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산의 도심 한 가운데에 작은 언덕으로 남겨져 있는 복병산과 용두산을 찾는다
복병산(伏兵山)은 조선 시대 때 이곳에 군사들의 잠복 초소였던 복병막(伏兵幕)이 설치되어 있어 붙은 이름인데
해발 고도 49m의 복병산은 용두산과 함께 초량 왜관(倭館)이 있던 장소였고
부산의 옛 지도를 보면 용두산과 복병산은 민주공원과 중앙공원이 있는 보수산과 함께
하나의 긴 산줄기로 연결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같은 세대에게는 뽀족하고 큰 칼라와 허리가 착 달라붙어 관능미를 보이는 교복으로 유명한
남성여자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바로 그 산이다
오늘의 답사 시작은 대청로에서 중구청으로 올라가는 영선고개를 바로 오르지 않고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껴보기 위해 옛 한국은행 앞에서 골목길로 해서 올라가기로 한다
대청로는 부산의 첫 신작로로 1889년에 개설되었다고 한다
복병산길 7번길 골목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남성초등학교로 가는 길안내가 나오는데
바로 직진하여 올라간다
남성초등학교는 남성여고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
골목을 벗어나니 영선(營繕)고개 오르막이다
영선고개는 대청로에서 메리놀병원과 코모도호텔이 있는 고개마루를 넘어 영주동으로 가는 고갯길인데
1900년대 초에 도로를 개설하면서 사라진 영선산에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래부사가 왜관으로 행차할 때 넘던 길이었고
한국전쟁 때 부산에 상륙한 유엔군이 처음으로 아스팔트로 포장을 했던 '부산 아스팔트 도로 제1호'이라서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부르기도 했던 길이라고 한다
고갯길 오른쪽의 복병산 체육공원 안내판을 따라 데크 계단길을 오른다
산 중턱에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복병산 배수지와 조그만 체육시설이 있고
테니스장 옆에는 조그만 정자도 있다
나무숲 사이로 메리놀병원과 덕원중학교 건물이 보이고
계단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체육시설과 배드민턴장이 나오고
그 위가 바로 해발 49m인 복병산(伏兵山) 정상이다
복병산은 부산포 개항 후 1892년에 복병산 조차(租借)에 관한 협정으로 일본인 공동묘지로 이용되었으나
이후 아미산으로 이전하였고(지금의 아미동 비석마을),
1924년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촬영소가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우리나라 영화 제작의 효시가 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선고개 너머로 민주공원과 중앙공원이 있는 보수산(해발 169m)이 보이고
용두산공원과 멀리 천마산도 보이고
영도 봉래산도 조망이 된다
산 정상에서 내려오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남성여고를 가 본다
수령 약150년이 되었다는 복병산의 터줏대감 팽나무
영선고개마루에 자리잡고 있는 메리놀병원과
그 뒷쪽의 덕원중학교와 부산디지털고등학교(옛 덕원공고)
그리고, 코모도호텔
남성여고는 한창 교사 건물을 보수공사하는 중이었는데
남성여고의 상징이었던 초록색 건물 색깔은 일부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운동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중앙동의 빌딩들 사이로 부산항대교와 그 너머의 신선대가 보인다
당겨 찍은 부산항대교와 신선대
남성초등학교
복병산 남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부산기상관측소
1933년에 세워진 부산기상관측소는 근대 기상관측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부산광역시 시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복병산에서 내려와 복병산 북쪽 기슭, 영선고개 마루턱에 위치한 부산 중구청을 돌아 나온다
옛날 남성여고 학생들은 높은 산에 위치한 학교를 간다고 긴 계단을 오르내린 탓에
다리통이 굵다(?)고 놀리고 했었는데 오늘 보니 천만의 말씀이다
이 영선고개에서 중구청 옆으로 완만한 오르막길을 조금만 가면 바로 학교가 나온다
중구청 맞은편에 있는 메리놀병원을 일견하고 용두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대청로의 부산근대역사관 옆으로 해서 용두산으로 간다
옛 미국 문화원을 1999년 부산시에서 인수하여 2003년 7월에 부산근대역사관으로 개관을 하였는데
1982년 3월 18일에 일어난 미문화원 방화와 점거사건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은 미국이 전두환 대통령과 신군부세력의 군사독재를 용인하고 지원하는데 대한 항거였으며
사건 관련자들을 체포, 구속하는 과정에서 천주교인들까지 탄압함으로써 종교계의 민주화운동을 촉발하기도 했다
용두산공원 북쪽 산책로의 수화예방비(용두산 신위비)
1953년 1월의 국제시장 대화재와 그 해 11월에는 부산역이 화마에 휩싸이고
1954년 12월에는 용두산 피란민촌이 대화재로 많은 이재민을 내면서
용두산이 불타는 것을 목격한 당시 경상남도 지사와 부산시장은
수호신인 용의 힘을 빌려서라도 화재를 막고 싶은 간절한 염원으로
1955년 정월 대보름에 이 화재예방비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 모셔진 비석은 3기인데 가운데에 있는 것이 수화예방비이고
양쪽에 있는 것은 보국충신비이다
수화예방비(용두산 신위비)
비신의 앞면에는 관허(官許)라고 상단에 쓰고, 그 아래는 큰 글자로 '龍頭山 神位'라고 새겼다
관아 글씨는 붉게 칠하고 그 위를 시멘트로 만든 지붕틀을 얹었다
비석 후면의 상단에는 네모를 두르고 네모 안에 다시 작은 네모를 그려 그 속에 불 화(火)를 새겼다
'火'자를 중심으로 네 방위에 물 수(水)자를 돌아가면서 새겼다
이는 물과 불이 상극이라는 수화상극(水火相克)의 이치를 이용하여 불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네모의 왼쪽에는 황하수급(黃河水及 四海龍王)을 두 줄로 새겼는데
이는 부산에 큰 불이라도 나게 되면
중국의 큰 강 황하수에 버금가는 비를 내려 달라고 사해용왕께 비는 의미가 담겨있다
(안내문 참조)
용두산 부산타워
용두산(51.3m)은, 옛날에는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 하였다가
그후 산세가 흡사 용모양이어서 일본에서 건너오는 왜구들을 삼켜버릴 기상이라 하여
용두산(龍頭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678년(숙종 4)에는 이 산을 중심으로 초량 왜관이 설치되어 대일외교 및 교류의 중심지로
개항(1876)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전관거류지가 되었다
또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이 산에 신사(神社)를 세웠으나 8․15광복을 맞자마자 일본신사가 헐려 없어졌고
그 뒤 한국전쟁 때는 부산으로 밀려든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이루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1954년 12월 10일에 일어났던 큰 불로 용두산 피난민 판자촌이 불타 없어진 뒤 나무를 심었고
1957년에는 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雩南公園)이라 불렀으나
4․19 혁명 이후 다시 용두산공원으로 환원되었다
-[출처] '달뫼'님의 불로그 달뫼의 발길 닿는 어디메든-
'부산시민의 종' 종각
꽃시계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코로나19 임시선별검사소
부산 역사상 최고의 한파 속에 임시선별검사소도 문을 닫았는지 조용하고
몇몇 젊은이들만이 눈에 띄일 뿐 용두산 공원은 고요함 속에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용두산 공원 아래의 고갈비 골목
지금은 붉은 벽돌 건물 한 곳만 영업을 하고 있는데, 몇 년 전 전일출과 옛추억을 더듬어 찾은 적이 있다
광복동 거리
지하철로 가면서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오래된 추억의 명소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원산면옥
할매회국수
옛날의 비좁던 장소에서 조금 위치를 옮겼지만 아직도 그 명맥은 유지를 하고 있다
서면 영광도서 앞의 할매회국수 집이 정통성을 이어받은 집이라는 말도 있던데.....
서울깍두기
세명약국
간판에 since 1948이라고 당당하게 쓰여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주위에 있던 '석빙고' 아이스케키 가게는 사라지고 보이질 않는다
70년 전통의 18번 완당집
옛날 옆의 창선동지점에서 근무를 했을 때
숙취 후의 해장을 하거나, 전날 숙직을 한 뒤의 아침식사를 이 완당으로 때우곤 했었다
옛날에는 2층에 있었는데 지금은 건물 지하로 내려가 있네~
좀 더 둘러보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옛 것은 더 이상 보이지를 않는다
사라진 옛 것에 대한 추억을 더듬는 나를 보니 나도 어느듯 나이가 들었나보다
씁쓸한 웃음만 남포동 골목길에 남기고 이제 지하철로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