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각주이며, 행여, 송계선생님의 옥고에 누가 안되길 바라며, 재미삼아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각주:
주(註) 또는 각주(脚註, 영어: note, footnote 또는 annotation)는 본문에 대하는 참조 문헌이나 본문의 낱말,
문장 등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는 덧붙이는 글이다. 주는 매우 길어 본문에 기입하기 부적당하거나 본문 내용에 끼워 넣었을 때 문맥의 흐름이 방해되는 경우에 사용되며, 기술하는 내용의 출처를 밝히거나 해당 용어나 내용을 보충설명하는데사용한다.
마포하면, 어떤 분은 쏘주한잔에 "마포주물럭"을 떠올릴 수도 있겠고, 혹은 요즘의 걸 그룹의 원조라고 평가되는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나는, 대륙조선의 개념이 아예 없었던 때의, 중학교시절(1976 무렵)에 언젠가 들었던 국어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르고, 그것이 이 각주를 달게된 이유이다.
어느날 수업중에 외솔 최현배 선생에 대한 이야기 끝에, "일본 놈들이, 우리땅의 고유지명을 전부 창씨개명하듯이 한짜로 바꾸었다", 그예로 자신이, 현 마포가 고향인데, 어렸을땐 그곳이 "삼개,삼개나루"였고, 더울 때에는, 동네친구들과 삼개나루에 멱감으러 다녔는데, 그 삼개가 일제에 의해 어느날 마포로 개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그 국어 선생님 역시, 대륙의 개념은 없었던 것 같고, 다만, 우리의 고유말을 일제가 바꾸었다는 것에 대한 울분의 토로였던 것 같은데, 대륙조선을 염두에 두면 반도지명 "삼개"는 중요한 단서이다 .
(이하 색칠한 부분은 건너 뛰어도 무방함)
그의 민족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잠시, 최현배선생을 보자면,
최현배(崔鉉培, 1894년 10월 19일 ~ 1970년 3월 23일)는 대한민국의 국어학자, 한글학자이며 교육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외솔이며,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지금의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2동)에서 출생하였다.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에 주목해 주길 바란다. 그 시절에,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도호부라니...)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에는 우리말의 모든 품사를 우리말로, 예컨대,
이름씨·대이름씨·셈씨, 풀이씨, 그림씨·움직씨·잡음씨,꾸밈씨(매김씨·어찌씨·느낌씨)등으로 나누었다.
흔히 품사를 외울때, 앞 머리를 따서, "명대수동형관부감조"라고 외운 기억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들을, 외솔은 다 순 우리말로 파악을 했다는 것이다.
외솔에 대해 주목할 또 한가지는, 그가 1926년, 일제치하에서 《조선민족갱생의 도》를 저술했다는 것이다.일제 치하에서의, 조선인에 의해 쓰여진, 조선민족에 대한 계몽의 글들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보다 앞서,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1922년 기고한〈민족 개조론〉(民族改造論)의 8조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도록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공상과 공론을 버리고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의무'라고 간주, 즉각 실행해야 한다.
셋째는 '표리부동'함이 없이 의리를 지켜 가야 한다.
넷째는 '겁나(怯懦)를 버리고 옳은 일, 작정한 일이거든 만 난을 무릅쓰고 나가는 자'가 되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사회적 공공 의식과 봉사정신의 함양을 강조하였다.
여섯째는 1인1기의 전문기술 습득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일곱째는 근검절약 정신의 함양이다.
여덟째는 생활환경의 청결이었다.
《조선민족갱생의 도》는,
1926년 『동아일보』에 66회에 걸쳐 연재한 내용을 1930년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는데,
이 글은 원래 저자가 10년 동안의 일본유학을 마무리하던 시절인 1925년에 집필한 것으로, 교육학 방면에는 저자가 공개한 최초의 업적에 해당된다.
제1장 민족적 질병의 진찰,
제2장 민족적 쇠약증의 원인,
제3장 민족적 갱생의 원리,
제4장 민족적 갱생의 노력 등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에서는 민족적 사회현실을 분석해, 의지 박약, 용기 부족, 활동력 결핍, 의뢰심, 저축심 부족, 성질 음울, 신념 부족, 자존심 부족, 도덕성 타락, 정치·경제적 파멸 등 10가지를 우리 민족의 병폐로 들었다.
제2장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현실의 인과적 원인을 천착(穿鑿)해서, 조선조 문약정치, 조선 유교의 교조성, 자각 없는 교육, 한자의 해독, 양반계급의 횡포, 번문욕례(繁文縟禮), 일상생활의 비효율, 조혼의 악습, 나이 자랑, 미신의 성행 등 역시 10가지를 구체적으로 논급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민족적 생활의 현실에 대해서 민족적 생활의 이상을 추구, 확립하려 했는데, 이 책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우리 민족갱생의 원리로는, 첫째 민족적 생기를 진작하고, 둘째 민족적 이상을 수립하며, 셋째 민족의 시대적 이상을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것을 실현하는 데 우리 민족의 특질을 구명, 민족성이 우수함을 의(意)·정(情)·지(知)의 세 가지 면에서 사실적으로 논증하였다. 다음으로 민족갱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제4장에서는 민족갱생의 노력을 열거해 신교육의 정신 함양, 계몽운동 전개, 체육 장려, 도덕 경장, 경제 진흥, 생활방식 개선, 민족문화 발양 등을 들었다.
다시,마포로 돌아와 보자.
누군가 말하기를,
“우리의 땅이름의 역사는 민족이 겪은 수난사와 같다”라고 단정 한다. 대동여지도와 수선전도 등 옛 지도에는 토박이 땅이름이 모두 한자로 의역 · 음역되었고 일제시대에는 일본이 마을사람의 일체감을 없애기 위해 지명통폐합정책을 쓰는 바람에 현재 토박이 땅이름은 90% 이상 훼손되었다.
이러한 진술은 일부는 맞다고 하겠지만, 여전히 반도에 갇혀있는 청맹과니적인 정신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즉,우리가 대대로 5천년여를 반도에서 살면서, 우리말로 지명을 부르며 살았는데, 일제가 그것을 다 한짜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삼개나루가 마포로 개칭된것은 국어선생님의 말씀대로, 최근의 일인데, 왕조실록에, 그 삼개나루(마포)가 여러 시대를 거쳐 등장한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시속에서는 삼개라 부르고, 조정에서는 마포라고 불렀다?(일제가 이걸 알고서 근대에 그렇게 개칭했다?)
실록에 마포를 검색해 보면, 아래와 같다.
검색어 麻浦 : 106건
·
국역(57) ·
원문(49)
·
전체 (57) ·
세종 (4)·
문종 (1)·
단종 (10)·
세조 (6)·
성종 (2)·
연산군일기 (4)·
중종 (4)·
명종 (2)·
선조 (5)·
선조수정 (1)·
광해군중초본 (1)·
광해군정초본 (1)·
인조 (1) ·
숙종 (2)·
영조 (1)·
정조 (2)·
순조 (1)·
고종 (8)·
순종부록 (1)
52번째 기사를 보면,
[고종실록 25권, 고종 25년 12월 10일 정해 2번째기사 1888년 조선 개국(開國) 497년]
파견관리를 마포에
주재시켜
몰래
들어오는
외국
선박을
검찰하게
하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방금 총세무사(總稅務司) 메릴 헨리〔墨賢理 : Merrill, Henry〕의 보고를 보니, ‘각 국의 범선(帆船)들이 마포(麻浦)에 몰래 들어오는 문제에 관하여 조약의 단속법에 근거해서 방금 비준한 문건을 시행하고자 하니 빨리 관리를 파견해서 포구에 주재시키소서.’ 하였습니다. 인천항 서기관(仁川港書記官) 변석운(邊錫運), 부산항 방판(釜山港幫辦) 유기환(兪箕煥), 원산항 서기관(元山港書記官) 팽한주(彭翰周)를 모두 마포에 옮겨 주재시키고 조약에 근거하여 몰래 새는 것을 검찰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반도의 마포지역을 지도로 보면, 각 국의 범선들이 구태여, 안쪽으로 들어와 현 성산대교 근처의, "삼개나루"에 새우젓을 사러 모여들 일이 전혀 없다. 제물포라면 모를까. 또한, 윗 기사에서, 인천항,부산항,원산항등의 관리들을, 마포에 전근시키라고 하는데, 인접해 있는 지역이 아니라면, 반도의 형세를 볼때,
뜬금없이, 거리가 먼 꼬리부분의 부산과 등허리 부분인 원산의 관리들을 어찌 불러오자는 것일까?
*마포의 각주에만 충실하자면, 민족개조론, 조선민족갱생의 도는 곁가지인데, 빼지않고 그냥 남겨둡니다.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마포가 삼개나루인 것을 보면 아마 마포진에서 삼베의 매매가 이루어져 전국각지로 흩어지고, 일본과 명,청 등으로 수출되었다고 쉽게 이해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제물포(濟物浦)를 검색해보면, 구한말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던 인천의 별칭(別稱)이라고만 나오는데, 선생님의 원글에서, 특히 인천과 제물포가 별개의 지명이었음은 새로이 알게된 내용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