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공포
질문자 :
어떻게 하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읍니까?.
마하리쉬 :
죽음을 생각하기 전에
그대가
과연 태어났는지를
알아내십시오.
태어난 자만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대는 잠 속에서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무슨 죽음의 공포가 있습니까?
질문자 :
잠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있습니까?
마하리쉬 :
잠 속에서
그 질문을 하십시오.
그대는 깨어 있을 때만
잠의 경험을 회상합니다.
그 상태를 회상하면서
'나는 행복하게 잤다"고 말하지요.
질문자 :
우리가 그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도구(마음의 기능)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우리는 그것을
마야기관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다른 상태들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내적 기관에 상대됩니다.
같은 도구가
다른 상태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잠의 지복아(至福我) 조차도
생시상태에서는
명지아(明知我)로 불리니 말입니다.
질문자 :
지복을 경험하는 마야 기관에 대하여
어떤 비유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마하리쉬 :
그대는 어떻게 해서
"나는 행복하게 잤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대가 행복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그 경험자가 있어야 합니다.
잠의 상태에서 하는 그런 경험이 없는
생시 상태에서는,
그런 기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질문자 :
동의합니다.
그러나 부디
어떤 비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마하리쉬 :
그것을
어떻게 묘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대가
잊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하여
물속에 뒤어 들었다면,
물에서 솟구쳐 나온 뒤에야
그것을 찾았노라고 말할 수 있지요.
물 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질문자 :
잠들어 있을 때는
두려움이 없는데,
지금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하리쉬 :
"두 번째 것(대상)이 있기에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두려워 합니까?
질문자 :
몸, 감각기관, 세계,
이스와라, 행위자, 향유 등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마하리쉬 :
그런 것들이
두려움을 야기한다면
그것들은 왜 봅니까?
질문자 :
피할 수 없으니까요.
마하리쉬 :
그러나
그것들을 보는 것은
그대입니다.
그 두려움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것들에게 있습니까?
질문자 :
아니요, 저에게 있습니다.
마하리쉬 :
그대가
그것들을 보기 때문에
그것들을 두려워합니다.
그것들을 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아무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질문자 :
그러면
생시의 상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
자기(참나)가 되십시오.
그러면
두려움을 야기할
그 어떤 두번째 것(대상들)도
없을 것입니다.
질문자 :
예, 이제 이해합니다.
만일 저의 진아를 보면
제 시선이
비아를 보지 않게 되고,
행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하리쉬 :
태어난 사람만이 죽게 됩니다.
죽음이 그대를 위협한다면,
그대가
과연 태어났는지를
살펴 보십시오.
ㅡ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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