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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평화의 샘 원문보기 글쓴이: 보라매
산타마리아 마조레성당 (성 마리아 대성당,
로마) | 유럽(남유럽,이탈리아,로마)
산타마리아 마조레성당 (성 마리아 대성당) 현지에서 제공되는 설명 라디오 가이드
로마의 '성 마리아 대성당' 곧 산타 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당 방문에 앞서 라디오 가이드를 하는 녹음기의 성능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녹음기에는 숫자 판이 있는데 성당 안을 돌아다니면서 누르면 됩니다. 녹음기와 함께 나눠드리는 성당 약도를 보면 붉은 색 숫자가 나오며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중요한 작품과 지점을 나타냅니다. 그 지점의 숫자를 확인하고서 녹음기의 숫자를 누르고 초록색 화살표 <작동> 버튼을 누르면 그 지점에 있는 작품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초록색 두 줄로 나온 <정지> 버튼을 누르면 그 설명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초록색 화살표 <작동> 버튼을 누르면 앞서 멈춘 설명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 부분 설명이 끝나면 "삐-"하는 소리가 납니다. 붉은 색 버튼을 누르면 아무 때라도 설명이 아주 멈춥니다. 기계를 잘못 작동했을 때에도 붉은 버튼이나 아래편 C 버튼을 누르면 멈춥니다. 음성의 볼륨을 조정하는 버튼도 달려 있습니다. 1. 대성당의
역사적 내력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확인해 주는 유일한 고문서는 <주교 의식서>라는 책인데, 그 책에 라틴어로 "교황 리베리우스가 리비아 시장 옆에 자기 명의로 성당을 만들었다"는 글귀가 나옵니다. 최근 이 성당 지하에서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은 서기 2, 3세기에 통용되던 고대 로마의 달력과 로마 시대의 주택 담벼락을 찾아냈습니다. 이 성당 지하 박물관에 들어가면 지금도 그 담벼락을 볼 수 있습니다.
2. 산타 마리아 마죠레 광장 라디오 가이드 녹음기를 받았으면 잠시 밖으로 나가서 광장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광장 한가운데에 돌 하나를 깎아 세운 코린토식 기둥이 서 있는데 원래는 로마 시장(포로 로마노)에 있던 막센티우스 대저택(서기 312년)의 유물이며, 그 저택 기둥이 온전하게 보전되기는 이것이 유일한 작품입니다. 보르지아 가문 출신의 교황 바오로 5세의 지시에 따라 1614년에 건축가 마데르노(Maderno)가 이 자리로 옮겼습니다. 높이는 14미터 50센티에 기석이 따로 있고 기둥의 지름은 1미터 75센티입니다. 기둥 꼭대기에 아기 예수를 안은 청동 성모상이 모셔져 있는데 베르텔로(Guillaume Berthelo)의 1614년 작품입니다. 달을 밟고 서 있는 성모의 발은 성서 묵시록의 현시를 표현합니다. 같은 해 1614년에 기둥 밑에 마데르노가 설계하여 석회석 수조를 설치하였습니다. 3. 성당 정면 성당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회랑이 안에 있고 일층에 출입문이 다섯, 이층 회랑에도 세 칸의 아치가 있습니다. 푸가(Ferdiando Fuga)의 1761년 작품입니다. 일층의 회랑 때문에 옛날 성당 정면에 있던 13 세기의 천정 모자익이 가리워져 안 보입니다. (이층 회랑에 올라가 13세기의 모자익을 보려면 성당 안 성 미카엘 경당 성물 판매실에서 입장권을 신청하면 됩니다) 성당 양편의 부속건물을 소개하면, 오른편의 건물은 폰지오(Ponzio)의 1605년 작품이고, 왼편의 건물은 푸가의 1743년 작품인데, 오른편 건물보다 138년이나 늦었지만, 성당 정면의 좌우대칭을 맞추려고 애써서 지은 것입니다. 중앙 철책문 위에 대리석상 둘이 있는데 하나는 마이니(Maini)의 작품으로 처녀성 즉 동정의 덕성을 상징하고, 하나는 브락치(Bracci)의 작품으로 겸손의 덕을 상징합니다. 4. 정면
회랑 그러면 성당 정면의 회랑에 들어가서 안을 살펴봅시다. 들어가면서 회랑 오른편에는 스페인 국왕 필립 4세의 동상이 있는데 대성당에 이바지한 바가 많은 인물이어서 여기에 석상이 안치되었습니다. 석상은 17세기에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가 초벌을 떴고 루첸티(Girolamo Lucenti)가 제작하였습니다.
회랑 한가운데는 성당으로 들어가는 중앙 대문이 구리로 만들어져 있는데 1949년에 조각가 폴리아기(Ludovico Pogliaghi)가 제작한 작품이며, 대문 한가운데에는 마리아의 생애의 일화들이 돋을 새김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성모의 일화 외에도 아래쪽에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조각되고 문 쪽으로는 복음사가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문설주 쪽으로는 위아래에 네 명의 여인들이 나오는데 구약성서에서 마리아를 예표하던 여인들입니다.
왼편에는 회랑 깊숙한 쪽으로 "거룩한 문"(Porta Santa)이 있는데 2001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축성한 문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무덤 기사회"가 대성당에 기증한 것으로 현대 이탈리아 조각가 마테이(Luigi Mattei)의 작품입니다. 이 문의 중앙에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 발현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으며, 예수 상은 토리노에 보관된 "거룩한 염포"(Santa Sindone)에서 따온 모습을 하고 있고, 마리아는 "로마 백성의 구원"(Salus Populi Romani)을 상징합니다. 위쪽 사각형 안의 왼편에는 "우물가의 성모 영보"가 새겨져 위경으로 내려오는 복음서의 일화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른편 장면은 성령강림입니다. 문 아래쪽 왼편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Mater Dei)"로 정의한 에페소 공의회 장면이요, 오른편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Mater Ecclesiae)"로 정의하려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장면입니다. 꼭대기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문장(紋章)이 새겨지고 "나는 오로지 당신의 것"(Totus tuus)이라는 교황의 표어가 적혀 있습니다. 아래편에 나오는 문장 둘은 대성당 대사제 푸르노(Furno) 추기경의 문장과 "거룩한 무덤 기사회"의 문장입니다.
현재의 대성당은 서기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당 건축은 431년에 열린 에페소 공의회와 연관이 있는데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정의한 사건을 기념하여 당시 로마의 주교 식스투스 3세가 성당건축을 결정하고 재정후원을 하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의 광대한 크기며 화련한 대리석이며 풍부한 장식에 놀라게 됩니다.
이 성당이 위대한 예술작으로 돋보이는 것은 성당의 축조형태와 각 부분의 조화 있는 배치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성당은 로마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가 말하던, "우아한 율격"이라는 건축 규범에 입각하여 세워졌고, 두 줄의 기둥을 세워 회중석이 세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기둥 위에는 미술작품들로 장식된 상인방이 놓여 있습니다. 이 상인방은 제대 쪽의 압시스(반원공간)를 향하여 뻗어나가다 두 개의 아치를 만나기도 합니다. 이 아치는 측면에 식스토 경당(Cappella Sistina)과 파울로 경당(Cappella Paolina)을 짓기 위한 버팀목입니다. 기둥과 천장 사이의 벽은 원래 대형 창문들이 나 있던 곳인데 지금은 절반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마리아의 생애를 그린 벽화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부분을 감상하려면 기둥 곳곳에 동전을 넣는 조명 스위치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벽화는 18세기 로마 프레스코입니다. 창문과 그림 벽의 위쪽을 보면 황소를 올라탄 큐핏들이 조각되어 천정의 금박 장식과 이어집니다. 황소들은 보르지아(Borgia) 가문의 상징물로서 이 가문 출신 교황 칼리스토 3세와 알렉산델 6세의 문장에도 나타납니다. 칼리스토 교황이 이 부분의 설치에 어떤 이바지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알렉산델 6세가 이 성당의 수석사제 직위에 있었을 적에 이 부분의 제작을 위임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천장은 쥴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가 도면을 그리고 그의 아우 안토니오(Antonio da Sangallo)가 제작한 작품입니다. 천장에 입힌 금박은 아메리카에서 맨 먼저 실어온 황금을 스페인 국왕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도가 교황 알렉산델 6세에게 선물하여 이곳 장식에 사용했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우리 발 밑에는 화려한 양탄자처럼 대리석 조각으로 꾸민 모자익이 깔려 있는데 코스마 가문의 장인들이 만든 것이고, 12세기 로마 귀족 파파로니(Scoto Paparoni)라는 사람과 그 아들 죠반니(Giovanni)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선사한 작품입니다.
대성당의 뛰어난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5세기의 화려한 모자익이며 중앙 회중석과 아치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교황 식스토 3세가 제작케 한 것으로 중앙 회중석의 모자익은 "구세사"(救世史)의 네 주기를 나타내어 아브라함, 야곱,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구약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하느님께 "크고 강한 민족"이 후손에게서 이루어지리라는 언약을 받았다고 합니다. 야곱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다시 다짐받은 인물입니다. 모세는 노예 살이 하던 자기 민족을 구출해내어 "하느님의 선민"으로 만들었다는 영웅입니다. 여호수아는 해방된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들어간 지도자입니다. 이런 얘기들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위벽에 그려져 있으므로 회중석과 아치를 한바퀴 돌면서 천천히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제단 앞의 아치 옆에 있는 왼쪽 벽에서부터 현관 쪽으로 물러서면서 모자익을 둘러봅시다. 첫 번 그림은 멜키세덱의 제사를 그린 것인데, 그 인물은 짐승을 죽여 바치지 않고 빵과 포도주로 제사를 올린 인물이며, 예루살렘의 군주이자 제관이었습니다. 로마 성화의 영향이 잘 나타나는 그림입니다. 그는 로마 관리의 복장을 하고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있고, 그에게 빵과 포도주를 선사하는 모습입니다. 흰 수염이 난 아브라함은 로마 원로원 의원의 복장을 한 채 말을 타고 있습니다.
왼편으로 옮겨가면서 그림들을 보면 아브라함 생애의 다른 일화들을 보여주는데, 첫 번 그림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순서대로 기술되어 있지 않아서 설명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시대와 사실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신학과 예술을 주안점으로 해서 그린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벽의 모자익과 아치의 모자익을 서로 맞추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앙 회중석의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모두 모자익에 나오는 구세사를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왼편 벽에 중간에 모자익이 아닌 벽화가 두 장 나오는데 피넬리(Pinelli) 추기경의 성당 복원사업 때에 그려진 것으로, 다윗이 계약 귀를 예루살렘으로 들여오는 장면과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을 그린 것은 제단 앞의 아치에 나오는 묵시문학의 일화들과 연결되는데 그리스도가 다윗 가문의 후손임을 강조하여 이 자리에 나옵니다.
중앙 제단의 옴폭하게 들어간 벽을 포함하여 제단 부근을 전문용어로 압시스(apsis)라고 부릅니다. 압시스 바로 앞의 아치에 그려진 모자익은 네 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왼편부터 본다면 먼저, "성모 영보"로 시작합니다. 마리아가 로마 공주의 복장을 하고서 왕좌에 앉아 있고, 손에는 실타래를 들고 자기가 섬기는 성전에서 사용할 장막을 짜고 있습니다. 그 왼편에는
요셉에게 천사가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장면, 그 아래편 띠에는 동방박사들의 예배, 그 밑에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학살 장면이 나옵니다. 세 번째
칸 그림의 오른편 끝에 푸른 망토를 걸친 여자가 다른 여자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그림 아래편에 있는 화폭은 헤로데를 만난 동방박사들입니다. 아치의 양편 그림 발치에 나타나는 두 고을은 오른편이 베들레헴,
왼편이 예루살렘이랍니다. 베들레헴은 예수가 태어난 곳이고 동방박사들에게 모습을 보인 공현(公顯)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은 그가 죽고
부활한 곳입니다. 아치 한가운데를 보려면 좀 떨어져서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푸른색 동그라미 안에 빈 어좌(御座)가 보이는데 그리스도가 세상 끝 날에 와서 즉위할 자리라고 합니다. 어좌 양옆에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시립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고, 바오로는 이방인들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둘 다 베드로를 지도자로 하는 교회를 구성합니다. 베드로의 후계자에 해당하는 식스토 3세가 이 성당을 지어 백성에게 바쳤습니다. 그래서 아치 꼭대기에는 로마 주교인 교황을 지칭하는 칭호, "하느님 백성의 주교"(EPISCOPUS PLEBI DEI)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교황 식스토 3세는 하느님의 백성을 천상 예루살렘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스스로 느낀 것입니다.
13세기에 와서
프란치스코회 출신 교황 니콜라스 4세는 대성당의 원래 압시스를 헐고 그 자리에 지금의 압시스를 건축하기로 정했습니다.
압시스의 장식은 프란치스코회 토리티(Jacopo Torriti)의 작품이며 콜론나 가문 출신 쟈코모와 피에트로 두 추기경이 후원한 것입니다. 토리티의 모자익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따로 시간을 내어 모자익을 감상하고 싶다면 잠시 녹음기를 머추고 가까이 가서 살펴보기 바랍니다.) 토리티는 압시스 천정에 커다랗게 "동정녀의 대관식"을 그려놓았습니다. 그 아래 띠에는 동정녀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차례로 엮어 두었습니다. 천장 한가운데 동그라미 속에는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동방에서 보는 장의자 형식의 어좌에 앉아 있고, 아들이 어머니의 머리에 보석으로 꾸며진 관을 씌워드리는 모습입니다. 모자익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그치지 않고 교회의 어머니이기도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배필(配匹)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표현입니다. 예수와 마리아의 발 밑에 그려진 동그라미 두 개는 해와 달을 나타냅니다.
천사들이 두 분을 에워싸고 경배하고 있고 성인들이 그려져 있는데, 왼편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조그맣게 그려진 교황 니콜라스 4세가 서 있고, 오른편에는 세례자 요한과 복음사가 요한, 성 안토니오와 조그맣게 그려진 콜론나 추기경이 서 있습니다. 그림 양끝의 나무기둥에서는 모자익의 전형적인 장식으로 가지들이 위로 뻗어 올라가 나머지 공간을 다 덮고 있습니다.
압시스 아래쪽 띠에는 성모의 생애가 좌우로 그려져 있는데 "성모의 대관식" 바로 밑에 "성모의 영면(永眠)"이 나옵니다. 이런 배치는 비잔틴 성화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는데 십자군 이후 서방에도 퍼졌습니다. 동정녀는 침상에 누워 있고 천사들은 사도들이 놀라는 가운데 그 몸을 들어올릴 태세이며 그리스도는 동정녀의 '하얀색 영혼'을 팔 안으로 맞아들이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토리티는 왼편에 자그마한 인물들을 그려놓고 있는데 프란치스코 회원 두 명과 붉은 베레모를 쓴 평신도 한 명이며 13세기의 복장 그대로입니다.
"성모의 영면"
밑에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리게 했는데 만치니(Mancini)라는 화가의
작품입니다. 모자익 아래의 이오니아식 기둥 사이에는 예수의 탄생, 한여름에 눈이 내린 기적, 리베리오 교황의 성전 기공식, 마리아 승천, 동방박사의 경배 등을 흰 대리석에 새긴 부조(浮彫)가 나오는데 미노(Mino del Reame)의 작품을 건축가 푸가(Fuga)가 이 자리에 설치한 것입니다.
중앙 제대 위의 덮개 역시 푸가가 세운 것입니다. (전문용어로 이 축조물을 천개(天蓋)라고 하며 이탈리아어로는 발다키노(baldacchino)라고 부릅니다) 중앙 제단 천개 앞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경당(콘페씨오[Confessio]라고 부릅니다)이 있는데, 비오 9세 교황이 추진하여 베스피냐니(Vespignani)가 세운 것입니다. 그곳에 내려가면 예수님이 태어나서 누었던 말구유의 유물이라고 전해오는 성물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수정으로 만든 말구유 모습의 유물함 속에 예수님이 태어나서 누었던 말구유의 조각으로 전해오는 나무 조각이 보입니다. 유물함을 제작한 것은 발라디예(Valadier)이고 포르투갈 대사가 기증한 것입니다. 이 좁은 공간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거대한 대리석상은 비오 9세의 석상으로 1854년에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가톨릭 교리로 선포한 인물입니다. 야코메티(Ignazio Jacometti)가 조각해서 레오 13세가 설치했습니다.
이쯤에서 성당 대문을 향하여 돌아서면 성당 정면 장미창문의 스테인글라스가 보입니다. 이 스테인글라스를 새로 제작한 것은 1995년 하이날(Giovanni Hajnal)이라는 화가였습니다. 거기에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마리아를 '시온의 딸'로 표명한 사건이 그려져 있습니다. 성모가 그림에서 십계명판과 일곱 촉대로 상징된 구약과 성작(聖酌)으로 표상된 신약을 한데 이어주는 고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성당 입구로 돌아가서 왼편부터 경당을 하나씩 방문합시다. 왼편 입구에 제일 가까운 경당은 바올로 체시(Paolo Emilio Cesi) 추기경과 아우 페데리코의 소원에 따라 건축된 것이어서 체시 경당이라고 부릅니다. 1560년경의 작품으로 설계 및 시공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경당은 바닥이 정사각형이고 장식이 풍부합니다. 벽에 그려진 벽화와 제단 위의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가타리나의 순교장면은 시춀란테(Gerolamo Siciolante)의 작품입니다. 이곳에는 성체가 현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체시 경당에서 나와 앞으로 조금 가면 대리석으로 된 성모자상이 나옵니다. 이 동상은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제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운 것이며 구이도 갈리(Guido Galli)의 작품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한 팔을 들고 있는 품은 더 이상 다른 전쟁이 일어나지 말라고 만류하는 모습이고, 아기 예수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왼편 아래에 있는 비둘기는 올리브 가지를 물고 세상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할 태세입니다.
경당 입구에 있는 벽감 안에는 이 경당이 대성당의 수석사제였던 스포르자 추기경(Guido Ascanio Sforza di Santafiora)과 그의 아우 추기경(Alessandro Sforza Cesarini) 덕분에 세워졌음을 알리는 석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1573년에 경당의 장식을 마무리한 것은 아우 추기경이었다고 합니다. 경당은 성녀 플로라와 루칠라에게 바쳐진 경당입니다. 정면 그림의 아래편에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경당의 건축은 원래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시작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특징이 나타나는 부분은 제대 위 높이 있는 사다리꼴 창문이며, 플로렌스에 있는 메디치 가문 경당들의 창문과 흡사합니다. 경당 공사를 마무리한 것은 칼카니(Tiberio Calcagni)와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이며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약간 변경하여 1575년에 경당을 완성하였습니다. 제단 위의 사각형판에 그려진 "성모 승천"은 시춀란테(Girolamo Siciolante)의 작품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체시 경당의 성녀 가타리나 순교일화도 이 화가가 그렸습니다.
보르지아 가문 출신 교황 바오로 5세는 1605년 폰지오(Flaminio Ponzio)가 설계한 이 경당의 건축을 허가하였습니다. 교황에 선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이 대성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당이며, 성모께 바쳐진 제대는 세계에서 감히 겨루는 제대가 없을 만큼 화려하게 꾸미라고 교황 친히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1612년에 성모 제단이 완성되었고 1613년 1월 27일에 대제대 위쪽에 자그마한 성모 성화가 안치되었는데 이 성모는 "로마 백성의 구원"(Salus Populi Romani)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성모 성화는 복음사가 루가가 그렸다고 하며, 로마시민들은 전통적으로 이 성화에 극진한 공경을 표해 왔습니다. 몇몇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서기 590년에 로마에 흑사병이 창궐할 적에 이 역병이 물러가게 해달라고 대그레고리오 교황이 행렬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모시고 간 성화상이 이 성모 성화였다고 합니다. 성모 성화와 경당을 꾸미는데 당시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이 초빙되었습니다. 조각가로는 모키(Mochi), 코르디예(Cordier), 마데르노(Maderno)가 불려왔는데 성모를 둘러싼 군상의 도금한 대리석 부조물은 마데르노의 작품입니다. 이 부조물 위에는 교황 리베리오가 이 언덕에 눈이 내린 경계에 따라서 성당부지를 밟아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그때 초빙되어 온 화가들 가운데서는 파씨냐노(Passignano), 치골리(Cigoli), 구이도 레니(Guido Reni), 아르피노(Cavalier d'Arpino) 등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당에 장식용으로 그려진 그림의 주제는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신앙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경당의 돔 천장에 그려진 벽화는 치골리가 남긴 유일한 벽화입니다. "원죄없이 잉태된 마리아가 열두 사도에 옹위되어 천사들의 영광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모의 발치에 있는 달이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달 표면의 분화구를 볼록볼록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천체를 관찰한 갈릴레오가 친구 화가 치골리에게 알려주어서 화가가 여기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는 중앙 제단 오른편으로 자리를 옮깁시다.
"고귀한 베르니니 가문이 여기서 부활을 기다리노라." 1600년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비석치고는 너무도 소박하여 사람들이 실망까지 합니다. 베르니니는 평생을 두고 역대 교황들의 뜻을 받들어 예술작업에 정진하였지만 작품마다 자기의 종교적 열성과 심원한 신앙을 쏟아 부었습니다.
딸 다섯과 아들 넷을 두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에게는 이 신앙심이 전수되었는지 이 대성당의 참사원 성직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베르니니가 죽은 것은 1680년 9월 28일이었으며, 나이 82세에 교황의 축복을 받고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베르니니의 무덤을 손질하는 공사 중에 조각가가 평소에 지니고 다니던 조각칼(spadino)이 발굴되어 지금은 대성당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꼭 방문할 만합니다.
로드리게즈(Consalvo Rodriguez) 추기경의 묘소는 현존하는 가장 우아한 중세 묘소로 꼽히며, 조각가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13세기 대리석 조각에 끼친 막강한 영향력을 잘 보여줍니다. 무덤은 디 코스마(Giovanni di Cosma)가 설계한 것이고, 무덤을 장식한 모자익에는 동정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성 마태오와 성 예로니모 사이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경당을 신축한 것은 식스토 5세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은 신임하던 건축가 폰타나(Domenico Fontana)에게 명을 내려, 성체를 모시면서도 말구유 조각군을 모신 지하경당도 함께 덮도록 배치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경당을 장식하는 성화들은 그리스도의 조상들, 성모의 일생, 예수의 일생을 묘사하고 있고, 제단 밑에 말구유 조각군을 모신 지하경당을 건물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대 밑의 지하경당은 13세기에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제작한 "말구유의 오라토리오"를 포함하고 있는데 원래 대성당 압시스에 있던 것을 건축가 폰타나가 통째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면 이 지하경당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지하경당을 뒤로 돌면 유리벽 안에 오래된 대리석 조각상들이 예수 탄생 장면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식스토 경당의 그림들은 성모의 승리를 경축하는 내용인데, 트렌토 공의회 전후해서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거부하던 이단을 이기고 승리한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 예술 작업은 궤르라(Cesare Guerra)와 네비아(Giovanni Nebbia)가 기획하였고 화가들의 개성의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식스토 5세 교황은 이 경당에 자기 묘소를 마련하였고, 자기를 추기경으로 서임해 준 성 비오 5세의 묘소도 준공하였습니다.
식스토 5세의 무덤은 경당 오른편 벽에 있고 피오 5세의 무덤은 왼편에 보입니다. 경당 한가운데에 있는 제단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도금된 구리로 만들어진 네 명의 천사는 실물 크기이며 토레지아니(Sebastiano Torregiani)의 작품입니다. 천사들이 떠받치고 있는 감실은 이 경당의 모습을 그대로 축소한 형태입니다. 감실 역시 예언자와 천사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대문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경당은 매우 아름다운 나무 십자가를 모시고 있는데 15세기 초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입니다. 이 경당을 유해(遺骸) 경당이라고도 부르는데 여러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기 때문입니다. 유해의 상당수가 지금은 대성당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1862년에 이 대성당은 지역 신도들의 본당(本堂)이라는 자격도 부여되었으며, 그 기회에 대성당의 겨울 합창석이 세례당으로 바뀌었는데 발라디예(Valadier)가 작업한 것입니다. 세례조는 고대 술잔 모양의 반암(盤岩)에다 설화석고를 얹어 장식하였습니다. 세례조 위에는 세례자의 구리 동상이 있고 아기 천사들이 부채살 모양의 꽃대 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 조각군 전체가 발라디예의 설계에 따라서 금세공인 스파냐(Giuseppe Spagna)가 만든 것입니다. 제단 위의 흰 대리석 부조물은 성모 승천을 새긴 것으로 피에트로 베르니니(Pietro Bernini)의 작품입니다. 원래는 보르지아 경당 외부에 안치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더 위에 있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를 그린 캔버스 그림으로 뒤에 창문이 있어서 뒤편에서 조명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세례조를 막은 철책 왼편 기둥 안에는 교황 하드리아노 2세가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도록 윤허한 사건을 기념하는 부조물이 왼편 벽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 형제는 최초로 성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한 인물들입니다. 교황은 고대슬라브어 도서들을 이 대성당에 소장시키도록 명령하였고, 슬라브어로 최초의 미사가 거행된 것도 이 성당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성당 제의실로 통하는 나무문이 있고 반대편에는 성 미카엘 경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이 경당은 본래 성 미카엘과 "사슬에 묶인 성 베드로"에게 봉헌되었던 경당이었습니다. 1400년 이 대성당의 수석사제였던 데스투트빌(d'Estouteville) 추기경이 전에 있던 소경당을 수리하여 천장 한가운데에 자기 문장을 설치하였습니다. 천장 벽화에 일부가 남은 네 명의 복음사가는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왼편 구석 천장에 "천사들의 부축을 받아 무덤에서 일어서는 그리스도"의 상은 고쫄리(Benozzo Gozzoli)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들어오는 문 위의 "용과 싸우는 성 미카엘" 벽화의 초벌 그림도 고쫄리의 것입니다. 바닥에 있는 코스마 대리석 장식은 1400년대의 것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