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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52:1-4 강포한 자여 : 칼빈
이 다윗의 시는 아히멜렉과 다른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여 온 백성이 두려움에 떨고 그들이 다윗에게 어떤 후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줄 수 없게 되었을 때 쓰였습니다.
또 도엑은 고자질하여 얻은 성공적 결과로 의기양양해 하고 있을 때 쓰여졌습니다.
이런 처지 가운데에서도 더욱 강렬한 믿음의 감동에 힘을 얻어 다윗은 고자질을 한 그 파렴치한 사람의 잔인한 반역행위를 통렬하게 나무랍니다.
하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시고 경건치 않은 자들의 교만을 형벌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용기를 얻습니다.
1. 본 시편의 주제는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더라 말하던 때에” 입니다.
우리는 ליכשמ(마스길)이란 말이 다윗이 징계 또는 최소한 자기를 바로 잡기 위한 마치 선생님의 매질처럼, 자기가 받게 된 어떤 고통에 의해 권고 받고 있음을 말하는 시에는 꼭 붙여져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실예는 32편과 42편에 있습니다.
45편 처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같이 이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입니다.
거기에서는 그 노래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부정한 취미를 즐기려 함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교회와 맺게 되는 신령한 결혼을 설명하려 하고 있음을 읽는 이들에게 넌지시 말해 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시에서와 연결된 시에서 이 말은 ‘교훈’, 상세히 말하면 ‘바로 잡아 주다’에서 나온 의미로 이해하게 해 줍니다.
다윗은 이 말을 사용하여 자기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교훈하기 위해 자기에게 임한 이 특이한 시련에 지금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말합니다.
이 시가 가리키고 있는 그 한 부분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이 놉에 있는 아히멜렉에게로 피해 갔을 때 다윗은 그 제사장에게서 먹을 것과 골리앗의 칼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하고 있는 실제 위험을 아히멜렉에게 숨기고 왕이 시킨 은밀하고 중대한 일을 하는 척했습니다.
시편 52 편
왕의 목자장이었던 도엑은 보상을 기대하고 이 사실을 사울에게 알렸는데 도엑은 죄없는 제사장과 그 전체 제사장들에게 이 폭군의 격노를 끌어온 장본인이었습니다.
그처럼 자행된 유혈의 사건 때문에 사람들은 극히 평범한 인정의 손길조차도 다윗에게 펴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비참한 망명 중에 안도의 길은 모조리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도엑은 그의 그릇된 행위가 성공적이었다고 의기양양해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도엑이 받았던 보상에 의해 다윗을 파멸시키려는 생각을 해보고자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이 시 가운데 하나님의 위안으로 자기 영혼을 격려하고 있으며 행위가 무례한 그의 원수들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2. 본문 1절은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입니다.
도엑이 반역하여 얻은 성공 때문에 다윗의 믿음은 상당히 흔들렸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유혹에 대항하여 자신을 더욱 효과적으로 무장하기 위해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신성한 도전의 성격을 띤 방법을 택합니다.
다윗은 더할 나위없이 악한 행동으로 얻은 권세를 자랑함으로서 죄악을 격심하게 행하고 있는 도엑을 나무라면서 시작합니다.
이 권세는 이 시 중에서 그렇게 하고 있듯이 충분히 주의를 끌만합니다.
도엑은 ‘왕의 목자장’ 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이 칭호는 도엑이 실제로 육축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고 마치 오늘날 법정에서 ‘사마관(司馬官, The Master of the Horse)이라는 말을 쓰듯이 하나의 가칭이었을 것입니다.
도엑이 악을 위한 목적에 자기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 한, 자기가 높은 직위의 사람인 사실을 내세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도엑이 최근에 범한 악한 행위의 보상으로 왕이 그에게 주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새 영예를 헛되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성실성만이 권세와 승진에 이르는 단 하나의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이나 반역 또는 정당하지 못한 수단에 의해 얻어진 승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반절에서 다윗은 사람들이 악한 중에도 자랑을 일삼는 우매에 대한 참된 이유를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데서 생겨납니다.
시편 52 편
또 하나님이 그들의 유익에 관심을 갖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하고 파렴치하게 기회만 있으면 그 가난한 자들을 억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행사하시는 섭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윗은 거룩한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럽히는 오만하게 자랑을 하는 자들에게 도전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선하심을 나타내시되 언제나 똑같은 길을 따르시지는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해도 용납하시고 때로는 그 선하심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겉으로 나타난 일들을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반대되는 것 같지만, 그 선하심은 매일 실행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서 이런 상황들이 유혹해 오는 온갖 시험을 물리칩니다.
분명히 다윗이 전해 주려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는 것을 부분적으로 방해하는 일은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계속적으로 새롭게 나타나는 그 선하심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장차 경험하게 되리라고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도우심에 있어서나 그들이 당하는 불행을 덜어주시는 일에 피곤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고통에 빠지도록 자주 허용하신다 할지라도 그들이 원하는 구원을 주시기 위해 언제나 준비하십니다.
3. 본문 2-4절은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4)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부당하게 손상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습성을 가지는 것처럼 보복의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의 대적을 향해 홍수처럼 비난을 퍼붓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생각하는 원한을 갚으려고 자신을 격려하고자 하나님 앞에서 도엑을 향해 책망합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악을 행하는데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의 노를 더 많이 일으켜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나타내실 그 멸망에 더욱더 가까워지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52 편
그러므로 다윗의 목적은 세상 사람들에게 도엑을 나쁘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열거하는 극악스런 범죄로 도엑의 위에 확실하게 임할 하나님의 형벌을 눈앞에 보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범죄 중에서도 그가 제사장직을 온전히 멸절시켰다는 혐의를 받을만한 그 은밀한 반역을 특별히 더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의 은밀하고 악의에 찬 고소 조건을 말하면서 다윗은 ‘그의 혀’를 “날카로운 삭도”에다 비유합니다.
마치 시편 120편 4절에서 악한 자들의 혀가 “날카로운 살” 로 비유된 것과 같습니다.
“간사를 행하는도다”라는 말이 연결되는데 이 말을 어떤 이들은 눈에 잘 보이는 상처를 내는 보통 칼이 아니라 예리하게 자르는 면도날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비유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이 혀에 적용된다고 봄이 더욱 적절한 해석일 것입니다.
‘잡아먹다’라고 번역된 4절에 있는 עלב(발라)란 말을 우리는 ‘숨기다’ 또는 ‘비밀로 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다윗으로서는 우리가 무엇을 삼킬 때 혀를 뒤로 끌어당기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비유로 다윗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죄가 없는 자들을 삼키는 도엑이 하는 말의 거짓됨을 그려냅니다.
다윗의 가진 큰 의도는 자기의 원수들이 나타내는 그 악의 극도에 달하는 성격을 깊이 생각함으로서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격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52 편
시52:5-7 그런즉 하나님이
시인은 악인이 망할 것을 확실히 알고 자기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가집니다(6-9).
시인은 악인이 망할 때에 “의인들”로서는 두려워하며 또 비웃을 것이라고 합니다(6-). 그들의 두려움은 그 악인의 멸망을 보고 상선벌악(賞善罰惡)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가일층(加一層) 두려워함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비웃음은 악인의 멸망을 즐기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악한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을 확인하는 표정(表情)입니다(7-).
1. 본문 5절은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입니다.
이 구절부터는 다윗이 도엑의 극한 악을 깊이 생각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당할 파멸이 가까워짐에 대한 확실함을 증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 범죄자의 양심을 놀라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확신과 위안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반역의 행위를 잠정적으로 모른 척하시지만 그 행위가 처벌되지 않고 지나가도록 허락지 아니하신다는 확신을 선언합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형통이 계속되면 부동의 안전감에 빠집니다.
또 하나님의 성도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보고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을 볼 때 믿음 없는 불안에 눌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선언하는 진리에 자기의 마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뽑아내며”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라고 한 가지 표현에 다른 말을 중복하고 있는데 이는 볼만합니다.
마치 다윗은 이 중복된 말로 하나님이 이 원수를 모든 자만스러운 힘과 권위와 함께 뒤엎어버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효과적으로 자신에게 확신시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의 ‘거처’ 또는 ‘장막’에서 또 ‘생존하는 땅’에서 뽑아내신다고 곧이어 말함에 있어 다윗은 악한 자들이 아무리 안전하게 어떤 평안한 저택의 보금자리에서, 또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희망 가운데 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멸절될 것을 넌지시 말합니다.
‘장막’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목자인 도엑의 직업을 암암리에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시편 52 편
2. 본문 6절은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도엑의 파멸을 바라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파멸됨으로서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달성된 사실을 제시합니다.
바로 그 이유가 주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경건한 마음을 더해 주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의인들은 물론 경건하지 않은 자들도 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시인이 의로운 자들이 이 현상을 볼 것이라고 말하는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중에 나타내시는 명백한 ‘보이심’에 눈이 감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에서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심판의 현상을 참으로 볼 수 있는 자들은 의인들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교만을 겪으실 때 마음 속에 갖는 목표는 자기 백성에게 위안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안전을 보살피실 때 갖는 관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공의로 나타내시는 광경을 볼 자들은 바로 그들입니다.
또 다윗이 그들이 ‘두려워하며’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이 무서워 떨거나 어떤 노예적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갖는 관심의 증거를 보고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공손함이 더 커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원수들에게 시련을 받도록 내맡겨지면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 갖는 그 보살피심에 대한 의심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서로 상반되는 설명은 실망하는 그들에게 열정을 일으켜 주고 이 구절의 끝에서 말하는 그 즐거움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 두려움을 더해 주는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잔인과 부정에 보복하심을 알 때 그들은 하나님께 더 공손하게 됩니다.
한편 하나님이 자기들의 방어자로 나타나시고 자기들의 원수들에게 대항하는 싸움에 참여하심을 알아차리면 그들은 자연히 가장 의기에 찬 기쁨을 충만히 갖게 됩니다.
히브리어는 ‘보다’라는 말과 ‘두려워하다’라는 말을 잘 어울리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말로는 잘 옮겨질 수 없습니다.
이 표현의 형태는 그들이 보되 효과적으로 볼 것을 암시합니다.
3. 본문 7절은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입니다.
어떤 자들은 말이 후에 속담처럼 도엑에게 적용될 말씀으로 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처럼 좁은 의미로 말하려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시편 52 편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판단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음을 표명합니다.
한편 극히 빠르게 비천해질 불경건한 자들의 오만 아래서 인내하도록 교훈합니다.
이 말은 불경건한 자들의 얼빠진 정신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도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멸망을 보고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모욕하는 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면서 더욱 기뻐하고 이 세상의 헛된 쾌락을 향하여 더욱 기꺼이 자신들을 부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러한 섭리의 움직임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는 우리의 감정은 없어져야 합니다.
이 구절은 ‘보라 이 사람을’(칼빈)이란 부르짖음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은 우리가 주님을 멸시하는 모든 자들의 종말을 생생한 방법으로 우리 눈앞에 보여주는 한 실예로 이 말씀을 보도록 합니다.
그처럼 독특한 섭리를 일반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한 것은 실용적 지혜의 사소한 점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와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라는 두 구절은 서로 연결됩니다.
자신이 가진 수단에 대한 모든 신뢰를 아무것도 아니게 여기는 사람 외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랑할 수 있는 자기들 소유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인정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권력을 빼앗는 결과가 됩니다.
또 우리의 신뢰를 다른 데로 빼앗아감으로서 우리가 주님께 묻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재물뿐 아니라 세상에 속한 다른 어떤 소유물입니다.
대부분의 해설자들이 ‘악’이라고 번역하고 어떤 이들이 ‘살육’ 또는 ‘멸망’이라고 번역한 명사 הוה(하바)가 여기에서는 ‘물질’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각각 다른 말을 쓰면서 같은 취지를 반복하는 것은 다윗에게 늘 있는 일입니다.
이 번역에 따른다면 이 구절은 연결성을 갖고 진행됩니다.
그 해석은 자기의 부를 의지하며 자기가 가진 물질로부터 힘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지셔야 할 마땅한 영광을 빼앗는 것이 됩니다.
시편 52 편
시52:8-9 오직 나는 하나님의
시인은 악인의 멸망에 대한 의인들의 태도를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자기의 신앙적 태도를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형통의 길임을 확신하여 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의 신앙이 영원할 것을 내다보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라”하였고(8-),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겠다고도 합니다(9-).
시인의 이와 같은 확신은 악인이 멸망할 것을 신령한 감동에 의하여 확실히 깨달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시인은 악인이 장차 멸망할 것을 확실히 알았기에 그 사실을 벌써 이루어진 듯이 과거사(過去詞)로 표현하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라고 하였습니다(9-).
1. 본문 8절은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믿음을 발동하여 신성한 경멸로 도엑이 가진 세상에 속한 위풍을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의 상황 속에서 현재 당하는 온갖 고통에서 보다 높이 오릅니다.
겉모습을 볼 때 다윗은 땅 윗부분이 썩고 말라 죽은 줄기의 나무보다 더 심한 상태에 비교 되겠지만 다가올 번영의 확신 속에서 자신을 푸른 감람나무에 비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잔학함에 대한 보복을 내리시는 심판자시라는 사실을 다윗이 스스로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에 대한 벌을 내리시는 것만큼 자기를 번영의 새로운 위치로 이끌어 가실 것이므로 도엑이 당할 멸망은 다윗의 마음에 오직 위안을 전해줄 것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이 한 말을 보면 자기가 당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끼이고 헌신에 열중하게 되는 것보다 더 귀한 복은 없다고 생각함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가진 정신의 특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다윗이 하나님 전에서 쫓겨난 것을 자기 아내와 갈라진 것, 또 세상 재물을 잃은 것보다 광야의 위험과 곤란보다 더 통렬히 느꼈음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는 순전히 한 사람의 정탐자로서 위선적 구실을 내세워 하나님의 성소에 찾아왔던 도엑에 대한 암시가 대조법에 의해 나타난다는 해석은 무리이며 엉뚱합니다.
시편 52 편
다윗은 자기가 지금은 비록 성소에서 떠나 있지만 머지않아 되돌아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집 독점소유를 자랑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을 암시하면서 자신을 자기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자연스럽게 구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 속에 우리가 끼여 있게 된 것이 우리 생존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여겨야 하며 우리의 약함에 필요한 도움을 주고 피차 자극과 격려의 방편이 되는 앞서 말한 교회의 모임에 관한 극히 값진 특전을 활용해야 한다는 유용한 교훈을 우리들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자기 안에서 하나 되기를 의도하고 계시는 주께서는 영생에의 소망과 그의 거룩한 이름을 연합하여 찬양하는 가운데 이러한 모임과 우리가 공동으로 행하는 성례전에 의하여 우리를 함께 훈련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윗과 함께 세상 온갖 거짓된 허사들보다 하나님의 집안에 한 곳을 택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왜 푸른 감람나무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이유를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나타내는 불변화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에 있어서 다윗은 자기와 원수들 사이에 있는 대조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잠시동안 번창할 것이며 그들의 가지를 멀리 넓게 뻗칠 것이며 무성하게 자랄 것이나 신속하게 마를 것입니다.
다윗은 근원으로부터 계속 수액(樹液)과 활력의 새로운 공급을 받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는 반면에 그들은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신뢰가 미래에 있지 않다면 그가 땅에서 당하는 시련 기간이 연장될 것이고 그것이 계속되는 중에 그가 주저앉아 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향해 시간을 규정하려 하지 않고 자기 희망은 영원에 이른다고 명백히 선언합니다.
다윗은 이생이나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굴복시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순수한 자녀들과 위선자들 사이에 있는 큰 구분입니다.
마치 타작마당에 밀과 쭉정이가 섞여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부류가 그릇된 신뢰를 가지고 허망하게 밀려나가는 반면 다른 한 부류는 좋은 희망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게 됩니다.
2. 본문 9절은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감사하며 시를 끝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특별히 인정하면서 신실하게 찬양합니다.
시편 52 편
입으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러내는 백 명의 사람들 중에 자기가 받은 유익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도엑의 반역과 자기에게 계속 다가오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피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심에 힘입은 사실을 선언합니다.
또 다윗은 그 고마움의 감정을 자기 일생동안 간직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인내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하다고 가르치는 경건상의 명령이 있듯이 감사하는 일에서 그 정신을 가지라고 특별히 명을 받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베풀어주신 자비를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영구히 기억해야 함에도 2,3일만 감사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다윗은 감사를 실천함과 동시에 희망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비가 가장 적게 허락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질 때에라도 그 자비를 참을성 있게 기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데 아무리 지연되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신용하라는 말과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주의 성도 앞에서 선함’을 깊이 생각함으로서 자기가 가진 희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신을 격려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주의 성도 앞에서 좋은 일이기 때문이옵니다’, 즉 주의 이름 안에서 희망을 갖는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시118:8)로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언제나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백성의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앞서 말한 해석이 우리에게는 가장 단순하고 마땅한 것같이 보입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몹시 싫어할는지 모릅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이름이 모든 백성의 경험에는 듣고 싶은 이름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유순한 자들이라고 불려집니다.
우리가 시편 16편 3절을 주석하면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자기의 인격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갖고 계시는 친절과 덕스러운 행위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