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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성호와 행하신 사역으로 인해 찬양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성도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며 그분을 찬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세상은 아직까지도 원인을 밝힐 수 없는 상황에 의해 물질이 모여서 터짐으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 있는 단백질 덩어리에 번개가 침으로, 세포 분열이 생성되어, 아메바가 생성되었고, 이것이 거듭 변화하여,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과학자들의 발표라기에는 모호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연구하는 가운데, “가정”이라는 정하고, 그것에 맞추는 가운데, 도무지 논리적이라고 하기에는 황당한 발표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은 성경을 오랜 세월 속에서 만들어진 사람들의 저작이라고 하지만, 어찌 수천년을 걸치고, 시대를 달리 살았던 수 십명의 사람들이 쓴 저작물의 중심내용이 이렇게 한결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를 볼 때, 성경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저작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 창조에 대해 알 수 있으며, 세상이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특별한 목적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으로 설계하시고 지으셨고 지금도 지키고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히 1: 3을 보시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합니다. 본문은 구원의 하나님을 높이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 역사를 증거하며 찬양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역사와 시인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심으로 구원을 베푸신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이스라엘이 체험한 구원을 말하며,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처럼, 필경 세상의 모든 성도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지금도 행하시는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 있고,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며, 바다를 육지로 반드신 분이며,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찬양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찬양으로 경배하며,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시고, 세상의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복된 삶을 사심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라고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시인이 말한 “즐거운 소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의미합니다. 실로 온 땅은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 땅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땅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시인이나 성도들이 온 땅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한다고 해도 온 땅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말하는 “온 땅”은, 사실상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 구약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신약으로 말하면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찬송은 모든 성도가 마땅히 드려야 할 신앙적의 행위입니다. 사 43: 21을 보시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임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은 성도들의 존재의 본질적인 목적인 찬양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잘 나타나지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 찬양은 성도의 정체성을 찾게 하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곧, 성도로 성도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되 우리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찬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받기를 원하시지만, 형식적이고 작위적인 찬양, 우리의 마음도 뜻도 정성도 기쁨도 즐거움도 존재하지 않는 입술의 찬양, 육신의 찬양은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단순히 내 자신의 평안과 안위를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온전히 자발적이어야 하며, 그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들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내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을 일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날마다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실지 기대해야 합니다.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성호를 높일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내 신분 내 위치를 알아가는 것이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이유이며,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계 4: 11을 보시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 불만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또, 주변에서 보이고, 듣는 것으로 인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는 믿음 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또,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오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찬양하며,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올려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성도를 구원하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바다가 갈라져 바다 사이로 길이 생긴다는 것은, 논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런가하여 연구하는 가운데, 지구의 공전과 자전으로 인한 바다의 밀물과 썰물 현상으로 인해, 일정시간동안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필요할 때, 사용한다는 것은,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앞두고, 뒤에서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를 보았을 때, 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며, 불만과 불평,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출 14: 11 - 12을 보시면,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홍해는 그들이 넘을 수 없는 한계였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홍해와 애굽의 군대를 극복하고 구원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라도 자신들을 구원하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가능의 자리에서조차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홍해와 애굽의 군대라도 능히 극복하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출 14: 13을 보시면,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두려워하며 원망을 토로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담대한 말입니까? 이 얼마나 확신에 찬 말입니까? 모세의 믿음대로, 모세의 말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는 애굽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한계에 달했던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인 홍해를 갈라 그들로 하여금 걸어서 건너게 하신 반면, 애굽 군대는 홍해에 수장시켰습니다. 우리는 이 홍해 사건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면, 이러한 홍해 도하 사건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와 상상을 초월하는 전능자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고 확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데서부터 우리의 바른 믿음은 시작됩니다. 진정 우리는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신 창조자이심을 굳게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성적 사고로 보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망적이라도, 모세와 같이 담대한 마음과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구원하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성도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시련은 있으나 실족함은 없습니다.
본문은 감사와 찬양이 개인적인 관심에 멈추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이는, 예배당에서의 예배가 의식으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양임을 말하는 겁니다. 오랜 세월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 감격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일정시간이 지나면, 기억의 건너편에 있게 되어, 새로운 어려움이 닥치면 그대로 무너지는 것이 한 순간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이 또한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삼초”로 끝날 때도 많습니다. 완전히 “조변석개”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것을 기초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가 믿음의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고 다시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알고, 기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그것을 고백하는 것에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알고, 기억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시인은 인정하며, 세상의 그 무엇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존재할 수 없음을 선포하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본문의 시인이나 오늘의 우리나 한결같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도인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기에, 성도인 우리에게 시련은 있어도, 그 시련으로 인해 실족하는 일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성도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기에, 연약한 우리의 능력, 우리의 힘만 의지한다면, 우리는 실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성도된 우리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형통하고, 탄탄대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면, 오랜 시간동안 고된 훈련으로 인한 시련이 있지만, 그 훈련을 잘 마침으로, 경기에 나갔을 때, 그들에게는 오직 승리의 영광만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인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연단이라는 시련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연단이 궁극적으로는 성도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불가능의 상황으로 인해, 불만불평, 부정적인 생각은 모두 버리고, 오직, 우리로 하여금, 탄탄대로를 걷는 형통한 삶으로 이끄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