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60,1-6; 에페 3,2.3ㄴ.5-6; 마태 2,1-12
+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셨지요?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은 ‘공개적으로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희랍어로는 ‘에피-파네이아’라고 하는데요, ‘위에서 드러남’ 또는 ‘나타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주신 신비를 의미하는데,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으심, 세례 받으심, 카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베푸심, 이 세 가지가 주님 공현입니다.
이 세 가지 공현은 오늘 복음과 다음 주일, 또 그 다음 주일 복음으로 이어지는데요, 예수님의 세례와 카나에서의 첫 번째 기적은 묵주기도 빛의 신비 제1단과 2단에서 묵상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대 앞의 구유를 보시면 동방박사 세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박사라고 하니까 ‘전공이 뭐예요?’ 이렇게 물어보시는 분이 계신데, 그런 박사가 아니고요,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점성가나 현자를 의미합니다. 박사들의 이름을 호르미즈다(Hormizdah), 야즈데게르드(Yazdegerd), 페로자드(Perozadh)라고 소개한 문헌도 있고, 호르(Hor), 바사나테르(Basanater), 카르수단(Karsudan)이라고 기록한 문헌이 있는가 하면, 어떤 문헌은 우리에게 친숙한 발타사르(Balthasar), 멜키오르(Melchior), 가스파르(Gaspar)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노인, 중년, 청년 또는 황인, 흑인, 백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온 인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세 명의 박사는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이 별이 과연 어떤 별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요, 그래서 세 개의 가설이 등장했습니다. 첫 번째는 별이 수명을 다하고 폭발하면서 엄청난 빛을 방출하는 초신성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혜성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고요, 세 번째로는 행성들이 겹쳐 보인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목성과 토성은 20년에 한 번씩 같은 방향에서 관찰되는데요, 이때 화성까지 여기를 지나면 세 행성이 겹치며 매우 밝은 빛을 낸다고 합니다. 17세기의 천문학자 케플러는 이와 같은 현상이 805년에 한 번씩 일어난다고 계산했는데, 기원전 7년 혹은 6년에 이런 현상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를 서기 1년으로 삼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1세가 기원전 4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에, 즉 기원전 7년 혹은 6년경 태어나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즈음 많은 사람에게 목격된 밝은 빛의 별이, 동방박사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 가을에 신학교에서 산보하다가 밤하늘의 아름다운 빛 두 개를 보고 궁금해서 검색을 해 보았는데요, 그것이 목성과 토성이라는 것을 알고는, 신학생 때부터 별러 오던 천체망원경을 샀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그 정도 망원경으로는 토성의 띠 정도만 겨우 보인다’면서 사지 말라고 하던데요, 망원경으로 토성의 띠는 아직도 못 보았지만, 목성 주위의 위성들을 보고 너무나 신비로워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지구에서 목성까지의 거리는 평균 7억 8천만 km 정도라고 하는데요, 만일 자동차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걸릴까요? 시속 100km의 속도로 가면 890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이 목성은, 하늘에 있는 천체 중 지구에서 여섯 번째로 가까운 천체입니다. 태양계와 가장 가까이 있는 별은 우리와 4.24광년이 떨어져 있는데요, 이는 목성과의 거리의 5만 배에 해당합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은하는 그 3백억 배가 되는 250만 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아득히 먼 거리에 있는 별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기나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광활한 천체를 관측하다가 동방박사들은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면서 예루살렘에 나타납니다. 이로써 민수기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민수기 24장에서 발라암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동방박사의 방문은 또한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로 시작되는 제1독서는 “[이민족들이]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라고 예언합니다.
금과 유향은 당시에 너무나도 귀한 예물이었습니다. 금은 지금도 값어치가 높지만, 유향은 당시 신께 바치는 예배 때 쓰던 물품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 두 가지에 더하여 몰약까지 예물로 가지고 옵니다. 이 세 가지는 너무나 귀했기에 임금에게나 드릴 수 있는 예물이었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황금은 지혜를, 유향은 거룩한 말씀을 추구함을, 몰약은 육신의 고행을 상징한다고 보셨습니다. 한편 많은 교부들은 황금이 예수님의 왕권을,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몰약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키는 상징이라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메시아 경배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이방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비해, 정작 유다 권력자들은 새로 나신 왕께 경배드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헤로데는 “유다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유다인의 왕”은 오직 자기 자신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자리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그는 자기 왕위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부인, 장모, 그리고 아들 셋을 살해한 포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성경을 풀이하여 예언자들이 말한 바를 알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서의 말씀이 아니라 헤로데의 명령을 따릅니다. 왜 그들 중 아무도, ‘우리도 가서 경배드립시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나중에 헤로데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죽이라는 무서운 명령을 내릴 때, “당신이 정말 유다인의 왕이라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느냐?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 아니냐?”고 어찌하여 따지지 못하였을까요?
권력에 빌붙어, 권력을 우상으로 섬기며 어느새 권력욕이 그들을 집어삼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헤로데 뒤에 숨어 있지만, 헤로데의 폭정을 방관하고 협력함으로써 또 다른 헤로데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슴 아픈 소식이 연일 뉴스를 도배하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교황님의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동방박사들은 머나먼 천체들에서 발생한 현상조차 자신들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먼 길을 떠나 주님께 경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가슴 아픈 참사들이 나와 상관있는 일, 바로 나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멀리 있는 별의 움직임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우리에게는 별이고, 사건 하나하나가 우리에게는 시대의 징조입니다. 그 일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라고, 생각과 마음과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하느님의 의로우심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무엇인가 하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그리스도께 예물을 드려야겠습니다. 헤로데와 같은 거짓 권력, 거짓된 욕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이 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주님 뜻을 따르려 할 때 아기 예수님께 황금을 바치는 것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깨닫고 하느님의 의로우심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실천할 때, 아기 예수님께 유향을 드리는 것입니다. 억울한 희생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할 때, 아기 예수님께 몰약을 드리는 것입니다.
동방박사, 1375년 경
출처: Three kings - Biblical Magi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