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과 혼과 몸의 분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 영혼과 몸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영혼을 사람 속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며, 몸을 보이는 것인 사람의 밖의 신체로 생각한다. 몸이 사람의 외면적인 신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하나인가는 의문이다. 영혼은 두 가지 실체인가, 하나인가? 영과 혼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사람의 답변은 이것이 하나의 실체로서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문자적인 차이가 있을 뿐 영과 혼을 같은 실체로 생각한다.
사람의 답변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여 믿을 만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하는지를 보게하자.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영혼과 몸의 두 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나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영과 혼을 구분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너희 온 영과 혼」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 영혼」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로 보건대 사람의 영은 혼과 구분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단정할 수 있다.
영과 혼을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그렇다. 이것은 믿는이의 영적 생명과 생활에 큰 관련이 있다. 믿는이가 영의 경계를 모륻다면 어떻게 영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활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믿는이의 영적 생명이 계속 자라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영과 혼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어떻게 영과 혼을 구분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은 데살로니가 전서 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구분을 언급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4장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여기서도 사람을 영과 혼(생각과 뜻의 기관) 및 몸인 관절과 골수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혼과 영을 찔러 쪼갤 수 있다면 영과 혼은 같지 않음이 분명하다.
처음 피조된 사람
창세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혼이 된지라』(원문참조)고 말한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는 사람의 몸을 가리키고, 그 코에 불어 넣어진 「생기(생명의 호흡)」는 사람의 영을 뜻한다. 「산 혼」은 사람의 혼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구절에 의하면 혼은 영과 몸이 합해짐으로 생긴 것이다. 영이 사람의 몸에 들어와 혼이 산출하였다. 본래 몸은 죽은 것이었지만 생명의 영을 만날 때 제 삼자인 혼을 낳았다. 영이 없다면 몸은 죽은 것이고 영이 있어야만 생활이 있다. 몸 안에 영이 있는 사람은 유기적이 되는데 이 유기적인 것을 혼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은 인간 생명의 원천이다. 주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요 6:63)라고 하셨다. 생명의 호흡은 사람을 살리기 때문에 이 호흡은 바로 영이다. 영과 몸이 합해질 때 혼을 낳았다. 성경에는 『산 혼이 된지라』로 되어있다. 이는 아담의 영이 그의 몸과 연합할 때 세번째 부분인 혼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의 영과 몸이 세번째 부분인 혼 안에서 연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을 「산 혼」(고전 15:45)이라고 칭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주님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 자로서 온 존재가 영의 다스림을 받는다. 이것은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사람을 살리는 영이신 마지막 아담과 연합했기 때문이다(고전 15:45)
영과 혼과 몸의 기능
사람은 영과 몸의 두 부분의 독립된 본질로 피조되었다. 영이 흙으로 둘러싸인 부분에 들어간 후 곧 혼을 산출했다. 영이 몸을 직접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매개체가 필요한데 이 매개체는 바로 영이 몸을 접촉함으로 생긴 혼이다. 영이 몸과 완전히 융화될 때 혼이 생겼는데, 이로써 사람은 산 혼이 되었다. 그러므로 혼은 영과 몸이 상합한 결과요, 사람의 인격이 된다.
몸은 혼의 외곽이고 혼은 영의 외곽이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온 존재는 영의 다스림을 받았다. 어떤 행동을 취하고자 할 때 영은 그 뜻을 혼에 전달하고 혼은 영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게 한다. 이것이 바로 혼이 매개체로 사용된다는 뜻이다. 누가복음 1장 46절과 47절을 보자『내 혼이 주를 찬양하며(현재형) 내 영이 하나님을 기뻐하였음은(과거 완료형)』(원문참조) 영이(먼저) 기뻐한 다음에야 혼이 주를 찬양할 수 있다. 먼저 영이 기쁨을 혼에 전달하면 혼은 그 것을 몸에 전달하게 된다.
몸은 「세상에 대한 지각(知覺)」이고, 혼은 「자기에 대한 지각」이며, 영은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다. 몸은 사람에게 다섯 가지 지각을 갖게 하는 오관(五官)이 있다. 이 물질적인 몸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적인 세계와 왕래하기 때문에 이것을 「세상에 대한 지각」이라고 부른다. 혼은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지력(智力)의 부분과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사랑하게 하는 감정의 부분과 지각에서 산출한 자극의 부분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이자 인격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지각」이라고 한다. 영은 사람이 하나님과 왕래하는 부분으로서 이 부분을 통해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라고 부른다.
영에도 지식이 있지만 이 지식은 생각의 지식과 다르다. 영에 속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안다. 영은 생각이 아니다. 고린도 전서 2장 11절은,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라고 말한다. 비록 사람이 생각을 통해 어떤 사정을 알지만 실제로 사람의 생각은 믿을만 하지 못하며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다.
생각 속에 지식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오직 사람의 영만이 사람의 사정을 알고 그 자신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을 말한 것이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 영은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부분이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욥 32:8, 원문 참조).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사람의 영은 사람이 하나님과 왕래하는 부분이다.
일단 자극을 받으면 사람의 혼은 낙망하고(시 42:5, 원문 참조) 고민( 마태복음 26장 38절의 마음은 혼으로 번역되어야 함)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의 인격에 포함된 것은 다 혼이다. 그러므로 혼을 인격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경의 많은 곳에서 사람을 혼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애굽에 내려간 야곱 집의 칠십 인에 대한 성경은 「칠십 혼」이라 기록했다(창 46:27, 원문 참조)
몸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종과 같다.
혼은 결집하는 장소로서 거기서 영과 몸이 연합한다. 사람은 영으로 말미암아 영적 세계와 왕래하고 몸을 통해서는 지각의 세계와 왕래한다. 혼은 중간 위치에 서서 한면에서 영으로 말미암아 영적 세계와 교통하고 또 한면에서는 물질 세계와 왕래한다.
혼은 영과 몸의 중간에 위치하여 영과 몸을 하나로 묶어준다. 영은 혼을 통해 몸을 다스려 몸이 하나님의 능력에 복종하게 한다. 몸도 역시 혼으로 말미암아 영이 세상을 사모하게 할 수 있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혼은 인격의 산출지(産出地)로서, 그 안에는 사람의 판단력과 지력(智力)과 애정이 있다. 영은 사람이 영적 세계와 왕래하는 부분이다. 몸은 사람이 자연계와 왕래하는 부분이다. 혼은 이 두 부분의 중간에 서서 그 판단력을 사용해서 영적 세계의 다스림을 받을 것인지 물질 세계의 다스림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해준다. 때로는 혼이 그 지력과 자극을 받아 온 존재를 다스리는데 이것은 이상의 세계가 다스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혼이 영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원함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혼이 영의 다스림을 받도록 결정해야만 영이 혼과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다. 이것은 혼이 인격의 산출지이기 때문이다.
타락 후 사람의 영과 혼과 몸
본래 영은 혼과 몸이 그에게 복종하는 온 존재의 가장 높은 부분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영은 주인같고 혼은 청지기와 같으며 몸은 종과 같다. 주인은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그것을 청지기에게 부탁하며 청지기는 종들에게 분부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은 타락하게 되었다! 실패하고 범죄하고 말았다! 결국 사람의 영과 몸에는 본래 있어야 할 정상적인 질서가 파괴되었다.
아담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의 호흡인 영을 통해서였다. 영은 하나님의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알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 아주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타락 후 아담의 영은 죽었다.
최초에 하나님은 아담에게『네가 먹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과실을 먹은 후에도 몇 백년을 더 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과학적 의미의 죽음이란「외부 환경과 교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담의 죽음은 그의 몸의 죽음이 아닌 영의 죽음이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영이 그 예민한 지각을 상실하고 하나님에 대해 죽었다는 뜻이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벙어리가 있다 하자 그에게 입이나 목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입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의 입은 언어 능력에 대해 죽어 있다. 아담이 하나님을 불순종함으로 그의 영은 죽었다. 그에게 영이라는 것은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죽어 있었다. 만일 아담이 그 당시 그의 판단력을 사용하여 생명나무를 택하여 먹었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그의 영에 들어가 그의 혼을 통과하며 그의 속사람을 변케 하였을 것이다. 죽어 마땅한 그의 흙에 속한 밖의 몸도 변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무질서하고 타락하였다. 이러므로 그의 바깥 몸은 죽고 부패하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은 사람의 혼을 높이 들어 올리고 영의 과실을 다스린다. 이 세상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혼의 역사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과실 먹는 것을 금하신 것은, 사람을 시험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 속의 영의 생명과 혼의 생명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 과실을 먹으면 혼의 생명은 살게되고 영의 생명은 죽게 된다. 즉 하나님의 지각을 상실하고 하나님에 대해 죽게 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선악과 지식은 모두 악이다. 지식은 사람의 혼의 부분에서 나온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을 때 혼의 생명은 일깨워지고 높이 올려진다. 혼의 생명이 일깨워지고 높이 올려질 때 영의 생명은 하락하여 죽은 것 같이 하나님의 지각을 상실하게 된다.
이때로 부터 아담(그리고 그의 자손들)의 영은 혼의 압제를 받게 되었고 얼마 안 되어서 혼의 억압 때문에 그의 영은 혼과 융화되어 두 부분이 긴밀히 연결되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과 혼을 찔러 쪼갠다고 말한다. 이것은 영과 혼이 하나로 합해졌기 때문에 쪼갤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혼과 영이 이렇게 긴밀히 연결되었기 때문에 사람의 생활은 이상(理想)의 세계 안에 살게 된다. 모든 일에서 사람은 지력 혹은 감각을 좇아 행한다. 이때 영은 죽은 것 같이 그 능력과 지각을 완전히 상실한다. 유다서 19절에서 말한 『육에 속한 자며 영이 없는 자니라』(여기서의 영은 성령이 아닌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 이는 윗 구절의 「육에 속한 자」의 육이 원문에서는 혼으로서 혼 -혼은 역시 사람에 속한 것임- 적인 자를 말했기 때문에 다음에 언급한 영도 역시 사람의 영을 가리킨 것이다. 헬라어에서도 정관사가 이것을 증명한다)는 실지로 영이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이 혼에 의해 막혀 있고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이렇게 날로 악화되어 몸 안의 육신(혹은 혈기)도 권세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홍수가 임할 때 사람은 이미 육체가 되었다(창 6:3)
혼에 속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생이 믿을만 하지 못함을 깨닫고 내세의 영생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결코 인간의 생각과 이론으로는 생명의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이것들은 모두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아주 총명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이론은 사람을 잘못된 데로 인도한다. 그것은 공중누각에 불과하며 사람을 영원한 흑암으로 인도할 뿐이다.
육신에 속할 때 사람은 육적인 애호와 사욕의 지배를 받는다. 그는 그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사욕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더러운 죄들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사람은 세 부분, 곧 영과 혼과 몸으로 나뉜다. 원래 하나님의 뜻은 영을 최고의 위치에 두어 혼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혼에 속하게 된 후 사람의 영은 잠겨져 혼을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육체에 속한 후로는 가장 비천한 육신이 왕 노릇 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 영의 다스림」에서 「혼의 다스림」으로 하락했고 그 다음 「혼의 다스림」에서 「육신의 다스림」으로 하락했다. 이러한 단계적인 하락의 결과 육신이 권세를 잡게 될 정도로 가련하게 되었다.
거듭남
거듭나기전 (1) 사람의 영은 하나님과 멀리 있고 죽어 있었다. 죽음은 생명을 떠난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최종적인 칭호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곧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사람의 영은 죽은 것 같이 하나님을 떠나 있어 그분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다. (2) 혼이 온 몸을 다스릴 때 사람은 이상(理想) 혹은 자극 가운데 산다. (3) 도리어 혼은 몸의 정욕과 애호에 복종 하였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육으로 난 육(요 3:6)이기 때문에 마땅히 거듭나야 한다. 거듭난 후 그는 영의 존재가 되었지만(요 3:6, 아직 영에 속하지는 못함) 여전히 혼에 속한다. 거듭남은 바로 성령께서 십자가 공로를 사람에게 더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대신 죽었다가 부활하신 구주이심을 믿은 사람은 거듭난 것이다. 일단 사람이 거듭나면 성령은 그의 영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한걸음 한걸음 완전한 데까지 전진한다.
거듭나기 전 사람의 영은 혼의 다스림을 받는다. 그의「자아」가 혼을 다스리고 육신(혈기)이 그의 몸을 다스리며, 혼은 영의 생명이 되고 「자아」는 혼의 생명이 되었으며 육신은 몸의 생명이 되었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의 영은 성령의 통제를 받게 되고 그의 혼을 다스리게 된다. 영은 혼을 통해 그의 몸을 다스리고 성령은 영의 생명이 되고 영은 온 존재의 생명이 된다.
『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이라』(잠 20:27). 거듭날 때 성령은 등불을 켜고 사람의 영에 들어가기 위해 오신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서 36장 26절에 말한 「새 영」이다. 원래 있던 영은 죽은 것 같았지만 이제 성령이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사람 속에 넣으심으로 사람의 영은 새 것 같이 되었고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산 것이 되었다.
사람의 어두어지고 타락한 영이 성령의 능력을 입고 살아난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성령이 사람을 거듭나게 한 근거는 십자가에 있다(요 3;14~15 참조). 영생은 바로 성령에 의해 사람의 영 속에 넣어진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거듭난 사람이 이 생명을 얻은 것을 가리켜 영생을 얻었다고 말한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생명이 죽으면 사람의 영생도 끝난다.! 거듭남은 영적 생명의 초보이다. 이때 그의 영적 생명은 완전하기는 하지만 성숙되지 않았다. 이것은 어떤 과일과 같은데 그것이 처음 나타날 때 생명은 완전하지만 그 모양은 아직 푸르고 성숙되지 않았다. 생명에 있어서는 완전하지만 유기체의 각 부분으로서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사람의 거듭남도 이와 같음을 주의하라! 거듭났다고 완전한 것이 아니다.
믿는이의 생명의 세 시기(時期)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으신 구주로 믿었다면 그는 거듭난 것이다. 거듭남은 영적 생명의 첫 걸음이다. 거듭난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 믿는이가 거듭난 생명을 얻은 후 그의 그리스도인 생활은 개략적으로 다음 세 시기를 거치게 된다. 첫째는 육신에 속한 시기이고, 둘째는 혼에 속한 시기이며, 셋째는 영적인 시기이다.
거듭난 믿는이도 한동안은 전과 같이 화를 내고 교만하며 질투하는 등의 죄를 범한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은 자기(다른 사람)의 거듭난 것을 의심한다. 실지로 그는 거듭났지만 그가 육신에 속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는 차츰 진보해서 성경 읽기와 기도에 흥미를 갖고 마음 속에「느끼는」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를 때 믿는이는 자신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인 줄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가「느끼는」이상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일 뿐 여전히 혼에 속한 자임을 알지 못한다. 후에 그의 안에서 성령이 이룬 더 깊은 십자가의 역사로 그가 자아를 좇아 행하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한 느낌을 주의하지 않으며 잠잠히 영 안에만 살게 된다면 그는 영적인 사람이 된다.
육신에 속할 때 그의 주인은 육체이고, 혼에 속할 때 그의 주인은 혼이며, 영에 속할 때 그의 주인은 그의 영 안에 있는 성령이다..
한국복음서원 刊 영적 전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