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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8편 3절-7절: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찌어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셀라).
3절: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 왜 의인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뛰노는 걸까? 첫째는 마치 초가 불 앞에서 녹아버리듯이 악인이 다 망해서 씨도 없이, 형체도 없이,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서 의인들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의인이 하나님의 의를 붙잡고 자기 자체화 시키니 이것이 참 보기가 좋기 때문이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은 것이 보기 좋기 때문에 기뻐하며 춤을 추는 거다.
첫째는 악인을 다 멸절했기 때문에 기쁜 것이고, 그 다음에 이룰구원 차원에서 현재에 악인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말씀을 따라 살면서 의인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 때 보기가 좋기 때문에 기쁜 거다. 악인들이 주는 환난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붙잡고 신앙정조를 지키며 살아온 보람이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빙빙 돌며 춤을 추며 ‘어느 면이 잘 만들어졌나 보세요?’ 라고 한다는 거다. 하나님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것은 성도 스스로도 기쁘고 남이 보아도 기쁘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노래를 잘 하는데, 악인은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누림성의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며 악인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의의 나라가 이뤄지는 것을 보고 기뻐서 춤을 춘다.
믿는 우리는 악인은 망하고 의인은 흥한다고 하는 성경을 읽는다. ‘의인은 망하는 법이 없다. 의인은 거지가 되는 법이 없다’ 라는 성경구절을 늘 읽으면서도 왜 신앙정신과 사상을 가지는 면에 있어서는 악인의 정신과 사상을 가지느냐?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을 행동적으로만 보고 말을 하지 신앙사상 면에서 마귀가 좋아하고 마귀의 꾀임에 빠진 세상을 좋아하는 정신도 신앙 면에서 질적으로 악한 것임을 도무지 모르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의 본질을 모르니까 자기가 육적 세상적인 정신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게 하나님 앞에 악한 것임을 도무지 모르고 있다. 이런 거짓 교회, 거짓 교인, 거짓 목사가 얼마나 많으냐? 안 믿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을 볼 때 사람의 속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교회의 가르침에 있어서 성질 성격을 구별하지 않는 거냐? 참으로 이상하다.
악인은 자기의 중심에 세상을 높이 세우는데, 세상을 높이 세운다는 것은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고, 세상 것을 자랑하고, 노래하고, 돋보는 정신을 말한다. 마귀가 이런 짓을 하고, 거짓 종들이 이런 짓을 한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세상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게 악인이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의인은 자기 중심에 하나님의 의를 높이 세운다. 하나님의 옳은 것을 높이 세운다. 이게 의인이다.
의인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옳은 것을 높이 세워라. 자기 생명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옳음을 높이 세워라. 신앙사상 면에서 하나님의 의를 높이 세우다 보면 자기의 육적인 면이 손해가 나기도 한다. 이 때 자기의 목숨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지 못한다. 내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의를 세워나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시는데,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편으로 자기를 높이실 런지 모르는 거다.
자기가 하나님의 의로 높임을 받아야 옳은 거고 천국에서도 그 효력이 나타나는 건데, 속화된 교회는 인간의 비위를 맞춰서 인간으로부터 높이 올림 받는 것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한다.
4절: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찌어다.’ 믿는 나는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할만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치 않고는 하나님을 찬양을 할 수 없고, 또 영적 이치를 깨닫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할 수가 없다. 근본적으로 안 된다. 이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많이 가진 것으로 찬양이 된다.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이 있어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자기 속에서 이 증거가 없으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거다. 증거가 있어야 생각이 되는 거고, 느낌이 있어야 그것으로 인해 노래하고 찬양이 나오는 거지 아무 증거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다면 무슨 찬양이 나오겠느냐?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게 많으냐?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지식적으로만 깨달아도 이게 어디냐? 그리고 이 목적대로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이뤄갈 수 있는 진리이치를 한 이치라도 깨달았다면 이에 대한 감사가 얼마나 큰 거냐?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 골 백 살을 먹도록 진리이치를 하나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과,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아는 자기를 비교해 봐라. 참 사람이 되는 것을 어떻게 돈으로 비교할 수 있느냐? 타락된 인간의 목숨도 돈으로 비교할 수 없거늘, 아닌 말로 지옥에 갈 목숨도 돈으로 계산이 안 되는 건데 영이 중생이 되었고 이룰구원을 이룬 우리의 목숨이 그것보다 못한 거냐?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타고 광야를 행하시던 자’란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생활을 할 때 이 광야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다. 이 때 밤과 낮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와 보호를 하셨다. 아울러 모세의 뒤를 따라가면서 약속의 땅으로 향해 가는 이스라엘의 대열을 가로막는 이방의 원수들이 있었고, 또한 같은 동족들의 반역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이적과 기사로 다 처치해 주셨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약속한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이라면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게 된다.
그런데 68편의 내용을 보면 다윗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한 후 약 500여년 뒤에 나온 인물인데도 자신이 그 광야생활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말을 하면서 노래를 하고 있다. 우리 역시도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한 것을 영적으로 보면 지금의 우리도 광야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거다. 즉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한 것과 똑같은 사상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거다.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기도 했고, 백성들을 꾀어서 애굽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기도 했던 것 등을 보면서 지금의 자기도 현재의 위치에서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거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과거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얻어맞았던 것처럼 나도 얻어맞겠구나. 나는 이렇게 살아야 만이 희망이 있겠구나’ 하는 것을 말씀에 의해 알게 되는 거다.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대로’란 큰 길이요, ‘수축’이란 고치는 것을 말한다. 즉 큰 길을 닦으라는 거다. 여기서 ‘큰 길’이란 영의 길을 말한다. 큰 길을 잘 닦아놓으면 속도 빠르게 활동을 할 수도 있고 빨리 나갈 수도 있다. 돌짝밭 가시밭길이라면 그 길을 가는 사람은 고통스럽고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이것을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회개를 안 한 죄악성, 애굽 같은 세상성의 마음은 하나님과 의사대립을 일으켜서 얻어맞고, 이로 인해 슬픔이요, 고통뿐이니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그 마음을 고치라는 거다.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한 대로와 같은 마음은 하나님과 의사대립을 일으키지 않고, 진노를 받지 않고,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으로 무장을 해서 정복을 하며 올라가니 실력자 능력자가 되고, 이러면 하나님께서 앞서 가면서 옆에서 나타나는 원수들을 처치해 주시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역자들을 발견케 해 주셔서 모든 악한 자들을 이기게 하신다. 우리가 믿음의 대로만 수축하면 하나님께서 만능의 능력으로 우리의 편이 되어서 활동을 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장엄하고 위대한 구원역사를 맛본 자는 감사 감격하여 뛰놀게 된다. 뛰논다는 것은 승리한 것에 대한 기쁨의 충동성을 말한다. 하나님과 자기가 의사소통이 잘 되려면 자기 속의 모든 육적인 이해타산을 영적인 것으로 돌려라.
5절: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고아는 부모가 없다. 과부는 남편이 없다. 고아는 부모의 보호도 없고, 부모의 사랑과 양육도 없다. 버려진 아이다. 이러면 살아나가기 막막하다. 고아는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다. 그래서 고아는 의지할 곳이 없다. 있다고 한다면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진리의 성도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의 길을 가는 성도는 세상의 관심 밖이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 진리의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니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인 면의 고아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게 된다.
세상의 고아는 세상에서 보호를 받지 못한다. 진리의 길을 가다보니 세상의 보호를 못 받는 성도는 고아라. 이 진리성도는 세상에서 보호를 해 주지 않는다. 순전히 하나님의 손에 길림을 받는 자는 세상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 못 받는다. 세상이 그를 보호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길림으로만 사는 것이 고아다.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과부’란 남편이 죽었거나 남편과 헤어진 자다. 과부는 남편이 없다. 그러니까 과부는 남편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없다. 육의 사랑이 차단이 되었다. 육의 사랑이 죽었다. 이것을 영적으로 생각하면 신앙 사상적으로 세상의 사랑이 죽고 끊어진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에게 구별력 분별력을 주어서 거룩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서 거룩하게 살게 해 주신다. 곧 신앙정절을 잘 지키게 해 주신다는 거다.
진리본질의 길을 가는 사람은 고아요 재판장이다. 세상의 재판장이 자기가 죄를 지으면서 재판을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다. 그런 것처럼 진리본질을 가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판단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면에서의 재판장이다. 세상 재판장은 자기가 죄를 짓고도 재판을 할 수도 있는 거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재판장은 죄를 안 지어야 한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믿는 사람 중에 이 말씀을 세상 육신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육의 고아와 육적인 과부를 돌본다는 말씀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육의 고아와 육의 과부를 어떻게 돌보신다는 거냐? 고아원을 짓고 과부원을 지어서 돌보신다는 거냐? 이런 식의 해석을 한다면 고아를 만들고 과부를 만든 자는 마귀가 되고, 하나님은 그 뒷수습을 위해 돌보신다는 말이 돼버린다. 이건 이치에서 틀렸다.
이처럼 성경을 육적인 개념으로 해석을 한다면 성경에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죄를 지으면 한 눈을 빼라’ 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할 거냐? 모든 성경은 우리의 이룰구원에 강조점이 있는 거다. 본 절의 고아와 과부도 마찬가지다. 신앙사상을 말을 하기 위해 고아나 과부를 들고 온 거다. 말씀을 하시는 그 분의 의사성은 보지 않고 자꾸 그 분의 손에 있는 것만 보면 그 분의 뜻이 전달이 안 된다.
6절: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고독한 자’ 라고 할 때 혼자 있기 때문에 고독한 것으로만 보면 안 된다. 혼자 있어도 고독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본문의 고독한 자들은 고아와 과부들을 말함인데, 고독한 것도 이유가 있는 거다. 세상에서 자기가 못나서 고독한 경우가 있고, 아니면 진리를 붙잡고 믿음생활을 바로 하다 보니 고독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홀로 버려두지 않고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신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교회 안으로 이끌어서 하나님의 큰 일과 작은 일을 같이 논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 교인들과 모든 희로애락을 같이 하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러니 자기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느냐? 손님 겪으로 살면 되겠느냐?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수금된 자’란 갇힌 자를 말한다. 마음도 정신도 죄에 갇힌 자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갇힌 자를 자유로 이끌어 내서 앞에서 말한 당신의 권속들을 수종 들게 하신다. 죄에 갇혀있고 세상에 갇혀있는 자들을 이끌어 내는 데는 자유자가 아니면 안 된다. 갇혀있는 자가 어떻게 다른 갇힌 자를 자유자로 만들 수 있겠느냐? 해방된 자유자가 수금된 자, 갇힌 자를 이끌어 내서 자유자로 만들어서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속에서도 이룰구원을 형통케 할 수 있는 거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수금되어 있는 자를 자유케 하여 주의 일에 수종 드는 권속이 되게 하시는데,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가 세상에 속한 것을 자랑하여 또 다시 죄에 수금이 되도록 하면 큰일 날 일이다. 예를 들면 몸이 교회로 나왔다면 이 사람은 집에서 탈출이 된 거다. 그렇지만 아직은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세상이 들어있다. 세상에 갇힌 채로 있다. 교회에서는 이 사람에게 진리말씀을 주어서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끄집어내야 하는데 이게 아닌 세상 것을 가져와서 가르치게 되면 이 교인은 그 마음이 세상에서 탈출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세상 쪽으로 가둬져 버린다. 이건 수금이 된 거다. 우리는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 정신이, 소원 목적성이, 이해타산 판단성이 세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이 사람은 자유가 없어져 버린다. 성경을 깨닫는 것도 없다.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내던져지게 된다.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거짓 종들의 교회요 마귀 짓을 하는 거다. 구약시대로 말하면 광야교회를 애굽으로 도로 데리고 들어가서 바로 왕을 섬기게 하는 거다. 그러니 어찌 열 가지 재앙이 안 오겠느냐?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교회들을 진리말씀으로 부숴버려야 한다. 알아주지 말아야 한다.
영의 눈으로 보면 우리 궁극교회는 과거 광야에서 모세를 따라가던 이스라엘의 대열에 끼어있는 거다. 이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모세 따로 궁극교회 따로가 아니라 한 대열에서 같이 가는 거다. 이게 아니면 ‘우리’가 아니다. 세상에 교회간판 붙이고 성경을 들고 가르치는 교회가 많고 다 비슷하니까 모든 교회가 비슷하게 보이겠지만 그게 아니다. 주님은 한 분밖에 없고, 가르치는 것도 하나밖에 없고, 만들어지는 것도 하나밖에 없는 거다.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거역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를 말하는 거다. 어느 목사를 거역하는 자로 보면 안 된다. 이 거역자 중에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거역자가 있는데, 이건 이방인들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역자도 있다. 이 거역자들은 세상성으로 믿는 기독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성경의 역사는 받아들이지만 이 역사를 들어서 말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뜻인 은밀계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 때 바리새인들이 이런 자들이다. 이들은 이방인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의사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역했다.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모든 거역자들의 마음은 메마른 사막과 같다고 한다. 그러면 사막과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들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은 성격과 성질이 부드럽지 못하고, 무조건 급하고, 이기적이고, 모나고, 감정적이고, 이해심이 없고, 욕 잘 하고, 말 많고, 거짓말을 잘 하고, 욕심이 많아서 가시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예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다.
사막과 같은 메마른 땅에서 무슨 곡물이 생산되어 나오겠느냐? 사람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는 땅, 가시밭 땅, 버려진 땅, 저주의 땅, 전갈이 기어 다니다가 사람을 쏘는 땅, 고통만 주는 땅, 비가 없고 메마른 땅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생각해 봐라. 이런 사람의 마음 밭은 병이 들게 되어있다. 여러 가지 오만 정신병이 들어서 결국은 몸까지 못 쓰게 돼버린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사성을 버리고 살면 그 마음 밭에 성령의 열매가 있을까? 성령의 열매가 아닌 마음은 완전히 세상 판이다. 이해타산이나 사고하는 평가성과 판단성은 완전히 세상이다. 사막에는 바람이 많이 불 듯이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늘 세상바람이 휭휭 분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사성을 거역하면 성령의 은혜를 거역하고 대적하는 격이니 이렇게 되면 위로부터 오는 은혜는 하나도 받지 못하게 된다. 거역하는 자에게 그 무엇 하나라도 유익이 있겠느냐? 광야에 버려진 사람처럼 된다. 사람이 광야에 버려지면 그 마음이 어떻겠느냐? 낮에는 햇볕이 비취고 밤에는 무서운 추위의 바람을 겪는 그 마음상태가 어떨까? 이건 저주다.
7절: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셀라).’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서 행하심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 인도하심의 뜻도 있지만 또 다른 뜻은 당신이 보내신 모세의 인도를 따라 고분고분 수종하여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이 보기가 좋아서 이것을 기뻐하셔서 이스라엘 앞에 오셔서 앞서서 나가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좋아서 앞서서 나가시는 것도 있고, 인도하시기 위해서 앞서서 나가시는 것도 있다. 왜냐? 사랑하니까. 어쨌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를 앞서서 나가시면 당신이 알아서 일처리를 다 하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