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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2-26
아골 골짜기의 비극 / 안효관 목사
그리스 신화에 우리가 잘 아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주신(酒神)인 디오니소스(Dionisus)가 절친한 마이다스(Maids)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이다스 왕이여, 당신이 가장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내가 다 들어 주리이다.” 평소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강했던 마이다스 왕이 ‘바로 이 때다’ 싶어 자신이 만지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디오니소스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흔쾌히 그 요구를 들어 주었습니다.
너무나 큰 횡재에 어안이 벙벙해진 왕은 그 신비한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커다란 방위 덩어리에 손을 대었습니다. 마치 자기 욕심의 덩어리만큼이나 큰 바위 덩어리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말 같이 바위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황금 덩어리로 변하였습니다. 신바람이 난 왕은 계속 손에 잡힐 만한 모든 물건을 손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앉은 의자나, 문, 정원의 화초, 심지어는 애완동물까지도 손을 대자마자 모두 황금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왕의 주위는 온통 황금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기막힌 소식을 전해들은 왕비는 진귀한 구경을 하기 위해서 왕에게 급히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왕비는 자신을 반기는 왕의 손을 잡는 순간 황금덩어리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왕은 자기의 요구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왕은 식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 빵을 먹으려고 빵을 집으면 그것은 곧 황금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쯤 되자 왕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왕이 겁에 질려 두려워하고 있는 사이에 사랑하는 공주가 왕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겁에 질려 있던 왕은 사랑하는 공주를 보자 너무 반가워서 딸을 품에 안았습니다. 물론 공주도 황금 동상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욕망과 소원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마이다스 왕은 뒤늦게 디오니소스 신에게 찾아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욕심이 얼마나 엄청난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과연 물질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계속 던져질 물음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과 물질이라는 것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물질을 초월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 앞에서는 과감하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이더스 왕을 통해서 우리 선조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이더스 왕처럼 욕심이 때로는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소원을 깡그리 짓밟아버리고 오히려 우리에게 파멸이라는 참으로 쓰디쓴 결과를 안겨주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읽은 아간이라는 사람도 그랬습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은 욕심 때문에 파멸의 길로 들어선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생활을 다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 첫 번째 성읍인 여리고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여리고를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아이성을 향하여 돌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을 점령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이성은 아주 작은 성읍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8:25절에 의하면 아이성의 총 인구는 12,00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여리고라는 큰 성을 점령하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아아성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7:3절에 보면, 아이성을 정탐하고 온 정탐꾼들이 여호수아에게 보고하면서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그렇게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3,000명의 군사를 보내어 아이성을 치게 했지만, 결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간 실망이 아니었습니다. 크고 견고한 성읍 여리고를 한 사람의 인명피해도 없이 함락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기세와 사기를 가지고 작은 성읍 아이를 점령하고는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 전부를 얻기 위하여 진군할 큰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대한 꿈에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40년 동안 고생 고생 하면서 간직해 온 꿈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초기에 깨어져버린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렇듯,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일한 꿈, ‘하나님께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그 꿈이 깨어져버린 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성경은 그 원인을 ‘아간의 범죄’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참패한 것은 단순히 아간의 범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간의 범죄 때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아이성의 전투에서 참패를 면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7:3-4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을 너무 얕잡아 보았습니다. 큰 성읍 여리고도 점령했는데 그 작은 성 하나 정복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3,000명의 군대를 가지고 간단히 일을 끝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출정하였다가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강한 민족과 전쟁할 때도 그랬고, 아무리 약한 민족과 전쟁할 때일지라도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물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이리라’ 그러면 올라가서 싸웠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는 반드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에 갈 때에는 그들의 마음에 교만이 가득 차서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정탐꾼들의 말만 듣고 곧 군대를 파송하고 말았습니다. 아이성의 패배는 교만이 낳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교만이 가득 차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실 자리가 없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자리 잡고 앉아서 인간적인 것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됩니다. 아이성을 점령하러 나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여리고성을 점령했던 그 경험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지식이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하시려고 많은 지식과 경험과 생각들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 지식과 경험과 생각들이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종종 우리의 삶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생각을 하나님보다 앞세웁니다. 너무나도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과 상의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아이성에서 참패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불행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이든지 하나님께 묻는 신앙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좀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께 묻고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라도 하나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귀찮게 여기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작은 것 하나까지도 묻고 살아가는 신앙인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아이성의 실패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첫 번째 음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만한 마음의 단적인 증표가 바로 아간의 범죄였습니다.
그러기에 아간의 범죄는 아간 개인의 범죄이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만한 마음을 드러내 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간의 범죄를 보면서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 전투에서 참패할만큼 아간의 범죄가 큰 것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아간이 범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리고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모든 것을 진멸하고 불태워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성 전리품 중에 일부를 훔쳤습니다. 아간이 훔친 것은 21절에 보니까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짜리 금덩이 하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의 단위로 한 세겔은 11.4g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아간이 훔친 것은 은 600돈, 금 150돈, 그리고 거기에다 외투 한 벌이었습니다.
요즘 금값이 연중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 도매시장에서는 금 하 돈에 약 7만원을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확한 가격은 잘 모르겠지만, 요즘 은 한 돈에 만원을 잡는다면 아간이 훔친 은덩이는 약 600만원이고, 금값을 한돈에 7만원 정도 잡는다면 약 천 만원 정도 됩니다. 그리고 고급 외투 한 벌에 약 100만원 정도로 잡는다면, 아간이 훔친 것은 총 1,700만원 정도 됩니다.
그러나 ‘그 돈이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참패하도록 만들만큼 많은 것인가’ 하는 데에는 다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이나 기업에서 부정직하게 사용한 돈들에 비하면 2,000만원도 되지 않는 돈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습니다. 몇 억, 몇 십억씩 비리를 저질러도 나라가 망하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몇 백억씩 검은 돈이 오가도 나라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잠시 시끄럽다가 금새 조용해집니다.
그런 현실에 비춰 전쟁통에 잠시 욕심을 내서 2천만 원도 안 되는 것을 훔쳤다고 그게 그렇게 큰 죄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수십억, 수백억씩 검은 돈이 오고가도 우리 대한민국은 끄떡도 없는데, 2,000만 원도 안 되는 전리품을 몰래 숨겨두었던 아간의 범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아간과 그 가족들이 모두 아골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오늘날의 현실과 비추어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분명 아간의 범죄는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간의 그 작은 범죄가 이스라엘에게는 아이성에서 참패를 경험하게 했고, 그 범죄로 인하여 아간과 그 가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간의 작은 죄를 크게 벌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곧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거기에 정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온갖 탐욕에 대한 유혹이 다가올 것입니다. 광야에서와 같이 떠돌이 생활을 할 때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착한 생활을 하고 나면 많이 가지고 싶어지고,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는 법입니다.
우리도 작은 사글세 집에 살 때에는 좋은 가구, 큰 가구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습니다.
언제 어디로 또 다시 옮겨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좋은 것, 큰 것을 가진다는 것은 오히려 불편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 집을 장만하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거기에 욕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좋은 것, 남들보다 크고 화려한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정착하여 생활하게 되고 수많은 물질적인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나라가 부강해져서 주변 나라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탐욕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탐욕으로 인해서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간을 벌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 부부는 초대교회 때 사도들 아래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면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필요를 따라서 나눠 쓰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도 자기들의 재산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도들에게 가져다 줄려니까 아까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절반쯤 감추어 두고서 나머지 절반만 갖다 주면서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랬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 거짓말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이 조금 너무 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죄가 초대교회의 그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깨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엄중한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어긴다면 아간과 같이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아간과 그 가족들, 그리고 아간의 모든 재산을 아골 골짜기에서 불태웠습니다. ‘아골 골짜기’라는 말은 괴로움의 골짜기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결국 자신에게 괴로움과 파멸을 가져다 줄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소가 아골 골짜기입니다.
성경은 끝임 없이 우리 신앙인들이 경계해야 할 경계의 대상 1호가 탐욕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도 결국 탐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도 탐욕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고, 가장 선한 왕이라고 불리는 다윗왕도 여인에 대한 탐심 때문에 밧세바를 범하는 치욕적인 행적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라고 불리는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 하는 탐욕 때문에 살인이라는 잔인한 방법을 써서 그 포도원을 소유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잠언 1:19절에서는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믿음도 잃게 되고 사망을 향하여 달음질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께서 산상수훈 중 8복을 말씀하시는데, 그 첫 번째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탐심과 욕심을 벗어버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천국은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만족함만이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탐욕이 있는 곳에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가난하게 살라고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부하게 살고 넉넉하게 살면서 이웃을 도와주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하지 않고 부자로 산다고 하더라도 늘 마음만은 가난한 자로 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탐욕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것이기에 탐욕에 눈이 먼 사람은 그 탐욕으로 인해서 결국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탐욕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파멸의 순간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15절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욕심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결국 우리를 파멸의 길로, 사망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절에서 우리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간은 작은 탐심을 물리치지 못해서 생명을 잃는 불행의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작은 것이 커져서 결국은 우리의 생의 바퀴까지 불사르는 엄청난 것으로 커지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 마음속에서 늘 우리를 유혹하고 괴롭히고 있는 탐욕과 욕심을 버리고 - 우리의 옛사람을 정과 그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 천국을 - 창조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버린 자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사시겠습니까? 욕심으로 가득 차서 늘 불평과 원망 가운데 사시겠습니까?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16교구 여러분, 그리고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세상의 물질에 대한 욕심보다는 좀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싶은 거룩한 욕심으로 남은 생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에 아골골짜기의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날마다 풍성하게 채우시는 우리 주님의 은총 가운데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아름다운 생애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