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印光大師 嘉言錄] 1, 인과응보의 사실을 밝힘
/ 인광 대사
불경에 "보살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결과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는 말이 있소.
보살은 나쁜원인을 끊어버리기 때문에, 죄악과 업장이 사라지고
공덕이 원만히 쌓여가서 끝내 부처가 되고야 만다오.
그런데 중생은 늘 나쁜 원인만 지으면서
나쁜 과보를 피하려고 하니, 이는 비유하자면
햇빛 아래 서서 그림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것과 같아서
정신없이 헛수고만 하는 격이오.
흔히 뭘 모르는 어리석은 이는
조그만 착한 일을 해놓고는 큰 복을 바라기 일쑤요.
그러다가 한 번 역경이라도 만나면 곧장
"착한 일을 하는데도 재앙을 당하니
'인과법칙'이란 말짱 빈말이다." 라고 불평하오.
그로부터 처음 품었던 마음을 후회하고 뒷꽁무니 빼면서
도리어 불법(佛法)을 비방하기도 하는구려.
그들이 어찌 인과응보가 삼세에 걸쳐 나타나고(報通三世),
그를 돌려 뒤바꾸는 것이 마음이라는 오묘한 이치를 알겠소?
인과응보가 어떻게 삼세에 걸쳐 나타나는 줄 아오?
금생에 지은 선악의 과보로
금생에 화복(禍福)을 받는 것이 '현보(現報)'이고,
금생에 지은 선악의 과보로
내생에 화복을 받는 것이 '생보(生報)'라오.
그리고 금생에 지은 선악의 과보를
미래의 제3생이나 제4생 또 백 천 만생 뒤에야
비로소 받는 경우는 '후보(後報)'라고 하오.
'후보'는 결과가 나타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자기가 지은 업보를 받지 않는 법은 결코 없소.
예컨대 선비가 과거시험 공부를 하여 몇 년 만에 급제하고,
평생 부귀공명을 누리는 것은
보통사람의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현보'라 하겠소.
그러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학문을 중시하여 자손대에 이르러
크게 운이 트이는 것은 보통사람 눈으로는 알아보기 어렵고
천안으로나 알 수 있는 '생보'로 비유되겠소.
(금생과 내생은 모두 본인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나,
생을 뛰어 넘는 윤회의 사실은 비유로 구체화하기 어려워
짐짓 조부모와 자손사이의 세대물림의 방편을 편의상 든 것이니,
글자에 얽매여 뜻을 해치는 일이 없길 바라오.)
그리고 '후보(後報)'는 우(禹)나 주(周)의 왕업이
사실은 후직(后稷)과 설(契)이 순(舜)과 은(殷)임금을 돕던
상고시대에 이미 터전을 잡았던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소.
이는 천안으로도 보기 어렵고
성문(聲聞)의 도안(道眼) 정도나 알아 볼 것이오.
그러나 '무량아승지겁에 걸친 인과'는 오직
오안(五眼 : 肉 天 慧 法 佛眼)을 두루 갖추신
부처님만이 훤히 내다 보실 수 있소.
이는 성문의 도안에도 안 보이는데,
하물며 천안이나 육안 따위에 보이겠소?
이러한 '삼세 인과응보'의 이치를 안다면,
착한 일에 복이 내리고 나쁜 일에 재앙이 내린다는
성인의 말씀은 본디 조금도 틀릴 게 없소.
부귀와 빈천이나 장수와 요절, 통달과 궁핍 등의
천명(天命)은 일찍이 한쪽으로 치우친 적이 전혀 없는 게요.
바깥 경계의 연분(境緣)이 닥쳐옴은
마치 거울에 사물의 모습(像)이 나타나는 것과 같소.
지혜로운 사람은 단지
거울 밖에 선 자신의 얼굴만을 단정히 가다듬는데,
어리석은 자는 오직
거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못 마땅하게 여긴다오.
역경이 들이닥칠 때 순순히 받아들여 적응하는 것(逆來順受)이
바로 낙천(樂天:하늘의 뜻과 자연의 섭리를 즐겨받아들임)이며,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세울(立命) 수 있소.
그러면 인과응보를 마음으로 돌려
뒤바꾼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죄악을 지어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아야 할 운명인데, 나중에 크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죄를 참회하고 큰보리심(菩提心. 求道心)을 내어 개과천선하며
독경과 염불 수행에 열심히 정진하면서,
남들을 교화시켜 함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고 합시다.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다 보면, 현생에 우선 당장
남들로부터 비웃음이나 손가락질 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뜻밖의 질병을 얻기도 하며,
또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는 등,
갖가지 안 좋은 일들이 생기게 되오.
그러한 재난과 시련으로 말미암아, 먼저 지었던 죄악으로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받아야 할 고통이 액땜되어 사라지고,
나아가 평범한 생사윤회를 벗어나 성현의 경지에 들수 있는게요.
[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이 사람은 전생의 죄악으로 마땅히 삼악도에 떨어져야 할
업보가 금생에 남들의 경시와 천대로 말미암아
곧 사라지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覺)를
얻게 될 것이다" 고 설하고 있소.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를 마음으로 돌려 뒤바꾼다'는 뜻이오.
그리고 부모와 자식사이에는 네가지 인연이 있다오.
첫째는 은혜를 갚는(報恩) 인연이고 ,
둘째는 원한을 갚는(報怨) 인연이며,
셋째는 빚을 갚는(償債) 인연이고,
넷째는 빚을 되찾는(討債) 인연이오.
'은혜를 갚는 인연'이란
부모와 자식에게 전생에 큰 은혜가 있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금생에 자식으로 태어나, 생전에 부모가 기뻐하도록
극진히 봉양하고 사후에는 귀신이 흠향하도록
장례와 제사를 정성껏 모시는 것이오.
나아가 국가사회에 이바지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끼쳐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천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흠모하면서
그 부모까지 존경하도록 훌륭한 도덕을 닦기도 하오.
역사 속의 수 많은 충신과 효자가 그러하오.
'원한을 갚는 인연'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원한을 사서
그걸 갚기 위해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오.
작게는 부모 마음을 거스르고,
크게는 화가 부모에게 미치게 하며,
살아 생전에는 맛있고 따뜻한 봉양을 올리지 않고,
죽은 뒤에는 황천에서도 모욕을 당하게 하오.
또 더 심한 경우에는 권세나 요직에 앉은 신분으로
부정부패와 불궤(不軌)의 죄악을 저질러
가문과 친족을 파멸시키고 조상의 무덤까지 파헤치며,
천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욕하면서
그 부모까지 침 뱉게 만드는데, 왕망(王莽)이나 조조(曹操),
동탁(董卓),진괴(秦檜)등과 같은 간신역적이 그대표적인 예라오
'빚을 갚는 인연'이란,
자식이 전생에 부모에게 진
재산 상의 빚을 갚으려고 태어난 경우요.
진 빚이 많으면 평생토록 뼈 빠지게 일해 받들어 모시지만.
빚이 적으면 잘 봉양하다가 더러 중간에 그만두기도 하오,
예컨대 힘들여 공부하여 부귀공명을 조금 얻는가 싶더니
그만 요절한다든지,
사업이 잘 되어 재산 좀 모으다가 죽는 수도 있소,
'빚을 되찾는 인연'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재산상의 빚을 진 까닭에
그 빚을 받으려고 태어난 경우요.
빚이 적으면 생활비나 학비를 들여 가르치고 혼수 장만하여
결혼시켜 이제 자립하고 사회활동 할 만하니
그만 수명이 다해 버리기도 하고,
빚이 많으면 집안 재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하기까지 한다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재난이 당하면
곧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기 일쑤요.
전생에 진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을 내는 이는 참으로 드물기 짝이 없소.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줄을 알아야 하오.
가라지를 심고 밀을 거두고자 하고,
피를 씨 뿌리고, 벼를 거둘 생각은 말아야 하오.
금생에 죄악을 지으면서도 복을 누리는 자들은
전생에 심어 놓은 착한 씨가 많기 때문인데,
만약 죄악을 짓지 않는다면 그 복이 더욱 커질 것이오.
예컨대 갑부 집안의 자식들이 술과 계집,
노름에 빠져 흥청망청하면서 돈을 흙 뿌리듯 내버리면서도
금방 굶고 얼어 죽지않는 것은 모아놓은 재산이 많기 때문이오.
만약 매일같이 이렇게 낭비한다면, 설령 백만장자라도
몇 년이 채 안되어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알거지가 될 것이오.
또 금생에 착한 일을 하면서도 재난을 당하는 이들은
전생에 지은 죄악의 업장이 너무 두텁기 때문인데, 만약 이들이
착한 일을 안 한다면 그 재앙은 더욱 커질 게 분명하오,
예컨대 중대한 악을 범한 죄인이 처형되기 전에
조그만 공을 세운다면, 그 공이 그리 크지 않아 사형을 완전히
사면할 수는 없을지라도 틀림없이 감형해 줄 것이오.
그리고 매일같이 공을 세워 점차 커지면 죄를 모두 사면받아
석방되고, 더 나아가
관직에 임명되어 부귀까지 누릴 수 있지 않겠소?
단지 눈앞의 길흉만 쳐다보고서,
선을 행해도 재난을 당하니 선은 행할게 못 되고,
악을 지어도 복을 받으니 악을 금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면,
이는 정말로 어리석고 위험스러운 생각이오.
선악의 과보는 하루 아침 저녁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 유래와 과정이 점차
진행(漸進)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오.
예컨대 석 자(三尺)나 되는 두터운 얼음이
어찌 하루 저녁 추위에 얼어 붙겠소?
또한 그 얼음이 어찌 한 나절 햇볕에 금방 녹아 버리겠소?
절대로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들을 탓해서는 안 되오.
더구나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면서
후회하거나 뒤로 물러나서는 결코 안 되오.
마땅히 유정의(愈淨意)선생의 수신(修身)이나
원료범(袁了凡) 선생의 운명개척을 본받아야 할 줄 아오.
무릇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등용되는 것은
모두 그 조상들이 커다란 음덕을 쌓았기 때문이오.
만약 음덕이 없다면 이는 사람의 힘
(예컨대 권력 배경 뇌물 청탁 등)으로 이루어 진 것이니,
반드시 나중에 큰 재앙이 뒤따르게 되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애당초 급제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소.
고금의 역사를 통해 살피건대,
위대한 성현의 태어남은 모두 그 조상의 음덕으로 비롯되오.
고관대작이나 갑부도 마찬가지요,
자손들은 부귀 속에서 태어나 살면서 복을 누리고
업을 지을 줄만 알지, 그 조상들이
힘들여 쌓은 공덕은 잊어버리기 일쑤라오.
그러다가 조상의 공덕도 잃고 가산도 탕진한 뒤 금방
가난하고 비천해지니, 이것이 세상의 모든
부귀한 자들이 공통으로 저지르는 폐단이오.
(우리 속담에 '부자가 삼대를 못 간다'는 말도 있음)
대대로 조상의 공덕을 지키며 가문이 기울어지지 않은 경우는
오직 소주(蘇州)의 범(范)씨가 고금을 통해 제일 으뜸일것이오.
송나라 문정공(文正公:范仲淹)부터 청말에 이르기까지
8백여년 동안 가풍이 스러지지 않고 줄곧 과거 급제가 이어졌으니,
세덕서향(世德書香:대 이은 공덕으로 책 향기가 끊이지 않음)의
집안이라고 일컬을 만하오.
장주(長州)의 팽(彭)씨 집안은
청초(淸初) 이래 과거급제로 천하에 으뜸이었는데,
장원 급제만도 너댓 명이나 되고 형제 모두 삼정갑
(三鼎甲: 甲科3人인 壯元 榜眼 深花)에 급제한 경우도 있다오
그런데 그 집안은 대대로 불법을 받들어 행하면서,
비록 장원한 제상일지라도 매일같이 태상감응편
(太上感應篇)과 음질문(陰질文)을 독송하였소.
(두 가지 모두 道家의 대표적인 권선징악 문장임)
정성스러운 뜻과 정직한 마음으로 국가에 충성하고
백성에게 덕택을 베푼 귀감이 바로 여기에 있었소.
멋모르고 미쳐 날뛰는 자들은 이러한 책들이
그저 세속의 범부나 아낙 사이에 읽히는 글로 여기는데,
이는 성현이 왜 성현이 되었고, 사람이 어떻게
사람 노릇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소.
살아서는 걸어 다니는 고깃덩이나 움직이는
시체(走肉行尸)와 같고,
죽어서는 초목과 함께 썩어 문드러졌겠지만,
그 죄악의 업보는 소멸하기 어려우니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져 고생할 자들이오.
한때 시끌벅적하게 스스로 박학다식하고 통달한 인물이라고
떠들다가, 후대에 이름조차 들리지 않는 자가 얼마나 많소?
그리고 행여라도
“우리 집안은 본디 빈한하여 널리 음덕을 쌓고
크게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고 핑계대지는 마소.
몸과 입과 뜻 삼업(三業)이 모두 사악하면 이보다
더 큰 죄악은 없으며, 반대로 삼업이 모두 착하면
이보다 더 큰 선행이 없다는 이치를 알아야 하오.
인과 법칙을 믿지 않고, 죄와 복이
모두 일정한 응보임을 믿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안사전서(安士全書)등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자상히 일러주어
'인과 법칙'을 믿게 하고, 나아가 불법을 믿게 하며
마침내 염불수행으로 서방극락에 왕생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해 주는 것보다 좋은 선행이 없소.
한 사람만 이렇게 이끌어도 그 공덕이 무한한데,
하물며 수 많은 사람을 제도한다면 오죽하겠소?
그러나 자신이 흠없이 실천 궁행하여야만
비로소 남들을 감화시킬 수 있소.
자기의 배우자나 자녀가 따라서 믿고 함께 받들어 행할 때,
남들도 저절로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착하게 감화될 것이오.
어찌 선행을 베풀고 음덕을 쌓는 일이
재산이나 지위에 달려 있다고 하겠소?
천하의 모든 일은 다 인연이 있기 마련이오.
일이 이루어지고 어그러지는 것은
모두 그 인연이 조종하고 결정하오.
비록 겉보기에는 일을 이루거나 어그러뜨리는
사람(의 역할)이 분명히 있지만, 성패의 실제 권력은
자신이 심은 과거의 원인[前因]에 달려 있으며
지금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의 연분[現緣]에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자신의 운명을 알고
하늘의 뜻을 즐겨 따르면서,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는 일없이,
자신의 현재처지에 편안히 만족하는
마음으로 살아 갈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 어디에 가든지 자유자재롭지 않음이 없게 되리라.
나무아미타불
- 인광 대사 / 가언록(嘉言錄)[보적 김지수교수옮김]
- 그 림 / 담원 김창배님 - 禪수묵화[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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