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암스님은
중국 베이징대학 철학과에서 <돈오선연구>로 박사학위. 동국대 선학과에서 강의했으며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하고 부산 미타선원 행복선수행학교 교장이며 문경 한산사 창건 후 용성선원장으로 있다. 저서로 <간화정로> <돈오선> <친절한 간화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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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중진스님 20명은 경기도 용인시 정원사(주지 록관스님)에서 ‘친절한 간화선회’를 열고 용성선원장 월암스님의 법문을 8일간 들었다. 월명스님의 간화선 법문은 지난 9일부터 16일까지 하루 두 차례 2시간씩 진행됐으며, 중간에 실참 문답도 진행됐다. 월암스님의 간화선 법문 중 서두의 ‘발심 왜 중요한가’(9일)와 결론에 해당되는 ‘화두참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상중계로 싣는다.
일체 중생 법으로 섬겨야 보리심 완성
發菩提心, 지혜와 중생제도의 자비 겸해야
발심, 왜 중요한가
선사들은 왜 신심(信心)을 도의 근원이라고 했는가, 더구나 선사들은 신심을 공덕의 어머니라 말하고, 수행하여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신심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했다.
수행의 근본은 진여(眞如)를 깨닫는 것이며, 그 첫째 믿음의 근본으로 진여를 믿는 것이다. 연수선사는 “스스로의 마음 깨달음이 부처, 마음의 원리대로 유지함이 법, 마음 성품이 화합해 둘이 아니므로 승”이라 말했다. 이를 통해 신심을 정의하면, 마음이 부처임을 믿고, 마음이 공적하되 항상 작용함을 믿고, 마음이 다툼이 없어 깨끗함을 믿는 것이 곧 신심이다.
선(禪)에서는 마음이 부처임을 믿는 것을 신심이라 한다. 그래서 조사들은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거나 “사람이 부처(卽人是佛)”라고 말하고,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心外無佛), 부처 밖에 마음이 없다(佛外無心)’고도 한다.
<관무량수경>이 “이 마음이 부처이니(是心是佛),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지어라(是心作佛)”고 한 말은 마음이 부처임을 깨달아 끊임없이 마음으로 부처를 수행해(行佛) 나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지으니(是心作佛) 마음이 부처니라(是心是佛)
기자가 잘못 쓴 것인지? 잘못 아는 것인지?
<화엄경>에서도 “부처와 마음과 중생, 셋은 차별이 없다”라면서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요, 마음이 미혹하면 중생이라고 표현한다.
마음이 부처, 사람이 부처라면 이를 깨닫기 위해 적극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 탐진치 삼독으로 오염된 마음이 부처일 수 없고, 번뇌 망념에 싸여 있는 어리석은 중생이 그대로 부처일 수 없기 때문에 수행정진으로 마음을 깨달아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不二)을 증득하는 것이다.
결국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 실천행을, 생활 그대로에서 온전히 수행으로 깨어 있도록하는 삶이 바로 선(禪)이다.
마음이 부처이며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확신하며 수행을 통해 다시 부처를 이루겠다는 결정적 믿음을 갖춘 보살은 마땅히 먼저 발심(發心)을 해야 한다. “마음을 깨닫는 데는 발심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라는 말 처럼 수행하여 깨닫기 위해서는 발심이 밑바탕이다.
발심이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줄임말로, 발무상보리심(發無上菩提心)에서의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금강경>에서 수행을 결심한 보살이 무상보리심을 일으켜야 함을 증명하고 있다. 그 깨달음의 마음(無上菩提心)을 수행하고자 처음 진리에 마음을 낸 보살을 ‘초발심보살’, 새로 진리에 뜻을 낸 보살을 ‘신발의(新發意)보살’이라 부른다.
<대지도론>에서는 ‘만일 처음 발심할 때/ 마땅히 성불하리라고 서원하면/ 이미 세간을 뛰어넘은 것이니/ 응당 세간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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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신론>에서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해행발심(解行發心), 증발심(證發心) 등 세 발심(三種發心)을 설하고 있다.신성취발심은 결정심을 발하는 것이며, (믿음을 성취하여 발심하는 것이며) 해행발심은 이해와 실천으로 앞으로 나아려는 발심이고, 증발심은 참마음(眞心)을 드러내는 발심이다. 신성취발심은 다시 직심(直心), 심심(深心), 일체 중생 고통을 건지려는 대비심(大悲心)으로 나뉘고, 해행발심에서는 육바라밀의 실천과 회향심을 발할 것, 증발심에서는 법신을 증득하여 진심(眞心: 불심)을 드러낼 것을 제시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상징처럼 통용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도 발심의 전부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승(二乘) 곧 성문승과 연각승인 소승은 보리심을 자신의 깨달음만으로 한정하지만, 대승의 보살은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목적이 중생제도 원력이라서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정발심(正發心)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처럼 발보리심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지혜’이며, 동시에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자비’를 말한다.
<무량수경종요>에서는 수사발심(隨事發心)과 순리발심(順理發心)의 두 가지를 말한다. 수사발심은 ‘번뇌가 무수하지만 모두 끊기를 원하고, 선법(善法)이 무량하지만 모두 닦기를 원하고, 중생이 무변하지만 모두 제도하기를 원하는 것’이라 했으며,
실천행을 강조한 이는 중생 제도하기를 발원하는 사홍서원의 내용이기도 하다. (사홍서원과는 다르다)
천태지자는 <차제법문>을 통해 “보살이 발심하는 상(相)이 바로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며 보리심에 대해 “중도정관(中道正觀)으로서 제법 실상을 보고 일체 중생을 가련히 여기는 대비심을 일으켜서 사홍서원을 세우는 것”이라 말했다.
다음으로 순리발심은 연기공성(緣起空性) 및 무자성(無自性)과 연결된다. 즉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어서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경계(비유비무)’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법을 믿고 이해하여 광대한 마음을 일으킨 바 없이 일으키는 것이 곧 순리발심인 것이다.
결국 순리발심과 수사발심은 이사원융(理事圓融)의 대승보살 실천행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밝힌 것이다. 중도실상의 법을 깨닫기를 강조한 순리발심은 상구보리의 영역에 속하며, 삼신(三身)의 지혜를 깨닫기 위한 보살 실천행인 수사발심은 하화중생의 영역이다. (삼신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원효사상에서만 볼 수 있는 내용임)
보살은 응당히 세간의 법이 공함을 깨달아 늘 그 깨달음을 중생에게 회향하여 중생과 세간을 요익되게 하려는 서원과 자비의 실천 주체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정발심(正發心)을 성취해야 한다. <팔천송반야경> ‘대여품’에는 ‘내가 마땅히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나는 세간을 위해 구제자가 되고, 세간을 위해 돌아갈 곳이 되고, 세간을 위해 쉴 집이 되고, 세간을 위해 구경의 길이 되고, 세간을 위해 머무를 섬이 되고, 세간을 위해 길잡이가 되고, 세간을 위해 나아갈 곳이 되리라’고 표현했다.
아래 내용들은 <무량수경종요>와 <아미타경소> 강의에서
간단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간화선이 염불수행보다 교리가 더 어렵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출가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으므로 말이 많게 된 것이다.
불퇴전의 발심을 말한 영가선사는 <선종영가집>에서 “삼보의 힘을 입어 지심으로 발원하여 위없는 보리도를 닦되 금생으로부터 정각을 이룰 때까지 중간에 결정코 부지런히 구하고 물러나지 않겠습니다”고 발원했다.
보리의 마음 내기가 어려움을 토로한 <사십이장경>에서는 “부처님 계신 때를 만났더라도 수도하여 깨친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고, 수도하여 깨친 사람들을 만났더라도 믿는 마음을 내기 어렵고, 믿는 마음을 냈다 하더라도 보리의 마음(菩提心)을 내기 어렵고, 보리의 마음을 냈다 하더라도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곳에 나아가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화엄경> ‘초발심공덕품’에서는 “초발심 공덕은 설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분별하기 어렵고, 믿고 이해하기 어렵고, 증득하기 어렵고, 행하기 어렵고, 통달하기 어렵고, 생각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우니라”면서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중도(中道)실천행으로 승화된 진발심(眞發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보살의 중도실천행을 강조한 남종의 신회선사는 “유위를 다함도 없고(不盡有爲), 무위에도 머물지 않는다(無住無爲)”라고 표현하면서 <열반경>을 인용해 “발심과 깨달음은 둘이 아니다. 이 둘 중 발심하기가 더욱 어렵다. 내가 아직 도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먼저 다른 이를 제도하라. 그러므로 초발심에 경례하는 것이다. 초발심은 이미 인천(人天)의 스승이라 성문과 연각을 뛰어 넘는다”고 했다.
조사어록에서 반복 언급되듯이 “내가 아직 도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먼저 다른 이를 제도”하는 것이 진정한 보살의 보리심이다. 더구나 처음 발심한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임을 확신하는 발심이기에 <화엄경>에서는 ‘초발심이 바로 바른 깨달음이다(初發心是便正覺)’이라 했다.
연명연수선사는 <화엄경>을 읽다가 “만일 보살이 큰 원력을 내지 않으면 그것은 보살의 마장(魔事)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감동하여 <대승비지원문(大乘悲智願文)>을 지어 중생들을 대신해 두루 발원하였다.
<화엄경>은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가 보리심을 내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노래한다. “보리심은 곧 큰 길이니 능히 모든 지혜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까닭이니라. 보리심은 곧 맑은 눈이니, 삿되고 바른 이치를 모두 보는 까닭이니라. 보리심은 곧 밝은 달이니, 모든 거룩하고 청정한 법을 원만케 하는 까닭이니라…”
보리심은 안과 밖이 없기에 중도의 ‘큰 길’이다. 일체 중생이 함께 발심하는 순간 이미 구경각의 문 안에 들어간다. 그런 보리심은 중도의 정안(正眼)이기에 ‘맑은 눈’이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님을 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본다. 또 보리심은 실상 반야를 사무쳤기에 ‘밝은 달’이고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법을 두루 비추어 원만케 한다. 또한 보리심은 명경지수(明鏡之水)의 샘물이기에 ‘맑은 물’이라서 번뇌가 본래 없음(本來無一物)을 통달해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한다. 마지막으로 보리심은 중생의 복전이기에 ‘좋은 밭’이다. 가지가지 보리수가 자라나 보리의 열매가 가득한 중생의 어머니이기에 ‘부처의 씨앗’이다. 이로부터 제불이 출세하여 정토를 장엄한다.
그런 보리심이란 중도정관(中道正觀)으로서 제법의 실상을 깨달아 일체 중생에 대한 대비심을 일으켜 사홍서원을 세우고, 사홍서원으로 선정을 닦아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보리심을 낸 발심수행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이다. 이제 선을 수행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서 일체 중생을 법으로 섬길 때 보리심은 완성되는 것이다.
정리=김종찬 기자
용성선원장 월암스님이 '친절한 간화선회'에서 화두참구의 중요성을 법문하고 있다. |
화두참구
이해못해 죽은 사람처럼, 의심이란 한 생각마저 부서져야
일체개공(一切皆空) 자리서 깨달음 열려
‘망념 보기’ ‘분별심 멈춤’ 동시에 이뤄져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향해 ‘이 생각이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라고 반문하는 ‘일념반조(一念返照)로서 의심을 던지면, 불교에서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를 알아차린다‘고 말한다.
여기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는 불이중도(不二中道)의 경계이다. 그것이 화두의심이라는 창조적 긴장을 통해 본연자성을 회복해야 하는 참선이다. 간화선의 창시자 대혜종고는 “여기에 이르러서는 번뇌를 생각할 필요없고, 불법도 생각할 필요없이 불법과 번뇌가 모두 바깥의 일이다”면서 “그렇다고 바깥의 일이라는 생각을 지어서도 안 되며 다만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라(廻光返照)”고 말했다.
결국 대혜선사는 “이 생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묻고 있다. 번뇌니 보리니 하는 분별은 망상이라서 바깥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분별을 떠나서 불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화두의 특징은 결국 생각을 돌이켜 물어 생각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원래 범부는 일상에서 경계(境界)에 빠져 망상을 주인삼아 살아간다. 곧 인식의 대상을 부여잡고 생각을 일으켜 집착하는 분별 망념으로 울고 웃는 것이다. 그런 바깥 경계는 분별이다.
문제는 분별로서의 생각이다. 이 분별과 망상은 언제나 대상을 향해 존재한다. 화두는 일단 분별과 망상의 생각을 돌이키는 작용을 한다. 생각을 돌이킨다는 것은 분별 망념을 멈춘다는 것으로, 화두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므로 질문을 통해 생각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설사 선지식에 의해 물음이 제기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 물음이 되는 것이며, 이 물음을 통해 알아차리는 그 자리를 비춰 보게 한다. 이것을 회광반조(廻光返照) 혹은 일념반조(一念返照)라고 한다.
<마조어록>을 보자. 양좌주(현재의 강주)가 경론을 강의하다가 마조와 대담을 나눴다. 여기서 나온 "마조가 불렀다. '좌주여!' 양좌주가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是甚麽)?' 양좌주가 활연대오(豁然大悟)하고서 예배하였다"는 대목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알아차리는 그 자리는 생각이 멈춘 생각 이전의 자리’를 상징한다. 즉 분별을 멈추고 본래의 마음자리를 바로 보게 지시한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조사선의 수증방편이다. 분별과 망상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분별과 망상을 바라보는 그 자리를 직시하게 한다. 오직 바라보는 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면 일체의 분별 망념을 초월할 수 있다. 번뇌 망념에 물든 생각을 돌이켜 자신의 본래 마음을 곧장 들여다보게 하여, 보는 그 자리로 복귀하게 하는 것이 반조의 방법을 활용한 조사선의 방법론이다. 마조의 한마디 말 아래에서 양좌주가 바로 깨닫게 하는 방식의 조사선 수증방편을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말한다.
육조는 이렇게 말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때 어떠한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 혜명선사는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이른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일체의 분별망념을 멈추라는 것이다. 일체의 이원(二元)적 분별을 하기 이전 자리로 돌아가 그 자리를 비추어 보면,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그대의 참 모습인 일체 생각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간다. 이는 선악에 물들기 이전의 본래 상태 존재이며, 그 자리를 체험하여 깨달은 것이다.
이는 조사선에서 구사하는 질문을 통한 반조의 방법이다. 반조를 통해 알음알이(지식)에 의한 일체의 분별의식이 사라져야 본래면목이 드러나는 것이다. 조사선의 물음은 밖의 경계를 향해 있는 생각을 안으로 돌이켜 본래심, 즉 본래부처(중도실상)를 비춰 보게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회광반조의 과정은 첫째 번뇌 망념 ‘바라보기’, 둘째 분별 망념의 ‘멈춤’, 셋째 생각 이전 자리 ‘직면’, 넷째 본래심의 ‘깨달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한 생각은 단계를 거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찰나적 심리현상을 단계적 과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는 것은 초심자들이 실제로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바로 일념이 현전되기가 쉽지 않아 참구하기가 어려운 현실 고충 때문이다.
실제 화두가 바로 일념으로 참구된다면 이러한 단계적 방편의 지시는 전혀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선방에서 시대에 맞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화두만 들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는 간화선 대중화는 어렵다. 이유를 간화선 특징 4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번뇌 망념을 바라보는 것은 습관에서 생각을 분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습관적적으로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인식의 체계에 휘말려 들지 않고 생각과 생각하는 자신을 분리해 보자는 의미이다. 마치 위빠사나에서 생각의 대상인 법을 알아차려 지켜보는 것과 같이 분별에 끄달리지 않고 분별을 바라보게 하는 방식이다.
이는 초보자에게 단련을 거쳐 번뇌 망념을 철저히 객관화하는 선행 작업의 필요성을 말한다. 생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결국 번뇌 망념이 공(空)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번뇌가 본래 공하므로 ‘바라보되 바라봄이 없는 바라봄’이 되는 것이다. 즉 번뇌 망념에 휘둘려 고통을 느끼는 인식의 체계를 전환함으로 해서 분별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국면을 맞이하게 하는 형태이다.
물론 이런 첫 번째 단계인 망념 바라보기만 잘 단련하여도 의식을 전환하고 오염식인 말라식을 바꾸어 인격적 수양에 현저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평생을 수행하고도 수준 높은 인격적 소양을 함양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수행의 첫 단계에 대한 단련을 소홀히 한 원인도 작용하고 있다.
둘째, 분별 망념의 멈춤이란 앞의 바라보기를 통해 바로 망념의 분별심을 타파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개념적인 분석으로 아는 분별심을 멈추는 것이다.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 오직 분별심을 멀리하고(唯嫌揀擇), 다만 미움과 사랑만 버리면(但莫憎愛), 툭 트여 밝게 깨달을 것이다(洞然明白)”라고 말한 대목이 여기에 부합된다. 밖으로 향해 있는 분별의 망념은 개념과 분석으로 아는 알음알이(知解)에 불과하다. 이 지해의 알음알이는 이원적 분별에 의한 번뇌 망념이기 때문에 분별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분별 이전의 자리란 불이중도의 경계이다. 생각 이전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량분별을 타파하여야 한다. 첫 번째 망념 바라보기와 두 번째 분별심의 멈춤은 거의 간격 없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셋째, 생각 이전 자리의 직면이란 대상을 향해 분별하던 마음을 멈추고 지금 여기의 마음과 마주하는 것이다. 여기 마음은 본래심이며, 생각이 일어난 바 없이 일어났으므로 그 실체가 없기에 공(空)한 것을 말한다.
오직 모름은 간화의 출발점이다. 알지 못하기에 알려고 하는 그 마음, 알지 못하기에 꽉 막힌 답답함이 화두의심의 동력이 된다. 그렇기에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온 정성으로 간절하게 의심하고, 의심뿐인 그 상태를 유지하여 참구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참구의 관건은 “저절로(自然)”에 있다. 억지로 작위적으로 참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이 저절로의 의심이 "일체 분별의식 부수고 본래면목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안으로 돌이켜 생각 이전 자리와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생각 이전 자리는 생각이 일어난 바 없이 일어나, 공한 그것마저 공하므로 창조적 보리정념(菩提正念)이 일어나게 된다.
넷째, 본래심의 깨달음이란 분별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지도 않으며 없지도 않은 중도의 무심(無心)에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도의 무심이 바로 생각 이전의 자리인 본래의 마음이며, 진여자성(眞如自性)이며, 본연불성(本然佛性)으로서, 그 체험은 선지식의 지시에 의해 즉각적으로 단박에 이루어지고, 화두참구를 통해 망념을 소멸해 점진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황벽선사의 <전심법요>는 “빠르건 더디건 무심하면 그만이지, 다시 수행하거나 깨달을 것은 없다“고 했다.
어떠한 수행이 되었든지 간에 모두 무심(無心)에 계합하는 것이 목적이다. 공안과 화두 또한 방편이다. 일체의 분별이 다하여 헤아림이 미치지 못하는 무념(無念)으로 나아가야 돌아갈 본래면목 자리이다.
간화선은 본래면목을 깨치기 위해 모든 분별과 망념을 내려놓은 그 부정의 자리에서 간절히 의심하고, 화두 의심으로 일체의 정식(情識), 즉 분별 망념이 끊어진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깨달아야 한다”면서 “그대가 진실하게 참구하려 한다면, 일체를 놓아 버리고 마치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라고 했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서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된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자리에 앉아 의심의 한 생각마저 부서질 때 깨달음이 열리게 된다.
정리=김종찬 기자
조계종 비구니 중진스님 20명은 경기도 용인시 정원사(주지 록관스님)에서 ‘친절한 간화선회’를 열고 용성선원장 월암스님(앞줄 가운데)의 법문을 9월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들었다.
첫댓글 월암스님께 <일심정토 염불수행>을 보내드렸더니
읽어 본 후에 감사하다는 전화가 왔다.
대화를 하면서 나는 반드시 신행체계를 가르쳐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정토의 깊은 뜻을 알면 참선의 논리를 다 이해한다. 그러나 참선자는 염불의 뜻을 다 알기 어렵다.
일심정토 염불수행은 지금의 간화선과 대등하거나 차원이 높다는 뜻이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한다,
선과 염불을 차별하거나, 간화선 우위를 고집만 하는 것은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다.
"일체가 아미타불 화신이다" 이 명제가 얼마나 위대한 지를 알면, 굳이 깨달음을 구할 것이 없다.
<기신론>과 <정토경전>은 참으로 위대하다,
나무아미타불
일체경계 본래일심임을,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체경계 본래일심
일체가 아미타불 화신이다.
모든 인연에 감사하고 보은합니다.
이 위대한 가르침에 모든 깨달음의 깊은 뜻이 다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뜻을 깊이 이해하고 발심하여 실천하면 그가 바로 정정취입니다.
오로지 일심으로 믿고 실천하는 행으로 염불수행정진 합니다.....
일심.광명.화신.
감사드립니다.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_()()()_
일심 광명 화신.
아미타파에서 공부할수 있음이 감사하게 깊이 느껴집니다.
한걸음씩 꾸준히 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정신없이(어떤 스님께선 이런 표현을 쓰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쫓기듯이 바쁜 한달여가량...
알게 되었습니다,광명이라는것이 어떤것인지,,,
엄살을 피울수도 없고 ,내 앞에 펼쳐지는 현상들에 대해 정직하지 않을수 없고
자신을 속일수 없고,...
그것은 위대한 염불의 힘이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태여 "끝까지"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아도
전 언제나 늘 염불과 함께 할것입니다,
그래서 정목 스님께 더 없이 감사함을 어떻게 해야하나????
봉은사 법문때 그래도 진솔한 법문을 하셨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일심,광명,화신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스님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스님()()()
일심정토 염불수행
일체가 아미타불 화신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오로지 염불수행으로 나아갑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아미타불아미타불아미타불
월암스님!!
서울 봉은사 월암스님 법문 들어보았읍니다.교재(간화정로)
생각 이전 자리------귀신굴...
일체가 아미타불화신으로보라 -------참선에서 말하는 "화두정" "삼매현전"
일심정토염불수행---- 교학체계,신행체계.....행이깊으면 "정토" 가 다가오니 육근으로 "감득"한다.
깨달음 으로가는 "길" 수학공식!!! "안심" 수행의 "이정표" 정토세계성취
일체경계본래일심 "증득"
일심정토염불수행----정목스님이들려주는 "정정취" 깨달음은 참선을 능가하는...
왜????? "견명성오도" 엄청난 이시대의 불교 "혁명" 의 "허공의사상가" 일심의증득!!!
염불____기록있음...(법 의경계)
참선----기록없음...(법의경계)(의심 만 해서안되는경계) 참선 교학체계 안되어있음..(무기공).
현재 참선자..."화두정" 실참자 몾보았음..(스님들중에...).
현재 염불자...일체가이미타불 화신...----"감득""증득"----정토원정목큰스님!!!
원효성사님 논서--- 1000년 이넘게 사장된"이유" "견명성오도" 못이루워서.....(감득 증득)안되어...
정목큰스님 --- 이시대 "선지식":조사" 감사합니다.(원효스님 논서--- 번역하실수있는 엄청난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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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금보살님, 요약내용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일심 광명 화신 은혜에감사하고 보은 하겠습니다,,,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터 아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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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 아미타파 ()()()
일체경계 본래일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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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일심 광명 화신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불()()()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드립니다.
< 일체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
< 일심정토 염불수행 >
일심광명.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
일심 광명 화신
오로지 염불입니다.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저절로 자연 스럽게 다 그렇게 되어가도록 ...그리 여기며 오직 염불로...
일체경계는 본래일심입니다.
일체가 아미타불의 화신입니다.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 아미타波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염불은 일체 상대적 개념이 다 깨져버린 상태를 바로 알려주고 각인하게하는 돈법이다." (정목스님)
--- 일체경계가 본래 일심이고 ---
--- 일체가 무량광명이며 ---
--- 일체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
是心作佛 是心是佛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지으니 이 마음이 부처다.
이 마음은 청정한 마음이 아니다.
이 마음은 번뇌의 마음이 아니다.
이 마음은 불지(佛智)를 믿는 진실한(信心) 마음이다.
보리심(삼신의 지혜).
번뇌가 무수하지만 모두 끊기를 원하고,(법신)
선법이 무량하지만 모두 닦기를 원하고,(보신)
중생이 무변하지만 모두 제도하기를 원하는 마음.(화신)
일심.광명.화신.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일심 정토 염불 수행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 아미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심 광명 화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3개월 안거동안 무엇을 공부했는지
확인도 안되고 공부를 점검해 주는 스승도 없는 선방수자님들
흔히 말하는 큰스님, 스승님을 모시려고하는 주지스님이 보기어려우니
참선을 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먼것 겉습니다.
3개월동안 편안히 좋은 공양 받아드시고 해제비 많이주는 절을 찾아다니는
스님도 계신다고 하니...........
일체가 아미타불화신이다.
일체경계 본래일심
이것만 바르게 알아도 정정취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일체가 아미타불 화신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일심 광명 화신 감사 합니다.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감사합니다. 일심 광명 화신 나무아미타불 아미타()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일심 광명 화신.
감사합니다.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_()()()_
월암스님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에 선지식 몇분만 계셔도 개혁이 일어난다시는 스님 감사합니다.
또 곳곳에서 대승의 꽃 보리심을
부처님의 뜻을 잘 헤아리기를 애쓰 주시는 스님들께 삼배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부인따라 들어 왔습니다. 생활속에서 어떻게 하면 항상 같이 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일 하면서 기대에 못 미친다 느낀면 잠 못자고 끙긍됩니다. 무아에서 우선 안심을 얻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부처님 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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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일체가 아미타불 화신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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