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옷 수선집’에 들려 롱코트의 길이를 잘랐다. 싹둑싹둑, 길든 가위가 쇠락한 유행과 무력하게 앉은 시간과 한 웅큼의 추억들을 떨쳐낸다. 계절이 바뀌고 유행이 변하고 있다. 시간을 따라가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느낌도 달라지고 생각마저 거듭난다. 단골 옷 수선집 아주머니와 나는 곧잘 의기투합한다. 길이를 자르거나 품을 넓히고, 프릴을 달거나 레이스를 붙여 유행을 ‘리폼’하는 동안 우리는 함께 조금씩 늙어 왔다. 올겨울 패션 코드는 길이를 날려 버린 외투다.
빠른 템포의 스타카토처럼 가뿐한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많던 ‘롱코트’는 다 어디로 갔을까. 거침없이 휩쓸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는 유행의 속성을 알면서도 어울리는 건, 밋밋한 일상을 흔들어주듯 파격적으로 튀는 맛 때문인가 싶다. 원색 의류 광고 화보의 모델이 입고서 패션도 경쾌하다. 입꼬리에 연륜이 묻어나는 주부 모델이면서도 세월의 무게를 살짝 덜어내었다. 무릎 선에 닿는 짧은 외투며 색색의 레깅스나 몸에 착 달라붙는 기모 바지, 털 부츠가 보온성과 함께 산뜻함까지 겨냥했다. 유행은 치밀한 상술에 따른 것일 수도 있으나, 누군가의 마음속에 부는 바람이며 시대상을 반영하는 창이란 느낌이 든다.
오래전 일이다. 끼니가 걱정이던 시절에 철 따라 입을 옷인들 제대로 있을 리 없었다. 아버지는 겨울 된바람에 외투는 고사하고 해마다 가죽점퍼 하나로 맞섰고 어머니는 헐렁한 스웨터로 매운 계절을 버티었다. 그러나 온 식구들이 둘러앉은 밥상에서 자식들 목에 밥 넘어가는 소리만 들어도 추위쯤은 모르셨을 터이다. 그 결핍의 시절이 내게 꼭꼭 씹히지 못하던 보리 밥알처럼 아릿하면서도 생에 가장 안온한 때였음은 나중에 알았다. 눈물 나게 포근포근한 애정(愛情), 그것이 내 추위를 막아 준 외투였고 세상 밑자리의 은은한 온도인 것을 그때의 내가 알 턱이 없었다.
꼭 유행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여러 모양과 빛깔의 외투를 갈아입으며 사는 것 같다. 어느 땐 부모님의 사랑이 든든한 외투였다가, 배우자를 만나면 서로에게 따스한 외투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자신의 외투가 되어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외투란 몸을 감싸 추위를 막아 주는 옷이기도 하면서, 바깥세상에 지금의 나를 나타내는 옷 이상의 무엇이 아닐까.
옷장 안에서 한때의 유행을 찾아낸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최신 유행의 기세에 밀려 보일 듯 말 듯 구석 쪽에 숨죽이고 있어도, 아직 윤기가 자르르한 순모 백 퍼센트 ‘롱코트’다. 전성기 때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코트는 깐깐한 검정색을 빛내며 무심한 주인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지난겨울에도 입었던 기억이 없다. 혹시라도 돌아올 유행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만만찮고, 손끝에서 살아나는 푹신한 감촉 때문인지 선뜻 버리기에도 내키지 않고…. 하지만 패션 하나도 따라잡지 못하는 내, 몰락은 싫었다.
실밥도 털어내고 다시 봉합하는 아주머니의 손길이 날렵하다. 어쩌면 삶의 허망함까지 꿰매고 있을지 모르는 그녀의 섬세한 손끝에선 지친 일상도 환하게 되살아난다. 실밥이 수북한 시간 들 속에 아들딸 거뜬히 키워낸 아주머니의 몸이 이따금 뚜두둑 관절 소리를 내지만, 그녀의 세월과 야문 손끝에 보내는 내 신뢰는 아직 꿋꿋하다. 생각해 보면 어줍은 내 패선 안목도 그렇게 유행을 맞고 보내고 늘이고 줄이며 이어 온 날들 위에 있다. 삶 또한 그러하듯이.
싸한 바람과 먼 하늘빛이 묵묵히 드리운 겨울 한낮이다. 나는 지금 새로운 외투를 입고 외출 길에 나섰다. 무릎에 사뿐 와 닿는 길이로 깡총하게 ‘리폼’된 검정 외투가 오랜만의 나들이에 신이 난 모양이다. 끝자락이 자주 들썩거리는 낌새를 나는 모른 척하며 걷는다. 하나뿐인 나만의 ‘리폼 해설’에 실은 내 기분도 조금 들뜬다. 백화점에서 새 기성복을 사 입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이다. 세상에 내 뜻대로 될 수 있는 것들이 몇이나 되던가. 이 엄동의 거리를 거침없이 누비는 패션 바람처럼, 사람들은 어쩌면 현실을 뛰어넘을 한 번씩의 반전을 꿈꾸며 팍팍한 삶을 여미어 가는지도 모른다.
보송보송해진 외투가 귓속말을, 걸어 온다. 옷의 마음을 아느냐고, 색과 모양과 품과 길이가 들어맞는 사람에게 맵시도 내어 주고 싶다고 속삭인다. 진짜 멋쟁이는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하며, 안을 더 꼼꼼하게 챙겨 입는 거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외투가 타이르는 말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뜨끔댄다. 그럴싸한 겉모양 속에 때로 걸맞지 않은 주인을 만나 불편하고 난감했을 옷의 마음이 읽혀서다. 얼떨결에 추슬러 입었던 민망한 옷들이 생각나고, 내가 선망하던 형형색색의 옷들이 눈앞을 스치기도 한다.
갑자기 나를 감싸고 있는 옷들에게 눈치가 보인다. 하나의 옷 모양이 만들어지는 데도 겉감과 안감이 들뜨거나 틀어지지 않게 잘 맞대어 마름질을, 하고 솔기도 고른지 살피며 촘촘한 박음질을 하거늘, 지금 내 삶은 어떻게 가고 있나. 짧고 길고 들쑥날쑥한 안쪽의 부딪침을 여태 다듬어내지 못한 채 껴입기만 한 옷들이 나를 막막하게 한다. 왠지 안팎이 다른 패션을 입고 마음 밖으로 멀리 나와 버린 것 같은 길 위에서 속이 허전하고 등은 시리다.
하나, 둘, 옷을 겹쳐 입느라 내 등 뒤로 스러져 간 것들이 어느새 아득하다. 마음 색이 그대로 내비치던 친구 정희의 맑은 눈동자와 까르르 함께 웃던 웃음소리, 마당 한쪽에 채송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를 심어 가꾸어 놓았던 작은 꽃밭. 꽃씨를 소중히 받아 모으던 내 마음, 자투리 털실로 동생들의 낡은 스웨터를 꾸며 주던 따뜻한 시간, 첫 출근하던 날의 청청했던 각오들이 자꾸 눈이 부시다. 그리운 만큼 눈부신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꽁꽁 얼어 붙이는 겨울의 뜻은 아무래도 마음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지 않을까.
홀로 옷깃을 여민다는 것은 속마음을 길어 올리는 일이다. 돌아보니 삶은 고단한 시간의 실밥들을 털어낸 한 벌 옷의 선명한 무늬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섣불리 흉내 낼 수도, 빛깔 화사한 꽃문양일 수도 없을 터이다. 수많은 마름질과 거듭되는 늘임 줄임의 고뇌와 한 땀 한 땀의 마음 심기로 마침내 오롯해지는 것. 글 길 또한 그러하다. 한 자 한 자, 온 마음으로 나를 길어 올려 뭉클한 글줄 하나 살아나 준다면, 시린 글 길에 다시 옷깃을 가다듬어야 할 살가운 외투가 될 것 같다.
“예, 어디쯤 오고 있니?”
쇼핑 약속을 한 친구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한발 앞서 달려왔다. 오늘은 깔깔한 글감 하나 끓어 올 참이라고 속 다짐을 해 보는 바람 찬 거리에서다.
첫댓글 염 작가님 이 글로서 선생님 작품이 끝인가 봅니다. 왠지 섭섭합니다. 앞으로 많은 발전 기원합니다. 다시 연이 닿아서 선생님의 귀한 글을 올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환절기 입니다. 건강 조심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