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사형장
박종인
밑동이 잘린 느티나무, 나이테를 세어보니
긴 세월 바람의 손끝에서 번진 파문이
온몸에 녹음되었다
계절이 드나든 길, 헐벗은 채 추위에 떨던
음지의 시간은 길고 촘촘하다
빛이 쏟아지던 따뜻한 풍경은 느슨하게 감겼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미 알아버린 세상
한 번도 보지 못한 하늘과 낯선 목소리도
네 몸에 다 기록되었다
한 줄의 동그라미는 그가 걸었던 흔적
레코드판이 세선을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우듬지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간다
천천히 해를 따라 걷던 발자국들
제 몸에 갇힌 보행은 수많은 동그라미로 압축되었다
해가 지고 달이 지고
숱한 저녁이 오고 새벽이 오고 아침이 다녀가면
공중에 걸어둔 수많은 팔을 흔들며 춤을 추던 나무
그때마다 점점 가까워지던 하늘
그가 품던 둥지와 재재거리던 날개는 사라졌다
끝내 그가 닿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두툼한 뱃살의 시간들
푸른 옷 한 벌 어디에 벗어두고 맨몸으로 이곳에 멈추었을까
숨겨둔 나이를 실토하고 또 무엇이 되려나
막막한 그의 여생은 저 사나운 톱날에 달려있다
2015년 [미래시학] 봄호에서
첫댓글 제목 좋고 내용 좋고~절창이십니다^^
감사해요. 오랫만에 오신 듯, 자주 뵈어요. 사리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