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학생데모의 회고
1960년 2월28일은 일요일이었다.
자유당 말기.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구시내 수성방천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선거 유세가 있은 날이다.
대통령후보로 나온 조병옥박사가 그해 1월29일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갔다가 2얼15일 미국에서 서거하셨다.
결국 대통령은 단독후보이니 부통령 선거에 열을 올리게 된 셈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2월16일 모교(경북사대부속고등학교) 동기동창 유모군 등 세명이
당시 유행하던 유행가 유정천리에 개사를 하여 칠판에 적고 부른 것이 전교로 퍼지고 대구 시내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온다" 가사 1절이다.
2월28일은 대구 시내 전 고교에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장면박사 선거 유세를 막기 위한 치졸한 조치였다.
학교마다 구실을 달리하고--반마다 담임선생이 장악하여 등교한 학생들의 하교를 막고 있었다.
결국 거리로 뛰어나온 경북고교 등 시내 8개 고교 학생들이 도청으로 몰려가고 반 정부 시위 데모가 되었다.
1950년대 관제 데모 이후 처음으로 자유와 독재에 대한 항거 민주화 학생데모였다.
이를 계기로 3월에 서울 대전 수원 충주 부산 문경 등지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나더니
결국 3월15일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데모가 마산 등지에서 일어났다.
맨주먹의 데모대에 발포를 하여 김주열군 등 사상자가 발생하여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4.19가 발발하게 된 것이다.
대구는 자유당 시절 가장 다루기 힘든 야당 도시였다. 어린시절 제대로 판단을 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자유를 억압하고 강제로 동원되는 처사에 반발하는 정의감이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집은 두개의 신문을 보고 있었다. 동아일보와 서울신문--
수성천변에서 있었던 민주당 유세에 참가한 숫자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안나지만 무려 5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관제신문인 서울신문은 공무원 집에는 강제로 보아야 했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아니 방종에 가까운 자유가 넘친다.
그래서 국기를 흔드는 사상논쟁과 안보위기까지 몰고 왔다.
오늘은 삼일절이다.
집앞에 태극기를 내걸며 여러 상념에 젖어든다.
민족의 수난을 겪어내고 얻은 독립과 자유의 환희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아야만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독재에 항거하며 얻은 민주화를 이념전쟁에 소모하며 국력을 낭비해서야--
더구나 북에서는 전쟁의 도발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
자유와 평화 우리 인간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한번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