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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신구약성경을 통털어 에베소서 4:11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목사와 교사" 라는 구절에서 현대 목사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정당성을 찾고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을 <애절하고도 절박하게> 붙잡고 이 구절에 등장하는 "목사"와 "교사"를 한데 묶어 현대교회의 "목사"로 볼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는 몰라도..이 구절에서 유일하게 "목사(pastor)"로 번역된 원어는 "포이멘"인데 이 "포이멘"이란 단어는 이 구절을 제외하고는 신구약 성경에서 모두 예외없이 "목자(shepherd)"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포이멘"이란 단어는 "풀을 뜯기다, 돌보다" 란 의미의 히브리어인 "라아"의 헬라어역어로 <구약 70인역>에서 등장한 것으로, "목자"라는 번역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보겠습니다.
따라서 백번 양보하여 이 분들의 주장대로 성경에 나오는 <"목자" = 현대 한국교회의 "목사" >라고 인정해 드리고 이러한 등식의 근거하에 이야기를 전개시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올바른 이해를 위해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성경에 나오는 <목자>라는 직업이 당시에 과연 어떤 일들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당시에 양들에게 "풀을 뜯기고 돌보는" 일이 과연 어떤 일이었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이 선한 목자에 비유되셨는지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어 정확히 짚어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원래 농본주의였던 한국에서 자란 성도들은 성서시대의 목자에 대해 어느 정도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를 갖고있는게 사실입니다. 즉, 시원하고 아름다운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 초장에서(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여유있고 한가롭게 양떼들에게 꼴을 먹이고 있는 그런 아름다운 이미지 말입니다. (굳이 한국적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대관령 목장쯤 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이는 유대광야란 곳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오해에서 빚어진 크나큰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서시대 목자들이 양들을 치던 유대광야는 갖가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위험천만한 곳이었습니다. 먼저 광야의 지형 자체가 험준한 산악들과 골짜기, 때로는 깊은 낭떠러지가 이어지는 위험한 곳이 대단히 많았고 호주나 뉴질랜드같은, 평지로 끝없이 이어지는 천혜의 목초지와는 전혀 달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23:4)"라는 표현을 썼겠으며, 여행을 가 본 사람들로부터 "작은 그랜드캐넌" 이라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늘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먹잇감을 찾던 굶주린 맹수들뿐 아니라 사회에 적응 못한 부랑자들로 이루어진 강도들의 습격에다, 이글이글 타는듯한 한낮의 뜨거운 햇빛 등.. 생명을 위협하는 온갖 요소들이 잠재해 있는 이러한 광야에서 춥고 무서운 밤을 며칠씩 보내야 하는 생활이 바로 목자들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광야투어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룹을 지어 움직이고 밤에 잘때는 텐트를 치고 돌아가며 불침번도 서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때로는 높은 바위를 올라타야 하고 때로는 험준한 골짜기를 내려가며 이런저런 장애를 모두 극복하며 양떼들을 이끌고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으며, 또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 과연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즉 요즘말로 치면 3D업종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완전 노가다> 였다는 말입니다. (거기다 조금만 놀라도 잘 흩어지는, 두려움이 엄청 많은 동물인 양떼들이니 오죽했겠습니까?)
즉 당시에 <목자>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온갖 고난을 감수해야 하고, 때로는 양떼들을 제대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희생이 따른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실을 온 삶으로 그대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힘들었던 목자의 일이었기에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농경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하면서 목자들은 더욱더 입지와 위상이 갈수록 나빠져서 결국엔 광야을 떠도는 부랑자 내지는 사회의 최하층민에 속하는 극빈자들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당시엔 수많은 가축들을 개인적으로 소유한 부호들이 많았기 때문에(욥1:3, 삼상25:2) 당시는 소정의 품삯을 받고 주인을 대신해 양떼를 돌보아 주는 삯꾼목자가 다수를 차지했고 따라서 삯꾼목자도 당연히 목자였음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삯꾼은 목자가 아니라고 하셨을까요?(요10:12) 그 이유는 전후구절의 내용을 보면 바로 명확해 집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1-15)
바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 목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꺼이 자기희생도 감수해내는 선한 목자의 반대개념으로서 삯꾼은 <본질적으로는> 양을 위해 헌신하는 참된 목자는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삯꾼으로서는, 워낙 척박한 광야의 환경에다 또 24시간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그리고 양들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보니 내 양으로서의 책임과 애착을 느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위기에 처한 양 몇마리를 구하려고 굳이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물론 당시 품삯을 받고 일을 했던 삯꾼목자는 나름 프로정신을 가지고 어지간한 위험은 무릎쓰고라도 양떼를 돌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부득이한 손실은 양떼의 주인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삯꾼 품삭의 몇배 아니 몇십배 아니 몇백배..의 품삯을 받으면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양들에게 꼴을 먹이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깊은 사망의 골짜기로 밀어넣는다면 과연 이런 분들이 최소한의 삯꾼목자의 자격이라도 있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겔34:2-3)
자신이 마치 사도 바울의 후예(?)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일단 품삯이나 설교권이나 치리권 등의 주장에 앞서
신약에 와서 성서시대의 목자의 삶이 어떻게 바울 자신의 삶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지 그리고 과연 본인들이 <목자>란 말을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길 적극 권면 드립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고후11: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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