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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
평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일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신경세포가 그 방향으로 열리면 사사로운 우연에도 의심을 품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게 된다. 예컨데, 찢어진 눈이네 라고 누군가 지적했다면 그 순간부터 남의 시선을 느끼면 그들이 자신의 눈만 바라보는 것 같이 느껴지듯이.
나는 회사 근처로 찾아 온 민주와 설렁탕을 먹고 있다가 문득 통유리 밖을 쳐다보았다.
민주는 대학시절부터 사귄 캠퍼스커플로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취직이 된 지금까지 한결 같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 누군가에게 노출되는 것을 나는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맛 있는 설렁탕집이 있다며 회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으로 데리고 올 때부터 난 내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막연한 두려움을 무시하기엔 꺼림칙한 무엇이 내 안에서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식당 통유리 밖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정겨운 일반인들의 모습뿐이었다. 내가 보게 될 것을 걱정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난 불쑥불쑥 찾아드는 꺼림칙한 기분을 물리쳤을 때처럼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이라고 자위하며 내심 안도했다.
‘그래, 우연이었어.’
나는 어느새 뻣뻣해져 있는 목덜미를 주무른 후 평온을 찾은 마음으로 민주에게 충실했다. 푸른색 원피스로 날씬한 몸을 감싼 민주는 마음도 얼굴도 예뼜다. 난 그녀를 잃는 것은 내 전부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와 올 가을 결혼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럽게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년으로 연기한 상태였다.
민주와 잡다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며 설렁탕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불안이 불필요할 수도 있는 이동을 요구해 먼 곳까지 와 점심을 먹은 거였지만, 민주가 오랜만에 맛 있게 먹은 점심이었다고 좋아해, 서둘러 직장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녀를 보는 내 마음의 안쓰러움이 좀 가셨다.
내가 카드로 계산을 하고 영수증에 사인을 하는 동안 민주는 껌을 집어 포장지를 까고 있었다. 그녀가 내 입에 껌을 넣어 주었고, 난 질겅질겅 씹으며 카운터에서 카드를 건네 받았다. 그 때, 옆얼굴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익숙한 그 시선에 난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의 시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카드를 건네받던 내 손이 움찔하면서 카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란 심장이 벌렁거렸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카드를 집어 들고 허리를 편 순간, 그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여자는 출입 밖에서 유리문에 붙은 메뉴들을 유심히 읽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이 보면 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까로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늘 그랬었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돌아보면 그 여잔 나와 하등의 상관없는 것처럼 딴청을 피웠다. 벌써 한 달째였다. 매일 점심 시간이면 나의 주변에 그 여자가 있었다.
난 민주보다 앞서 식당을 나와 멍청한 표정으로 식당 안을 기웃거리는 그 여자를 스쳐 지났다. 제발 내 주변에 나타나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이 구는데, 애원을 한들 과민 증상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총총히 따라 온 민주가 나의 이상한 행동을 캐물었지만, 난 카드를 떨어뜨린 것과 수 십 미터를 앞선 후에 비로소 걸음을 늦추고 민주가 따라오기를 기다린 것에 대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해 주었다. 민주는 나의 어줍짢은 변명에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으나 자기의 행동 중에 나를 화나게 하는 구석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기색이었다.
나와 민주가 동행이 아니었다고 믿기를 바라는 나의 황당한 짓은 그 여자가 발산하고 있는 음침한 공포 때문이었다. 꺾어진 길 뒤쪽으로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만일 그 여자가 젊은 아가씨였다면 민주는 나를 의심했을지 모른다.
사십대 초반의 그 여자는 곱슬퍼머였는데, 머리를 감지 않고 사는 듯 매번 뒷머리가 눌러지고 뻗쳐 있었다. 가느다란 눈과 납작코에 길죽한 얼굴. 화장기 없는 그 얼굴엔 흩뿌려놓은 듯한 주근깨가 널려 있었다. 헐렁한 청바지는 남의 것을 입은 것 같고, 짙은 색 셔츠는 기장이 길어 엉덩이 반을 덮고 있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거리의 노숙자 같은 여자였지만, 멍청해 보일 정도로 표정이 없는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면 섬뜩한 냉기와 소름 끼치는 조소가 머리를 쭈뼛 서게 한다.
수퍼아줌마에게 진이엄마로 불리는 그 여자는 우리 집 바로 옆 집에서 살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룬 곳에 집들이 성냥갑처럼 얹혀 있는 동네에 난 살고 있다. 소위 달동네라고 하는 지역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서민들의 터전이었다. 그런 동네의 주민들은 이웃간의 정이 두터운 편이다. 일부러 음식을 많이 해 이웃들에 나눠 주며 화목하게 지낸다.
그토록 삭막함과는 거리가 먼 우리 동네 주민들에게 기피하는 인물이 생긴 것은 그 여자가 이사 오고부터였다. 그녀는 다가가는 친절에 무안함을 안겨 주었고, 자기 신변이나 일상에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불쾌해 했다. 음식을 나눠 주려고 대문이라도 노크하면 자기가 거지인 줄 아냐고 면박을 주며 대문이 부서줘라 닫아 잠궜다.
점차 주민들은 골목이나 거리에서 여자를 보면 기본적인 인사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차가운 여자라는 인상과 어딘가 모자란 여자라는 평이 나돌았다. 그렇게 재수없다 라는 수식어로 불리게 된 여자는 남편과 진이라는 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는데, 아무도 여자의 남편과 진이 라는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진이 라는 아이가 사내아이인지 계집아이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세 사람이 산다는 여자의 집을 들락거리는 것은 오로지 그 여자 혼자뿐이어서 이혼이나 별거 중일 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고, 미력하나마 불쌍한 여자일 거라는 동정 여론이 꿈틀거렸다.
여자의 집엔 덩치가 큰 잡종 개 한 마리가 마당에서 키워지고 있었는데, 그 놈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짖어대는 골치덩이였다. 그 여자 집 앞을 지나며 웃음을 터트리거나 어디선가 삼겹살 굽는 냄새가 솔솔 풍기거나 이웃간에 모여 얘기꽃을 피우는 날이면 참기 힘들 정도로 시끄럽게 짖어댔다. 자연스럽게 이웃들의 원성이 높아져 갔고, 그 집에 대고 함부로 말을 해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개 짖는 소리를 멈추게 하라는 울분의 소리는 몇 배의 소음으로 동네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그런 날이면 마치 녹음기라도 틀어 놓은 듯 밤늦도록 개의 컹컹 대는 소리는 멈출 기세가 없었다. 여자가 막대기로 개를 때려 짖게 한다는 추측이 나올만 했다.
어느 날 그녀의 앞 집, 강씨 아저씨 집에 중요한 손님들이 방문을 했다. 소규모 공장을 운영하는 아저씨는 손맛이 일품인 부인의 음식 솜씨로 거래처 사장들을 대접하기 위해 초대를 한 것이었다. 아저씨는 초대객들이 도착하기 전에 여자의 집 대문을 노크했다. 그는 누런 눈곱을 떼지도 않은 채 나온 지저분한 행색의 여자를 보며 역겨움을 느꼈지만, 초대한 분들이 조용한 환경에서 음식을 먹고 놀다 가기를 간구했다.
아저씨는 손님들이 머물 동안만이라도 개가 짖지 않게 해 줄 것을 부탁하고 개가 좋아할 뼈다귀 고기를 한 봉지 건넸다. 그는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말을 하고 있었으나, 여자의 냉소적인 얼굴엔 미묘한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아저씨는 얘기의 말미에 접어들자,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여자는 묵직한 비닐봉지를 깔보듯 쳐다보며 입꼬리를 틀었다. 온몸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아저씨는 서둘러 가져간 봉지를 대문 안쪽에 내려놓았다. 한시라도 빨리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저씨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면서 어깨너머를 흘깃 돌아보았다. 돌아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가 대문을 쾅! 하고 세차게 닫았다. 그러나 뼈다귀 봉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아저씨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들이 도착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개는 짖지 않았다. 그러나 아저씨는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 불안했다. 거칠게 문을 닫던 여자에게서 미지의 분노를 전달받은 기분이었다. 역시나 불안은 불안으로 그치지 않았다.
콰당! 갑자기 대문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올 것이 왔다! 아저씨는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 걸음에 밖으로 뛰쳐 나간 아저씨는 눈앞의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국물을 질질 흘리며 뼈다귀가 나뒹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잠하던 개가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인사불성으로 치닫는 분노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차마 손님들 앞에서 이성을 잃을 수는 없었다.
손님들이 돌아가자 아저씨는 작정하고 여자의 집 대문을 쾅 쾅 쳤다. 성질 같아서는 때려 부셔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면 한켠엔 미지의 두려움이 바늘처럼 콕콕 찔려오는 기분이었다. 동네 주민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더니, 그의 주변으로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아저씨는 든든한 지원병들에게 둘러싸인 것 같았다. 궁중심리가 더해진 때문일까. 아저씨는 기세등등하게 여자에게 엄포를 놓았다. 한 번만 더 개가 짖는 날엔 그 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여자는 겁을 집어 먹었는지 내다보지도 개를 짖게 하지도 않았다. 주민들의 얼굴에 전투에서 승리한 듯한 희열이 감돌았다. 아저씨는 울분이 눈 녹듯 사라지고 어떤 쾌감마져 느껴졌다. 그 날 밤 이웃들은 두다리 뻗고 숙면을 취했다.
다음 날 아침에 동네 아래쪽 어귀에서 순찰차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가 올라올 수 없는 비탈진 골목길을 걸어 올라오며 경찰들의 얼굴엔 짜증이 역력했다. 그들은 여자의 집 앞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바꾸고 그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 날 오후에 앞집 아저씨는 개를 살해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개의 사체 주변에 뼈다귀 몇 개가 발견되었는데, 다량의 농약 성분이 검출되었다. 아저씨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벌금형에 처해졌고, 주민들은 아저씨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담장 너머로 독국물을 첨가한 뼈다귀를 던졌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무도 아저씨의 짓을 비난하지 않았다. 덕분에 동네는 조용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동네 사람들은 아저씨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의 실천이 사람들을 두렵게 한 것일까. 아저씨는 몇 달 후 이사를 가버렸다.
난 그 무렵에 군 복무 중이어서 제대 후에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귀동냥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자기의 입으로 옆집 여자 얘기 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난 할머니의 너그럽고 인자한 성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개가 죽고 나자 고양이들을 사와 기르고 있었다. 개보다 낫다고 안도했던 주민들은 오래 걸리지 않아 그 생각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개가 짖어대며 소란을 피웠다면, 풀어놓고 키우는 고양이들은 동네 여기저기에서 예기지 않은 순간에 튀어나와 놀래켰을 뿐만 아니라 야밤에 우는 소리는 아기 울음소리 같아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곤 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고양이가 침입하기라도 하면 소리나 도구를 이용해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몸짓만으로 몰아냈다. 난 옆집 여자를 의식할 이유가 없었음으로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재미 있었다.
난 어려서부터 고양이를 좋아한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나도 고양이가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과 여자의 집의 경계를 이루는 높은 담장 위에 검은 고양이들이 뻔질나게 올라와 쪼그리거나 엎드려 있었는데, 밤중에 갈증이 나 수도꼭지가 있는 마당으로 나오다가 불현듯 그러고 있는 놈들을 보노라면 등골이 오싹해 지며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귀엽게만 보였던 고양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몸집이 불어난 까닭일까.
난 학교 졸업 후 군대에 갔다. 고참 시절에 틈틈이 책을 볼 수 있긴 했었지만 대기업 입사 시험에 응시할만한 실력은 아니었음으로 유망한 중소기업에 응시해 합격했다. 제대 후 두 달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그 무렵에 동네 아이 하나가 실종되었다.
돌을 갓 지난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29살의 새댁은 아래동네에서 살았는데, 아이가 잠을 든 틈을 타 잠깐 분유를 사러 집을 비웠다고 한다. 수퍼에서 돌아와보니 새근거리며 자고 있던 아이는 온데간데 없었다고 한다. 수퍼가 가까운 곳에 있어 대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동네가 발각 뒤집혔고, 경찰들의 탐문 수사가 이루어졌다. 대낮에 일어난 유아 납치 사건이었지만 목격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난 회사 업무가 밀려 야근을 하고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무조건적으로 반갑게 날 맞아주는 평소와는 다르게 날 보자 쉿! 하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난 할머니가 왜 그러는지 금방 알았다. 할머니는 옆집 담장에 귀를 바짝 대고 염탐하고 있는 중이었다.
난 나지막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손짓으로 날 불렀다. 난 담장에 다가가 할머니처럼 벽에 귀를 들이댔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얼핏 들었을 때 그 소리는 고양이 울음소리 같았다. 그러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자세히 들어보자 그 소리는 어린아이가 칭얼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난 할머니가 왜 남의 집을 염탐하고 있는지 일순 깨달았다. 머릿속으로 아래동네에서 실종되었다는 어린아이가 스쳐갔다. 옆집에서 그 여자의 소리나 기척 외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어떤 낌새도 없었던 집이었음으로, 단박에 의심을 가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난 어떤 정의감과 등골이 오싹해 지는 공포감으로 전율했다. 내 청각을 신뢰하기 위해 난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간간히 들리는 어린아이의 낮은 칭얼거림 사이로 여자가 아이를 어루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가 자신의 추정에 동의하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확신이 서지 않아 내가 올 때까지 그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심증을 보완해 줄 방법이 절실했다. 그 다음에 신고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난 창고에서 사다리를 꺼내와 옆집에 들키지 않게 신중을 기해 담장에 세웠다. 사다리를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담장 꼭대기에 다다르자 난 숨을 들이쉬었다. 달이 없는 밤이었지만 골목의 보안등의 불빛은 희미하게 우리집 마당과 옆집 마당에 새어 들었다. 사다리에 올라 선 내 그림자가 열평남짓한 크기의 우리 집 마당에 길게 누워 있었고, 할머니는 목이 타는지 바가지에 물을 퍼서 들이키고 있었다. 난 할머니의 바가지를 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막연한 공포심에 젖은 나보다 심하게 겁을 집어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눈 아래 부분을 감춘 내 시야에 옆집의 마당이 들어왔다. 마당에 시벤트가 발라진 우리 집과 다르게 여자의 집은 마당의 디긋[ㄷ] 자형 가장자리에 빙둘러 한 평 크기의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곳에 일미터 남짓한 수목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손질을 안해서 어른 무릎 높이의 잡초들이 우거져 있었다. 잡초들은 흙바닥인 마당에서도 자라고 있었는데, 여자의 발길이 잦은 곳이 수돗가를 중심으로 대문과 마루로 이어진 일부 공간임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서울에 저런 집이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여자가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마당을 서성이고 있는 광경을 그렸었다. 젠장, 그 사이에 집안으로 들어간 모양이군. 난 허탈감이 밀려왔다.
마당의 그늘진 곳에 시꺼먼 물체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십여 마리에 이르는 고양이들이 집을 지키고 있는 십여 마리의 사나운 개들처럼 비춰졌다. 난 놈들이 날 발견하고 한꺼번에 공격해 오는 상상을 했다.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난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내 눈으로 여자와 아이를 목격해야 신고를 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가 사다리를 꺼내려는 나를 만류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오인이었을 경우에 여자가 어떤 식으로든 보복해 올 것이라는 우려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생겨났던 것이다.
주민들은 아저씨가 이사를 간 후에서야 여자의 자작극이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억울함을 호소한 마지막 수단으로 아저씨는 이사를 갔을지 모른다고.
어느 순간 여자의 실루엣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방심하고 있던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루의 문이 열리고, 초라한 행색의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난 숨을 삼켰다. 여자의 등이 불룩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여자는 아이를 보자기로 둘러매 업고 있었다. 그녀는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마당을 서성거렸다. 불빛에 닿은 지점에 여자가 지나갈 때 난 그녀의 등에서 아이의 새까만 머리털을 목격했다. 아이는 여자의 등에 바짝 엎드려 잠을 청한 듯이 보였다.
난 할머니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예상이 들어맞자 큰 충격을 입은 듯이 휘청했다. 그 바람에 할머니 손에 있던 바가지가 양은 세수대야 위에 떨어졌다. 바가지와 세수대야가 요란하게 콘크리트 바닥을 나뒹굴었다.
난 깜짝 놀라며 급히 몸을 숨겼다. 아주 잽싼 행동이었고, 난 여자가 나를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난 조심스러우나, 매우 조급하게 사다리에서 내려 수돗가로 이동했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양은 세수대야에 수돗물이 콸콸 쏟아졌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할머니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나를 보고서야 한 시름 놓았다. 난 날뛰는 맥박을 느끼며 그 여느 때보다 호들갑스럽게 세수를 했다. 이제 퇴근해 씻고 있다는 듯이.
난 즉시 신고를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여자에게 의심을 사기 싫었다. 만에 하나 그 아이가 진이 라는 그녀의 딸이면 어쩌란 말인가.
난 서너 시간이 지난 후에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옆집 여자가 수상하니 조사를 해 보라는 말과 신고자는 철저히 기밀에 붙여 줄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다음 날 아침에 경찰들이 옆집에 출동했다. 난 몰려든 구경꾼들 속으로 끼어 들었다. 활짝 열린 대문 안쪽에서 여자가 경찰들에게 조사를 받고 있었다. 머리는 사방으로 뻗치고 무릎이 튀어 나온 추리닝 바지와 때에 찌든 티셔츠를 입은 여자는 이른 아침에 경찰들이 들이닥친 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 여자를 본 순간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조사를 받는 여자의 등에 아이가 업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경찰이 아이를 쓰다듬자 어린아이의 칭얼대는 울음소리가 났다. 살아 있는 아이가 아니라니. 난 두려움에 떨며 사람들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여자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제보자가 누구냐고 따져 물었다. 난처해 진 경찰은 여자의 집 앞을 지나가던 행인이었다고 얼버무렸다. 난 안도감으로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경찰이 신고가 들어왔으니 집을 수색해야 한다고 하자 여자는 의외로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경꾼들을 훑는 여자의 눈 속에 어떤 증오와 살기가 번득였다. 난 여자가 경찰들로부터 무고함을 입증받고 신고한 자에게 기필코 복수할 거라고 이를 악물고 있다고 느껴졌다. 가슴속이 서늘했다. 신고자를 기밀이 붙여 달라는 나의 부탁을 굳건하게 지켜 준 경찰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여자의 집을 나서는 경찰들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집 좀 치우고 사십시오. 작은 방의 개 시체부터 당장 치워요. 필요하다면 자원봉사자를 보내 드리도록 하죠.”
경찰의 말에 구경꾼들은 하나 같이 기겁하는 얼굴이었다.
여자는 자기가 치우겠으니 자원봉사자는 필요없다며 벌컥 화를 냈다. 경찰들의 등 뒤로 대문이 부서질 듯이 닫혔다.
구경꾼들의 질문에 답하는 경찰관의 대답을 통해 난 그 여자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자는 결혼 10년만에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선천성 심장병으로 생후 7달만에 죽었다. 그로인해 여자는 우울증을 앓게 됐고,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완치는 안 된 것 같았다. 여자가 죽은 아이의 영혼이 업고 있는 인형속에 들어와 자꾸 칭얼댄다고 말했다니, 어찌 정상적인 여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여자라는 것이 경찰관들의 중론이었다. 집안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고, 반 년이 넘은 개의 사체는 작은 방에 방치된 채 썪어 있었다고 했다. 그 개에게 여자가 정을 많이 주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경찰은 추측했다.
여자의 남편의 행방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는 지방에서 근무하며 매달 생활비를 붙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가엾고 불쌍한 여자라고 주민들은 혀를 끌끌 찼다. 문제의 개가 죽은 것은 자작극이었을 거라는 소리는 쏙 들어갔다. 개가 끊임없이 짖어 시끄럽긴 했었지만, 독살한 것은 잘못된 짓이었다며 아저씨를 욕하는 분위기였다.
여자는 하루 아침에 기피 인물에서 동정 인물로 탈바꿈해 버렸다. 때문에 두어 달 후, 한 정거장 떨어진 동네에서 또다시 돌 무렵의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도 아무도 여자를 의심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뉴스가 나온 직후에 돌아가셨다. 난 퇴근하고 돌아와 마루 턱에 엎어진 채 숨져 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시장에서 파는 찰쌉떡이 할머니 곁에서 발견됐다. 찹쌀떡을 드시다가 기도가 막혀 즉사했다는 부검 결과를 받아 보고 난 심하게 자책했다. 내가 곁에 있었다면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가 나를 스토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와 점심을 먹은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난 어제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고, 떨칠 수 없는 악몽처럼 여자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난 여자가 직장을 구했고, 그 직장이 하필 내 직장 근방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점심 시간마다 마주치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우연이 과도함을 넘어선다고 인식하면서부터 난 실체 없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여자와 나 사이에 원한을 주고받을만한 일이 없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려는 데만 급급했었다.
내면 깊숙이에서 짚이는 것이 있긴 있었다. 나와 할머니가 인형을 오인해 경찰에 신고한 것을 알게 된 여자가 앙심을 품고 기이한 짓으로 복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할머니의 돌연사를 인정할 수 없어 부검을 요청했던 난 밝혀진 사인을 접하며 허탈했었다. 내심 여자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회사에서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 시간에 맞춰 안부 전화를 한 민주와 통화를 하는 바람에 동료들을 따라 가지 못하고 혼자 밥을 먹게 되었다. 혼자 사는 난 아침은 거르고 점심과 저녁은 사 먹는다.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은 난 7살때부터 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하지만 할머니는 날 부족함 없이 키워 주었고, 그 위대한 사랑은 부모없는 아이로 성장하면서 겪어야 했던 홀대와 편견을 크게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습성을 형성시켜 주었다. 때문에 할머니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난 주문한 된장찌개가 나오자 한숨을 내쉬고 수저를 들었다. 여자가 내 주변에 등장하고부터 서서히 소화불량 증세가 느껴지더니, 요즘은 몇 수저 떠 넣으면 벌써 엉친 것처럼 명치 끝에 꽉 막힌다. 아침을 굶었기 때문에 억지로 라도 점심을 먹어 주는 거지만, 식사 후엔 반드시 소화제를 복용해야 했다. 내 신경도 너무 예민해져 있었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얼굴 근육이 떨려오고 해결책이 없는 불안감으로 심장이 무섭게 뛴다. 그것에 연결된 내 신체 반응은 지체없이 이어지는데, 그것은 고정된 생각을 돌변시키는 것이다. 즉 갑자기 내 머릿속에 회오리가 일어나는 데, 유심히 관찰했던 여자 등의 인형이 실은 움직였으며, 그 움직임은 살아 있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는 확신이 찾아온다. 그리고 여자는 그 아이를 죽였을 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상하지 않니? 여자가 인형을 업고 있는 것을 한 번도 못 봤어.’
경찰이 옆집을 수색하고 간 날로부터 며칠이 경과한 후에 할머니가 늦은 저녁을 먹는 내 앞에 앉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데 잖아. 정신이 돌아올 땐 그런 짓 안하나 보지.’
난 아직도 옆집 여자에게 의심을 품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필요 이상의 화를 냈다. 쓸데없는 호기심을 붙잡고 있다가 여자에게 발각돼 화를 입을까 걱정돼서였다. 구경꾼들 속에 몸을 숨길 때부터 난 여자를 무서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잘 못 건들었다간 큰일날 것 같은 불길함이 내 몸속을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찌개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언제쯤 마음 편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을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꾸역꾸역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내 심장이 팔딱거렸고, 겁에 질리기라도 한 듯 난 끊임없이 식당 입구를 힐끔거렸다. 여자가 나타나야 차라리 마음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른 나였다.
마침내 여자가 식당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늘 아무렇지 말자고 맹세하지만, 여자를 목격한 내 신체는 경직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막연한 두려움은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초라한 행색의 여자는 손님들로 만원인 식당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더니 느릿느릿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난 여자의 시선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식당엔 여자가 차지하고 앉을 빈자리는 하나도 없었다. 난 이미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는 곧 되돌아 나가게 될 것이며. 그 후엔 신경 쓰는 데 없이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급한 심정으로 여자를 기다렸었다. 여자는 종종 내가 점심을 먹는 식당으로 들어와 혼자 음식을 시켜 먹곤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날 스토킹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었던 것이다.
난 여자가 내 식탁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수저질을 했다. 여자는 늘 내 주변을 지나치지 않았던가. 소리 없는 위협을 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것은 나의 망상이었다. 액운이 끼어 여자가 늘 내 주변에 있게 된 것 뿐인 것이다.
난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압박을 위안해 주려고 주문처럼 그런 생각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믿기지 않게도 여자가 내 앞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난 뜻밖의 상황에 얼굴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혼자 식사하는 사람은 나 외에도 서너 명 있었고, 그들의 앞자리도 비어 있었다. 지난 한 달여 간의 미스터리가 갑자기 풀릴 것 같은 불길함이 내 심장을 조여왔다.
난 엉겁결에 여자를 쳐다보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이웃집에 사는 여자인데, 아는 척은 해야 되지 않을까, 아는 척 하지 않았다고 시비 걸면 어쩌지, 그것이 재앙으로 이어지는 빌미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난 입도 벙긋 못하고 얼른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여자가 입을 살짝 비틀면서 기묘한 미소를 짓는데, 소름이 쫙 끼쳤다.
“된장찌개 맛 어때요?”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충격적이었다. 너무나 부드럽고 정감이 배인 목소리.
난 그 부조화에 놀라 그만 사리가 들였다. 그리고 내 의지와는 달리 얼굴이 빨개지며 켁켁 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여자가 물컵을 건넸다.
“이거 마셔봐요. 괜찮아질 거예요. 어서요.”
목소리는 아까처럼 부드러우면서 염려가 깃들었다. 그러나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서늘한 깊이를 발산하고 있었다. 난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 표정인 줄을 깨달았다. 노골적인 가식! 식은땀이 온 몸에 솟아나며 식당 안이 찜질방처럼 느껴졌다.
“어서 이거 마시라니까요.”
가벼운 재촉. 난 마른 침을 삼켰다. 왜 내게 위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받지 않으면 여자가 물컵을 내게 던져버릴 것만 같았다.
“고, 고맙습니다…….”
난 컵을 건네받는 내 손이 떨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여자가 어떤 반응을 표정에 담고 있는지 살피지 않았다.
“목젖이 알맞게 튀어나왔네. 진짜 남자다워.”
물을 마시는 날을 지켜보던 여자가 문득 말했다. 난 놀라서 컵을 내려놓았다.
여자의 눈빛이 이상하게 흔들였다.
“무, 무슨 말씀이죠?”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마져 식사해. 아직 반은 남았네.”
착각일까. 기묘한 빛이 사라진 눈속에 마치 장성한 아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흐뭇한 기색이 명멸했다. 무서울 정도로 애정이 가득한 눈빛.
“다, 다 먹었습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난 장성한 아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길이 내 마음속에서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것을 느끼고 기겁을 하며, 그러나 여자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 애쓰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 땐 바빠서 조문도 못 갔어.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말이야. 내게 관심을 많이 보여 주셔서 고마웠던 분인데.”
여자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오, 오셨던 것으로 생각할게요. 그럼.”
난 더듬거렸고, 심장은 무섭게 방망이질쳤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에 가득찼다.
난 바보 같이 여자에게 꾸벅 목례까지 하고 탁자를 벗어났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내 귓전에 여자의 혼잣말이 파고들었다.
“관심 없는 척 하는 것들, 난 딱 질색인데…….”
난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갔는 것 같았다.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의 느낌이 온 몸에서 느껴졌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난 속으로 울부짖었다. 구역질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대한 날, 군 복장으로 집에 오던 골목길이 기억의 저편에서 튀어올랐다.
저벅저벅 비탈길을 올라오는데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 뚫어지게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처들었다. 그러나 비좁은 골목길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 시야 언저리로 검은 빛이 스쳐갔다. 우리 집 옆집 담장에서 무언가 급히 사라진 것 같았다. 난 정체 모를 그것이 사람이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옆집에서 검은 고양이를 키우는 것을 알고 그 순간의 의문이 자취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난 늦은 퇴근길에 동네 아래쪽에 있는 부동산중개소에 들렸다. 우리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부동산중개소였다. 난 부동산중개소를 통해 알아볼 것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여자의 신상은 경찰에게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도 전적으로 여자의 구두 진술에 의존한 것 뿐이었다.
난 부동산중개소를 나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부동산중개소 할아버지는 집 계약 당시 여자가 남편과 함께 왔었고, 남편의 이름으로 계약했다고 증언해 주었다. 그리고 남편이 여자를 진이 엄마라고 불렀다고 확인해 주었다. 남편과 진이 라는 아이는 허상의 존재일지 모른다는 내 예측이 빗나갔다. 정신적인 장애로 여태 미혼인 여자가 남편과 아이가 있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아내와 엄마였던 사람으로 행세하는지 모른다고 난 생각했었다. 그런 이유로 결혼 적령기 때의 시각을 여태 가지고 있으며, 그 시각으로 남자를 보는지 모른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한참이나 어린 남자를 스토킹하겠는가. 등에 업은 인형도 그런 맥락으로 분석했었다. 아이를 키우고 싶은 열망의 소산일 거라고.
난 신경이 예민해 지는 것을 느끼며 옆집을 쳐다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옆집에 사는 미친 여자가 날 그리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내 기분을 더럽히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미친 여자에게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단 말인가. 난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여자의 스토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만을 모색하는 내 자신이 비참해 지기까지 했다.
내 방안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내게 말을 붙이려고 그 동안 내 주변을 서성였단 말인가. 젠장, 빌어먹을. 욕지기가 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난 더 쌍스런 욕은 할 줄 모른다. 할머니가 날 그렇게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더 쌍스런 욕을 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렸다. 결국 난 참지 못했다. 씨팔 년, 미친 년, 주제도 모른 개 같은 년. 난 입 속으로 그런 쌍스런 욕을 열을 내며 옹알거리다가 문득 뭔가 오류가 있는 것 같다는 깨달음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여자는 우리 집 바로 옆집에서 살지 않는가. 날 좋아하는 것이라면 굳이 회사까지 올 필요없지 않을까. 순간 여자의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다.
‘목젖이 알맞게 튀어나왔네!’
‘남자다워!’
여자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기괴한 소리! 혹시 뒤의 말은 속내를 희석시키기 위해 내뱉은 말이 아닐까.
여자가 내 목젖을 따고 싶어 한 소리일지 몰라.
난 무서운 속도로 원점으로 돌아가 여자가 아이들을 납치했고, 그 아이들을 살해했을지 모른다는 망상에 다시 시달리기 시작했다.
할머니? 여자는 할머니가 지대한 관심을 가져줘서 고마웠었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내게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는 소리? 그런 건가? 그럼 그 소리는 한 마디로 불쾌했다는 의미! 할머니를 죽였다는 소리!
나는 추정이 확신으로 이어지자 새파랗게 질렸다. 여자는 날 죽일 기회를 노리고 스토킹하고 있는지 모른다. 할머니가 자기에게 관심이 지나쳤다는 소리는 나도 그랬다는 의미라고 보아야 맞는 것이다. 할머니는 나와 같은 집에 살며 하는 짓도 상의해서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이코!
그 순간, 갑자기 마당에서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여자가 담을 넘어 뛰어내린 소리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파르르 겁에 질리며 방의 불부터 껐다. 스토킹으론 죽일 방법이 없을 것 같자, 직접 우리 집으로 처들어 온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분명 흉기를 소지하고 있을 것이다.
난 문 가의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내 숨통을 조였다.
철퍽!
또 다시 아까와 같은 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소리의 정체를 분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딱딱하지 않은 물체가 일정한 높이에서 마당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여자가 뭔가를 우리 집 마당에 던졌다! 그 다음엔 담을 넘어 올 것이 틀림없어!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밖의 동태에 귀를 기울였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흘러내려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침대 밑에 야구방망이를 숨겨 둔 기억이 나자 조용히 몸을 구부리고 무릎으로 기어가 그것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에 땀이 번질거려 야구방망이가 금세 미끌거렸다.
밖은 적막에 휩싸였다. 내 숨소리는 가쁘고 거칠었다. 멈춘 듯한 시간이 5분여는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기척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난 견디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렸다. 소리없이 방을 나와 잠시 멈춰 섰다. 사방은 오싹할 정도로 조용했다. 여자가 집에 침입해 있을까. 난 야구방망이를 한 손에 꽉 쥐고 다른 손으로 벽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기습적으로 올렸다. 순간 내 시야에 마당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난 전기에 감전된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시꺼먼 고양이 두 마리가 마당에 널부러져 있었다. 죽었는지 꼼짝도 않은 놈들의 사체에서 시뻘건 피가 스며나와 마당을 물들이고 있었다.
혼미해진 내 눈에 불현듯 고양이의 목에 박힌 칼이 보였다. 피가 튄 칼자루가 은색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기분이었다. 너무 놀라 부엌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오래된 5개의 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자루마다 호일을 감아 놓았었다. 그 칼들은 싱크대 문 안쪽 칼집에 나란히 꽂아 두었다. 난 부들거리는 손으로 싱크대 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정확히 두 곳이 비어 있었다. 여자가 우리 집에 잠입했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여자는 내게 누명을 씌우고자 할머니의 칼을 훔쳐 자기 고양이를 살해한 것이 분명했다. 한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불현듯 이사를 간 아저씨가 떠올랐다. 나는 야구방망이를 내던지고 미친 듯이 쓰레기봉투를 찾았다. 시간이 없었다. 봉투를 찾은 난 그것을 들고 마당으로 뛰어갔다. 고양이들은 칼에 난자당해 있었다. 원한에 사무치기라도 한 듯 마구 칼을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내 눈에 그것은 대리 살인으로 비춰졌다. 뼈속 깊이 공포가 느껴졌다.
나는 고양이를 쓰레기봉투에 담아 배냥에 넣었다. 동네 아래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난 황급히 수도를 틀고 그 물로 바닥의 피를 깨끗이 닦아냈다. 그리고 사다리를 가져와 우리집 지붕을 향해 올라갔다. 대문에선 보이지 않은 지붕 옆면 쪽 물받이 위쪽에 배냥을 올려놓고 다급하게 내려와 사다리를 창고에 집어 넣었다.
경찰들이 도착했을 때 난 하의 추리닝과 상체는 벗은 채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 주었다.
경찰은 옆집 여자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의 여자는 우리 집에서 고양이의 비명소리를 들었다며 신고했다고 했다. 자기가 기르는 동물은 모두 이웃들이 죽인다고 서럽게 흐느꼈다. 가증스럽고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여자였다.
다행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경찰은 허탕을 치고 우리 집을 나갔다. 대문을 나서다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여자의 눈에 살기가 번득였다. 난 당장에 이사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번 신경이 쓰이면 그곳에 생각을 집중하고 망상에 사로잡히고 딱히 증거가 없어도 자신의 망상을 굳게 믿고 행동하는 편집광적인 정신병환자. 사이코가 그런 류의 환자 같았다. 사이코는 우리 집 담장을 볼 때마다 그 너머에서 누군가 염탐하고 있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인을 택한 것일까. 대체 할머니는 어떻게 죽인 것이란 말인가. 나는 여자에게로 향하는 혐의를 풀고 싶었지만 어떠한 증거도 물증도 없었다. 할머니에게 죄송하고 무력한 내 자신에게 화가 치밀 뿐이었다.
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사이코지만, 정상인보다 머리가 비상한 여자라는 것을 고양이 살인 누명을 통해 알게 된 난, 내 가까이에 그런 여자가 살고 있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집을 세 주고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 강씨 아저씨가 괜히 이사를 간 것 같지 않았다.
퇴근하는 길에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다. 동네 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집에 간 나는 마루로 들어가는 미닫이 문 하단에 끼어둔 일센치미터 크기의 실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했다. 칼집의 칼들의 숫자도 정확히 맞았다.
‘ 오늘 밤은 최소한 누명 씌우는 짓은 안 당하겠군.’
나는 초조감과 압박감을 덜어내기 위해 속으로 몇 번이고 이 대사를 반복했다.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숨이 턱턱 막혔다.
난 어제처럼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편치 못한 심사는 그대로 육신으로 옮겨져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오늘 점심 시간에 여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난 태풍의 눈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 내내 불안했고, 오늘 밤에 그 이유가 밝혀질 것 같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했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핸드폰 액정화면에 찍힌 번호는 민주의 집 전화번호였다. 난 민주와 수다라도 떨면 이 숨막히는 불안감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민주 어머니였다.
“민주 언제 떠났나?”
안부를 주고받고 조심스럽게 묻는 민주 어머니의 질문에 난 당황했다. 우린 점심시간과 민주의 퇴근 시간에 맞춰 통화를 했었다.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지 몰라하는 내게 이어지는 민주 어머니의 말은 날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집에 시골서 사는 고모가 올라왔다면서? 자네 고모가 자네에게 연락하지 말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던데, 자넨 몰랐나…….”
난 갑자기 공포에 휩싸이며 황급히 시골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무시다가 깬 고모는 되러 무슨 소리를 하냐고 반문했다.
내 눈에 불꽃이 튀었다. 민주가 사라졌다면, 그 곳은 한 곳밖에 없다!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는 민주의 핸드폰이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 움츠리고 있던 내 몸에 분노의 기운이 무섭게 솟구쳤다. 민주가 나와 동행이 아니라는 속임수는 안 먹힌 것이다!
“씨팔년, 죽여 버리겠어!”
난 절로 튀어나오는 쌍스런 욕지기를 내뱉으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칼집에서 제일 긴 걸로 한 자루를 꺼내 허리참에 꽂고 침대 밑에서 야구방망이를 찾아내 힘껏 움켜 쥐었다.
민주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 이상일 수도 있었지만 난 그 이상은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는 나의 전부였다. 그녀를 잃는다는 것은 내 전부를 잃는 것이다.
난 경찰에 신고 전화부터 걸었다. 경찰은 민주가 옆집 여자에게 납치되었다는 증거부터 요구했다. 욕지기가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난 고양이 누명 건에 대해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 여자가 내게 뒤집어 씌우려고 고양이를 죽여 우리 집에 던졌다고 언성을 높였다. 강씨 아저씨도 나와 유사한 봉변을 겪었을 것이며 두려운 나머지 이사를 간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내 할머니도 그 여자에게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 때는 울컥 울음이 올라왔다. 그러나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추측만으로 그 여자 집을 수색할 수 없다며, 지난 번의 오인 출동에 대해 언급했다. 난 한가에게 언쟁이나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나 혼자 여자의 집에 쳐들어 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1시간이 넘어도 내 전화가 없으면 내 신변에 치명적인 위험이 닥쳤다고 알고 그 때라도 출동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난 혼자서도 민주를 구할 수 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난 사다리를 가져와 담장에 기대고 올라갔다. 여자의 집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시꺼먼 무리를 지어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들도 없었다. 뭔가 이상한 정적이 감돈다고 생각했지만 그 딴 것을 신경 쓸 여력이 내겐 없었다. 나는 화단의 키 작은 나무로 몸을 날려 가지를 붙잡았다.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가지로 인해 난 마당에 떨어졌다.
정강이가 긁히긴 했지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마당에 엎드린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무 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놀라 여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난 아무 조짐이 없자 몸을 일으켜 불도 켜 있지 않은 집을 향해 소리 죽여 다가갔다. 이윽고 미닫이 문에 당도하자 문에 귀를 바짝 들이대고 안의 소리를 엿들었다.
너무나 조용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민주가 이미 당했으면 어떡하지. 나는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며 미닫이문을 살살 옆으로 밀었다. 집 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확 끼쳤다. 무언가 썩은 냄새였는데, 숨을 못 쉴 정도의 악취였다.
민주가 이 더러운 집 어딘가에 있을거란 생각에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더불어 무서운 상상이 밀려들었지만 난 최악은 염두에 두지 않기로 마음먹고 온 사람이었다. 민주는 약 같은 것에 취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아직 죽이진 않았을 거야!
나는 땀을 바지에 문지르고 야구방망이를 힘주어 쥐었다. 마루에 조심스럽게 한 발을 올려 놓고 다시 한 발을 올렸다. 칠흙 같이 어두운 집 안에 들어서자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마치 어둠을 깨울 것처럼 크게 들렸다.
나는 집 내부가 우리 집과 비슷한 구조라는 것을 마루에 오르면서 직감했다. 오른쪽으로 대여섯 걸음 옮기면 안방이 있을 것이었다. 안방으로 다가가 문에 귀를 가까이 대고 소리가 나는지 살폈다.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자, 난 신중을 기해 문손잡이를 돌렸다.
눌림쇠가 튀어나오며 철컥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내 귀청을 찢을 듯이 크게 들렸다. 난 터질 듯이 요동치는 심장 고동소리를 들으며 야구방망이를 처들고 벽에 붙어섰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기분 나쁠 정도의 적막함뿐이었다.
난 호흡을 멈추며 안방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마치 화장실에 들어온 듯 지린내가 확 끼쳤다. 난 후각을 마비시킬 것 같은 악취에 절로 코를 막았다. 어느 정도 어둠에 익은 눈에 옷가지들로 어지럽혀진 방바닥이 들어왔다. 마치 장롱에 있는 옷들을 재다 꺼내 놓은 것처럼 발 내디딜 공간조차 없는 난장판 같은 방이었다. 그 한 켠에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머리부분이 애벌레집 모양으로 둥그렇게 올라와 있고, 아래부분은 평평한 이부자리였다.
순간 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게으른 사람이 잠자리에서 몸만 빠져나오면 저런 모양의 이부자리가 형성된다. 미칠 것 같은 공포가 날 엄습했다. 여자는 아침에 집을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나는 성급히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다른 방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찬 방은 창고를 연상시킬 정도로 혼잡스러웠다. 난 마지막 남은 작은 방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그 방의 문을 열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악취가 엄습했다. 너저분하기 이를 데 없이 더러운 그 방을 난 재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고약한 그 냄새의 진원지는 방 한 켠의 작요 담요로, 섞어 뼈만 남은 개의 머리통이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다.
대체 민주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난 집의 어디에도 민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득한 절망감에 진저리를 쳤다. 여자는 민주를 다른 장소로 납치해 갔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민주의 목숨은 누구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난 울음을 삼키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직 조사해 보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다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창고는 우리집 반대편 담장에 붙어 있는 두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나는 손가락의 관절에서 통증이 느껴질 만큼 야구방망이를 세게 움켜 쥐고 창고로 빠르게 걸어갔다. 발에 무언가 채이는 것이 있었다. 무심코 내려다 본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잔인하게 찢긴 고양이들의 사체가 창고 앞에 널부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여자는 자기가 키우던 고양이 전부를 죽여 버린 것이 틀림없다.
난 엄습하는 절망감에 넋이 나가 멍청하게 창고를 쳐다보았다. 창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은 농밀한 어둠뿐이었다. 여자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럼 내 민주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내 손에서 힘없이 야구방망이가 떨어졌다. 난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창고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집이 아니라고, 창고 안에 무슨 단서가 있을 거라고, 마지막 희망을 찾아야한다는 듯이.
그러나 창고는 그 사용 용도가 무색하게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었다. 민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졌다는 내 아픔 가슴 속에 고통이 파고들었다.
갑자기 못 견디게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다시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한다고 이성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 다리가 후들거려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그 순간이었다. 다리 밑이 꺼지면서 환한 불빛의 세상이 열렸다. 난 사태를 가늠할 사이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난 흙바닥에 고꾸라졌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난 갑작스런 상황에 얼이 나가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허공에서 굵은 쇠막대기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쏟아졌다. 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몸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난 내 몸이 포승줄에 단단히 포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이코가 각각의 손에 식칼과 쇠막대기를 나눠 들고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녀의 모습보다 그녀의 뒤의 엽기적인 광경에 경악했다.
홀쭉한 양복을 걸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양 팔을 벌린 자세였는데, 각각의 팔에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차림의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해골에 가까웠고, 어린아이들의 얼굴은 섞어 문들어지고 있었다. 난 구역질을 삼키는 것이 힘들었다.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어 시선을 돌린 내 시야에 쓰려져 있는 민주가 보였다. 가슴이 울컥했다. 민주는 팔과 다리를 한 데 모아 둥그런 자세로 묶여 있었다. 여자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눈과 코의 구별조차 힘들었지만 그녀는 내 민주가 틀림없었다. 난 민주의 몸이 낮게 들썩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민주는 살아 있었다!
“너랑 같이 죽이려고 아직 살려 두고 있었지, 호호호호!”
여자가 민주를 발을 툭 차며 히스테리하게 웃어젖혔다. 민주가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힘겹게 눈을 떴다. 난 민주가 날 발견하기를 고대하며 그녀를 깊이 응시했다. 내 입과 민주의 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 대화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다행히 날 발견한 민주가 금세 굵은 눈물을 흘렸다. 난 눈시울이 붉어지며, 내가 왔으니 안심하라는 눈길를 보냈다. 내 눈길을 받고 위로가 되었을까, 민주의 눈꺼풀은 이내 감겼다.
“난 네 놈하고 네 할머니 년이 내 집에 너무 관심을 보여서 불안했지. 그럼 우리 진이의 영혼을 빼앗은 것들을 잡아와 죽일 수가 없거든, 호호호! 저 작자가 내 남편이야. 저 작자로부터 내 진이가 심장병을 물려받은 거야. 왜냐면 난 건강한 여자거든. 그래서 죽여 버렸어.”
여자가 소름 끼치는 눈으로 자기의 기념품들을 쏘아보았다.
“난 네 놈을 미치게 해 볼까 생각했지. 날 공격해 오기를 바란 거야. 그럼 죽일 때 짜릿할 것 같았어, 호호호. 네 할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내가 목구멍에 찹쌀떡을 집어 넣고 배게로 주둥이를 눌러버렸지. 온종일 내 집을 염탐하고 있는 걸 내가 알았거든. 너 또한 그 년에게 염탐한 보고를 받고 살았을 거야. 이를테면 같은 범죄지, 호호호!”
여자가 한걸음 내게로 다가왔다.
난 허리참에 꽂아 둔 칼을 꺼내 밧줄을 자르고 있었다.
“사실은 말이야, 내가 널 쫓아다닌 것은 네 할머니에게 나에 대해 비밀스런 뭔가를 들었을까 싶어서였지, 호호호. 내가 데려온 아이가 마당으로 도망쳐 비명을 질렀거든. 난 그 아일 이 지하실에 가두고 당장 너네 집으로 담장을 넘었지. 그 사이에 그 년이 너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싶었던 거야. 난 네 놈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무언의 협박을 가하고 있었던 거지. 그랬다간 네 할머니처럼 죽여 버릴 거라고 말이지.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더군. 그래도 난 확신이 안 섰어. 한 달을 채우고 그만 두려했지. 그런데 넌 내 화해 제스처를 무시했어. 너무 화가 나더군. 그래서 너 하나 죽이는 것으로 분이 안 풀릴 것 같았지. 그래서 저 년을 납치해 온 거야!”
여자가 살기에 가득찬 눈으로 날 째려보더니 칼을 홱 던져 버리고 쇠막대기를 단단히 잡더니 이내 높이 처들었다.
“고통스럽게 죽여주지. 날 무시한 대가로 말이야!”
여자가 이를 악물며 쇠막대기를 세차게 휘둘렀다. 난 본능적으로 머리를 수그렸다. 어깨를 내리친 쇠막대기에 어깨뼈가 부숴지는 듯 아팠다. 하지만 난 그 기회를 이용해 쓰려지면서 간당간당한 밧줄 끝을 잘라냈다.
여자가 자기 뜻대로 때리지 못하자 화가 치미는지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녀는 짐승처럼 신음을 토하며 내 머리통을 향해 쇠막대기를 휘둘렀다. 난 여자 쪽으로 댕구르 굴렀다. 내 손에 여자의 발목이 잡히자 힘껏 잡아 당겼다. 여자가 고목처럼 쿵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난 두발이 묶여 있어 일어서는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잘라낼 시간이 없었다. 여자는 얼떨떨한 듯 머리를 털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난 지체없이 여자 위로 몸을 날렸다. 내 밑에 깔리게 된 여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대뜸 내 눈에 손가락을 찔러 버렸다. 난 눈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 내리는 것을 느꼈다.
“쌍년! 죽여 버리겠어!”
난 여자의 면상에 미친 듯이 주먹을 날렸다.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며 여자가 괴성을 내질렀다. 여자의 코와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난 멈추지 않았다. 이 여자가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했다는 생각과 민주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에 증오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갑자기 뱃속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난 놀라 멈짓했다. 다음 순간 여자가 내 배에서 피 묻은 식칼을 빼내고 있었다. 그 칼이 지체없이 내 목을 겨냥해 날라오는 순간 난 옆으로 몸을 굴렸다. 방심한 사이에 여자의 손이 바닥에 떨어진 식칼을 집은 모양이었다. 여자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에 난 쇠막대기를 주워 들었다. 내가 가져온 칼은 여자의 뒤쪽에 떨어져 있어 집어 올 수가 없었다.
여자가 씩씩 쇳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난 발목이 묶인 채 엉거주춤 일어섰다. 각자 가진 무기로 보면 내게 승산이 컸다. 여자는 내가 가져 온 칼마져 집어 들고 한 걸음씩 다가왔지만, 내가 쇠막대기를 휘둘러대자 이빨만 뻑뻑 갈 뿐이었다. 난 강시처럼 통퉁거리며 한 걸음씩 여자에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물러서는 여자의 등 뒤로 흙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여자가 벽에 닿았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게 된 순간이었다. 기괴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여자가 내가 휘두르는 쇠막대기 사이로 뛰어들었다. 난 여자의 머리통이 박살나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자기 머리가 박살이 나는 순간에도 칼을 내 복부에 꽂는 것에 집중했다. 난 쇠막대기를 놓치며 허리를 굽혔다. 내 뱃속 깊숙이 칼이 박혀 있었다. 난 그것을 빼내면 더 위험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지하실이 떠나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뽑아냈다. 여자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뻗어 있었다. 미동도 없는 것이 즉사한 것이 분명했다. 난 샘물처럼 숫구치는 피를 손바닥으로 눌러 막으며 민주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민주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펑펑 눈물을 쏟으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난 민주의 입의 재갈을 벗겨내고 그녀의 따뜻한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사랑해, 민주야! 내가 널 지켜줄게, 언제까지나!”
민주가 내게 몸을 기대왔다. 하지만 난 점점 의식이 희미해 지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의식의 끄트머리로 아득히 먼 데서 경찰 사이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끝-
첫댓글 마지막에 어찌된 거요. 둘은 살아남았겠죠? 아, 정말 잘 쓰셨네요. 심장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어디 추리소설 공모전에 그대로 투고해도 괜찮을 것같아요. 만족스런 내용에 비해 제목이 다소 평이한 느낌인데 더 꾸미면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튼 좋은 작품 계속 써주십시요.
본격 애호가님 감사합니다.
예 정말요ㅎ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믹스커피님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으면 더 좋을것 같아요. 화자인 나의 착각,즉 싸이코가 화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봤거든요. 여튼, 글 정말 잘 쓰시네요^^
추리소설에 반전이 묘미인데 처음에 범인을 공개하지 않았으면 반전을 세팅하기 쉬웠을 겁니다. 독자의 심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해서 서프라이즈나 서스펜스를 넣었으면 더 재밌었을 거예요.
마지막에 두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글은 풀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위기를 갖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글은 정말 긴장되는 분위기가 그대로 표현되서 마치 배경음악이 저절로 떠오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재밌게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