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와 아모르 파티(전3:1-14)
Memento Mori & Amor Fati
2024.7.7 맥추감사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고대 로마제국시대에는 전쟁에 승리한 장군은 금으로 수놓은 자줏빛 외투인 ‘토가’를 입고, 네 필의 말이 이끄는 전차에 올라서 로마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시내를 행진했다. 그때 전차의 뒤쪽에 동승한 종이 승리의 기쁨에 감정이 고조된 장군을 향해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기억하라(메멘토)’와 ‘죽음(모리)’을 뜻하는 라틴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당신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시민들의 환호에 취해있는 장군을 향해 ‘언젠가 당신도 죽게 되니까 지금의 승리에 취해서 너무 자만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로마시대의 장군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개인이나 교회나 또는 사업체나 국가라 할지라도 메멘토 모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마치 이 땅에서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면, 결국은 쇠퇴의 길을 가다가 소멸된다. 이는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메멘토 모리와 함께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말이 있다. 그것은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말이다. 아모르 파티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수 김연자씨의 노래를 생각해낼 것이다. 아모르 파티는 ‘사랑(아모르)’과 ‘인생 또는 운명(파티)’의 합성어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김연자씨의 노래 가사에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라는 표현이 있다. 메멘토 모리와 아모르 파티를 연결하면, ‘언젠가 죽음의 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삶을 사랑하라’는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기독교적으로도 충분히 연결되고 적용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인 전도서의 내용들은 더욱 그렇다. 우리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듯이 우리의 생명에도 날 때가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가 있다(기독교적인 메멘토 모리)(전3:1-8,).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전 3:1-3)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오늘’이라는 시간 동안에 세상의 헛된 것들에 마음을 뺏기지도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모든 것들(건강, 재정, 시간, 재능 등)을 감사함으로 누리며 살되, 현재의 시간은 또한 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시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삶이다며(기독교적인 아모르 파티). 또한 이것이 오늘 본문말씀인 전도서를 통하여 이 시간에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주시고자 하는 핵심이다(전3:12-14, 전12:13).
“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14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오늘은 맥추감사절이다. 문자적으로 맥추감사절은 밀과 보리를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절기이지만, 시기적으로 보리농사 추수뿐만 아니라, 지난 전반기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의미가 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지난 전반기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은 곧 우리 앞에 있는 후반기의 시간도 반드시 끝날 때가 온다는 것을 뜻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때도 반드시 온다는 것을 뜻한다. 지나온 시간을 감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앞으로의 시간도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메멘토 모리 정신이다.
어떤 사람은 “뭐가 감사혀? 감사한 것은 하나도 없고 힘만 들었슈”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들 동안, 수많은 사고의 위험들과 마귀의 간계 속에서도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숨을 쉬며 이 자리에 앉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힘들 수밖에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순금으로 만드는 단련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이다(욥23:10). 감사는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려는 ‘마귀 사탄의 공격’을 무력하게 만든다. 깊은 밤일수록 밤하늘의 별은 더욱 빛나듯이 감사는 고난의 밤이 깊을수록 우리의 믿음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미래가 현재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불평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 아니라, ‘불만’인 것이다.
지난 주중에 맥추감사절을 앞두고 설교준비를 하고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주님 어떤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일까요?’라고 생각하면 묵상하고 있는데, 교회 한쪽에서 우리교회 국악팀이 장구를 치면서 맥추감사절찬양예배 때 부를 특송을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온 찬송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찬송가338장)이었다.
(‘어잇~ 뚱따당 뚱당~’)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2절, “꿈에도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3절 -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4절 -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이 찬송을 들을 때, 마치 주님께서 ‘이것이 바로 죽음의 날을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살아가야할 모습이다(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정말 그렇다! 내 일생 다하도록, 꿈에도,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며 주님 앞에서 나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이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는(아모르 파티)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다. 성경은 바로 이런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며, 사람의 본분인 것을 말씀했다(전12;3).
찬송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사람을 더 생각해 보자. 그는 프레드릭 밀러(F. S. Miller, 1866-1937, 한국명 민로아) 선교사이다.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충북지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분으로서 청주에서 37년간 사역하였다. 그가 지은 찬송들이 찬송가에 몇 곡이 들어있다(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427장 “맘 가난한 사람”, 451장 “예수 영광 버리사”,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밀러 선교사는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교학당(현 경신학교)을 맡아서 ‘민로아 학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3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특히 당시 17살이던 도산 안창호를 가르쳤고, 6개월 만에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결혼까지 주선하여 주례한 후에는 유학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프레드릭 밀러(민로아) 선교사가 지은 찬송들 중에서도 특히 “예수님은 누구신가”(96장)라는 찬송을 짓게 된 동기는 오늘 같은 감사절기에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를 잘 말해준다. 밀러 선교사 부부는 1892년 한국에 도착했다. 도착할 당시에 밀러 선교사 부부는 자녀가 없었는데, 한국에 들어온 지 6년 만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 아기는 풍토병으로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양화진에 묻혔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둘째 아이가 생겼는데, 그 아기는 출산한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년 후 밀러의 아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질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보던 조선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이 전하는 예수가 누구기에 이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요?”
그때 밀러 선교사는 대답 대신에 찬양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그 곡이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올해의 전반기가 끝났다는 것은 후반기도 끝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뜻한다. 인생의 끝 날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들 중에 감사할 조건은 생각나지 않고, 오히려 슬픔의 눈물이 강물 되어 마음에 흐르는 분이 있는가? 먹고사는 문제나 질병의 태풍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는가? 그러나 이 찬송가의 가사처럼 예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는 자의 위로시며,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이 되시고, 잡힌 자의 놓임과 우리(나)의 기쁨이 되신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원망의 대상이 아닌, 감사의 노래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실의 문제가 너무 힘들어서 때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님의 뜻 안에 내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믿자(찬620장 2절). 이러한 믿음으로 늘 감사하면서, 꿈에도, 숨질 때에도, 내 일생 다하도록 주님을 찬송하면서 주와 함께 걸어가자.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기독교적인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와 아모르 파티(삶을 사랑하라)의 삶을 추구하는 성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