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탐방과 전주한옥마을 답사 - 역사를 수용하는 우리의 자세
역사학과 20154770 양은서
답사일이었던 5월 21일은 여름에 한창 접어드는 초입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답사에 대한 궁금증으로 역으로 향할 때에는 어떤 경험을 하고 오게 될지 자못 기대가 되었었다. 박경하 교수님이 일전에 답사에 관해 말씀하시길, 교수님이 회장으로 계신 고서연구회의 회원 분들과 같이 향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고서연구회의 분들과 함께 가는 것이니만큼 답사지는 전통이 아직 맥맥이 이어져 고서가 보존되고 유통되고 있는 지역인 전주였다. 교수님은 전주의 고서점에서 얻게 된 책들이 중요한 학술자료로 쓰이는 경우가 꽤 있다고 말씀하시며, 일견 평범해 보이는 고서적일지라도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작성자의 일상생활로 그 당시의 시대를 엿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학술 연구가 진전될 수 있다며 고서 수집의 중요성을 역설하셨다. 또한 전주는 예부터 대도시로 인구가 많고 문화가 발전된 고장이었으며, 그로 인해 향토 음식도 고유의 특색을 가지고 전승되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답사 버스에 타 전주로 향하는 길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을 곱씹으며 과연 직접 가 본 전주는 어떨 것인가 생각에 젖었었다.
전주에 도착하기 전 점심 때 쯤에 먼저 들른 곳은 삼례였다. 삼례에 들른 것은 그 곳의 책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셔였다. 삼례책박물관의 관장이신 박대헌 관장님은 책박물관 뿐만 아니라 삼례책마을문화센터를 기획, 개장 준비에 한창이신 분이었는데 기본적인 콘셉트는 헌책방으로 잡고 있다 말씀하셨다. 책박물관이라 함은 책의 역사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곳이며, 헌책방은 역사를 간직한 책들이 세월에 파묻히지 않고 다시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손에 오가는 곳이다. 책박물관을 경영하시며 그에 대한 기획전을 매년 여시고 연구를 하시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고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더 나아가 직접 고서를 만지고 거래할 수 있는 흐름까지 조성하셨다는 것이 굉장히 감명깊게 다가왔다. 삼례성당 옆에 위치한 책박물관은 일제시대의 양곡창고를 개조해 만든 공간이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무인책방이 있었는데, 헌책을 책장에 전시해 놓은 다음 책을 구매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누군가에게 돈을 건네지 않고 직접 돈통에 넣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무인책방을 전에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책박물관 앞에 위치한 무인책방은 무언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가게를 무인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그 곳에 들르는 사람을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니 책박물관장님은 이 박물관에 오는 관람객들은 고서에 대한 예의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으시는 거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만큼 이 박물관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시며 자부심을 가지고 운영하시는 것이란 생각은 이후의 책박물관 안에 들어가 전시를 관람했을 때 더 굳어졌다. 먼저 책박물관 안을 메우고 있던 것은 영국 작가 랜돌프 칼데콧의 작품들이었다. 그는 그림책의 3대 거장 중 하나로 꼽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로, 근대 그림책의 기획 전시 중 첫 번째로 소개되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형식을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글이 아닌 그림을 주제로 하는 책을 그려낸 것이었다. 그의 그림은 특유의 해학적이고 서민적인 화풍을 가지고 있어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후대 그림책 작가들에게도 수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건강악화로 39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도서관협회는 그의 이름을 딴 ‘칼데콧 상’을 만들어 매 해 가장 뛰어난 그림책을 그린 작가에게 수여하고 있다. 칼데콧의 전시실 옆에는 한국 근대의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작품은 근대 국민 학교 삽화를 그렸던 김태형의 그림들이었다. 50-60년대의 삽화를 담당했던 김태형의 그림은 그보다 더 한참 지낸 세대의 우리들에게도 익숙하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림이라는 말이라는 것도 될테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그림이 역사성을 띄고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칼데콧과 김태형의 그림은 모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며 학습에 대한 관심을 일으킴과 동시에 재미와 흥미를 주었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띄고 있다. 이 작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자란 사람들은 이제 모두 수없는 시간의 흐름을 지나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그림까지 그 흐름에 묻혀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품들을 다시 불러와 전시한다는 것은 이 작가들이 당시의 어린이들을 위해 공로한 것을 기리고 그로 인해 우리 시대가 발전해 나갈 수 있었음을 시사하기 위함일 것이다.
책박물관 앞에 위치한 책마을문화센터의 완공 전 모습을 구경한 뒤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전통백반을 파는 죽림집으로 향했다. 죽림집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식당으로 과거와 같은 가격(7000원)을 단골손님들을 위해 아직도 유지하고 있었다. 과거와 같은 가격을 고수한다 하더라도 상차림에는 빠짐이 없었으며 오히려 정성이 없으면 나오지 못할 음식, 예를 들면 발효음식이나 장을 이용한 요리들이 상에 많이 올라왔다. 김치찌개 등 평소에도 자주 먹는 음식들도 있었지만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도 있어 더 좋은 경험으로 다가왔다.
이후 고서를 구매하기 위해 고서점으로 향했으나 21일이 경매전이 열리는 날이었기에 인근의 골동품상이 모두 닫혀 있었다. 그래서 연락을 취해 경매전이 열리는 장소로 향했으나, 경매전의 주요 물품이 고서적이 아닌 항아리나 망태기 등 골동품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오래 머무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계획과 달리 고서를 만나보지 못했더라도 골동품이 오가는 경매의 장면은 처음 보게 되었기 때문에 이 또한 뜻깊게 다가왔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전주한옥마을의 시내였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기에 주변엔 현대적으로 개량한 한복을 입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나 또한 전주 한옥마을에 대한 소문을 자주 들었었기 때문에 꽤 흥미가 생겼었지만 우리의 목적은 관광이 아닌 사적을 답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먼저 들린 곳은 바로 근처에 위치한 어진박물관이었다. 어진이라 함은 역대 국왕들의 초상화를 뜻하는 것이지만 조선 25대 임금들 중 현재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 어진 뿐이다. 세종과 정조 어진은 나아 있지 않아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습과 그 후손들의 골격을 토대로 후대에 그린 국가 공인 표준 영정이다. 인종은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는 것을 원치 않아 후대에 남기지 않았으며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 제작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숙종 이후로는 어진 제작이 활발해져 여러 본을 동시에 자작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매 10년마다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의 손자인 정조 역시 3번이나 다양한 복장으로 어진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에도 현존하는 어진이 소수인 것은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왜란과 호란을 피한 어진들도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이안했다 1954년 화재로 상당수가 불에 타고 말았다.
조선시대에는 대상의 털끝 하나라도 똑같지 않다면 초상화가 아니라고 보았으며, 그러한 겉모습 뿐만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내야 한다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초상화에 대한 인식이 엄격하였으므로 어진을 제작하는 것도 제작 단계별로 왕과 대신들의 심사 과정을 거치고 길일길시(吉日吉時)를 택하여 진행되었다. 또한 어진을 이안하거나 황안할 때에는 여러 가마들과 의장품들이 동원되어 마치 실제 국왕을 모시는 것처럼 성대한 행렬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태조 어진을 모신 전시관에서 태조 관련 유물들에 대한 정보를 보았을 때였다. 전반적으로 그 유물들에서 중국풍의 느낌, 그리고 북방 유목민족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는데 이는 조선 북부 출신으로 국경을 지키던 무인이었던 태조 이성계의 출신에서 기원한 것이라 생각이 되었다. 또한 과거 나라의 존엄이었던 국왕들의 어진을 보며 그 자리가 가지는 권위만큼 책임도 막중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후 향한 곳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있는 건물인 경기전이었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건물은 본래 개성, 영흥, 진주, 경주, 평양 등 다섯 곳에 있었는데, 경기전 정전을 제외한 나머지 4개의 건물은 모두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경기전정전도 정유재란(1597)에 불탔으나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세워졌다. 이 경기전 입구에는 말에서 내리는 속임을 표시하는 하마비와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내삼문, 외삼문이 위치해 있으며 초상화를 모신 전각도 함께 경기전을 구성하고 있다. 정전의 한가운데에는 감실이 있으며 여기에 태조 어진을 모시고 있다. 청룡포를 입고 있는 전신상 어진이며 이는 고종 9년(1872)에 새로 모사한 것이다. 구본은 초상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 항아리에 담아 진전 북쪽에 묻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감실 앞쪽에는 어진을 호위하는 운검 한 쌍을 세워 두었다고 전해지며, 정전 좌우면으로는 용선, 봉선, 홍개, 청개 등의 위장물을 배치하였다. 경기전의 부속건물로는 수복청, 마청, 용실, 제기고, 수문장청, 동재, 서재 등이 있는데, 이는 대부분 경기전에서 지내지는 제사를 준비하거나, 경기전을 관리하는 관원들의 업무를 할 때에 쓰던 건물들이다.
부족한 시간을 내 전주 전동성당까지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은 꽤 지쳐있었지만 그래도 충만한 답사였다는 기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경기전을 건너편에 위치한 로마네스크 복고 양식의 성당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는데, 전통문화와 서양문화가 융합되어 조화되는 풍경이 사뭇 아름다웠다.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전주 시내를 돌며 더 답사하며 느끼고 싶은 곳이 많았으나 시간 문제로 미처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주는 서울과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나의 고향과도 꽤 거리가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자주 발걸음을 할 수 없기에 아쉬움은 더했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통해 전주가 얼마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도시인지를 깨닫게 되었기에 이번 방학에 다시 한 번 향해 볼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답사는 현대에도 남아 존재하며 역사의 기록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유물들을 몸소 느끼고 오는 경험이다. 이번 고서와 전주시내 탐방을 같이 하며 느끼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유물들은 보존도 중요하지만 이를 연구하고 관심을 가져 현대적으로 의미를 재창조하고 또 변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삼례책박물관, 세계적인 그림책의 거장 랜돌프 칼데콧 전시, 코리아플러스, 전영문 기자
http://www.kplus.kr/news/articleView.html?idxno=111319
완주책박물관 박대헌 관장 "책으로 자생하는 마을…주민과 함께 삼례를 책으로 덮고 싶어", 전북일보, 김은정 기자
http://www.kplus.kr/news/articleView.html?idxno=111319
전주답사 기행문.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