中庵居士)라고 부르면서 불교와 선(禪)·거문고와 책·약 조제를 일상의 일로 삼았다. 충선왕이 평소에 그 이름을 알고 있었으므로 즉위하자 장차 크게 쓰려고 억지로 복직시켜 사의부정(司醫副正)으로 임명하였다가 갑자기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시켰다. 예전의 〈벼슬인〉 지후(祗候)로부터 여덟 번 옮겨 재상이 되자 사림(士林)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다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충숙왕 원년(1314)에 비로소 〈토지의〉 경계(經界)를 바로 잡고 양전(量田)하여 부세(賦稅)를 정하면서, 채홍철을 오도순방계정사(五道巡訪計定使)로 삼았다. 이듬해 승진하여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삼사사(三司使)로 옮겼고, 곧이어 찬성사(贊成事)로 옮겼는데, 순방한지 1년 만에 5도의 전적(田籍)을 거의 작성하였다. 그러나 신구(新舊)의 공부(貢賦)가 고르지 못한 것이 많아 민이 살기 어려웠다. 또 성품이 탐욕스러워서 사사로이 경영하는 걸 좋아하여 민의 토지를 많이 빼앗았기 때문에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다. 왕은 비록 그의 행위를 바르다고 여기지는 않았으나 충선왕에게 총애를 받았고 또한 권한공이나 최성지와 사이가 좋았으므로 감히 〈감정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충숙왕 5년(1318)에 이르러 불균등한 것을 바로잡으려고 대관(臺官)을 나누어 파견하였지만 결국 들춰내는 사람은 없었다.
〈충숙왕〉 7년(1320)에 채홍철은 중대광 평강군(重大匡 平康君)에 제수되었으나, 아들 채하중(蔡河中)이 원에서 관질(官秩)이 5품이었기 때문에, 〈채하중을〉 봉의대부 대상례의원판관 효기위 대흥현자(奉議大夫 大常禮儀院判官 驍騎尉 大興縣子)에 제수하는 은전을 내렸다. 충숙왕이 복위(復位)하자 찬성사(贊成事)로 기용되었을 때, 당시 양부(兩府)가 〈원의〉 왕의 행재소[行邸]의 비용이 부족하자, 문·무관에게서 베를 과렴(科斂)하고 부자들에게 재물을 강제로 거두어들였다. 〈그때〉 이문낭중(理問郞中) 장백상(蔣伯祥)이 채홍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원로 재상이 되어서 강제로 민의 재물을 거두어들이니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채홍철이 말하기를, “내 잘못이 아니오. 지금 임금께서 연경의 사저에 계시면서 꼭 써야할 데가 많으므로 돈을 거두라는 분부를 내리셨는데, 국고가 텅 비어 있어서 지출을 감당할 수 없으니,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소?”라고 하였다. 〈뒤에〉 순천군(順天君)으로 고쳐 봉해지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승진하였으며 순성보익찬화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왕이〉 채홍철과 안규(安珪)에게 과거를 주관할 것을 명하였는데, 양재(梁載)라는 자는 왕의 폐행(嬖幸)으로 정권을 잡고 농락하니 사대부(士大夫)가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양재가 채홍철에게 이윤(李潤)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말을 타고 달리면서 비단을 보면[走馬看錦] 햇빛에 5가지 색이 섞일까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채홍철이 과연 그를 뽑으니 왕이 채홍철에게 모시베 50필과 규옥(珪玉)으로 만든 띠, 오종포(五綜布) 600필을 하사하였다. 충혜왕 후원년(1340)에 죽으니 나이는 79살이었다.
〈채홍철은〉 사람됨이 문장에 정교하고 기예에 모두 능하였다. 불교를 특히 좋아하여 일찍이 집 북쪽에 전단원(旃檀園)을 짓고 늘 선승(禪僧)을 봉양하였다. 또한 〈사람들에게〉 약을 나누어주어서 국인(國人)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의 집을〉 활인당(活人堂)이라 불렀다. 충선왕이 일찍이 전단원에 행차하여 백금(白金) 30근을 베풀어주었다. 또한 집 남쪽에 당(堂)을 짓고 중화당(中和堂)이라고 불렀는데, 때로 영가군(永嘉君) 권보(權溥) 이하 나라의 원로 8명을 초청하여 기영회(耆英會)를 열었다. 「자하동신곡(紫霞洞新曲)」을 지었는데 지금도 악부(樂府)에 악보가 있다. 처음에 김방경(金方慶)이 북계(北界)에 주둔하였을 때 용강현(龍岡縣)의 관비(官婢)를 좋아하여 딸 1명을 낳았는데, 채홍철이 이 딸에게 장가들어 채하중(蔡河中)과 채하로(蔡河老)를 낳았다. 채하중은 따로 전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