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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유족회조직배경 (제8편)▶
1.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붕괴
제2공화국은 1960년6월15일부터 1961년 5월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 (存續) 했던 대한민국 역시상 최단명(最短命) 헌정체제였으나 민주화(民主化) 의 열망에 부응(副應)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붕괴 (崩壞)되고말았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총리
이후 붕괴 (崩壞)의 원인을 두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있으나 확실하게 역사적 정의를 내려지고있지는 못하고있다.이유인즉 민주화세력과 제2공화국을 붕괴시킨 쿠데타세력이 한반도 이남에서 공존(共存)하여 얽히고 섥혀 뒤죽박죽 살아오고있기때문이다.이는 승자 (勝者) 와 패자 (敗者) 가 시대에따라 뒤바뀐 탓도있으리라.
4·19로 일어나 5·16으로 무너진 제2공화국은 한국인이 오랫동안 꿈꿔온 민주주의 구현(具顯) 의 출발점이었다. 제2공화국에 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는 5·16군사쿠제타 세력과 그 뒤를 이은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선전한 결과다. 제2공화국의 붕괴는 미국의 對한반도 정책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장면 정부가 추진한 ‘10만 감군’과 남북화해 정책 등은 한반도를 반공(反共) 의 보루(堡壘) 로 삼으려 한 미국 (美國) 의 세계전략이나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필자는 다만 제2공화국붕괴의 원인을 일반적인 정설(定說) 에의하여 다루어보고자한다.
제1공화국 이승만 1인 독재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민주당은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 (議院內閣制) 를 채택하였다. 의원내각제 (議院內閣制) 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정무(政務)적 실권은 장면국무총리에게 있었고, 윤보선은 형식적인 국가원수(國家元首)였다. 그 밖에 국민의기본권보장 강화, 국회양원제.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제2공화국 헌법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민주당정부는 4.19혁명에 따른 다양한 개혁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데다 장면(張勉)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간 파벌 갈등까지 벌여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어 정책적 실행이 원활하지 못했고, 이승만 자유당 정권 청산 문제에도 과감하지 못했다.
제2공화국 장면(張勉)정부는 '자유화'의 원칙에서 다양한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였다.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억압되었던 각계 각층의 열망이 활발한 정치활동과 노동조합의 결성을 통한 노동운동 등의 방식으로 표출되었으며 또한, 정치활동의 규제가 풀리면서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각종 단체가 만들어졌다.
4·19 혁명 주체가 아닌 장면(張勉) 정권은 4·19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시민들의 이러한 다양한 활동은 최대한 보장하였으나,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을 통하여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요구하였던 "전국피학살자 유족회"의 요구사항을 장면(張勉)정권은 제5대 국회에 출석하여 정부는 책임질수없다고 강변하였다.
3.15부정선거의 주모자와4.19혁명의 전후에 있었던 일련의 시위에서 군중들을 살상한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점점 강해져 1960년10월11일에는 4.19부상자 50여명 등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반역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10월17일, 민의원에 특별처벌법의 제정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헌법 부칙 개헌안이 제출되어11월29일에 반민주행위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소급입법 (遡及立法) 의 근거가 되는 제4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이를 근거로 12월31일에는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과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이 제정되었다.
또한 '자유화'의 바람은 남북관계에 대한 변화의 열망으로도 나타났다. 북진통일론이 국시(國是)나 다름없던 이승만정권 하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던 '평화통일론',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 등 남북교류와 통일에 관한 여러 주장들이 대두되었다. 1961년1월 참의원 에서 여운홍(呂運弘) 의원은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며, 특히 학생운동세력과 혁신세력은 독재타도의 여세를 몰아 직접 접촉을 통한 남북협상을 전개하려 시도하였다. 1961년 5월13일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평화통일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마저 팽배했다.
불과 9개월 존속한 당시의 장면(張勉)정권은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들뜬 분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고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며 미국의 장면정부에대한 신임도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맹신하였기때문에 미국의 양면성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찍힐때는 이미 때는 늦었다.
윤보선과장면(張勉)은 공무원 인사와 국군통수권을 두고 극심하게 대립했다. 정권 인수의 3개월만인 1960년 12월까지 장면은 자유당정권 에 적극 부역한 경찰관 4천500명 등 다수의 공무원을 해임하였다. 그런데, 그 빈자리의 상당수는 민주당 당원출신으로 채워졌다. 윤보선은 공무원 인사가 있을 때마다 민주당 구파를 안배할 것을 압박하며 인사문제에 개입하는 한편으로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인사를 '정실인사', '부정부패'라고 비난했다.
특히, 국군통수권을 두고 벌인 두 사람의 권력다툼은 군사반란의 빌미로 작용했다. 제2공화국 헌법 제61조제1항은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나, 제72조에서는 '선전(宣戰), 강화(講和), 계엄안(戒嚴案), 계엄해제, 군사(軍事)에 관한 중요사항 및 각군 참모총장의 임면(任免)'은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군통수권의 실질적 행사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장면(張勉)은 여러사람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도영(張都暎)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였다.
박정희(朴正煕)는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 후 좌익(左翼) 에 연루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 장도영(張都暎), 백선엽(白善燁)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는데 전쟁 발발 후 육군 소령으로 복직 (復職) 하였다.
좌측이 이승만 우측이 (張都暎)
이러한 사정으로 군(軍)통수권에 관한 구체적인 하위법률의 제정과 정비가 필요했음에도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대립으로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그 해2월17일 장면이 임명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張都暎)은 쿠데타 발생 후 이틀만에 군사반란세력과 한패가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휴전 이후 1953년 6월 육군 제8사단장, 1954년 2월 육군 제2군단장 등을 거쳐 그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1955년 5월에 육군본부로 돌아와 기획참모부장, 행정참모부장, 참모차장 등을 역임한 후 1956년 육군참모차장에 취임했고, 1957년 7월 다시 육군참모차장에 연임되었으며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을 거쳐 5.16 군사쿠데타 이전에 제2공화국 출범이후 장면국무총리 에 의해 발탁되어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했다.
장면(張勉)과 장도영(張都暎)은 선대(先代) 의 고향이 평안북도(平安北道) 용천이었고 당시 서북계로 분류되는 인사였다. 장도영(張都暎)참모총장은 1923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에 재학하였다. 이후 1944년 일본 도요 대학 사학과를 수학했다.
학병(學兵)으로 일본군 생활을 하였으며 장준하(張俊河) 선생과 함께 중국에 주둔했던 쓰카다 부대에서 근무하였다.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일본군 탈영과 독립운동 여정을 담은 수필 돌베개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책에는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모 장군이라고 칭하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인 고참병(古參兵) 놈들이 남긴 음식을 혼자 먹기위해 더러운 손을 밥그릇에 넣어 뒤돌아 혼자 먹고, 조선인 탈주병이 생겨 부대 내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눈초리가 사나웠고 생활이 고달파지자. 조선인들이 모여있는 내무반 안에서 조선인 동료들을 향해 칼을 뽑아들고는 "이제 또 누가 도망치겠느냐? 이제 도망가는 놈은 내가 찔러죽일 테다!" 라고 호통치는 등... 그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제2공화국 장면(張勉)정권은 경제분야에 있어서 4.19혁명 직후의 사회불안 요인과 노동운동, 시위의 증가 등 경제 불안요소 때문에 경제성장이 정체되었고 실업률과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1960년 가을부터 1961년 봄까지 미국 달러화에 대한 대한민국 환(圜)화의 가치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한편, 제2공화국 정부는 경공업과 농업의 생산력 증가, 실업자 해소, 국토개발 등을 목표로 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입안 (立案) 하였으나,5.16 군사쿠데타 로 이를 집행할 수 없었다.
2. 5,16 군사쿠데타직전의 폭풍전야
1961년5월9일5.16군사쿠데타 일주일 전 장면(張勉)은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육군 참모 총장인 장도영(張都暎)을 불렀다.장면이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朴正熙)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장면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장도영(張都暎)에게 전하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장도영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한다. 장면(張勉)에 의하면 “참모 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에게 보고해야 될 성질의 사건을 반대로 내가 참모 총장에게 지시하고 있으니 책임 지고 내사해 보시오.” 이러한 내 말에도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라는 대답이 반복될 뿐이었다는 것이다.
장면(張勉)은 재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군사 정변 정보를 보고 받거나 입수했다. 근거 없는 설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정보였다. 장면은 그때마다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을 하겠소"라는 말로 태연하게 대응했다.
제2공화국 장면(張勉)정권의 안일한 국가의 정보정책의 부재였으며 대한민국 정권의 뒷 배경이었던 미국에 대한 과신(過信) 이 불러온 암울한결과가 국민들을 기다리고있었으며 민주주의의 새싹이 채돋아나기도전에 짓밝혀 버리고말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18년의 무소불위(無所不爲) 의군사독재정권이 기다리고 있을줄 누구도 예측할수없었다. 오직 미국과 5,16군사쿠데타를 기획한 정치군인들만이 통치전략을 수립하고 미국의 엄호아래 민중을 통치하는 밑그림을 그렸을것이다.
3. 5.16 군사쿠데타의배경
5·16 군사 쿠데타는 1961년 5월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박정희소장, 김종필중령, 이낙선소령등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8기, 9기 출신 일부 장교들이 장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이유로 제6군단 포병여단, 해병대,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들
19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축출(逐出) 하려는 군사반란 시도를 했던 박정희는 1960년5월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군내 부패행위에 항거하다가 중령에서 예편된 김종필등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다. 또한 장면내각에 불평, 불만이 많던 인사들을 포섭하였다. 군 내부의 알력다툼과 인사적체로 인한 불만을 쿠데타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국군은 광복군(光復軍) 과 중국군 (中國軍)출신, 일본군 (日本軍)출신, 만주군( 滿洲軍 ) 출신, 함경도파, 서북파 등 여러 군벌(軍閥) 로 형성되어 있었다. 창군(創軍) 직후에는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이 중용되었으나, 이들은 김구(金九) 와 정치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이승만정권 출범과 함께 주요 요직에서 제거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일본군 출신을 중용하였고, 훗날 이들의 세력이 비대해지자 다시 만주군 출신을 중용하여 일본군 출신을 제거하였다.
이런 와중에 박정희(朴正煕)는 주류 세력에 편승(便乘)하지 못했고 그와 함께 육사5기, 육사8기 그룹 역시 소외되어 승진길이 막혔다. 결국 이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하극상 (下剋上) 을 일으키게 되고, 그들이 주도 세력이 되어 하극상파를 이루어 쿠데타를 주도한다.
(張都暎) (朴正煕)
특히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南朝鮮勞動黨)과 여순사건당시 좌익(左翼) 에 연루되어 이승만정권과 군내부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있어 언제 예비역으로 퇴역할지 알수 없는 암담(暗澹) 한 신세였다.
1961년 5월 16일군사쿠데타는 대한민국 제2공화국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군사반란. 이 날은 장장 18년 간의 박정희 장기집권(국가재건최고회의 2년+대통령 16년) 및 박정희-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32년간의 군사정권이 사실상 시작된 날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사건과 함께 한국사의 대표적인 쿠데타사건으로 이후 역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5.16 쿠데타군은 탱크하나없이 서울에 무혈입성 (無血入城) 하였다.그리고 바로 방송국을 점령한 쿠데타군은 혁명공약을 HLKA 중앙방국 박종세아나운서의 육성(肉聲)으로 전국에 울려퍼졌다.
"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서 군사혁명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 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육군 중장 장도영
장면사
금번 군사 쿠테타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우리 국무위원일동은 전원 총 사퇴한다. 국민제위에게 양해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사후 수습에 있어서는 유혈을 방지하고 반공(反共) 태세를 강화하며, 국제적 지지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張勉) 총리는 카르멜수녀원(修女院)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여 권력의 중심에나선다.
4.19혁명을 민주 문화의 배양기로 보고 5.16 군사정변을 민주 문화와 상반되는 권력 유지를 위해 연속적으로 군부대를 동원하면서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사실상의 병영국가 체제로 만든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열은 사건으로 보는 비판이 있다.
재일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장면(張勉) 총리의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피노체트에게 습격당해도 최후까지 저항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죽어간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에 비해 그 말로가 너무도 교활해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라며 장면총리의 처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함석헌(咸錫憲) 은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쿠데타를 비판했다.
혁명 직후, 언론인 장준하(張俊河)를 비롯한 당대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를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평가, 지지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4.19혁명이후 이승만정권 하에서 지지부진했던친일파와 기득권 청산 문제에 불만을 가졌고, 장면 정부 역시 이에 미온적(微溫的) 태도를 보였기에 불만이 팽배했다. 더욱이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민정이양과 혁명과업 수행을 주장하였으므로, 이러한 기대감 속에 당대 지식인들은 국가재건 최고회의등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박정희의 공약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민정이양과 친일세력 청산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장준하(張俊河)는 쿠데타 적대 세력의 중심이 되어 쿠데타를 혹평했다.
4. 5,16 군시쿠데타와 미국의 선택
미국 (美國) 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동북아시아의 패권(霸權) 을 장악하는데 일본과 한국을 묶어 반공전선을 구축하여 소련의 팽창주의 (膨脹主義)와 중국의 대 한반도 영향력을 억제 하는데 주력하는 정책이 4.19혁명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당혹감을 불러일으켰다. 대외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을 앞세우고있었으나 미국의 팽창주의 (膨脹主義)에 대한 속셈은 한국전쟁을 통하여 여실히 증명된셈이다.
죤 F케네디 대통령
특히 소련과 미국 (美國) 의 영향권내에있는 나라(영국, 터키. 이탈리아,쿠바)에 미사일 배치문제를 두고 미국 케네디대통령과 소련 후루시쵸프 당서기의 신경전은 세계 3차대전을 유발시킬수도있다는 국제적인 여론도 형성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런 시기에 미국 (美國) 의 입장에서 동북아시아 반공전선의 최첨단에 서있는 한국이 4,19민주혁명으로 숭미주의자였고 철저한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 )였던 이승만정권이 민중에의하여 축출되고 제2공화국 장면정권이 수립되어 미국의 국익에 부응하는 방향보다는 민족 자주쪽으로 사회변혁현상이 나타나기 시작되었다.
한국의 사회적 현상은 국민들과학생, 혁신계정당들은 반공(反共) 이데오로기보다는 외세배격,평회통일, 남북화해.전쟁반대. 민간인 학살살배후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등의 구호를 내걸고 장면정부를 압박하였고 장면정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할뿐 아니라 남북통일문제와 남북협상요구에 대하여는 암묵적(暗黙的) 동조까지 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한국의 정치적상황과 사회변혁(社會變革) 움직에 대하여 주한 미국대사 메카나기와 후임자 사무엘 버거는 본국에 수시로 상황을 보고하면서 한국의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군부내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있었다.
조선의 통일문제는 한국인의 바람이고 소망일따름이었다. 미국 (美國) 은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하기위해서는 한반도에 반공정부가 수립되는것을 강력하게 원하였고 남북 대결구도를 설정하여 주한미군(駐韓美軍)을 주둔시켜 반공전선의 교두보(橋頭堡) 를 구축하는데 의미가있었다.
그리고 장면정권의 반공정책은 이승만정권의 반공전선과는 궤적(軌跡)이 벗어나고있음을 인지하고있었고 장면정권에 대한 불신과 회의감(懷疑感) 이 미국무부의 견해였다.이런 상황아래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다. 미국은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깃치를 내걸었으나 내실(內實) 은 장면정권은 미국의 국익 (國益) 에 부합(附合) 되지않은 미운 오리새끼에 불과하였던것이다. 이런 미국을 카르멜 수녀원으로 도망친 장면총리가 애타게 미국의구명 (救命 )을 기다렸지만 미국무부의 반응은 " 한국의 내정에 불간섭" 이라는 차디찬 한마디였다. 장면은 미국을 짝사랑하였던것이다.
5.16 군사쿠데타는 탱크 한대 동원하지않고 한강인도교에서 근무하고있던 일부헌병들과 간단한 교전(交戰)이 일어났을뿐 쿠데타군은 서울역과 청와대, 총리공관.방송국등 주요 시설등을 손쉽게 장악하고 "혁명공약"과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국의 안보를 담당하여 용산에 자리잡은 철옹성(鐵甕城) 과같은 미 8군사령부는 5,16쿠데타군에 대한 어떤 물리적 (物理的) 조치나 경고성(警告性) 발언도 극히 자제하면서 5.16 쿠데타 세력을 응징(膺懲)하자는 반쿠데타 군부(軍部) 움직임을 차단하는데 주력하고있었다.
미군과 추종세력들이 항상 애용하는 말이다.
" 북한의 남침이 예상되고 아군끼리 충돌하면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될우려가크다"
미8군사령부가 윤보선, 최규하를 내세워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부 쿠데타를 직간접적으로 승인했던 발표문 내용이동일하다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내걸고 이땅에서 자행한 인명살상사건에 대하여 다시한번 고찰해보기로 하자.
한반도 이남의 모든 군사작전권은1950년7월14일 "주한 미군"에 이양되었기때문에 이책임또한 미국에 있는것이다.
대구항쟁.제주4.3항쟁, 여순항쟁.한국전쟁민간인 학살사건(한강인도교폭파사건.국민보도연맹사건.형무소재소자사건.국민방위군사건.미군 폭격사건.부역혐의사건.민간인 희생사건.통비분자 혐의사건.5,18항쟁)등 이루말할수없는 비무장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무한 책임이 미국에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까지 단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고있다.
5,16 쿠데타세력은 혁명공약을 발표하면서 미국에 아양을 부렸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미국의 대한반도 외교정책은 간단하고 교활하였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으면 그만이고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일종의 미국에대한 충성서약(忠誠誓約)이었다.
미국은 5.16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와 김종필의 과거의전력에 대하여 소상히 파악하고있었다.미국이 그처럼 혐오하던 좌익경력의 소유자요 불순분자로 여겨왔던 박정희 소장이 김종필을 앞세워 교전 한번없이 무혈쿠데타를 일으킨 후진국형 반란을 미국은슬그머니인정하였다. 이는 한국국민들에게 인심을 잃지않고 적절하게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미국의 국익에 보탬이된다면 "손 않대고 코푸는식"이라고 생각하였다.
한국의민주화와 국민이 무엇을 원하느냐는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좌충우돌하는 이승만과 미국의 의중 (意中) 을 잘못 이해한 자유주의 신봉자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을 한순간에 쓸어 내버리고 한반도에서 자행한 미군학살범죄를 반공을 국시로삼아 일소에 해소 해버리겠다고 검정 썬그라스를 끼고 나타난 혜성과 같은 존재들을 미국은 얼마나 기다렸던가. 미8군의 한반도 주둔은 이제 영구주둔으로 정착해버린 5.16 군사쿠데타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을 순조롭게 정착시킬수있는 확고한 계기가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제2공화국이 전략적(戰略的) 으로 무기력 (無氣力) 하고 통제력(統制力) 이 없는 정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군사 독재가 막을 내린 뒤, '장면 정권은 1961년 초에 들어가면서 차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반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역사관에도 많이 반영되었다. 혼란을 순차적으로 극복하고 정책을 펴보기도전에 총칼을 들고 야음을 틈타 일어난 쿠데타세력에의해 장면정권의 제2공화국은 9개월만에 무릎을 꿇고말았다.
물론 4.19혁명에 고무되어 빈발하는 학생 운동, 노동 운동 등과 민주당 신파와 구파간의 갈등으로 인한 혼란이 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4.19혁명 1주년 큰 혼란이 올 것을 예상하며 선동을 계획했던 5.16쿠데타세력의 예상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은 평온하였고 이 때문에 당시의 사회 혼란을 '민주주의를 위한 당연한 진통'으로 파악하는 사람들도 있다. 북한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던 것도 좋게 평가하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민주당 구파에 의해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는 현재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일부에 편입되어, 집시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이후 전개되는 5.16쿠데타세력은 쿠데타를 합리화(合理化) 시키기위하여 그럴듯힌 명분(名分)과 실리 (實利) 를 내세우면서 "혁명"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미국의 경제원조속에 미국의 회유 (懷柔) 로 한일회담을 졸속히 성사시켜 경제개발을 내세우고 국민들을 열악한 산업현장에 내몰아 구악을 일소하기는 커녕 신악을 양산하는 도덕적타락이민중속에 파들어 정신문명의 파괴로 이어지는 군사문화가 향후 30년이상을 이땅에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들이 내세운 혁명공약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오로지 이땅에는 18년간의 공포정치로인하여 권력암투.밀실정치. 향락정치.요정정치. 부정축재.재벌위주 성장정책.공작정치. 연좌제실시.조작사건,지역감정조장. 4대 의혹사건.인권유린등으로 한국사회가 현재까지 몸부림치며 고통받고있으며 아직까지도 그후유증 (後遺症) 이 계속되고있다.
(제9편에서 계속됩니다)
제9편
0. 5.16군사쿠데타세력의 민중탄압(한국전쟁피학살자 유족회간부 일제검거)
0. 민간인 학살 합동묘 부관참시
0. 혹독한 연좌제실시
첫댓글 원고를 직접작성하기때문에 연이어 게재못함을 이해하여 주시기바랍니다. 눈도 어둡고 체력이 소진되어 연속으로 연재못함을 양해하여 주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보감사합니다!
제2공화국의붕괴가 참으로 어이없었네요. 군사쿠데타를 막을수도 있었는데말입니다.총라가 가족과함께 뺑소니쳤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좋은 역사공부하였습니다. 필자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보면 볼수록 흥미진진합니다.
12.12군사반란때도 노재현 국방이 진압할생각은 아예없고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저혼자 도망다닌꼴이 이나라의장성글이 하는 꼬락서니입니다.나라에 위기가 오면 제일먼저 꽁무니빼는 녀석들...... 한심하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