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본받지 말 것을 말씀하시다(6-6)
- 십일조 역사를 통해 헌금(연보)을 배우다 -
십일조 역사
십일조 역사를 ‘십일조‘를 나타내는 표현인 ‘십분의 일’이 처음 언급된 ‘아브라함의 십일조’(창 14:20)에서 시작하여 ‘야곱의 십일조’(창 28:22)에서 있어 온 것으로 봅니다. 이 때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오 이삭의 하나님이시오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언약의 하나님 되신 관계성에서 하나님이 해 나가실 일을 알리시는 것으로 있게 된 사건에 의한 신앙고백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아브라함과 야곱 이후로 더 이상 나오지 않다가 ‘십분의 일’이 비로소 ‘십일조’란 율법의 계명으로 주어져 법으로 제도화 된 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모세 때입니다. 야곱의 후손이 애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크게 번성한 후 하나님의 불러내심으로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진행 중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명하여 십일조를 명령하여 언급하실 때에 다시 나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맹세>한 증표로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율법의 규정으로 주어져서 (1)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제사장의 일을 돕는 레위인을 섬기는 일로, (2)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절기를 지키는데 필요한 비용을 지는 일과 (3) 고아와 과부의 가난한 자들을 도우는 일로 지켜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열 두 지파의 대표자인 야곱의 십일조<십분의 일> 맹세는 지켜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게 한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실현에 있어 가시는 것인데, 이 십일조가 율법의 계명으로 명령하게 된 것은 (1)가나안 땅 분배와 (2)성막 건축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보이시는 땅 가나안을 야곱의 후손 열 두 지파 중에 열 한 지파에 분배하여 주시며 그들 한 가운데에 성막을 두시고 남은 한 지파에게 성막과 함께 성막 안에서 행해져야 할 모든 일을 맡긴 데 따른 것입니다.
가나안 땅 분배는 열 한 지파에게 주어졌지만, 사실은 열 두 지파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열 두 지파 중 어느 지파에게 더 많이 주어지거나 더 적게 주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분배였습니다. 각 지파에 분배된 땅의 영역이 얼마이든지 그 땅에서 나게 하신 소산에 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복이신 사실로 안녕히 사는 분배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를 더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 한 가운데 성막을 두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막은 출애굽한지 석 달이 된 시점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번에 걸쳐 두 돌판에 기록된 율법을 받아 내려와 하나님의 성막 건축 명령을 전달함으로 건축이 진행되어 출애굽 한 그 이듬해 정월 초하룻날에 모든 역사가 마쳐졌으므로(출 40:1-2), 대략 7개월 정도의 기간이 걸렸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임재하여 그들과 만나고 증거의 말씀을 주시는 것을 통해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 사역을 해 나갈 것에 따라서 그 필요로 있게 됩니다. 제사장이 성막 뜰에서 행한 제사에 있는 속죄는 성소의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법궤)는 속죄판(속죄소)가 덮고 있으며 그룹이 양 옆에서 그 속죄판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 성막 생활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한 지파인 레위 지파를 성별하여 맡기셨으며, 제사장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맡도록 하였습니다. 이들 모두는 성막 생활을 위해 그들에게 분배해 주실 땅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그들이 분배 받을 땅의 몫은 그들의 형제인 열 한 지파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열 한 지파는 자신들이 분배 받은 땅 외에 레위 지파가 분배 받을 땅을 더하여 분배 받았습니다. 이는 레위 지파가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성막 생활에만 전념하여 그들이 맡은 직무를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해서 이스라엘 열 한 지파는 레위 지파가 분배 받을 몫의 땅을 대신 맡아 관리합니다. 레위 지파가 온 이스라엘이 해야 할 성전 생활을 대신 맡아 직무를 수행하는 까닭에 이스라엘 열 한 지파는 레위 지파를 위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분배 받은 땅에서 레위 지파의 몫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자신들이 분배 받아 얻을 땅의 소산을 열 한 지파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레위인이 받을 십일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십일조 규례를 지킴에 있게 하시면서 이 십일조를 하게 하신 이유를 더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두를 이스라엘이 알게 하시는 말씀을 다음 구절에서 해 주셨습니다.
(1)첫 번째 십일조인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 민수기 18:1-32
(2)두 번째 십일조인 절기 축제를 위한 십일조 : 신명기 12:5-12, 14:22-27
(3)세 번째 십일조인 구제를 위한 십일조 : 신명기 14:28-29
해서, 모두 세 가지의 십일조를 통해서 나타내 알리셨습니다. 이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며 여기에 예수께서 언급하신 십일조의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 십일조 :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그 첫 번째 구절이 민수기 18장입니다. 이곳은 다음의 세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1)레위 지파와 제사장에게 맡겨진 직무(민 18:1-7)
1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조상의 가문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너와 네 아들들은 너희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니라 2너는 네 형제 레위 지파 곧 네 조상의 지파를 데려다가 너와 함께 있게 하여 너와 네 아들들이 증거의 장막 앞에 있을 때 그들이 너를 돕게 하라 3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제단에는 가까이 하지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4레위인은 너와 합동하여 장막의 모든 일과 회막의 직무를 다할 것이요 다른 사람은 너희에게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니라 5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다하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6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의 형제 레위인을 택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7너와 네 아들들은 제단과 휘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임을 당할지니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1)은 성소에서 일을 볼 때 누구든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그 책임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을 돕는 레위인들이 책임을 져야 하며, 또 제사장 일을 잘못 보는 경우가 있을 때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레위 지파와 제사장에게 맡겨진 직무에 대해 지시해 줍니다. 민수기 3-4장에서 알려주시고 있는 성막의 역할과 진 이동시의 맡은 일에 의하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성소 봉사, 성막 이동시 포장의 일을 맡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의 게르손 가문의 아들들은 성막, 장막, 덮개, 휘장, 줄을 맡아 책임지며, 고핫 가문의 아들들은 증거궤(법궤/언약궤), 상, 등 및 그 외 기구들을, 므라리 가문의 아들들은 널판, 기둥, 받침, 말뚝, 줄을 맡아 책임집니다.
(2)성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맡은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민 18:8-20)
8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거제물 곧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한 모든 헌물을 네가 주관하게 하고 네가 기름 부음을 받았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너와 네 아들들에게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주노라 9지성물 중에 불사르지 아니한 것은 네 것이라 그들이 내게 드리는 모든 헌물의 모든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물은 다 지극히 거룩한즉 너와 네 아들들에게 돌리리니 10지극히 거룩하게 여김으로 먹으라 이는 네게 성물인즉 남자들이 다 먹을지니라 11네게 돌릴 것은 이것이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거제물과 모든 요제물이라 내가 그것을 너와 네 자녀에게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주었은즉 네 집의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니라 12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3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의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서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14이스라엘 중에서 특별히 드린 모든 것은 네 것이 되리라 15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처음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처음 태어난 부정한 짐승도 대속할 것이며 16그 사람을 대속할 때에는 난 지 한 달 이후에 네가 정한 대로 성소의 세겔을 따라 은 다섯 세겔로 대속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니라 17오직 처음 태어난 소나 처음 태어난 양이나 처음 태어난 염소는 대속하지 말지니 그것들은 거룩한즉 그 피는 제단에 뿌리고 그 기름은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릴 것이며 18그 고기는 네게 돌릴지니 흔든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 같이 네게 돌릴 것이니라 19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20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성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 가운데 태우지 않고 보관되어지는 제물2)은 그들의 생계를 위한 몫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오직 성전을 돌보고 제사를 드리는 일과 이스라엘 백성을 신앙으로 교육하는 일만을 전담했기에 이스라엘 열 한 지파처럼 분배 받은 땅이 없으므로 아무런 수입이 없는 그들을 위한 생계 수단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그들의 몫으로 허락했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제사장에게 주신 ‘몫’은 ‘직무에 응하여 받는 몫’이었습니다. 그 제사장의 몫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20절). 오직 여호와이신 하나님이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받을 몫이라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 바로 그 몫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받을 몫이 되심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3)제사장을 돕는 레위 지파에게 돌아갈 몫(민 18:21-24절)
21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하지 말 것이라 죄값으로 죽을까 하노라 23그러나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24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성소에서 일하는 제사장의 몫에 이어서 또한 그 제사장을 돕는 일에 있는 레위 자손들에게 돌아갈 몫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가져오는 십일조를 레위인들의 몫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분배 받아 모두 다 나누어 가질 몫이 있다 할지라도 레위인들에게는 돌아갈 몫이 없는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십일조를 레위인들의 몫으로 주심으로 레위인들이 회막(만남의 장막)에서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볼 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인들이 받을 몫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인 십일조를 통해서 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하나님의 전인 회막에서 일하게 한 것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수입니다.
(4) 레위인의 십일조(민 18:25-32절)
2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6너는 레위인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아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27내가 너희의 거제물을 타작 마당에서 드리는 곡물과 포도즙 틀에서 드리는 즙 같이 여기리니 28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29너희가 받은 모든 헌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30이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그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가져다가 드리고 남은 것은 너희 레위인에게는 타작 마당의 소출과 포도즙 틀의 소출 같이 되리니 31너희와 너희의 권속이 어디서든지 이것을 먹을 수 있음은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임이니라 32너희가 그 중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드린즉 이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 그리하여야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인 십일조를 레위인들이 받을 몫이 되게 하시면서, 그 레위인들 또한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중에서 또 십일조를 떼어 하나님께 바치게 하셨으며,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받은 몫을 가족들과 함께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인 그 레위인의 십일조를 이스라엘 백성이 농사를 지어 하나님께 바치는 곡식이나 포도즙틀에서 짜내어 내게 바치는 포도즙과 똑같이 여겨 받으실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께 바친 예물인 레위인의 십일조를 하나님께서는 모두 아론 제사장의 몫이 되게 함으로 그 자손들의 식량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에게, 그래서 가나안에 입성할 이스라엘에게 왜 그와 같은 의무가 주어졌는지요.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세상 나라와 전혀 성격이 다른 한 나라를 세우십니다. 하나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되는 신정국가의 개념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왕국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제사 제도의 보존 언약’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입니다(시 50:5). 이스라엘은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입니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그 언약 관계에서 의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확증해 나가셨는데 그 언약의 관계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르게 하신 순종과 충실을 표현하는 제사에 의하여 유지해 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시 이 제사 제도를 통하여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계시해 나가시는 방식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보이시는 것을 통하여 장차 인간의 죄를 속죄할 어린양 되신 독생자의 '헌제사역'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제사 방식에는 번제, 소제, 확목제, 속죄제, 속건제인 5대 제사가 사용되었는데, 이들 각종 제사 규례가 제물로 드려지는 첫 새끼와 첫 맏물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어린양의 희생 사역을 통하여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드리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형적으로 예표하셨습니다. (3)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르러 세상에 오시고 자신을 희생 제사의 제물로 드려지기까지는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대로 지속적으로 계승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헌제사역에 의한 희생 제사가 드려짐으로 제사의 마침이 될 때까지는 제사 제도가 지속적으로 계승되어와야만 했고, 그렇게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제사 제도가 보존되어야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제사법들이 보유하고 있는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곧 제사의 절차에 관한 규례, 제물들에 관한 규례,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기구들에 관한 규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에 관한 규례 등 부수적인 규례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절기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절기에는 가장 큰 절기로 지켜지는 유월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수장절[초막절, 장막절] 삼대절기를 비롯하여서 이 삼대절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무교절, 초실절이 있고 또한 부림절과 수전절이 있으며, 대속죄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식일, 안식월, 안식년, 희년의 절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실상 1년 전체가 절기로 되어 있어 절기 속에서 생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절기 제도 속에 두는 것은 절기를 통하여 제사가 멈추지 않고 시행되어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가 하면 절기에 이스라엘 온 백성이 집중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서 성전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제사와 절기와 성막과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제사와 절기와 성막은 한 묶음이 되어서 함께 같이 존재해 나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손 대대로 제사를 유지하고 보존해 나가게 하였습니다. 이때 성막을 관리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자들이 있어야 하기에 열 두 지파에서 레위지파를 성별하여 제사와 관련한 일만을 하며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레위인은 그런 면에서 다른 열 한 지파에게 영적인 기업이 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레위지파를 제외한 다른 열 한 지파는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을 분배받아서 땅의 분배가 없는 레위인의 기업이 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역할을 십일조 제도를 통해서 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레위인들이 먹고 사는 생계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보장이 되는 속에서 오직 성막(성전 )중심의 생활에만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민 18:24). 그래서 십일조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일조 제도에서 첫 번째 십일조입니다.
이 십일조 제도를 지켜 나가는 것은 열 한 지파만이 해 나가야 하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은 레위인들도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동일했습니다. 해서, 레위인들도 역시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일조를 취하여 아론의 제사장들에게 하였습니다. 이는 민수기 18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그들이 ‘회막에서 일한 보수(報酬)’였습니다. 레위인으로서 같은 레위지파인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기업으로 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 제사장을 하나님이 기업이 되어 주셔서 먹이신다고 하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래서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민 18:26)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거제(擧祭)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라고 한 것은 모든 제물 전체를 들어 여호와께 돌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에서 하라고 하셨으며, 그렇게 레위인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를 하나님은 제사장의 양식으로 제공하여서 그들의 생명을 보살피고 보존해 나가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십일조의 준수는 열 두 지파 모두인 이스라엘 전체가 지켜 나가야 하는 민족 공동체적인 제도였습니다.
두 번째 십일조 : 절기의 축제를 위한 십일조
신명기 12장 1-12절 / 1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2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4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5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8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9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11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2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신명기 14장 22-27절 / 22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십일조에는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제1의 십일조) 이외에도 다른 의미에서 드리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첫 번째에 이은 이 십일조를 ‘두 번째 십일조(제2의 십일조)’라고 명명하여 말할 수 있는데, 신명기 12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우상을 제거하고 그곳을 거룩한 땅, 곧 하나님의 성지가 되게 하신 곳을 이스라엘에 기업으로 주어 그곳에 거주하게 하여 안식에 있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곳에서 제물을 드리되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제물을 먹으며 즐거워하라고 하면서 그 즐거움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는 가운데서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곧 번제, 희생, 십일조,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택하여 지정한 한 곳에 가져다가 땅에 들어오게 된 즐거움에 의하여 즐거움을 함께 갖고 나누는 축제(Festival Tithe)의 분위기에서 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가나안에 들어온 즐거움을 누리는데 그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일조는 레위인을 섬기는 공궤의 목적에 의해서 하기도 하지만, 레위인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이 즐거움을 같이 갖고 나누는 누림에 의해서 하게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십일조는 해마다 농사를 지은 토지에서 나오는 모든 곡식의 소산에서 십일조를 바치는데,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 및 생축의 십일조와 함께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로 바친 후 남은 것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성소로 가져가서 잔치를 위한 십일조를 베푸는데 사용하는 ‘축제의 십일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의 십일조를 소와 양의 첫 새끼와 함께 하나님께서 성소로 지정하실 곳으로 가지고 가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으며, 언제나 하나님 여호와께 순종하며 경외함에 있는 것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해서 두 번째 십일조는 절기의 축제 속에서 십일조를 바칠 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공동식사를 하고 그들이 수고한 모든 일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 주신 것을 기뻐하며 그 자리에 레위인들도 참여시켜 함께 기쁨을 갖게 하는데 쓰였습니다.
세 번째 십일조 : 구제를 위한 십일조
신명기 14장 28-29절 / 28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4장 28-29절에서는 앞서인 22-27절에서의 두 번째 십일조 외에 이스라엘 백성이 드릴 십일조로 또 한 가지의 십일조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세 번째 십일조라고 명명하여 말할 수 있는데, 가난한 자들과 객(나그네,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을 구제하게 하기 위해서 명령되어졌습니다. 이스라엘 한 백성이요 이스라엘 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약한 상태에 있거나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지내는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 보살필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의 통치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며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 힘이 부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3년, 곧 제3년과 제6년마다 하게 하셨으니 매해 수확에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의 십일조를 따로 구별하여 마을의 창고에 쌓아 놓아 모아두었다가 매3년 끝에 저장해 두었던 십일조를 꺼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돕는 데 사용하는 구제의 십일조로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 십일조가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대로 쓰이도록 하였습니다.3) 그 대상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과 마을에 머물고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었으며, 그들이 와서 양식으로 필요한 만큼 마음껏 자유롭게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세 번째 십일조는 사회적, 경제적 가난하고 빈핍함에 있었던, 그리고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약자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하는 십일조입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있는 십일조
이상에서의 십일조에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 “공의와 자비와 믿음의 더 중요한 것”,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율법 가운데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 “율법의 더 중요한 것들인 의와 긍휼과 신뢰”, “정의, 자비, 믿음과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 등으로도 번역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1)의, 공의로도 번역되는 정의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합되는 가치 있는 올바른 삶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일조를 행하게 하는 것에 있는 정신인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제사로 맺어진 언약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중단되며 끊어짐이 없게 하여 이 제사에서 계시해 주시고 있는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속죄 사역을 행하실 메시야(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시는 복을 누림에 있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기업이 되신 복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 지파도 빠짐없이 있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온 이스라엘이 잘 알고 십일조를 행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 가치 있는 생활을 살아가는 삶에 있어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뜻과 하나님의 뜻과 다르지 않고 같습니다. 이를 훗날 사도 바울은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삶에 있는 것으로 말씀했습니다(갈 5:16-26).
(2)인 또는 자비로도 번역되는 긍휼은 불쌍한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보고서 그들을 향하여 베푸는 친절이나 호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로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소홀히 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시니 하나님이 그들의 복(기업)이신 것에서 제외되지 않게 살펴 챙기시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레위인들을 위한 생계를 책임지는 양식을 제공하고, 봄걷이 가을걷이에 있는 추수의 즐거운 축제에서 그들이 소외되어 빠지지 않도록 함께 자리를 같이 하며 온 가족과 함께 음식을 먹게 하며, 나그네를 비롯한 외지인,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 또한 보살펴 보호하게 하는 것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십일조를 행하게 하신 것에 있는 정신에 잘 나타나고 있으니,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다스리시는 주이심에 따라 자신들을 살피시어 생명을 안전히 지켜 보호하시며 평안히 살아가는 복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주이신 것이 자기들이 참으로 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즐거이 살아갑니다. 이를 하나님이 주신 기업,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토지의 분배에 의해 몫에서 얻는 열매에서 보며, 자신들 또한 의로우신 하나님을 따라 십일조에 있는 하나님의 정신을 마음에 품고 생각하며 실행하며 의롭게 살아갑니다.
(3)믿음, 신앙은 신뢰로도 번역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확신이나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이 돈독하게 형성되는 것을 나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는 이스라엘 백성 간에서도 동일하니, 십일조를 통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레위인을 대하는 이스라엘 각 지파가 갖는 관계는 ‘한 백성’인 깊은 신뢰를 가지고 대하는 것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 의도
십일조 역사에서 보는 십일조 율법이 위의 설명에서 보는 바인데 따라 예수께서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더 중요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정의와 긍휼과 믿음,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복이신 표현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복이심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표출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십일조로 행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십일조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엄격히 해 나가게 강조한 것은 십일조에 나타내시고 있는 율법의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것들은 버렸습니다. 그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도 신경을 써서 십일조를 해 나간 것은 십일조를 더욱 세세히, 세심하게 해 나가고자 한 것으로 너무 과하게 신경을 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문제가 있거나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십일조의 율법이란 큰 줄기에서 보다 세밀히 가져나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것을 문제 삼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문제 삼아 지적하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함에 있어야 할 것”인데 “이것은 행하면서 저것은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세세하고도 세심히 신경을 써서 아주 작은 것까지도 놓치지 않고 해 나가려고 했다면 그렇게 하는 십일조에 있어야 할 것인 율법이 품고 있는 정신인 참으로 크고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더더욱 마음을 기울이고 신경을 써서 놓치지 않도록 해야 했는데 정작 있어야 할 그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러했는가 하는 그 이유를 말씀해 알려주셨습니다. 십일조에 정작 있어야 할 것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기 때문입니다. 십일조에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의, 자비, 믿음과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것” 그 모두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버려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에서 ‘버렸도다’는 말은 ‘(정의, 긍휼, 믿음을 알면서도) 지나치다, 비켜가다’는 뜻입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율법임을 모르고 놓쳐 지나치는 것이 아닌, 이스라엘이 지켜온 십일조 역사에서 있어온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보아왔기에 알면서도 십일조를 어떤 방법으로 준수하게 할 것인가에만 신경을 쓰고 정작 신경을 써야 할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생각을 갖지 않고 지나침으로 놓쳐 버린 것입니다.
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율법으로 가져나가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것에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가져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리고, 단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들을 따라서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할” 율법 준수의 균형이 얼마나 심각하게 깨어져 있는지를 예수님은 한 해학적인 유비(類比)를 통해 인상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고 있다”(24절).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부정한 자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살이를 삼키는 것 같이 사소하고 율법의 작은 조항 – 자신들이 만든 자의적인 조항 - 에 저촉되는 것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이로 인해서 자신들이 부정한 자가 될 것을 염려하고 있지만, 참으로 중요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범하는데 있어서는 낙타를 삼키는 것과 같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갖지 않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한바 그대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렘 17:9)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아주 작은 것에서는 부정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음료에 혹시나 하루살이가 빠져 죽어 있지 않을까 살피며 부정한 곤충인 하루살이를 걸러내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그러한 그들 자신의 실상은 하루살이 곤충으로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 그보다 더 큰 부정한 동물로 다루어지는 참으로 큰 동물인 낙타를 통째로 삼킴에 있는 부정한 자였습니다. 이렇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 생활에서 보이는 외식은 그들이 부정한 자인 것에서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정에서 깨끗함을 입은 정결한 자가 되지 않고서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에 의한 십일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지혜에 의해 이 사실을 인식하고서 정결케 하시는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했으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은 자는 그분의 의로우심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에 의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함”에 있는 올바른 십일조를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외식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닌 올바른 십일조에 있게 하시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우리 또한 자신을 주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공급되는 의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의와 인과 신의 충만에 있게 해 나가십니다.
십일조의 변역인 ‘더 나은 것’ 헌금(연보)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신 십일조를 통해 헌금을 배웁니다. 헌금에는 십일조의 정신과 그 의미가 있습니다. 헌금은 십일조와 또 다른 것으로 십일조와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라, 헌금에서 십일조에 있어온 정신과 원리를 따름에 있습니다. 이러한 헌금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행하여 온 십일조보다 ‘더 나은’, ‘더 좋은’ 것입니다. 헌금은 옛것으로 있는 십일조의 변역(變易)인 새것으로 행하는 것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옛것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새것을 행하는 것에 있는 교회인데, 새것을 두고 옛것을 고집하며 따름에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행하여 온 헌금이라는 것이 없으면, 그래서 옛것의 변역인 새것에 있는 것이 없다면 그 새것이 올 때까지 옛것을 행함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나,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보는 것처럼 헌금을 통해 성도를 섬겨 그들의 믿음을 세워나가는 ‘더 나은, 더 좋은’ 것에 있어 왔습니다.
이 헌금에서 보게 되는 것이 예수께서 십일조를 언급하시며 말씀하신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입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인간의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밝히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십일조에 의해서 행할 수 있도록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율법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의한 구속을 통해 온전히 이루시고는 그 공급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공급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헌금(연보)를 통해서 하게 했습니다. 아론과 그의 후손들을 비롯한 레위인들이 맡았던 성막에서 봉사하는 직무는 교회를 봉사할 직무를 맡은 자로 새롭게 세워졌으며, 목사(목사요 겸하여 교사)와 장로와 집사로 구분되어 목사는 말씀을 증거하여 성도의 믿음이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려 견고하게 하는 일을, 장로는 성도의 믿음이 흔들림이 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서서 사는지를 살펴 감독하는 일을, 집사는 성도의 가정을 살펴 빈핍함으로 믿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자를 돕는 구제하는 일을 합니다.
이 삼직(三職)에서 장로와 집사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무(專務)합니다. 그럼으로써 목사는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자들의 ‘영적인 기업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런 생업이 없는 목사에 대하여 생업을 가진 성도는 ‘물질적인 기업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목사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할 수 있도록 성도는 물질로써 돕는 봉사의 직무를 또한 충성스럽게 수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봉사하는 이들을 지원할 필요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18절의 말씀은 신자들이 목사를 어떻게 잘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신약 교회에서 헌금(연보)의 성경적인 원리는 목사가 말씀 증거를 위한 연구와 목회에 몰두 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신과 가족의 필요를 위한 세속적인 일들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때 목사가, 그리고 신자가 돕는 봉사의 직무는 구약에서의 의무의 법에 의해서가 아닌 ‘믿음의 법’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에 의해서 하게 되는데, 여기에 적용되는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균’케 하는 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3-15절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 헌금을 하게 했을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거두어다가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평안하게 살게 하고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곤고한 형편에 처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고린도교회가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를 알려서 공평[평균]하게 하려는 것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넉넉한 자들은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도울 수 있으므로 자신들의 여유 있는 것으로 돕고 또한 훗날 고린도교회에 어려움이 닥쳐 곤란을 겪으면 이들을 통하여 도움을 받았던 자들이 다시 어려움에 처한 고린도교회를 도움으로써 서로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설명을 출애굽기 16장 18절을 인용하여서 하였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기에 성도는 이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서 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8:9).
이런 원칙에 의해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는데 여기에 따라야 할 신앙적인 자세와 태도가 있습니다. 신약교회에서의 연보가 구약에서는 십일조 규례를 통해서 의무로 주어졌는데 이스라엘은 공동체의 일원인 레위인을 책임지고 있는 자들로서 마땅히 섬겨야 할 의무를 짊어지고 그에 대한 본분을 다하여서 행해 나갈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십일조를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자신들이 하여야 할 십일조 준수를 기쁨으로 하여야 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러한 정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약 교회는 교회를 봉사하는 이들에 대해서나 또한 한 공동체의 일원인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을 섬겨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헌금해야 할 실제적인 책임으로서 헌신적 지원의 헌금이 요청됩니다.
이상에서 보는 말씀을 증거함에 있는 설교와 가르치는 일을 맡은 목사를 돕는 봉사의 직무로 행해지는 헌금은 구약에서의 두 번째 십일조인 축제를 위한 십일조와 세 번째 십일조인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돕는 구제를 위한 십일조가 있게 된 것에서 보는 일이 교회에서도 그대로 있기 때문에 이것에 쓰일 헌금의 필요성이 있게 됩니다. 주의 말씀이 증거되는 것과 함께 갖는 ‘주의 만찬(식탁)’을 비롯한 성도의 친밀한 교제에 쓰일 헌금이 필요하며, 성도들 가운데 긴급히 또는 지속적으로 구제해야 할 자가 있게 될 때 쓰일 헌금이 필요합니다. 이 모두를 포함해서 오늘날에는 성도들이 예배를 비롯한 회집을 가져나가는 교회의 유지를 위해 헌금이 필요합니다.
이 헌금을 어떻게 가져나가야 하는지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인 고린도후서 8-9장에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은 “주께 먼저 자신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으로 교회에도 헌신하는 정신을 가지고 ①힘써서 ②자원함으로 ③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④있는 대로 ⑤준비하여서 ⑥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헌금이라야 하나님께 헌상(獻上)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연보 액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 먼저 자신을 드린 ‘전부’입니다. ‘최소한’의 연보가 정해진 기준에 의해서 하는 것도 아니며, ‘최대한’의 연보가 정해진 기준에 의해서 그만큼까지는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부’란 ‘믿음의 법’에 의하여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분량’이기에 ‘믿음의 분량껏’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최소한의 분량도 없으며 최대한의 분량도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은 주께 먼저 자신을 드리고 그에 따라서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기에 이미 자신을 전부 드린 것으로 출발합니다. 얼마를 마음에 정하여서 하든지 간에 그것이 믿음의 분량껏이라면 그것은 전부입니다. 자신의 생명도 모든 소유도 다 주의 것이며, 따라서 주의 뜻을 좇아서 선하게 재물도 사용합니다. 이를 자원함으로 그 마음에 정하여서 있는 대로 힘껏 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얼마를 각각 그 마음에 정하여서 하든지 간에 구약의 십일조에서 보는 ‘하나님의 기업’인 하나님이 복 주심을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부요함을 베푸는 것에 의해서 합니다. 이 새로운 헌금의 법칙을 가르침 받습니다.
바울이 가르친 헌금의 원리와 정신, 그리고 자세와 태도는 “헌금하는 제도로 정해진 규칙이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께로부터 헌금에 대한 세세한 규칙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바울이 자기 임의로 헌금의 규칙을 만들어서 그것을 교회가 따르고 지켜야 할 법으로 갖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만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금을 고린도교회에 하도록 권하는 데서 그들이 어떤 원리와 정신으로 신앙적으로 헌금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나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헌금의 원리와 정신으로 등장하는 기준은 언제나 그들의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드림에서 찾아집니다. 그래서 주께서 그에게 공급하신 사랑(자비)의 원천에 의해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한 그와 같이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직무’인 헌신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교회는 이 가르침에 의해서 교회 생활에서 헌금 생활을 믿음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교회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
..............................................................
1)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고핫(그핫)과 므라리이며, 이중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고, 아므람은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을 낳았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인데, 엘리아살은 비느하스를 낳았고 비느하스는 아비수아를 낳았으며…아히둡은 사독을 낳았고 사독은 하이마아스를 낳았고…아사랴를 낳았으니, 아사랴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한 자이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에 이르기까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계승해 왔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산헤드린공회의 한 파인 사두개파에서 제사장을 세웠는데, 이들 사두개파는 사독의 후예라고 보고 있다.
2) (1)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소유 가운데 하나님께 들어 드린 거룩한 예물 –지성물 - 인 ‘거제물’은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몫이었다. 이 예물의 종류는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거룩한 예물이다(민 18:9). 이 예물에서 번제단의 불에 가까이 하지 않은, 곧 불사르지 않은 제물이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 (2)뿐만 아니라 예물로 바쳐지는 여타 제물들의 일부는 물론 모든 요제 – 하나님께 앞 뒤로 흔들어 드림 - 제물들도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 (3)또한 첫 소산, 곧 처음 익은 모든 열매를 제사장의 몫으로 주셨다. (4)그리고 백성들이 드린 서원 예물을 제사장의 몫으로 주셨다. (5)사람과 짐승의 초태생을 제사장의 몫으로 주셨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짐승의 경우처럼 제물로 바쳐질 수 없으므로 몸값, 곧 속전으로 대신 치르게 하였으니 ‘맏배(장자) 속전’이다.
3) 구제를 위한 십일조로 하나님께 바쳐진 세 번째 십일조(제3의 십일조)를 ‘축제를 위한 십일조’에 사용된 ‘제2의 십일조’의 또 다른 한 면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인 제1의 십일조가 있고, 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고 나서 또 하나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는 제2의 십일조가 있는데, 이 제2의 십일조가 매년 중앙 성소에 나아가서 축제의 절기를 지키며 사용한 ‘축제의 십일조’로 쓰였으며, 또한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3년마다 ‘구제의 십일조’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축제의 십일조’와 ‘구제의 십일조’를 하나의 십일조인 ‘제2의 십일조’로 보지 않고, ‘축제의 십일조’는 ‘제2의 십일조’, ‘구제의 십일조’는 제3의 십일조‘로 각각 별개로 보며, 그에 따라서 ’축제의 십일조‘와 ’구제의 십일조‘는 각각 별개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이해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