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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라진 경운궁 가정당과 또다른 가정당은 ?
- 경운궁( 慶運宮 )가정당( 嘉靖堂 )과 창덕궁(昌德宮)가정당(嘉靖堂) -
고종 승하와 덕혜의 일본 유학 후 덕수궁 가정당 창덕궁 이전 건립 추정
고종 함녕전 유폐 急死, 대한제국 황실 생활공간 이전, 덕혜옹주 일본유학
가정당 휴식공간, 해체와 설립시기의 일치, 기능과 규모 쓰임새 대동소이
1.위치
창덕궁(昌德宮)가정당(嘉靖堂) 대조전, 경훈각 후원 계단 위 천장문(天章門), 추양문(秋陽門) 너머 넙다란 잔디밭에 있는 1925년 6월경에 건립된 정자(매일신보, 1925,06,28/시대일보 1925년 6월 27일자)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로 왕과 왕자, 왕비와 공주의 휴식 공간이자 임금 국사처리(편전) ,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신하들을 초청하여 소연회(小宴, 작은 잔치) 장소, 순종 병상時 요양 및 쾌차기도 올린 장소 등으로 쓰였던 전각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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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운궁 가정당 : 1907년(융희 1)~1910년(융희 4)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경운궁중건배치도(慶運宮重建配置圖)"를 보면, 가정당은 즉조당의 동쪽에 위치하는 석어당 뒷마당에 자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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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조당과 석어당 북쪽에 가정당이 보이나 1928년도 경성부도시계획조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음 /경운궁 중건 배치도/융희 1년(1907) ~ 융희 4년(1910년) 추정/문화재청
2.가정당의 명칭 의미
"가정(嘉靖)"이란 "아름답고 편안하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의 “무일(無逸)”11편 “嘉靖殷邦”이 있는데 “고종(高宗)이 감히 일을 버려두고 편히 지내지 않아서 은나라를 아름답고 편안하게 만들었도다” 또한 송나라 성리학자 채침(蔡沈, 1167~1230년 12)은 “가(嘉)는 아름다운 것이고, 정 (靖)은 편안한 것이라고 풀이한 것에 견줘 볼 때 가정(嘉靖)이란 예악과 교화가 편안히 거처하며 일을 즐기는 데서 성대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3. 경과
1896년에 석어당과 함께 건립된으로 추정되고. 1904년 2월 29일(광무 8년)에 경운궁 대화재에도 소실되지 않고 남아 1919년 3월3일 고종의 국장 때 개명정 의례(改銘旌 依例)를 행했던 전각으로 1928년에 출간된"경성부도시계획조사서(京城府都市計劃調査書) 항공사진" 에서는 가정당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1925~26년경 해체된 것으로 추정 된다.
* 1926년 항공촬영사진에서 덕수궁에서 가정당을 찾을 수 없음/左(괄호)은 덕수궁 전경, 가운데 태평로를 두고 右(괄호) 경성부청/경성부청 광장과 덕수궁 일대 항공촬영사진/경성부가 도시계획조사를 위해 건축기사가 비행기에 탑승하여 촬영한 것/매일신보 1926년 10월 1일자/오마이뉴스
4. 덕수궁 가정당 이전 : 동궐도(효명세자, 1827 ~1830, 창덕궁과 창경궁 도화서 화원)”에는 없는 것으로 볼 때 1926년경 덕수궁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1) 덕수궁( 德壽宮) 가정당 이전설 : 고종 33년 1896년에 고종이 아관(러시아 공사관, 중구 정동)에 머물 당시에는 즉조당(卽阼堂) 하나뿐이었는데 경운궁(慶運宮) 건립을 명한 후 1897년(광무 1년)에 정문인 인화문( 仁化門, 경운궁 정문이자 현 대한문)을 통해 경운궁으로 임어했을 때는 정전으로 활용되던 즉조당외에 동쪽에 침전 건물로 중층의 석어당(昔御堂)과 북쪽에 가정당(嘉靖堂)이 건립(1897)되었다.
가정당( 嘉靖堂)은 1904년(광무 8년 )에 경운궁의 함녕전(咸寧殿, 1907년 재건)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즉조당과 석어당을 비롯 영복당(永福堂)·함희당(咸喜堂)·함유재(咸有齋) 등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가정당은 화재로 소실되지 않았다(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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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咸寧殿)의 구들을 고치고(교체 공사) 불을 지피다가 이 화재가 났는데, 게다가 바람이 사납게 부는 통에 일시에 불길이 번져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광무 8년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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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19년 1월 21일 에 고종이 승하하여 개명정 의례(改銘旌 依例,빈전 의례(殯殿 依例의 하나)를 행할 때에 고종의 재궁(梓宮)을 덮을 명정(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본관, 성씨 등을 써서 관 앞에 세우는 붉은 깃발)을 다시 쓰는 개명정(改銘旌, 명정을 고쳐쓰는 것) 의례를 가정당에서 행하였다.(3월 3일 장례, 40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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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4월 14일 양력 3번째기사 1904년 대한 광무(光武) 8년
화재 입은 것을 위안하러 온 원임 의정과 참정 이하를 소견하다.
이근명이 아뢰기를,
"지금 폐하(陛下)가 거처하는 곳이 비좁고 구차하기 때문에 한때 거처할 만한 자리가 못됩니다. 처소를 이어(移御)하는 처분을 속히 내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신년(1896)에 이어하였을 때에는 오로지 즉조당(卽阼堂) 하나뿐이었다. 지금은 몽땅 불탔지만 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九成軒)이 아직 온전하게 있는 만큼 그때에 비하면 도리어 낫다. 즉조당으로 말하면 몇 백 년 동안 전해오는 것이기 때문에 서까래 하나 바꾸거나 고치지 않았는데, 몽땅 타 버렸으니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다."
하였다.
이근명이 아뢰기를,
"즉조당이 불탔으니 더더구나 가슴이 아픕니다. 궁성 안이 모두 재가 되고, 나머지 집들의 한 쪽 모퉁이가 성한 채로 있기는 하지만, 어수선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폐하가 갈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물과 비용이 궁색하지만, 반드시 이 궁궐을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根命曰: "見今臨御之所, 其狹隘苟且, 非一時可御之地。 移御處所, 亟下處分。" 上曰: "丙申年移御時, 惟一卽祚堂而已。 今雖盡燒, 嘉靖堂、惇德殿 九成軒尙完存, 比諸其時, 還有勝也。 卽祚堂卽屢百年傳來者, 故未嘗改易一椽桷, 而竝爲燒燼, 甚爲愴惜矣。" 根命曰: "卽祚堂入于回祿, 尤爲傷痛矣。 宮城以內, 蕩爲灰燼, 雖有餘存堂宇, 保在一隅, 疎虞莫甚, 不可臨御矣。" 上曰: "財用雖窘絀, 必當重建於此闕矣。"
*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4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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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자표기 및 건물이름, 쓰임새, 규모 등이 대동소이
한자 표기가 '嘉靖堂'으로, 경운궁 가정당과 창덕궁 가정당과 같고 경운궁에서와 같이 순종과 순정효황후 윤비는 밤이면 대개 가정당에 오르샤 더위를 피하시며 감개(感慨, 감동과 느낌) 많은 경성시중(서울 도성 안)을 둘러 보신다 (매일신보, 1925,06,28, 이순우) 등 휴식공간으로 쓰였으며 규모나 형태가 정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창덕궁 가정당)과 정면 6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건축구조가 비슷하다.
3) 준명당( 浚眀堂) 유치원(幼稚園) 이전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민비시해 후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고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1898년 9월 12일 커피 독살시도(김홍륙), 1904년 2월 29일 경운궁 대화재, 을사늑약(1905,11,17 중명전)에다 1907년 7월 19일 강제퇴위 후 침전인 함녕전 유폐,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와 한일합방(융희 4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과 3대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내정의), 흥복헌, 통감부관저), 1911년 7월20일 영친왕 이은의 생모 순헌 황귀비 엄씨 죽음 등 낙이 없던 중 1912년 봄 환갑 나이에 고명딸 덕혜의 얻음은 개인의 즐거움이자 무거웠던 덕수궁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얼마나 덕혜를 귀여워 했던지 집무(執務)을 보다가 하루에 2번씩 함녕전에 보러갈 정도였고 마침내 1916년 4월 1일에는 서울시내 민씨 등 고위관료 자제를 모아 덕혜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幼稚園)을 차려 주었으며 날씨가 차고 덕혜가 기침을 해서 1918년 뒤쪽 전각 가정당으로 잠시 이전 사용/매일신보 1917년 1월 23일자) 영친왕 정략결혼을 보고 덕혜의 정략결혼을 피하려고 황제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덕혜 8살)은 했으나 1919년 1월 21일 고종 승하로 무효화되었다.
그후 고종의 국장이 3월 3일 40일만에 치려지고 빈전인 함녕전(咸寧殿, 1897년 경복궁 만화당 이전 건립)에서 창덕궁 낙선재로 혼전( 魂殿, 국장 후 27개월간 신위 모셔진 집) 이 옮겨짐에 따라 덕혜(9살)와 어머니 귀인 양춘기(39살)는 고종을 따라 창덕궁 관물헌(갑신정변)으로 거처를 옮겼고(매일신보, 1920,03,17 일자 기사, 이순우) 1925년 3월 24일 일본유학 결정, 3월 27일 한창수의 손에 끌려 일본 동경유학여자학습원으로 떠날 때까지 아침에 일어나 어머니와 함깨 고종에게 낙선재 문안인사 후 덕수궁 준명당 유치원(幼稚園) 시절 민용아, 민덕임 등 친구들(민용아 증언/삼천리 1939년 4월호)과 일어, 산술, 작문 등 공부를 하며 창덕궁에서 생활을 하였다(동아일보, 1920,06,03 일자 기사, 이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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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명당( 浚眀堂 )유치원 관련 사료
덕수궁(德壽宮)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여 복녕당(福寧堂)의 아기씨〔阿只氏〕를 교육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保姆)로 촉탁하였다./ 순종실록부록 7권, 순종 9년 4월 1일 양력 1번째기사
태왕 전하가 준명당에 가서 유치원 학도를 소견하고 필묵을 하사하다/ 순종실록부록 7권, 순종 9년 1916년 5월 8일 양력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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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미루어 준명당 유치원의 창덕궁 이전은 덕혜옹주가 덕수궁 유치원 시절 친구들과 창덕궁에서 함께 공부했고 어머니 양춘기와 고종 승하 후 낙선재에 혼전이 차려짐에 따라 창덕궁으로 옮겨 관물헌에서 살았다는 것(매일신보, 1920,03,17 일자/ 동아일보, 1920,06,03 일자) 이외에 어느 전각에서 유치원이 차려져졌다, 언제 어느 장소에 옮겼다는 입증자료와 연구의 한계로 이전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고 또한 준명당은 본래 목적인 유치원으로 사용하다 1918년 잠시 뒷편 가정당을 임시 사용했으며(매일신보 1월 25일자) 전술한 바와 같이 함녕전( 咸寧殿)에 유폐(留閉 )되었던 고종의 급사(急死)와 혼전에 창덕궁 낙선재에 차려짐에 따라 덕혜와 어머니 양춘기, 준명당( 浚眀堂) 유치원 친구들, 덕수궁( 德壽宮)의 황실가족들은 창덕궁에서 생활하였고 덕수궁은 20년대 이후 1925년 중명전 소실, 1933년 중앙공원사업화 일환으로 석조전 미술관, 이왕가 미술관화, 돈덕전(1907년 7월 19일, 순종 즉위)은 동물원화, 그리고 석조전은 46년, 47년 1.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장소, 48년 UN한국임시위원단 사무실, 1955년 국립박물관 등으로 쓰여 사실상 덕수궁은 궁(宮)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했다.
4) 가정당의 기능과 용도
종래에 가정당은 왕과 왕비 및 왕자, 공주 휴식 공간이자 임금 국사처리(편전) ,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신하들을 초청하여 소연회(小宴, 작은 잔치) 장소, 순종 병상時 요양 및 쾌차기도 올린 곳이기도 하나 1926년 4월 25일 대조전에서 53세로 승하했고 빈전은 선정전에 차려 졌으며 6월 4일 47일장 후 남양주 유릉에 모셔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각종 국악(노래, 연주)과 궁중무용 행사, 궁중 장신구 전시회, 한복 행사 등과 소규모 회의나 교육장소로 유료 개방되고 있고 후원입구 좌측에 이름없는 문이 나 있는데 평상시에는 가정당 안내 표시나 일반인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곳에 문이 굳게 닫힌 채로 생소하게 남아 있는 전각 중이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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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6월 27일자 가사를 보면 "당시 이왕직(李王職)에서 수만 원의 건축비를 들여 창덕궁 내 후원에 건립하였는데, 순종 이척과 순정효 황후 윤비가 재미있게 소풍할 집으로 창덕궁 후원에 건립했다, 매일신보 6월 28일자에는 "요사이 후원 높은 곳에 새로이 가정당이란 정자를 지었고. 그 이름을 가정당(嘉靖堂 )이라 적혀있다고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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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론
1919년 고종 승하 후 고종의 혼전이 낙선재에 차려짐에 따라 덕혜옹주와 어머니 양춘기를 비롯 대한제국 황실가족의 생활공간이 창덕궁으로 이전함 따라 덕수궁은 이름 뿐인 빈 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시대 상황과 재정여건, 필요성 및 쓰임새 등에 따라 창덕궁의 선정전이 인경궁 광정전을, 대조전이 경복궁 교태전을, 희정당이 경복궁 강녕전을, 흥복헌이 경복궁 건순각을, 희정당 돌출 현관이 경복궁 연생전을 헐어 지었듯 빈 공간에 덩그러니 남아있는덕수궁의 가정당도 유사 사례들 처럼 창덕궁으로 해체 이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개략적으로 보면 첫째 ,덕수궁이 빈공간에 건물만 남아 있는 궁이라는 점이다. 둘째, 한자표기 및 건물이름이 동일하고 규모 등이 대동소이하다. 세째 ,고종의 혼전이 낙선재에 차려짐에 따라 황실가족의 생활공간이 창덕궁 중심으로 이전 되었다. 네째, 가정당에서 한눈에 남산 조망가능과 순종과 순정효 황후 윤비의 휴식공간으로 이용 등 본래의 기능과 쓰임새가 비슷하다. 다섯째, 준명당, 가정당은 덕혜옹주와 관련성을 볼 때(1916 ~ 1925) 설립기와 덕혜의 일본유학시기가 일치한다. 여섯째, 두 전각의 해체(1926년 도시계회조사서 작성 항공사진)와 건립시기(1925년 6월)가 일치 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입증자료, 그동안 선행연구 부재, 필자의 연구 부족의 한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분명한 것은 가정당 상량식 때 쓴 상량문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보수와 수리공사가 언제 일런지 ?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새로운 연구자의 몫으로 돌리고 이만 줄인다.
* 참고
1. 개명정 의례(改銘旌 依例)
상례(喪禮) 때 명정(銘旌)을 고쳐 쓰는 의례로 명정은 장례 때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본관, 성씨 등을 써서 관 앞에 세우는 붉은 깃발이며 국왕의 국장에는 붉은 비단에 전자(篆字)로 대행왕 재궁(大行王梓宮)라고 세로로 쓰고 내상(內喪, 대비 혹은 왕비 상례)때는 예자(隸字)로 대행왕비 재궁(大行王妃梓宮)라고 쓴다.
2. 궁 명칭변경 : 1907년 8월 2일 순종이 돈덕전에서 즉위 후 경운궁에서 고종이 덕수궁으로 개칭
3.동궐도(東闕圖) : 조선후기 순조 연간 즉 효명세자(문조, 이영, 수릉, 구리 동구릉) 대리청정(1827,02 ~ 1830,05,06) 당시에 도화서 화원들이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과 궁궐 전경과 창덕궁 후원 일부를 하늘에서 새가 내려다 보는(조감법) 방법으로 그린 궁궐 그림으로 추정되고 현재 고려대 소장본은 1989년 국보 제249-1호로 등록, 동아대 소장본은 국보 제249-2호로 등록 2점이 전한다.
4. 조선공로자명감
한일합방 기점부터 1935년까지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민관공로자, 즉 일본인과 조선인의 친일행정 기록한 책자로 1935년 10월 발간.
5. 고종의 독살설
초대 총독 테라우치와 2대 총독 하세가와의 한일합방의 합법성에 인정에 고종이 거부하자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이 김상궁 휘하 2명의 궁녀에게 고종이 즐겨 마시던 밤참 식혜에 비상을 넣어 독살했다는 설이다.
일본이 총기호획 - 이완용 총연출 -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 - 김상궁 - 2명 궁녀 - 밤참 식혜에 비상을 넣어 고종 독살
6. 덕혜 창덕궁 유치원 생활
일본인 교사 스미나가(주영)와 사사키(좌좌목) 등으로부터 준명당 유치원 친구들(민용아, 민덕임, 한효순, 이해순, 조중응 일본인 처 딸 등/박옥희와 민용아 인터뷰 증언/삼천리 1939년 4월호/이순우 )과 일어, 산술, 작문, 그림, 글씨 등 공부를 하며 창덕궁에서 생활함( 동아일보, 1920,06,03 일자 기사, 이순우)
7. 상량식(上樑式)
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건물의 중심인 마룻대를 올리는 의식으로 상량문을 써서 올려 놓은 다음 모두 모여 축하 잔치를 하며 상량문에는 축원의 글을 쓴다.
* 참고 자료
- 문화재청 홈페이지
- 국사편찬위원회
- 창덕궁관리사무소 홈페이지
- 덕수궁관리사무소 홈페이지
- 이순우 기록물(신문기사) 참조
- 서울역사편찬원
- 대한민국역사빅물관
- 오마이뉴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