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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벌을 보내시리니
(신 7:17-24)
6·25가 우리에게 왔듯이 인류 역사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인
간 역사를 요약하자면 갈등과 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창
3: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를 창세기 3장의 표현으로 요약하면 뱀
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일어난 갈등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사라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모세
는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소위 가나안 7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고 요구하
거나, 노력이나 수고에 따른 보상으로 얻은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언
약을 세우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을 허락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서 거룩함
을 이루는 삶의 현장으로 삼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은 비록 가나안 7족의 방해가 끊임없이 지속될지라도 가나안 땅에서 거룩함을 이루어
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7족의 비교
신명기 7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7족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7족은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그리
고 여부스 족속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숫자도 많고 힘도 강한 백성들
입니다. 모세는 이 가나안 7족의 특징을 2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가나안 7족은 우
상숭배하는 백성들입니다. 아세라 목상과 조각한 우상들을 섬기는 백성들입니다. 둘째
로 우상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는 백성들입니다. 여호와를 떠나서 다른 신
들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7족은 우상으로 유혹하는 백
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
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
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
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
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
서 속량하셨나니”(신 7:6-8)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민(holy people)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거룩하
다’는 말은 ‘윤리적으로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
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들이란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 놓으신 백성
들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대전 대흥침례교회의 안종만 목사님께서 제 집
에 오셔서 기도를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특별히
구별해 놓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지금도 그 기도를 잊을 수
가 없습니다. 구별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우리
는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놓으신 백성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다가 멸망당
할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거룩한 백성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함 받은 백성(chosen people)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
라엘 백성들의 수효가 많거나 능력이 많거나 어떤 조건이 좋아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
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저 사랑하셨기 때문
에 택하셨습니다. 이 선택을 무조건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에
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 택함을 받았다면 그 조건을 잃게 되었을 때 마땅히 택함도 잃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선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저 우리를 사랑하셔
서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택함의 은혜를 잃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받은 백성(loved people)입니다. 이스라엘 백
성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누렸던 백성이었습니다.
2. 가나안 7족의 영적인 의미
하나님께서는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7족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세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로 그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명하셨고, 둘째로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혼인관계를 맺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불신자들
이 혼인관계를 맺은 후에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면 모르겠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겠
다고 하면 혼인하지 마십시오. 불신자와의 혼인은 집안에 우상을 끌어들이는 일이요,
집안이 망하는 일입니다. 혹시 지금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집안에 우상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면 오늘부로 집안에서 우상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우상을 아까워하지 마십
시오. 그것이 아무리 금이나 은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과감히 제거하십시오. 신명
기 7장 25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
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
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십
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7족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철저히 진멸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순종을 표현했
지만, 그 마음은 달랐습니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
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 낼 수 있으리요”(17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은 마음속으로 ‘이 가나안 7족이 우리보다 숫자도 많고 힘도 강한데 어떻게 이들
을 진멸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7족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선 가나안 7족
을 진멸하라는 것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
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말씀처럼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히포의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방탕한 시간들을 보냈으며, 결혼도 하지 않고 한 여자와 동거하여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거스틴이 32세에 밀라노에 가서 유명한 암브로스
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하게 됐습니다. 회심한 후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길 가에서 왕년에 드나들던 술집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
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에게 “왜 요즘은 저희 집에 들르지 않나요? 오셔서 함께
술 한 잔 하세요”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옛날의 어거스틴은 죽었
소. 나는 새사람이 됐소”라고 대답을 했다는 역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이 되었다
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속에는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있었던 옛 성품, 못된 성품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인들은 옛 성품과 새 성품이 공존하는 복잡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지만 여전
히 그 속에는 옛 성품과 새 성품이 공존합니다. 불신자들은 옛 사람 속에 옛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일관성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죄인 줄 모르는 옛 성품을 지니고 옛 사람으로 살다가 지옥에 갑니다. 간
단하고 단순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의 삶은 천국을 향한 여정입니다. 이는 쉬운 길
이 아닙니다. 옛 성품이 우리 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보다 복잡한 존재입니다. 어떤 때는 성자 같다
가도, 어떤 때는 죄인입니다. 새 사람이지만 옛 성품과 새 성품이 우리 안에 공존하
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영토와 주권과 백성을 가진 새로운 민족 국
가요, 새 나라입니다. 그러나 새 나라 가나안 땅에도 여전히 가나안 7족이 도사리며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훼방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나안 7족은 구원받은 신자들의 삶
속에 남아 있는 죄, 즉 옛 성품을 가리킵니다. 7족이기 때문에 종류도 많고 그 영향력
도 강한 것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면 이 가나안 7족은 숨어 있다고 기록되었습니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
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라” 동굴과 지하와 땅 속 어두운 곳으로 모두 숨어버렸습니
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을 믿어서 거룩한 성자가 된 것 같아도 우리 속에는 가나안 7족들
이 숨어버린 것처럼 옛 죄악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용기 없는
비굴함이 겸손으로 위장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다보면 죄마저도 무
조건 덮어버리면서 공의가 희생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죄를 엄히 다스리고자 하면
서도 자기 죄는 다스리지 않고 남의 죄만 다스리는 정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뻔뻔
스러움이 담대함으로 변질될 수도 있고, 사람과의 의를 지키고자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과 의무를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성품의 간교
함, 교묘함, 은닉성입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이렇게 숫자도 많고 강력한데다가 숨어 있는 가나
안 7족들을 어떻게 잡아서 진멸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
게 우리도 위대한 사도 바울처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
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
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
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
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1-24)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3. 왕벌을 보내리니
그렇다면 이 숨어 있는 죄를 몰아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는 무엇일까
요? 바로 ‘왕벌’(hornet)입니다. 이 왕벌은 꿀벌(bee)과는 다릅니다. 꿀벌에게는 쏘
여도 그냥 조금 부르틀 뿐 고통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왕벌에게 쏘이면 졸도할 수
도 있습니다. 지난 해 여름산상성회에서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왕벌에 쏘여 졸도
하는 바람에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신 후에 깨어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양관의 벌을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연약한 사람은 왕벌 몇 마리에 쏘이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옛
날 페르시아 군대가 코끼리를 타고 기독교 도시와 전쟁을 하기 위해 접근했을 때 그
군대는 전쟁을 하기도 전에 모두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시에 있
는 왕벌들이 모두 코끼리에게 덤볐기 때문입니다. 왕벌에 쏘인 코끼리들이 가려워서
날뛰는 바람에 그만 군인들이 모두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조그
만 왕벌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왕벌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출
23:28) 또한 여호수아서에서도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수 24:12)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벌을 두셔서 그 쏘는 무기로 남아있는 죄를 다스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위대한 사
도 바울은 계시를 많이 받아서 성경을 무려 14권이나 썼던 사람입니다. 자칫하면 교만
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의 왕벌을 보내셨기 때문에 교만죄를 다스릴 수 있
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에 왕벌이 옵니다. 자녀들이 속 썩이고 남편이 손찌
검 하는 것이 가정의 왕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업에 왕벌을 보내십니다. 될듯하
다가 안되고 망하는 것이 사업의 왕벌입니다. 또한 국가적인 왕벌을 두어서 국가적인
우상숭배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20세기에 일제치하 36년의 고통과 6·25 비극을 겪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
는 고통이었지만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그런 왕벌을 맞지 않으셨더라면 오늘날 대한민
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제 36년, 6·25라는 왕벌 두 마리를 보내시니까 유교도, 다른 종교도 모
두 고꾸라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독교가 이렇게 부흥하게 된 것이 아니겠
습니까?
오늘날 전 세계에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1991부터
1992년까지 약 400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연길의 신풍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
습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목회하시는지 저녁 7시에 설교를 시작해서 1시간
후에 축도까지 마쳤는데 예배를 끝마치지 않고 “피 목사님께서 설교 한 번 더 하시겠
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시간동안 말씀을 전했는데 이
목사님께서 또 나오셔서 “우리가 집에 가봐야 재미난 일도 없고 하니 피 목사님께서
설교 한 번 더 하시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날 저녁
에 무려 세 번이나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세 번째 예배를 마친 후에도 다른 목사님을
모셔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참 대단한 목사님이셨는데 그 목사님께서 그만 고문과 구
타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다른 분이 그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
다. 지금도 이와 같이 종교를 탄압하고 전도하지 못하게 하는 나라가 전 세계에 절반
이 넘습니다. 우리나라가 두 왕벌에 쏘이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이 무지몽매한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벌을 한꺼번에 보내어 가나안 7족을 한꺼번
에 쫓아내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7장 22절 말씀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
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왕벌이 한 번에
숨어 있는 가나안 7족속을 모두 쏘아 죽인다면 그 땅은 황폐하고 부패한 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가나안 땅 전체가 시체로 뒤덮일 것이고 온갖 들짐승들이 활보하며 다
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왕벌을 몇 마리씩 보내서 숨어있는 가
나안 7족들을 점진적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와 싸우는 것도 점진적인 작업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사람이
죄와 싸워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단번에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완전론(perfectionism)이라고 하는데 이 신학은 성경적이지 못한 이
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목사라고 해도 절대로 죄
가 없는 완전한 성자의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꾸준히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왕벌을 보내셔서 남은 죄들을 점차 쫓
아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점진적인 작업입니다.
결 론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벌의 소리가 들리는 분
이 계십니까? 혹시 왕벌에 쏘여서 지금 졸도 직전에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왕벌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왕벌을 보내신 목적은 우리의 삶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은밀한 죄를 찾아서 쫓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이 달성되면 하
나님께서는 왕벌을 거두어 가십니다.
여러분, 왕벌에 쏘여서 졸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날마다 자기점검(self-
examination)을 통해서 은밀한 죄를 고백하며 이겨나가시겠습니까? 벌에 쏘이지 마십
시오. 매일 자기 점검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신 목적, 즉 거룩함
을 이루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이뤄나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