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8. 주일예배설교
베드로전서 5장 5~11절
신앙의 가늠자인 ‘순종’과 ‘겸손’의 위력
■ 태도를 천성에 근거한 성품의 표출로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덜렁댄다든가, 급하다든가, 예의 없다든가, 말이 없다든가, 차분하다든가 하는 등의 태도들이 다 성품이라고 이해합니다. 요즘 대화에 한 번쯤은 등장하는 MBTI의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천성에 근거한 성품이 태도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태도를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마찬가지로 성품도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의 태도와 성품의 변화에 대해 권면하고 지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변화할 수 없는데,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성품에 의한 태도, 태도를 통해 보는 성품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품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이 변할 수 있습니다. 변해야 한다면, 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의 손길이 닿으면 당연히 변할 수 있습니다. 마음, 정신, 몸, 성품, 뇌 등 모든 것이 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손의 힘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는 데는, 오늘 본문이 “순종”과 “겸손”의 삶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5절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이해하시다시피,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과 “겸손”을 요구하십니다. 만약 “순종”과 “겸손”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성품에 관계되어 있다면, 결코 이를 요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성품/성격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구하셨다는 것은, 성품이든 태도이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고, 더욱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변화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당위성까지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순종”과 “겸손”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요 영향력이기에 “순종”과 “겸손”을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 우리는 5절에서 “순종”과 “겸손”이 함께 하고 있고, “교만”과 “겸손”이 대척 관계임을 봅니다. “순종”과 “겸손”은 교회와 하나님께 인정받는 태도인데, “교만”은 하나님의 대적을 받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교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겸손”보다는 “교만”의 태도를 부러워하고 닮으려 합니다. 이유인즉, 으스대고 싶고, 중심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배자처럼, 정복자처럼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심이 되어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을 통해 으쓱대는 태도가 “교만”입니다. 그러니 만물의 중심이시고, 통치자이신 주님이 이런 “교만”에 은혜를 베풀어 주실 리가 없습니다. “교만”은 주님의 자리를 넘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교만”은 마귀의 먹잇감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수하에서 온갖 어둠의 일을 생산해 낼 뿐입니다. 그러니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그 결국이 필패(必敗)요 필망(必亡)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과는 달리,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는 ‘때가 되면 높여주시는 은혜’와 ‘돌보아 주시는 은혜’입니다. 6~7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그런데 혹시 5~6절의 모든 내용을 “겸손”에 연결해서 해석하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실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각각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이 “순종”을 낳고, “겸손”이 “염려를 맡기는 삶”을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5절이 설명하는 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의 힘은 다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에 모든 것을 맡겼으니 염려 또한 당연히 맡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늠자는 “순종”과 “겸손”이지만, “순종”은 “겸손”이 나타내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무엇보다 우선 구비 해야 할 태도는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인다움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성품이 “겸손”을 향해 변화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 그런데 “겸손”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겸손”을 ‘무저항’과 ‘무기력’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저항하지 않는 태도이고, 힘없는 태도라고 이해합니다. 아닙니다. 이는 오해입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기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나대지 않는 것이지, 줏대가 없거나 비주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9절입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여기서 “그”는 8절에서 말한 ‘훼방자 마귀’입니다. 이 훼방자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은 “겸손”이 무저항과 무기력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정의와 사랑을 파괴하고 훼방하는 것들에 맞서는 믿음입니다.
단, ‘예의를 갖춘 거룩한 당당함’이고, ‘격식 갖춘 자기 주장’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춘 당당함이 거룩한 당당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어긋나지 않는 자기 주장을 하되 격식을 갖춘 예의 바른 태도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렇기에 “겸손”은 ‘거룩한 긍정성’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세계관과 가치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여기에 6~7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의미가 보다 정확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6~7절에서 두 가지를 확인합니다. ‘때가 되면 높여주시는 은혜’와 ‘돌보아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10절에서의 ‘온전하게 하시는 은혜’, ‘굳건하게 하시는 은혜’, ‘강하게 하시는 은혜’, 그리고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은혜’와 합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들의 교집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완벽한 붙드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붙드시고 챙기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염려든 다 주께 맡기는 믿음이 생깁니다. 잠깐 고난을 당하겠지만, 이 고난이 영원하지 않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훼방자 마귀에 의해 삶이 훼방을 받기도 하겠지만, 터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믿음 아래 나타나는 태도가 겸손이니, “겸손”은 ‘거룩한 긍정성’의 태도입니다. 사실 믿음의 삶을 훼방하는 것 중 하나가 부정적 태도입니다. 겸손으로서의 ‘나는 할 수 없다’가 아니라, 자포자기로서의 ‘나는 할 수 없다’는 태도는 부정적인 태도이자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자기 비관인 ‘나는 늘 왜 이 모양이지?’라는 자책은 결코 겸손이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또 일어나는 거야?’라며 분노하고 억울해하는 것은 결코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신앙적 겸손, 즉 주님이 원하시는 태도는 ‘거룩한 긍정성’입니다. 삶에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단지 지금 나에게 일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일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답이 없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도, 그분에게는 답이 있고, 탈출구 또한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답이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긍정성’인 “겸손”은 고난이나 어려움을 어둡게 이해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결코 9절과 10절을 놓치지 않습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 그러므로 “겸손”은 웃음을 떠나보내지 않습니다. 감사를 놓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행복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행복을 안기는 “겸손”이 여러분의 삶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대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절의 권면대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삶, 겸손의 옷을 입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늘 웃음과 감사와 기도가 넘치는 여러분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