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의 이쁜이
글 : 권창순
내가 오늘 경춘선 전동차를 탄 것은 김유정 소설 [산골]의 이쁜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꽃들이 나비 되어 날아다니는 이 좋은 봄날에 내가 뭐 열여섯 이쁜이를 만나 어떻게라도
손목 한번 잡아 보려고 가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그런다고 응해줄 이쁜이도 아니고 잘
못하다간 석숭이에게 몰매를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리가 없다.
그럼 네가 뭔데, 서울 간 도련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쁜이를 만나러 가느냐? 하고 나를 탓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나는 그런 사람에게 당당하게 이 편지를 내밀 것이다.
이쁜이는 오늘도 분명 우체부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같이 멀리 도망가자던 도련님이 서울로 저 혼자만 삐죽 달아난 것은 그 속이 알 수 없고 사나이 맘이 설사 변한다 하더라도 잣나무 밑에서 그다지 눈물까지 머금고 조르시던 그 도련님이 이제와 싹도 없이 변하신다니 이야 신의 조화가 아니면 안 될 것이라고 산비알 호양나무 밑에 와서 한 손으로 바구니의 편지를 꺼내어 행주치마 속에 감추어 들고 석숭이가 쓴 편지가 잘 찾아갈지 미심도 하거니와 이걸 보고 도련님이 꼼맥하여 뛰어올 겐지 장담 못할 일이지만 그래두 이 옷고름을 두고 가신 도련님이 안 오실 리 없으리라고 혼자 서서 우기며 우체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릴 것이다.
그런 이쁜이에게 이 편지를 전하러 가니 누구든지 이젠 나를 탓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경춘선 전동차를 타고 이쁜이를 만나러 실레마을에 가는 것은 이쁜이가 그토록 애간장 녹게 기다리던 도련님의 편지 배달 때문인 것이다. 오늘하루 나의 직업은 퀵, 러브레터 배달부인 것이다.
그럼 독자 분들도 이쁜이 못지않게 편지 내용이 궁금할 것이다.
그러니까 대충 어떤 내용인지 침을 발라 보자고 할 테지만 산골의 이쁜이를 생각한다면 차마 그럴 순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 살짝 독자 여러분들께 말씀드리자면 이 편지 겉봉엔 그때 이쁜이에게 떼어준 저고리 고름과 똑 같은, 다른 한 짝의 저고리 고름 사진이 우표로 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독자 여러분들은 기쁘고 가슴 설레리라고 믿는다.
어느 날 나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그런데 저장된 전화번호도 아니고 처음 보는 낯선 전화번호라 끊어 버렸다. 그런대도 전화기는 계속 울렸다. 할 수 없어 전화를 받았다.
전화 내용은 이랬다.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실레마을)에 있는 [산골]의 이쁜이에게 편지를 갖다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서며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외쳤다. 전화 속 앳된 목소리의 남자는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하며 만날 장소를 알려 주었다.
나는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전동차를 갈아타며 약속 장소를 향해 부랴부랴 뛰었다. 많은 사람들이 관악산 산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해물전과 동동주를 앞에 두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가 싱글싱글 웃었다. 산골에서 언젠가 커다란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떡비구리 한놈을 우물거리고 있는데 이쁜이가 쌔근쌔근 가쁜 숨을 쉬어가며 그걸 보다가 바로 발 앞에 도라지순이 있음을 발견하고 꼬챙이로 막 캐려할 즈음 등 뒤에 나타나 물푸레나무 토막을 한 손에 지팽이로 짚고 붉은 얼굴에 땀바가지가 되어 식식거리며 싱글싱글 웃던 그때처럼 그가 웃었다.
그리고 자기도 이쁜이 생각에 뛰어 왔더니 숨이 가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동주를 따라 쭈욱- 마시기를 권했다. 우리는 몇 잔을 연거푸 마셨다. 술에 취하자 춘천 김도삿댁 도련님은 이쁜이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내게 편지 한통을 내 놓았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이쁜이에게 아무쪼록 잘 전달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석숭이에게 … 라며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학사주점을 나와 고시촌골목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도련님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다보았다. 그런 도련님을 바라다보며 물푸래나무 토막의 지팽이 생각을 했고, 그 지팽이가 지금 도련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편지는 그렇게 도련님을 만나 직접 받은 것이다. 나는 지금 가슴이 마구 뛴다. 경춘선 전동차도 가슴이 마구 뛴다. 이 편지를 받으면 산, 마을, 돌, 물, 길의 [산골] 이쁜이는 얼마나 기뻐할까.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인 것이다.
언제나 노란 동백꽃 향기가 알싸한 김유정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실레이야기길을 향해 뛰었다. 도련님과 이쁜이가 만나던 수작골길을 향해 뛰었다. 오늘도 그 봄처럼 어김없이 뻐꾸기가 날아와 뻐꾹! 뻑꾹! 뻑뻐꾹! 운다. 저만치서 한 여인이 운다. 나물바구니를 툭, 땅에 떨어뜨려 놓고 치마폭으로 얼굴을 폭 가리고는 흐륵흐륵 마냥 느끼며 울고 섰다.
내가 인기척을 해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서럽게 울고 섰다. 나야 뭐 전집 속에서나 실레이야기길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일 뿐일 테니까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도 없으리라.
내가 한참이나 지나도 가지 않고 있자 그때서야 이쁜이가 울음을 멈추고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나는 얼른 배낭 속에서 도련님의 편지를 꺼내어 이쁜이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이쁜이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매처럼 편지를 채갔다. 한동안 편지를 읽더니 이쁜이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울음 삼킨 얼굴로 산을 내려갔다.
나는 이쁜이가 도련님의 편지를 받고 뛸 듯이 기뻐할 줄 알았건만 저렇게 힘없는 모습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차라리 도련님의 소식을 모른 채 우체부를 기다리는 게 이쁜이에겐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나의 두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이쁜이 어머니가 김도삿댁 씨종이고 보면 그의 딸 이쁜이는 잘 따져야 씨의 씨종이니 하잘것 없는 계집이지만 언제까지나 그렇다고 사랑에도 씨종이 있으랴.
내가 [소낙비]의 춘호의 처가 맨발로 더덕을 캐던 비탈길을 힘없이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숨이 곧 넘어갈 듯 헉헉거리며 석숭이가 뛰어 오더니 왜 우리 이쁜이가 울상이 되었냐고 원망하듯이 따졌다. 내가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않으면 곧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다. 내가 자주 전집이나 실레이야기길을 오가며 혹 서울의 도련님 소식을 전할까 노심초사하던 그였으니 어쩜 당연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내가 머뭇거리자 석숭이가 내 먹살을 잡았다. 그리고 내 허리께를 내려조겼다. 나는 [만무방]의 응오처럼 어이쿠쿠!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석숭이는 다신 이쁜이 곁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지만 왜 그리도 가슴이 시원한지 꽉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 뻥 뚫린 가슴으로 생강나무꽃향기가 드나들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