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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한창 위세를 부리던 70년대 어느 날 전주에서 하루를 묵었다 합니다.
이튿날 새벽 지난밤의 술로 헝크러진 속을 풀려고 경호원을 시켜 전주에서 유명하다는 콩나물
해장국집에 전화를 걸어 해장국을 배달해달랬다 합니다. 그러나 배달 대신 “술 처먹었으면
직접 와서 뜨끈뜨근한 해장국을 먹어야지, 어떤 시러배놈이 배달해달라는 거야!” 욕만 한
사발 먹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박정희가 직접 와서 해장국을 시켜 훌훌 맛있게
먹는데, 그것을 보고는 욕쟁이 할머니 왈 “박정희같이 생긴 놈이 잘도 처먹는다. 이젠 속
풀렸지?”라고 했다나.
‘박정희가 욕 한 사발과 같이 먹었다’는 해장국은 뚝배기에 콩나물국을 팔팔 끓이고 여기에
날계란을 풀어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는 ‘삼백집식’입니다.
삼백집에서 콩나물국밥 먹고 전주 한옥마을로 갔습니다.
2017년 기준 연 1,10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전주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근대식 한옥들을 짓기 시작
하면서 발전했습니다.
전주에 처음 들어온 일본인은 1897년 이노우에 쇼타로(井上正太郞)와 모리나가 신소
(守永新三)라는 야마구치 현 출신의 두 형제가 들어왔던 것이 최초입니다. 일본 옷을 입고
전주에 나타난 이들을 보고 개들이 울부짖었고 동네 사람과 꼬마들이 줄줄이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이렇게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주로 잡화상이나 매약상으로 활동하며
말라리아약, 회충약, 사탕, 과자, 거울, 석유, 램프 등을 취급했습니다. 당시 외국인은
성내에 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좌판을 벌려서도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서문시장과 남문시장에서 행상을 하였습니다.
을사늑약(1905년)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습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 안과 성 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도로(全群道路)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되었고, 1911년 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
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습니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을 점거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30년대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시가지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확장되면서, 서문 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뜻있는 선비들과 주민들이 조상의 얼이 스민 오목대와 이목대, 한벽당이
굽어보고 있는 풍남문 동쪽에 집단으로 한옥을 건립하고 마을을 건설했습니다. 이렇듯 고고한
선비정신이 깃든 한옥마을은 해방 이후인 1960-70년대 전주의 명문학교들이 모여있는
교육의 거점 역할을 했으며 전주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중앙초, 성심여중고, 전주여고, 북중
학교, 전주고등학교, 전주공업전문학교 등 학교기관들이 대거 위치했습니다. 지방의 지주들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풍남동 일대에 집을 사고, 지방에서 전주 유학을 온 학생들은 한옥마을
에서 자취나 하숙을 하며 수학했습니다. 당시 남자들은 북중학교를 거쳐 전주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엘리트 코스였고 여자들은 전주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근대 도시형 한옥들로 형성된 전주 한옥마을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부촌이었습니다.
문화연필, 백양메리야쓰 같은 유명 기업이 한옥마을에 자리했습니다. 문화연필은 우리나라
에서 두 번째로 생긴 연필 공장으로 1949년 전주시 완산구 교동 79번지에서 창업하여 1978년
팔복동으로 이전하기까지 한옥마을에 자리했으며, 1950년대 이후 내의류업체 BYC의 옛
상표인 백양메리야쓰를 제조하던 생산시설이 1980년대까지 이곳 한옥마을에 위치했습니다.
그러나 제조업이 도심 외곽으로 이전하고, 점차 주거 환경이 변화하면서 한옥마을은 퇴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면서 한옥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마을은
급격히 공동화(空洞化)되기 시작했습니다. 집이 무너져도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없는 극심한
규제 속에 주민 반발이 높아졌습니다. 1987년 전주시는 한옥보존지구를 ‘제4종 미관지구’로
변경하고 건축규제를 완화했습니다. 10년 후인 1997년, 미관지구가 폐지되면서 법적 규제가
사라짐에 따라, 양옥이 다수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건설경기불황과 IMF 여파로 신규 가옥이
많이 지어지지는 않아, 크게 훼손되지 않고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996년 대한민국이 한일월드컵을 유치하고 이듬해 전주가 개최도시로 선정되면서 한옥마을
은 다시 한 번 꿈틀거리게 됩니다. 한옥마을 보존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99년 전통문화
특구 기본 및 사업계획이 작성되었습니다. 세계인이 전주를 찾아올 때를 대비해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보여줌으로써 전통문화도시 전주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자는 의도였습니다. 보기
좋은 한옥들과 다양한 체험시설이 늘어나고 은행로에 실개천이 놓이는 등 크고 작은 변화를
거치면서 전주 한옥마을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2010년 전주는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세계 최초 도시형 국제슬로시티로 선정되었고,
2016년 재지정되었습니다. 또한 2012년 유네스코 음식 창의 도시로 선정되었고, 2016년
론리플래닛이 선정한 ‘1년 안에 가봐야 할 아시아 10대 명소’에 3위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전주한옥마을은 2014년 이후 해마다 국내 관광지 최상위에 올랐습니다.
전주한옥마을은 국제적인 문화관광의 명소가 되어 한 해 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국제적인 문화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지리산의 정령치는 지리산과 덕유산을 잊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자 바래봉으로 가는 철쭉
산행의 출발지입니다. 해발 1,172m입니다.
정령치에서 본 지리산 봉우리입니다.
정령치 매점에서 산악지도 스카프를 팝니다.
차를 파킹하고 노고단을 향해 걸어갑니다. 단풍이 익어가려고 준비중에 있습니다.
지리산하면 625사변 이후의 빨치산이 생각납니다. 조선인민유격대(朝鮮人民遊擊隊)는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영역에서 유격전을 수행한 북한의 파르티잔 빨치산이라고 부르며, 남부군, 공비, 공산 게릴라라는 표현도 사용되었습니다.
적의 총탄보다 더 무서운 게 내부 권력투쟁입니다. 6·25전쟁 중 남한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들은 이를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당장 자신들부터 구빨치와 신빨치로 나뉘어 소모적인 노선
투쟁을 벌였고, 북한 정권이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를 축출하면서 ‘조국’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는 운명이 됐습니다. 그 와중에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2개 군단의 막강 전력이
대대적인 지리산 토벌에 나서자 총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을 ‘세 가지 각오’를 했다는
빨치산들도 궤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빨치산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전쟁 전부터 좌익활동을 하던 속칭 구빨치,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서 낙오한 인민군들과 북한 점령하에서 공산당에 협력한 사람들로 구성된 신빨치가
그들입니다. 빨치산 부대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에서
직접 파견한 이현상의 독립제4지대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별로 조직된 도당 유격대입니다.
두 종류의 빨치산 부대는 전쟁 휴전을 앞두고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현상은
남로당 대남총책 이승엽으로부터 직접 임명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워 전체 빨치산을 통괄하려
했는데 박영발과 방준표는 순순히 그의 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방준표와
박영발도 본래는 남로당 출신이지만 북한군이 호남 일대를 점령했을 때 북로당에 의해 각각
전북도당과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북로당과 직접 선이 닿아 있었다고 합니다.
노고단에 가면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하여야 한다는 차문성이 말을 듣고 할머니랑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지리산(智異山)은 대한민국의 경상남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에 걸쳐있는 산백두대간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렸습니다.
7,500여종의 식물과 동물이 서식하여 있고 천왕봉 1967년12월29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
공원 지리산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이에 따른 고찰이 많고, 근.현대 문화재도
많이 남아 있는 중요한 산입니다.
서산대사의 횡령암기에는 반야봉 좌우의 두 봉우리인 황령과 정령에 한나라 소제 3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하여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고 고개의 이름을 두 장수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되지 않지만 달궁 계곡
근처에 이 기록을 뒷바침해 주는 지명들이 구전되어 내려옵니다. 지리산은 쫓겨온 자들의
땅이었습니다. 항일의병, 동학혁명군, 항일빨치산, 한국전쟁의 빨치산도 이곳에 몸을 숨겼습니다
최고 높이는 1,916.77m (천왕봉)이다. 산이 차지하는 총면적은 483.022 km²(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이며, 둘레는 320 km에 달합니다.
멀리보이는 운해(雲海)가 산을 휘감고 있습니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습니다. 칠선계곡, 한신계곡, 뱀사골, 피아골, 한수골, 도장골, 목동골,
대성골함양과 산청으로 흐르고 또 하나는 마이산에서 흘러온 물을 만나 섬진강이 됩니다.
뱀사골 계곡의 폭포가 있는 곳은 국내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밑으로 내려가면 화엄사가 되는데 길이 험하다고 합니다.
무넹기에서
무넹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멀리보이는 산과 산과 산사이에 구름이 끼어있습니다.
여기부터 아래사진은 펌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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