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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설
순나 [ sunnah ]
아랍어로 어의적으로는 ‘관례(慣例)’를 의미하지만 특히 예언자 무함마드([영어]Mahomet ; 마호메트)의 언행을
가리킨다. 이슬람학의 전문 용어로는
(1) 무함마드의 말,
(2) 그 자신의 행위,
(3)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그의 묵인, 이 3가지 카테고리를 예언자의 언행, 순나라고 한다.
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순나를 직접 제자들이 듣고 전달한 것을 하디스(언행록)라고 한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무류(無謬)로 되기 때문에 그의 순나는 알라(Allah)의 말씀인 코란과 함께 알라의 천계(天啓)의
가르침, 즉 샤리아의 일부로 간주되며, 코란에 이어 이슬람법의 주요 법원(法源)이 된다.
단, 시아파는 예언자의 후계자(이맘)들은 새로운 샤리아는 아니지만 무함마드의 샤리아의 해석에 있어서 무류인 것
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순나와 함께 이맘들의 순나도 법원으로 간주된다.
우마이야 왕조 661년 ~ 750년
우마이야 왕조 또는 우마위야 왕조(아랍어: بنو أمية)는 660년부터 750년까지 아랍 제국을 다스린 첫 번째 이슬람 칼리
파 세습왕조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로 개종한 비아랍인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등 차별을 두어 반란이 발생하였다.
아바스 왕조 [ Abbasids, -王朝 ]
이슬람 왕조(750~1258)로, 왕조 초기의 영토는 동쪽 아무다리야 강 이북 지역에서 서쪽 마그리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는데 점차 축소되었다.
제2대 칼리프에서 제5대 하룬알 라시드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며, 다른 왕조의 자립으로 서방 영토를 잃었으나 중앙
집권화가 진행되었다.
칼리프는 수니파 신앙을 옹호하였고, 칼리프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관념이 확립되어 있었다.
문화, 과학, 산업, 경제가 크게 발전하였으나 사마라 시기에 맘루크 군벌이 칼리프의 자리를 좌우한 뒤에는 쇠퇴하기
시작하여 945년에 부와이 조, 그 뒤 셀주크 투르크 조가 사실상의 지배권을 잡았다.
1258년에 몽골 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멸망시켰다
파티마 왕조
파티마 왕조, 파티마 칼리프조(아랍어: الفاطميون)는 아랍 제국의 시아파 이슬람 왕조로 909년부터 1171년까지 이집트,
북아프리카, 레반트를 다스린 왕조이다. 이 왕조의 군주 (칼리프)들은 이슬람의 시조인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
이라고 주장하며 왕조의 이름도 파티마라고 정했다. 이들은 이슬람 시아파의 또다른 분파인 이스마일파였다.
이프리키야(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와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서부)
해설
: 이븐 할둔의 생애와 [역사 서설]
이분 할둔은 회력 732년 라마단 첫날, 서력으로는 1332년 5월 27일 북아프리카 중부의 튀니스에서 출생하였다.
1406년 3월 16일에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븐 할둔은 이처럼 깊은 정치적 좌절을 경험하고 목도하면서 이제는 혼탁한 현실정치에서 손을 떼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힘이 무엇이고 역사는 어떻게 변화를 겪어
가며, 창조주 신의 거대한 계획은 무엇이고, 또 그속에서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븐 할둔은 불확실성과 혼란으로 가득 찬 정치의 세계를 떠나 조용히 은둔하려 했고 또 자신의 체험과 학문적 성찰
을 토대로 하여 세계사를 저술하는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375년 그러한 의도를 실현에 옮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가족과 함께 이븐 살라마라는 성채에서 자신의 은신처를 찾았고, 그곳에 머물며 역사 서술에 몰두하였으니,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역사서설]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그러한 은거가 가져다준 영감을 통해서 놀라운 방식
으로 [역사서설]을 완성했다.
그 작업이 완료될 때 까지 단어와 생각들은 마치 우유가 통 속에 부어지듯이 내 머리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븐 할둔의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는 생전에 여러 편의 글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
는 것은 그의 자서전과 [성찰의 책,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베르베르인 및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탁월한 군주
들에 관한 초기 및 그 후대 역사의 집성]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역사서밖에 없다.
우리에게 [역사서설]로 알려진 책도 사실은 원래 하나의 독립적인 서적이 아니라 이 역사서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성찰의 책]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븐 할둔이 1375년부터 1379년까지 이븐 살라미의 조그만 성채에 은거하고
있는 동안 집필한 것인데 모두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문명과 사회의 근본적인 특징을 다루었고,
제2부는 천지창조에서 당시까지 아랍인들의 역사를 중심으로 다른 여러 민족들의 역사를 서술하였으며,
제3부는 북아프리카 서부의 베르베르인들의 역사를 설명하였다.
그런데 문명의 본질을 다루는 제1부는 여러 민족과 지역의 역사를 통시대적으로 서술한 편년체적인 세계사인 제2부
및 제3부와는 별도로 읽혀져도 무방한 독립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학자들은 [성찰의 책] 전체의 서문과 서론
그리고 제1부를 합쳐서 무카디마 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이를 아랍어 그대로 무카디마라고 하거나 혹은 서설이라고 부른는데, 이 역사서에는 이 부분이 이븐
할둔이 저술사 역사서(성찰의 책)의 서설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역사서설]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는 역사의 표면에 드러난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것만으로는 세계사의 전개과정, 즉 왕조의 흥망과 문명
의 성쇠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역사적 변화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결과케하는 원인을 알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원인을 파악하
기 위해서는 사회와 문명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부터 구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학, 철학, 신학, 법학등 기존의 어떠한 학문도 그다 풀려고 하는 의문점에 대해서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문명의 학문이라고
불렀다.
성찰의 책 제1부, 즉 역사서설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모두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인간의 문명 일반
2. 전야문명, 야만민족과 부족에 대한 설명
3. 왕조, 왕권, 칼리프제, 정부관직에 대한 설명
4. 도회문명과 거기에서 생기는 조건들
5. 이윤과 기술 등 다양한 생계수단에 대한 설명
6. 다양한 학문 분야와 교육방법
‘연대의식’은 이븐 할둔의 문명론과 국가론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이 말은 영어로 solidarity, group feeling, group consiousnesss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특정 집단의 존속과
외부의 위협에 대한 대응을 위해서 구성원 사이에 형성된 결속의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연대의식은 일반적으로 공통의 조상을 갖는 혈연집단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따라서 혈연적 유대관계를 잘
보존하고 있는 전야민들이 그렇지 못한 도회민들에 비해서 더 강력한 연대의식을 소유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전야민에 속하는 여러집단들은 각각의 연대의식을 소유하지만, 그것들 사이에서도 강약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보다 강한 연대의식을 소유한 집단이 그렇지 못한 집단을 압도하며 지배하게 된다.
그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여러 왕조들이 어떤 규범을 근거로 정치를 펼쳤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왕조에 속한 지식인과 지배층이 지성적 규범을 근거로 정치제도를 만든 경우이고,
또 하나는 예언자가 제시한 종교적 규범을 근거로 정치제도를 만든 경우이다.
고대 페르시아 왕조들이 전자의 전형적인 예라면 이슬람의 칼리프제는 후자를 대표한다.
지성적 규범에 기초한 왕조일지라도 백성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정의로운 정치를 구현하느냐의 여부를
두고 선정과 폭정의 체제가 나누어진다. 이븐 할둔은 종교법에 기초한 칼리프제를 가장 이상적인 국가형태로 생각했
지만, 이슬람 출현 이후의 역사도 정통 칼리프제의 뒤를 이어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가 등장했듯이, 이 역시
국가의 일반적인 변화과정을 겪으며 군주제적인 성격으로 바뀐다고 보았다.
지배집단은 도시안에서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상인, 기술자, 학자들을 보호하면서 도시를 더욱 발전시키지만, 곧
도회문영이 가져다 주는 사치와 안일에 길들여 지고, 왕조의 내부나 외부에서 보다 더 강력한 연대의식을 지닌 집단
에 의해서 무너지고 이와 함께 도시도 쇠퇴와 붕괴의 길을 걷는다.
이븐 할둔이 “도회문화는 문명의 절정이자 성장의 종말이며 퇴락의 징후이다.”라고 단언한 것도 이러한 과정을 지적
한 것이며 , 그런 의미에서 그의 도시론은 대단히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역사가’로서 이븐 할둔의 탁월한 역량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음은 물론이며 “투키디데스가 역사
학을 창시한 사람이라면, 이븐 할둔은 역사학을 하나의 (과학적)학문으로 정립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를 말해준다.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지적인 활동의 분야에서 어떠한 선배로부터 영감을 받지 않은 듯 하며, 자신의 동료들 사이에서
도 어깨를 같이 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고 어떠한 후배들에게도 영감의 불꽃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세계사에 첨부한 [역사서설]속에서 독자적인 역사철학을 생각하고 형상화했는데, 그것은
이제껏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누구에 의해서 논의된 것보다 가장 위대한 작업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서문
반면에 역사학이 가지는 내적인 의미는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사고와 노력, 현존하는 사물들의 원인과 기원에 관한
미묘한 설명 그리고 사건들이 어떻게 또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깊은 지식을 포함한다.
따라서 역사학은 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것의 한 분야로 여겨질 만하다.
역사적인 정보들 가운데 오류와 근거 없는 추정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흔히 발견되는 요소이다.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인간이 생래적으로 물려받은 속성이다.
정말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학문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일이 너무 흔해졌다.
그러나 우매함의 목초지는 인류에게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진리의 권위와 맞서 싸울 수는 없으며, 거짓의 사악함에 대해서는 깨우치는 사유로써 싸워야만 한다.
보고하는 사람은 단지 받아 적어서 그대로 전달할 뿐이기 때문에, 은폐된 진리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비판적인 통찰
력이 필요하며, 이와 같은 통찰력이 적용되어 진리가 찬란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지식이 요구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저술을 읽고 또 현재와 과거의 가리워진 부분들을 탐구할 때, 나는 그 나른한 자기 만족과 졸음
에서 벗어나려 했고, 비록 탁월한 작가는 아니지만 가능한 한 나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역사에 관한 책 한 권을 저술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나는 다양한 시대에 벌어진 사건들이 처했던 상황에서 베일을 벗겨내었고, 역사적인 사실과 성찰을 다루
면서 그것을 체계적으로 순서에 따라서 배열했다. 거기에서 나는 왕조와 문명이 어떻게 그리고 왜 발생하게 되었는
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서 나는 왕조와 문명이 어떻게 그리고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오늘날 마그리브의 주민을
구성하고 여러 지역과 도시에 거주하는 두 종족의 역사, 그리고 수명이 길고 짧건 그 지배 가문들 – 과거 통치자 들과
그 연맹자들을 포함해서 – 의 역사를 저술의 토대로 삼았다. 이 두 종족은 아랍인 과 베르베르인들이다.
베르베르인 [ Berbers ]
북아프리카에서 사하라사막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거주해 있다. 베르베르어(아프로·아시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총칭. 베르베르라는 호칭은 라틴어의 바르바르스(Barbars, 로마세계 밖에 사는 문명화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킴)에
유래한다.
그들 자신은 이마지겐(Imajighen, 고귀한 출신의 사람이란 뜻)이라고 자칭. 인종적으로는 코카소이드(백인종군)에
속하지만 변종의 폭이 크다. 4가지 인종형으로 나뉘는데 남쪽에선 흑인종과의 혼혈도 볼 수 있다.
언어상으로는 마스무다계, 산하쟈계, 자나타계의 3방언 군으로 대별된다.
그런 점에서 이 저술은 포괄적인 세계사를 담게 되었으며 고집 세고 길 잃은 지혜를 제자리에 돌아오게 했다.
이 글은 여러 왕조에서 일어난 일들의 원인과 이유를 제시하고 있으며, 철학을 담는 그릇이자 역사적 지식의 창고이
기도 하다. 그리고 도회민이건 유목민이건 불문하고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역사를 포괄하며, 동시에 그들과 동시대
에 존재했던 위대한 왕조들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고, 나아가서 초기의 정황과 뒤이어 벌어진 역사에서 배우고
기억할 만한 교훈들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저술을 “성찰의 책,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베르베르인 및 그들과 동시대에 존재했던 탁월한 군주
들에 관한 초기 및 그 후대 역사의 집성” 이라고 칭했다.
따라서 학자로서의 능력과 폭넓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이 책을 불만에 차고 비판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더라도,
혹시 잘못이 발견되면 침묵으로 그것을 바로잡고 관대하게 수용해주었으면 한다.
서론
역사의 서술은 수많은 자료와 매우 다양한 지식을 요구한다.
또한 뛰어난 사변적 심성과 철저함도 필요한데, 이런 것들이야 말로 역사가로 하여금 실수를 범하지 않고 진리에 이
를 수 있도록 한다.
만약 역사가가 단순히 전해져오는 모양 그대로의 역사적인 정보를 믿기만 하고, 관습에서 비롯된 윈리들, 정치의
근본적인 사실들, 문명이 지니는 특징, 혹은 인간의 사회조직을 지배하는 상황들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면, 아니 더 나아가서 아주 먼 고대의 자료들을 평가하는 그 당시의 혹은 비슷한 시기의 자료들과 비교하
지 않는다면, 그는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서 실족하고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례들을 특히 숫자, 즉 역사적 일화 속에 등장하는 화폐나 군인들의 숫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숫자들은 오도된 정보들 전달하는 좋은 수단이 되고 황당한 진술을 낳은 매체가 되기 때문에, 이미 알려진 기본적
인 사실들의 도움을 받아 검증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창세기] 32장에는 아브람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하나님이 보내 천사와 씨름을 해서 이겼다고 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일화가 나와 있다.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시대나 가까운 시대의 왕조가 보유한 군대의 숫자를 말 할 때, 무슬림이나 기독교도의 병력에
관해서 토론을 벌일 때, 혹은 정부의 세금 수입이나 지출경비,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보유한 재화의 규모를 거론
할 때,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상식의 범위를 넘어서서 흥미주의의 유혹에 굴복하는 경향이 많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흥미주의를 선호하는 일반적인 경향, 숫자를 더 높여서 말해도 괜찮으리라는 안이한 생각, 평론
가나 비평가들이 제기하는 비판에 대한 무신경,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결국 자신의 실수와 의도에 대해서 자기비판
을 행하거나, 무엇인가를 보고할 때 스스로에게 절제와 공정함을 요구하거나, 혹은 탐구와 조사를 통해서 내용을 다
시 확인하는 그런 일들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정치의 원리와 사물의 성질은 물론 민족이나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서
생활방식, 성품, 관습, 교파, 학파등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서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서도 모든 방면에 걸쳐 포괄적인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는 현재와 과거의 상황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과 차이점을 비교해야만 하며, 그래서 어떤 경우에 유사성이 나타
나고 어떤 경우에 차이점이 보이는지 그 원인을 알아내야만 한다.
그는 왕조와 종교의 상이한 기원과 발생, 그리고 그것들이 생기게 된 이유와 동기 및 그것들을 지탱했던 사람들의
상황과 역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목표는 모든 현상들의 이유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추고 모든 사건들에 기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자신이 알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에 근거하여 전승되어온 보고의 내용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 보고가 요구조건을 충족시킨다면 그것은 건전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역사가는 그것을 엉터리로 간주
하여 폐기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고대인들이 역사를 높이 평가했던 것이고, 앗 타바리나 알 부하라 혹은 그들보다 전에 살았던
이븐 이스학을 비롯한 종교학자들이 역사학을 선택하고 헌신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역사학의 은폐된 함정은 민족과 종족이 처한 상황이 시대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변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정말 뿌리 깊은 통증이고 깊이 숨겨져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눈에 띄게 되기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세상과 민족, 관습, 교파등의 상황이 동일한 형태로 혹은 항구적인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
으며, 시대와 시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고,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가 있다는 점이다.
유추와 비교는 인간이 갖춘 자질이지만,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거기에다가 망각과 부주의 까지 겹쳐지면 사람은 자신의 목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상황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는 현재에 근거한 자신의 지식을 서슴지 않고 역사적 자료에 적용하며, 자기 눈으로 관찰해서 획득한 기준에 의거
하여 그러한 자료를 판단한다. 그러나 실제로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그는 실수의 나락
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어떤 시대에 어떤 종족에게 교유한 사건을 다루는 것이지만, 지역, 종족, 시대라는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서술
은 역사가들의 기반이다.
그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바로 이 기반 위에 놓여 있고, 역사적 지식은 그 위에서 명료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신이야말로 모든 지식의 최종적인 저장고이며, 인간은 무력하고 부족할 뿐이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종교적
으로 분명한 의무이며, 신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길을 쉽게 찾고 그의 노력과 추구를 성공을 거둘 것이다.
우리는 이 글 속에서 우리가 열망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신의 도움을 간구한다. 신께서는 인도하고 도움을
주시니, 믿을 만한 분이로다.
제1부
머리말
역사란 실제의 인간의 사회조직 – 그 자체가 세계의 문명이다 – 에 관한 정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허위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정보를 왜곡시킨다. 이러한 현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어떤 견해나 학파를 추종하는 당파성이다. 만약 사람이 공평한 마음으로 정보를 수용한다면,
그 정보가 마땅히 거쳐야 할 비판적인 검증을 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진실인지 허구 인지를 분명히 할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가 특정한 견해나 교파에 기우는 당파성으로 오염되어 있다면, 그는 자기가 만족스럽다고 생각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순간의 주저도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편견과 당파성은 비판적인 능력을 흐리게 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배제하며, 그 결과는 오로지 거짓의 수용과 전달일
뿐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러한 정보가 전달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인격비판을 통해서 검증 할 수
밖에 없다.
세 번째 이유는 사건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많은 전달자들은 그가 관찰한 것이나 구전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정보를 전달할 때
자기 나름대로 추정하거나 상상하는 의미를 거기에 덧붙여 전달할 뿐이다. 그 결과는 거짓이다.
네 번째 이유는 사물의 진실에 관한 근거없는 추정이다.
이는 매우 흔한 현상이며, 대부분 전달자를 맹신하기 때문에 생긴다.
다섯 번째 이유는 상황이 과연 진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잘 알지 못하는 데에 있다.
상황은 때로 애매하고 인위적으로 왜곡되기도 하기 때문에 비록 보고자가 자신이 보았던 대로 상황을 기술하더라도
그와 같은 인위적인 왜곡으로 인해서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다.
여섯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권력과 지위가 높은 찬미하고 칭찬하는 데에 있다.
그들은 상황을 미화하고 명성을 퍼뜨리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널리 유포된 정보는 진실하지 않다. 인간의 영혼
은 칭찬을 갈구하고 현세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지위와 부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덕성
을 열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덕을 갖춘 사람들에 대해서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일곱 번째 이유는 문명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들이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에 무지한 데에 있다.
어떤 사건들(혹은 현상들)이 본질과 관련되어 생긴 것이냐 아니면 어떤 행위의 결과이냐를 불문하고, 그것들은 본질
이면 본질 나름대로 혹은 부수적, 우연적 상황들이면 또 그나름대로의 고유한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만약 연구자들이 현존하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상황가 상태들의 고유한 성질을 안다면, 역사적 정보를 비판적
으로 검토할 때 진실과 허위를 구별하는 데에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비판적인 검토를 행할 때 어느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반면에 인격비판은 무슬림들의 종교적 정보가 건전하가를 판별할 때에만 동원되는데, 왜냐하면 이와 같은 종교적
정보는 대부분 종교법의 제시자(무함마드)가 무슬림들에게 이행하도록 한 명령과 관련된 것으로, 만약 그가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린 것이 사실이라는 점만 확인되면,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불문하고 무슬림들은 그것을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정보의 건전성 여부에 대한 검증은 전달자의 정직함과 건전성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 관한 정보의 진실성과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보도된 정보와 일반
적 상황 사이의 정합성 여부이다. 따라서 보고된 사살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의 여부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격비판에 선행하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적인 것에 관해 올바른 견해는 인격비판을 통해서 유도되는 것이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어떤 것에 대한 올바른 견해는 인격비판뿐만 아니라 정합성 여부의 검사에 의한 외적인 증거의 검증을 통해서 유도
되는 것이다.
아누시르완도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왕권은 군대를 통해서 존재하고, 군대는 재화를 통해서, 재화는 세금을
통해서, 세금은 경작을 통해서, 경작은 정의를 통해서 존재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은 군주가 자기 백성
들의 상태를 직접 살피고 그들을 가르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그가 그를 지배할 수 있고, 그들이 그를 지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했다고 하며 널리 읽혀지고 있는 [정치학]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언급은 철저하지 못하며, 그 주제는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채 다른 것들과 뒤섞여 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나 아누시르완의 말을 빌려 지적한 것과 같은 일반적인 관념들에 대
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면서 그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정치적 지혜를 담은 여덟 문장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끝이 다음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이것들은 하나의 고리를 이루고 있어 분명한 시작과 끝이 없다.
저자는 그가 생각한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꼈으며 그 문장들의 의미를 강조했다.
어떤 면에서 앗 투르투쉬는 올바른 생각을 겨냥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고 문제들을 철저하게 파헤치지도 못했다.
인간은 그에게만 독특한 다음과 같은 자질들로 인해서 다른 생명체와 구별된다고 우리는 말한다.즉
(1)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생긴 학문과 기술, 그 능력이 곧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키고, 다른 모든
피조물들 위에 사고하는 존재로 드높여 준다.
(2) 억제력과 강력한 권위에 대한 필요. 모든 동물들 가운데 유독 인간만이 이런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 법과 메뚜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지만, 만약 그것들이 우리와 비슷하게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감에 의한 것이지 사고나 성찰에 의한 것은 아니다.
(3) 생계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노력, 그리고 생활수단을 획득하는 다양한 방법 등에 대한 인간의 관심, 이것은 인간
이 생존과 존속을 위해서 식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신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필요를 느끼도록 하여 생계수단을 희망하고 추구하도록 인도하신다.
신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분은 만유를 창조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고유한 본성을 부여하시며 인도해주신다.”
(4) 문명, 이것은 인간이 필요한 것을 획득하고 공동생활이 부여하는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도시나 촌락에 모여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뒤에서 설명하듯이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협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논의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 진다.
(1) 인간의 문명 일반, 그 다양한 종류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명권에 관한 논의
(2) 전야문명, 그 부족과 야만민족들에 관한 논의도 여기에 포함된다.
(3) 왕조, 칼리프제, 왕권, 정부관직에 관한 논의도 여기에 포함된다.
(4) 도회문명과 지방, 도시에 관한 논의
(5) 기술,생계, 직업 및 그 갖가지 양상
(6) 학문, 그 습득과 연구
제1장 인간의 문명 일반
제1전제 : 인간의 사회조직은 필요불가결하다.
이 사실을 철학자들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는 곧 인간은 사회조직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니, 철학자들은 그러한 사회 조직을 도시(polis)라는 용어로 표현
했다. 이것은 곧 문명이기도 하다.
인간의 사회조직이나 문명이 필요불가결 이라는 점은 신이 인간을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생존하고 존속할 수 있는
형태로 창조했다는 사실로써 설명된다.
그 분은 인간에게 식량을 갈구하는 자연적인 욕망을 가지도록 했고 또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요컨대 사회조직은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인류는 불완전하게 되고 말 것이며, 세계를 인류의 거처
로 만들고 인간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상에 두려한 신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학문의 대상인 문명의 의미이다.
인류가 사회조직을 만들고 이 세상에 문명이 성립하게 되면, 사람들은 인간의 동물적 본성 속에 존재하는 공격성과
불의를 제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따라서 억제력을 발휘하고 서로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떨어뜨려 놓은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야수의 공격성에 대비하여 인간을 방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무기는 인간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충분하지 못
하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그러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상호간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이외의 다른 모든 동물들은 인간의 지각과 영감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억제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인간들 가운데 누군가일 수밖에 없다.
그는 사람들을 제압하는 힘과 권위를 가져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누구도 서로에 대해 공격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왕권이 가지는 의미이다.
예언의 존재는 논리에 의해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필요성은 초기 무슬림들의 의견처럼 종교법에 의해 성립
되는 것이다.
계보학자들은 민족 간의 차이가 오로지 혈통 때문에 생긴다고 하는 그들의 신념 때문에 이러한 오류에 빠지게 된 것
이다. 이는 인류와 지리적 환경, 이 양자의 진정한 본질을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외적인 생활과 환경도 변화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변화가 후속 세대에 영항을 준다는 사실도
무시한 것이다.
즉 많은 양의 음시과 그 속에 함유된 수분이 인간의 몸 안에 불필요한 유해 물질을 발생시키고,
그것이 다시 몸을 필요 이상으로 비대하게 만들며 나아가서 부패하고 상한 체액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반대로 굶주림은 사막에 사는 동물들의 몸집과 형태를 현저하게 개량시켜 준다.
배고픔에 단련된 사막의 주민들은 뚱뚱한 사람이건 마른 사람이건 몸 속에 불필요한 물질을 가지지 않았다.
실제로 도시와 읍의 주민들 대부분은 냉정하고 부주의하며 비종교적인 사람들인데, 이것은 그들이 다량의 고기와
조미료와 정제된 밀을 먹는것과 연관되어 있다.
기근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과거의 습관적인 포만상태의 희생물이지, 그를 처음으로 찾아온 굶주림의 희생물은 아니다.
갈증에 익숙하고 조미료나 버터가 없는 식생활에 습관이 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수분 – 모든 자연식에 그 정도는 존재
한다. - 은 항상 적정한 범위한에 머물러 있을뿐 더 증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위장은 음식섭취량의 변화에 따른 건조함이나 균형상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풍부한 식량과 다량의 조미료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맞게 되는 죽음을 그들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해의 열쇠는 습관에 있다. 일단 사람의 영혼이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면 그것은 그 영혼의 성격과
성질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왜냐하면 영혼은 다양한 색조에 물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점진적인 단련을 통해서 영혼이 배고픔에 익숙해지게 되면, 배고픔은 그 영혼의 자연적인 습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배고픔과 소식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너무 많이 먹을 때 보다 배고픈 상태로
있을 때가 신체적으로 더 좋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배고픔은 신체와 정신의 건강과 안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즉 음식이 신체의 근본적인 생존에 영향을 주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공복은 신체와 정신을 파괴하는 부패한 잉여
물과 혼합물을 몸에서 제거함으로써 신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제6전제 : 선천적으로 혹은 수행을 통해서 초자연적 지각능력을 지니는 여러 유형의 인간들.
그에 앞서 영감와 꿈에 대한 논의
신의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려줌으로써 영광을 부여했고, 또 그을 알 수 있도록 그들을
창조했다. 그는 그들을 그와 그의 종들을 연결하는 고리로 삼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류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알려주고 그들이 올바른 길로 인도되도록 권유한다.
그들은 인류가 지옥의 불길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는다.
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지식과 그들의 말을 통해서 드러내는 경이는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며, 신은 오로지 특정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그것을 알려주는데, 그들조차 신치 가르쳐 주지 않으면
그것을 알 수 없다. 무함마드는 “진실로 나는 신이 내게 가르쳐 준 것만을 알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을 확인시켜주는 징표는 그들이 영감의 상태에 들어갔을 때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질식된 느낌과 같은 것을 수반하는,
말하자면 졸도나 무의식의 상태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사실 그것은 영적인 왕국과의 만남이요,
그 속으로의 몰입이며, 그러한 느낌은 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통상적인 사람들의 지각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뒤 이러한 특이한 지각은 계시를 받은 사람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음성의 형태로, 혹은 신의 말을
전달하는 사람의 형태로,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내려온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상태는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가지만, 그는 계시된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
무함마드가 계시에 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때로 그것은 종이 울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 나는
가장 강한 충격을 받는다. 그것이 내게서 사라진 뒤에도 나는 내가 들은 것을 기억한다.
어떤 때에는 천사가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서 내게 말을 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한다.
영감은 받은 사람임을 확인시켜주는 또 다른 징표는 그들이 계시받기 전부터 도 선량하고 결백하며 어떠한 죄악도
행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류성(無謬性)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들은 마치 선천적으로 비천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행동은 그들의 본성 자체와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
영감을 받은 사람의 또 다른 징표는 그들이 기도와 자선과 순결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와 신앙을 널리 전파한다는 점
이다. 아부 바르크와 하디자는 무함마드의 그러한 행위야 말로 그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여겼다.
영감을 받은 사람의 또 다른 징표는 그들이 자기 백성들로부터 받는 신앙이다.
영감을 받은 사람의 또 다른 징표는 그들이 자신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경이를 행한다는 사실이다.
‘경이’는 다른 인간들이 수행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행동을 가리키며, 따라서 ‘기적’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 안에 있지 않고 그 범위를 넘는 곳에서 일어난다.
이제 이러한 사실이 밝혀졌으니 우리의 예언자에게 계시된 [코란]은 가장 위대하고 고귀하며 가장 분명한 기적이라는
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이는 예언자가 받는 계시와는 별도로 일어나며, 기적은 그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나타난다.
반면에 [코란]은 그 자체가 계시이며, 그 자체가 경이로운 기적이다.
[코란]은 그 자체가 증거이며, 계시와 연관되어 발생하는 여타의 경이들과는 달리 외부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 안에서 증명할 것과 증명될 것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가장 분명한 증거이다.
무함마드가 “모든 예언자들은 인류에게 자신이 예언자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어떤 징표들을 각각 부여 받았다.
내게 부여된 것은 계시이다.
그래서 나는 부활의 날에 가장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기를 희망한다.”고 한 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즉 그에게는 기적이 계시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그 계시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진실한 것이
라고 믿고 그를 진정한 예언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로 그의 추종자이자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상의 사실들은 [코란]이 우리의 예언자가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말과 구절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임을 보여주
고, 그런 점에서 그것은 신성한 경전들 가운데 에서도 독보적이며 [토라]나 [복음서]와 같은 다른 경전들과는 구별된다.
과거의 예언자들은 그러한 경전들을 계시의 상태에서 생각의 형태로 받았고, 인간적인 상태로 돌아온 뒤에 이 생각을
자신의 일상적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경전들은 ‘무비성(無比性)의 특징을 가지지 못한다.
무비성은[코란]에만 고유한 것이다.
[하디스]에도 자주언급되었듯이, 우리의 예언자는 신의 생각을 계시받았고 다른 예언자들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경전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문자 그대로의 형태로 [코란]을 받았다는 사실은 신이 무함마드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너는 혀를 지나치게 빨리 움직이지 말라. 계시의 구절들을 모으고 그것을 낭송케 하는
것은 나의 일이니 ..... 나의 계시를 왜곡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토라 [Torah] 유대교 율법.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 즉 유대 백성에게 내린 계시의 본질이며, 하느님이 인류를 위해 계시한 가르침
또는 지침이다.
토라는 종종 〈구약성서〉 처음 5권을 가리키는 데 국한되며, 율법 또는 오경(Pentateuch)이라고도 한다.
토라는 전통적으로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모세가 썼다고 인정된다.
유대교,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개신교 교회들의 정경은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
〈신명기〉로 이어지는 순서를 모두 똑같이 받아들인다.
기록된 토라는 모든 유대교 회당에서 계약궤 안에 들어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에 손으로 직접 쓴 사본으로 보존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그 사본을 특별한 경외감을 가지고 보관된 곳에서 꺼내오며 다시 집어넣는다.
유대교의 예배의식에서 토라(5경) 낭송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무비성(無比性)
신의 무비성(無比性)이라는 것은 신의 초월성을 의미하며 신이 초월자라는 것은 공간적ㆍ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
니다. 신은 그 본질에서 피조물로부터의 유추를 일체 거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디스]
무함마드의 언행에 관한 각종 보고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신빙성이 있는 것들을 선별하여 편찬한 책.
[코란]에 있는 많은 시구들은 신이 그것을 직접 문자 그대로 계시한 것임을 보여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장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예언자의 기적들 가운데 [코란]보다 더 위대한 기적, 아랍인들을 통합한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을 것이다. ‘지상의 모든 부를 다 탕진한다고 해도 너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신께서 그들을 결합시킨다“
이 점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며 숙고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설명한 대로 그것이 정확함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이 무함마드의 지위가 다른 예언자들에 비해서 우위에 있고 지고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사실
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초자연적 지각의 출발전을 이루는 힘이 주술이다.
그들의 영혼은 천성적으로 열등하며 완벽함을 획득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보편적인 것보다는 특수한 것을 더 잘
지각하며,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특수한 것을 인식하는 기관인 상상력이 아주 강하게 발달되어 있다.
주술사는 자신의 취약성 때문에 외래적인 관념의 도움에 의지한다.
그러한 관념들은 그의 지각속으로 들어와 그가 가지고자 열망하는 지각과 뒤섞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혼란에 빠지게 되며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거짓일 뿐이다.
따라서 그가 이러한 행동으로 예언을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꿈은 인간의 영혼에 독특한 자질이며 이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것이다. 아무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모든
사람은 잠에서 깬 뒤 꿈에서 본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한다.
우리는 영혼이 잠 속에서 초자연적 지각을 이룩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만약 이런 일이 잠 속에서 가능하다
면 다른 상태에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작을 행하는 본질은 하나이고 그 특질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성이라는 것은 영혼이 지니는 특수한 자질의 하나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 즉 그의 추리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여 그에게 어떻게 생활을 꾸려가
고 어떻게 가정을 꾸미는 가를 말해주는 그런 지식을 의미한다.
만약 그가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가는지를 알고 있다면 그에게는 법적 책임을 회피할 어떠한 구실도 없고, 사후의
생활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인간의 영혼이 지성이라는 특수한 자질을 결여하고 있다고 해서 영혼 자체를 결여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자신의 현실을 망각한 것도 아니다. 그가 비록 법적인 책임을 수반하는 지성을 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 즉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가는지를 알려주는 지식은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께서는 신지를 부여할 자신의 종을 선택할 때, 법적인 책임을 질수있느냐의 여부를 그 근거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제2장 전야문명,야만민족,야만부족과 그들의 생활상태 및 몇 가지 기본적이고 설명적인 진술들
즉 의식주를 충족시키기 위한 그들의 사회조직과 협동은 그들로 하여금 생존 차원 이상을 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함마든는 “모든 아기는 자연상태로 태어난다. 그를 유태인으로 기독교도로 혹은 불신자로 만드는 것은 그의 부모
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관습과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는 것들의 자식일 뿐,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 선천적 자질이나 기질의 산물이
아니다. 익숙한 조건들은 그의 새로운 성격과 습성을 형성하고 마침내 선천적 기질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률을 수반하는 지배가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의 용기를 파괴하고 저항력을 앗아가
버린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듯이 억압받는 사람의 영혼 속에 생성되는 무력감 때문이다.
처벌에 의해서 강제되는 법률은 용기를 완전히 파괴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사람에게 가해진 처벌은
그 사람에게 치욕감을 불러일으키고 치욕감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의 용기를 꺽어버리기 때문이다.
법률이 교육과 감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고 그리고 유년기부터 적용될 때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손함으로 길들여 지며 성장하게 되고 자신의 용기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이 무함마드로부터 종교를 얻었을 때, 그들은 [코란]에 나타난 고취와 금령을 통해서 자기내부에서 나온
억제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기술적인 지시나 학문적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법률은 그들이 전달받은 종교적인 규범과 종교법, 즉 신앙의 신조가 진실된다는 사실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신념에
근거해서 그들이 기꺼이 준수하는 그런 법률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용기는 감소되지 않았고 교육이나 권위에 침식되지도 않았다.
칼리프 우마르는 “종교법에 의해서 단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신에 의해서 교육받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우마르의 희망은 모든 사람이 자기 내부에서 나오는 자제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었다. 그는 무함마드야 말로 인류
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확신했다.
국가적, 교육적 법률은 분명히 용기를 파괴한다. 그 이유는 그 억제력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교법은 용기를 파괴하지 않으니, 그 까닭은 억제력이 내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저항을 꺾기 위해서 투쟁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성취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투쟁하기 위해서 인간은 연대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너희의 혈연적 유대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너희의 계보를 가능한 깊이 알도록 하라!”는 무함마드의 말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혈연적 유대가 긴밀성을 낳고 그것이 다시 상호간의 도움과 애정을 낳을 때 비로소 계보가
유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기대할 것이 없다.
즉 공통의 혈통임이 더 이상 명백하지 않으면, 그것은 학문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게 되고, 더 이상 우리의 관념을 움
직이지도 않고 집단감정이 야기하는 애정과도 단절된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연대의식을 지니는 특정 집단의 지도력은 다른 혈통의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도력이 오로지 지배능력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지배능력은 연대의식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 대한 지도력은 반드시 개별적인 연대의식들을 능가하는 더 강력한 연대의식에서만 도출될 수 있다.
각자의 개별적 연대의식이 지도자가 느끼는 연대의식의 우월성을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그에게 복종하고 추종하기
때문이다.
연대의식은 혈통에서 생기는 것이고 뛰어난 조상들을 배출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민들의 경우 ‘명망’이나 ‘가문’이라는 용어는 비유적인 의미에 불과하며, 훌륭한 활동을 했던 몇몇 조상
들이 있다는 정도를 의미한다. 이는 진정한 의미, 절대적인 의미에서 명망이라고 할 수 없다.
가문은 연대의식과 개인적 자질을 통해서 최초의 고귀함을 획득하게 된다.
그뒤에 가문을 지닌 사람들이 정주생활을 하고 평민들과 섞에게 되면 연대의식이 사라지고 고귀함도 소멸된다.
과거의 명망과 관련된 약간의 미망이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자기가 귀족가문에 속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연대의식은 완전히 소멸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상태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자기들의 뿌리가 아랍계 혹은 비아랍계 귀족가문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많은 도시민들은 그러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환상을 가장 심하게 기지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인들이다.
그들은 원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문에 속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첫째,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그들에게 종교와 종교법을 가져다준 모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언자와 사도들이
그들의 조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연대의식을 소유했고, 또 신이 그들에게 약속했던 그리고 연대의식을 매개로 내려준 왕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상실했고 치욕과 고난을 겪었으며, 지상에서 유배의 생활을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수천 년 동안 그들은 오로지 노예생활가 불신앙으로 일관했다.
그는 가문의 영광를 보존케 했던 자질들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을 경멸한다.
그는 그러한 영광이 시험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것이 집단적인 노력과 개인적인 자질로써 얻어
진 그 무엇이 아니라 단지 혈통 때문에 처음부터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에게 보이는 극도의 존경심을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경심이 어떻게 해서 생겼고 무슨 이유로 존경심을 나타내는가는 알지 못한다.
그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혈통때문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다.
또한 그는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는데, 이는 자신이 그들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복종하는 이유가 자기가 당연히 그들의 복종을 받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뿐, 그들
에게 복종케 한 자질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는 그들을 비천하게 여기고, 반대로 그들은 그를 경멸하며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명망과 관련하여 4대의 법칙은 대체로 타당하다. 경우에 따라서 4대보다 더 짧은 기간에 한 가문이 사라지거나 몰락
하기도 하고, 비록 쇠퇴와 영락한 상태에서나마 5-6대까지 지속하기도 한다.
4대는 창설자의 세대, 창설자와 개인적 접촉을 가진 세대, 전승에 의존하는 세대, 파괴하는 세대로 정의될 수 있을 것
이다.
그들이 향유하는 사치와 안락이 크면 클수록 파멸에 가까워진 것이니, 왕권을 장악할 가능성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치와 안일한 생활에의 탐닉은 지배력을 가져다주는 연대의식의 강건함을 파괴하고, 연대의식이 파괴되면 부족은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니 다른 민족에게 병탄되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야만민족들은 비옥한 목초지로 사용할 만한 고향이라든가 쉴만한 고정된 장소가 없다.
모든 지역과 장소가 그들에게는 다 똑같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가 있는 곳이나 그 주변 지역을 소유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며 자기 세계의 경계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먼 지역으로 무리지어 몰려가고 머나먼 곳의 민족들에 대해서 우위를 장악한다....
세월은 권좌에 있던 원래의 집단을 압도하게 된다. 그들의 용맹함은 노쇠로 인해서 사라지고 왕조는 그 활력을 잃어
버린다. 그들은 세월이 제물이 되어, 그들이 지녔던 활력은 안락으로 소진되고, 그들의 생기는 사치로 인해서 고갈
되어 버린다. 그들은 한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한계는 도시화와 정치적 권력의 본질에 의해서 예정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각각의 집단이 보유하는 연대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치는 왕권을 약화시키고 무너뜨려버린다. 한 왕조가 무너지면, 그 왕조의 연대의식의 일부를 이루던 또 다른 연대
의식을 지닌 왕조에 의해서 권력이 탈취된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기존의 연대의식에 순종하고 복종적이기 때문이며, 또 사람들이 그 연대의식이 다른 연대의식
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대의식은 소멸하는 왕조와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데, 그것은 연대의식의 강도
가 관계의 긴밀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세상의 거대한 변화, 즉 종교의 변혁이나 문명의 소멸과 같은 일들이 발생하고, 혹은 신의 힘이 의도하
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피정복민은 언행, 의복, 직업 등 모든 풍속과 관습에서 정복민을 항상 모방한다.
그것은 인간이 항상 자신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나 자신을 굴복시키는 사람을 더 완벽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지닌 위세가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복종하는 사람 자신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 존경받은 사람의 완벽함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일 경우도 있다.
그러한 잘못된 가정이 머릿속에 자리잡으면 그것은 확고한 신념이 되어버리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승리자의
모든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와 닮으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모방인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인의 지배를 받고 복속하게 되자,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결코 그들에게 행해진 어떤 박해나 가해의 결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지배는 정의로움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해체는 인간의 본성속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다른 사람의 도구로 전락했을 때 일어난다.
따라서 흑인들은 일반적으로 쉽게 노예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그들은 인간적인 것을
거의 가지지 못하고 동물들과 매우 유사한 특징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이윤의 진정한 원천이기 때문에, 노동이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면, 이윤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따라서 생산적 노동은 행해지지 않게 된다.
종교는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 문명의 발전을 도모하는 종교적 법률과 규정을 왕권의 지도력과 결합시킨 것이다.
그 결과 아랍인들의 왕권과 국가는 위대하고 강력해 졌다.
제3장 왕조,왕권,갈리프위, 정부 관직 및 이와 관련된 모든 사항들, 이에 관한 기본적인 제의와
보충적인 제의들
왕권과 광대한 왕조의 힘은 특정한 집단과 그들의 연대의식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은 연대의식이 자기
동료들을 위해서 싸우고 또 죽음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의 애정과 각오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런 연대의식을 통해서만
공격적인 혹은 방어적인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포교는 왕조 초기에 많은 지지자를 확보해줌으로써 그 왕조가 지니는 연대의식 이외에 또 다른 힘을 부가한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종교적인 감화가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간의 질시와 투기를 제거
하고 그들을 진리로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 일에 관해서 통찰력을 가지게 될 때, 그들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
나로 통합되고 그들의 목표가 하나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목표를 위해서 기꺼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누군가 악행을 보거든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변화 시켜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신의 혀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게도 할수 없으면 자기의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더구나 정치는 한 사람만이 통제력을 발휘하도록 한다. 만약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사람이 통제력을 발휘하면,
그 결과는 모두의 파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는 이러한 상황에서 성장한다. 그들은 자기가 받는 봉급이 병역과 봉사에 대해서 국가가 지불하는 대가라
고 생각할 뿐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거의 하지도 않고 자신의 목숨을 던질만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연대의식은 그것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붕괴되고, 그 결과 왕조는 약체화와 노쇠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안정과 휴식에 익숙해지고 그런 것들을 자기의 특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의 천성의 일부
가 된다. 인간이 익숙해 지는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세대는 안락과 사치의 안정 속에서 성장한다. 전 세대가 지녔던 야만성은 변화를 겪게되고, 그들은 왕권의
장악을 가능케 했던 전야생활의 관습들 ... 넘치는 활력, 강탈의 풍속, 황야를 여행할 때 길을 찾는 능력 등 –을 망각
해 버린다.
그들과 평범한 도시민들과의 사이에는 전투기술과 문장을 빼놓고는 아무런 차이도 없게된다.
그들의 군사적 방어력은 약화되고 활력은 소실되어 버린다. 이러한 상황이 왕조에게 가져다주는 나쁜 효과는 노쇠라
는 형태로 드러난다.
우리는 앞에서 한 왕조의 수명이 통상 3세대를 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1세대는 전야에서의 특질, 그 억척스러움과 야만성을 유지하며, 그들은 고통과 영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고,
용맹스러우며 또 사납다. 그러므로 연대의식의 힘은 그들 가운데 계속 보존되며, 그들은 날카롭고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복종하게 된다.
왕권과 편안한 생활의 영향을 받은 제2세대는 전야적인 태도에서 도희문화로, 곤궁에서 사치와 풍요로, 모든 사람
들이 영광을 공유하던 상태에서 한 사람만이 모든 영광을 독차지 하고 다른 사람들은 너무 나태해져 그 영광을
추구하려고 조차 하지 않는 상태로, 자부심에 찬 우월성에서
겸손한 복종으로 바뀌어 간다. 이렇게 해서 연대의식의 활력은 상당히 파괴되고, 사람들은 비굴과 복종에 익숙해
진다.
그러나 과거의 덕성들도 상당히 남아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제1세대와 그 생활을 직접적으로 접촉했고 자신들의 눈
으로 선배들의 용맹과 영광 그리고 자신에 방어, 보호 노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거의 덕성들 가운
데 상당 부분을 상실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제1세대 때에 존재했던 상황이 언젠가 다시 도래하리라는
희망 속에서, 혹은 그런 상황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사는 것이다.
제3세대는 전야에서의 생활과 그 강인함의 시대를 마치 그런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어버린다.
그들은 강압적인 힘에 의해서 지배되기 때문에 달콤한 명예와 연대의식에 대한 구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들이 번영과 안일의 생활에 너무나 탐닉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치는 절정에 이른다. 그들은 마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부녀자가 남에게 의존하듯이 왕조에 의지하게 되고, 연대의식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보호하는 법을 망각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지도 모른다.
그들은 휘장, 의복, 승마, 무술 등으로 남들을 속이며 그럴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들 대부분은 후방에 있는 부녀자들
보다 더 겁쟁이들이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어떤 정보를 과장하려는 유혹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정보들에 대해서 좀처럼 믿지 않으려는 일도 흔기 생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설명했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자료를 살펴보고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
으면 안 되는데, 명철한 마음과 올바르고 자연적인 상식을 가지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가능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여야 하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부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능’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지칭하는 절대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넓은 범위를 포괄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실제로 가능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때에는 유용하지
못하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물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가능성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기원, 종류, 차이, 크기, 강도등을 탐구해보면, 그것과 관련하여 보고된 자료가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능의 영역 밖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왕조에서는 지배자가 타인에 의해서 격리되거나 통제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는 어린 군주를 그의 동족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고, 그를 사치스런 생활이 주는 쾌락에 젖게 하고 그런 것에 탐닉
하도록 모든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국사를 돌보는 일을 망각하도록 만들고, 결국 자신이
그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다.
그는 어린 군주로 하여금 지배자가 왕권을 행사하는 것은 단지 왕좌에 앉아 있으며 악수를 나누고, ‘폐하’라는 존칭어
를 듣고 또 하렘이 들어앉아 여인들과 노닥거리는 정도라고 생각하게 한다.
이런 군주는 실질적인 행정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군대, 제정, 변경방위를 감독하는 등 군주와 관련된 사무들을 직접
처리하고 감독하는 업무가 재상의 권한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이런 것들을 모두 재상에게 위임한다.
일단 왕조가 재상이나 가신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그런 상태로 계속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예가 극히 드문 까닭은 외부인에 의한 통제라는 것은 대부분 왕족들이 영화에 파묻혀서 성장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진 결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자다운 생황방식을 잊어버리고 유모들이 보여주는 특징에 길들여져 성장하기 때문에 지배권을 희망하지
도 않는다. 그들은 독자적인 권력의 행사나 지도자의 특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기 떄문에, 바라는 것이라
고는 오로지 허세와 여러 가지 쾌락과 사치일 뿐이다.
인간은 무정부적인 상태에서는 살 수 없으며, 그들을 서로 분리시켜놓는 지배자 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은 자신들을 억제하는 사람을 팔요로 하는데 그가 바로 그들의 지배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서 그는 권위를 발휘하는 강권력을 지닌 군주가 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런점에서 연대의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대규모의 공격과 방어는 연대의식의 도움없이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왕권은 고귀한 제도
이며,그에 대한 필요성도 일반적인 뿐만 아니라. 수호되어야 마땅한 제도이다.
국가는 군주가 백성을 지배하고 그들의 문제를 처리할 때에 현실화 된다. 백성이 있어야 군주가 되고, 군주가 있어
야 백성이 될 수 있다.
‘지배권’이란 군주가 백성들과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발휘하는 속성이다.
이는 곧 그가 백성들을 지배하는 것을 뜻하며, 만약 그러한 지배권 및 그 속성들이 선한 것일 때에 국가의 목적은
가장 완벽하게 성취될 수 있다.
그러한 지배권이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면 백성들이 이익은 증진되겠지만, 악하고 부당한 것이라면 그들에게 해를
끼치고 파멸을 가져다줄 것이다.
선량한 지배권은 온후함에 있다. 만약 군주가 폭력을 사용하고 형벌을 마음대로 가하며 백성들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그들의 죄를 헤아리기 시작한다면, 백성들은 두렵고 짖눌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잔꾀를 부리고
기만 행위를 하게 된다.
이것은 그들의 성품이 되고 그들의 마음과 성품은 타락하게 된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종종 군주를 버리기도 하고 국방의 의무를 방기하기도 한다.
백성들의 의욕저하는 국방을 이완시키고, 그들은 군주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렇게 해서 왕조는 쇠퇴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울타리는 황폐하게 된다.
만약 군주가 백성들에 대해서 강압적인 지배를 계속한다면 연대의식은 파괴될 것이고, 만약 그가 온후하며 백성들
의 결점을 눈감아 준다면 그들은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서 안식처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마음 속 깊이 그를 사랑하고 적과의 전쟁터에서 그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 할 것이다.
자기 백성에 대한 친절과 보호야말로 선량한 지배권의 속성이다. 왕권의 진정한 의미는 군주가 자기 백성을 보호할
때에 실현된다.
기민하고 명석한 사람이 온후함의 습성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온후함은 일반적으로 무신경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이다. 군주의 기민함이 초래하는 약점중 하나는
그가 백성들의 능력을 넘는 것들을 요구한다는 것인데, 그 까닭은 그가 백성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까지 알고 있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에 이미 자신의 명석한 두뇌로 그 결과를 예견하기 때문이다.
군주의 지나친 요구는 백성들의 파탄을 초래할 수도 있다.
무함마드는 일찍이 “너희들 가운데 가장 약한 자와 보조를 맞추어라!” 고 말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지나친 명석과 기민은 정치지도자로서는 하나의 결함이다.
어떤 사람이 우둔하다면 그것은 곧 그가 지나치게 완고하다는 것을 뜻하듯이, 명석과 기민이라는 것이 곧 그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품성이 그러하듯이 극단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며 중용의 길이야
말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다.
낭비와 인색사이의 관대, 혹은 만용과 비겁사이의 용기도 이와 마찬가지이며, 인간이 지닌 다른 품성들도 그러하다.
대중들이 수용하고 순종하는 일정한 정치적 규범을 준거로 삼을 필요가 있다.
페르시아인이나 다른 민족들은 그러한 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규범에 근거한 정치를 펴지 않는 왕조는
자신의 지배권을 올바로 확립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인간의 목적이 단지 현세적인 안녕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소하고 무익하며, 결국 죽음과 소멸로 끝나고 만다.
인간의 목적은 종교인데, 종교는 그들을 내세의 행복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종교법은 인간이 신과 혹은 다른 인간가 교유할 때 그러한 길을 따르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조직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왕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법은 왕권을 종교의 길에 따라서 인도함으로써 모든 것이 종교법의 감독 아래 머물도록 한다.
왕권이 무력이나 구속력 혹은 제어되지 않은 분노를 통해서 수행하는 어떠한 것도 전체와 불의의 이고, 따라서 그것
은 종교법에 의해서는 물론 정치적 지혜의 관점에서도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법의 감독에서 벗
어난 여하한 정책이나 정치적 결정 역시 비난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광명을 결여한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부활의 날, 인간의 행위는 그것이 왕권과 관련된 것이건 아니건 모두 자신에게로 다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정치적 법률은 오로지 현세적 이해만을 고려하는 반면, 입법자가 인류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내세에서의 안녕이다.
따라서 현세와 내세에 관련된 모든 사무에서 대중들로 하여금 종교법에 부응해서 행동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사람은 종교법의 대리자, 즉 예언자 들이며, 그 다음으로는 예언자의 뒤를 이은 칼리
프들이다.
칼리프위는 대중들로 하여금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에서의 이해를 염두에 두는 종교적 통찰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세의 모든 조건은 내세의 가치와의 연관성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무함마드의 지적처럼,
현세의 이해는 내세에서의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칼리프위는 무함마드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를 보호하면서 현세에서의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사실
상 그를 대리한 것이다.
앞에서 칼리프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설명했다. 무함마드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를 보존하고 현세에서 정치적
지도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칼리프는 그를 대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위는 ‘칼리프위’ 혹은 ‘이맘위’라고 불리며, 그것을 주관하는 사람은 ‘칼리프’ 혹은 ‘이맘’이라고 한다.
사회조직은 상치되는 목적의 충돌로 인해서 의견대립이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억제력을 발휘하는 군주가
없다면 그와 같은 대립은 분란을 야기시키고 결국 인류의 파괴와 파멸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류의 보존이야 말로 종교법의 필연적인 목적의 하나이다.
종교법은 왕권 그 자체를 규제하지도, 그것을 완전히 묵살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또한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의 욕망과 분노를 규제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특성들을 완전히 금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 특성들이 적절히 사용되기를 희망할 뿐이
다.
이맘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네 가지 조건이 있다.
지식, 성실, 능력, 그리고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줄 만한 어떠한 결함도 없는 감각과 지체의 온전함이 그것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점은 무함마드가 현세의 모든 것들은 우리를 내세로 인도해주는 운반수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운반수단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무함마드는 우리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완전히 무시하라거나
아니면 철저히 제거하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또한 그런 행동이 파생시키는 힘을 전혀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
었다.
그는 그와 같은 힘이 가능하면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의도가 궁극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수렴되고, 인간의 모든 행위가 동일한 지향을 가지게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욕망을 억제하라고 했을 때에도 그것은 욕망을 완전히 제거 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서 강렬한 욕망을 완전히 제거 한다면 그는 장애인이나 열등인이 되고 말 것이다.
욕망이 대중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서 용인될 수 있는 목적에 사용됨으로써 인간이 신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적극적인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함마드의 참뜻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교법이 연대의식을 비판하며, “너희의 혈육도 자식도(최후의 심판의 날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을 때, 이는 이슬람 출현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연대의식이 가치 없는 목적에 이용되는 것
에 대한 경고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만심과 우월감을 가지게 하는 연대의식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한 태도는 영원의 세계, 즉 내세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무익한 것일 뿐
이다.
반면 신의 명령을 수행하고 진리를 위해서 봉사하는 연대의식은 바람직한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사라져 버린다면 , 종교법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종교법
은 오로지 연대의식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의식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알리와 무아위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들은 진리와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서 행동했다. 그들은 어떠한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았으며, 가치가 없는 것을 내세우거나 개인적
인 적개심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아마 이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이단자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차이를 만든 것은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각자의 독자적인 판단이었고, 양측이
상대방에 대해서 반대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비록 알 리가 옳았다고 하더라도, 무아위야의 의도가 사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진리를 원했지만, 놓친 것뿐이었다. 각자는 그 의도에 관한한 옳았다.
그러나 왕권의 본성은 한 사람이 모든 영광을 홀로 요구하고 차지하려는 것이다.
무아위아는 왕권의 이러한 본성을 자기 자신에게나 주위의 사람들에게 부인하지 않았다.
왕권이란 연대의식이 바로 그 자체의 본성의 결과물로 잉태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려고 했던 무아위아와 같지는 않았지만, 우마이야 일가나 그 추종자들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아위아 주위에 모여들었고, 그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려고 했다.
만약 무아위야가 그들의 행동의 지향점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거나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것의 붕괴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별다른 비판을 야기하지 않을 만한 행동의 지향점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보다 차라리
비판을 받더라도 그들을 결속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정부의 형태가 어떻게 왕조제로 바뀌어갔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왕조제의 시대에서도 칼리프제에 독특했던 측면들, 즉 이슬람과 그길에 대한 존중, 진리에 대한 추종등은
여전히 남아있다.
바뀌어진 것이라면 억제력을 발휘하던 것이 과거에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였으나, 이제는 연대의식과 칼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지나간 다음 무아위야 이후에 아랍인들의 연대의식은 그 최종적인 목적지인 왕권에 도달하게 되었다.
종교가 지니는 억제력은 악화되고, 대신 정부와 집단의 억제력이 필요해졌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연대의식을 발휘하는 집단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후계자로 임명될 경우, 그와 같은 임명
은 거부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임명된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는 신속하게 사라지고 공동체는 분열되고 반목으로 찢겨졌을 것이다.
후계자의 문제를 고찰할 때 우리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칼리프위와 왕권사이에 존재하는 그와 같은 차이를 고려
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가 바뀌면 그에 따라서 생기는 문제의 성격, 부족, 연대의식도 달라진다.
이런 방면에서의 차이들은 결국 공공의 이익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서로 상이한 공공의 이익은 그것에 맞는 특정한
법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군주권의 부자상속을 후계자 임명의 정당한 목적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계승이란 원하는 인물이 누구이건 그 사람을 드러내어 세우는 신의 뜻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
이다.
후계자를 지명할 때 가능한 한 선의로써 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적 제도와 상충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생활이 파탄을 맞을지라도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천사들이 도움을 주고 하늘의 계시가 그들 가운데 거듭
해서 나타나는 것을 보았으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신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낭송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대의식 이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굴종과 복종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놀라운 기적과 신기한 사건들 그리고 천사의 잦은
강림에 의해서 완전히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칼리프, 왕권, 계승, 연대의식 등등의 문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그와 같은 혼돈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러나 기적이 사라지고 그것을 자기눈으로 목도했던 세대들이 사라지면서 그 같은 상황도 끝나버렸다.
앞에서 말한 사람들의 성품도 조금씩 변해갔고, 기적이 남겼던 인상도 희미해지면서 일상적인 상황이 제자리를 잡아
갔다.
연대의식과 일상적 생활의 영향력이 발휘되면서 결과적으로 좋고 나쁜 제도들이 생겨났다.
칼리프제와 왕조제, 그리고 그 두 제도에서의 계승문제가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안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칼리프라는 것이 사실은 ‘입법자’(무함마드)의 대리인의 자격으로 종교를 수호하고 현세의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하
는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입법자’는 다음 두 가지에 모두 관여했다.
즉 하나는 대중에게 종교법이 부과하는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준하여 행동하도곡 하
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의 자격으로 행하는 종교적인 측면이고,
또 하나는 인류문명의 이익을 책임지는 사람의 자격으로 행하는 현실정치적인 측면이다.
종교법과 관련된 모든 종교적 직책 – 예를 들면 예배, 판관, 무프티, 성전, 시장감독관 등 – 은 대이맘 즉 칼리프의
관할하에 있다.
칼리프는 말하자면 거대한 근원이나 포괄적인 토대와 같은 것이어서, 모든 종류의 직책은 그 가지이며 그 아래에
포섭된다.
그 까닭은 칼리프위가 광범위한 관할성, 성속을 불문하고 무슬림 공동체의 모든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간여, 성속
양면에 걸쳐 종교법을 집행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배의 지도권과 그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에 관한 법규와 조건들은 이미 법학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초기의 칼리프들은 예배의 지도권을 타인에게 이양하지 않았다. 초기의 칼리프들은 예배의 지도권을 타인에게 이양
하지 않았다.
어떤 칼리프는 모스크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칼에 찔려 죽기도 했는데, 이는 암살자들이 예배시간에는 그가 반드시
그곳에 있을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며, 칼리프들이 예배를 몸소 지도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관습은 후일 우마이야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그들은 예배를 지도하는 것이 양도할 수 없는 특권이자 고위
직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부 무사를 임명할 때 그는 판관의 직무에 관한 모든 규정들, 특히 가장 기본이 되는 규정들을 기록한 편지를 한 통
썼다. 그 편지속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판관이라는 직책은 종교적으로 분명히 규정된 책무이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제도이다.
그대에게 제출된 진술서들을 이해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유효하지도 않은 탄원을 고려하는 것은 무관한 일이기 때문
이다. 그대의 법정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라 그래서 귀족들로 하여금 그대
가 편파적일 것으로 기대하지 않도록 하고, 평민들도 그대로 인해서 불의를 당하지 않도록 하라.
원고는 반드시 증거를 제시해야 하며, 피고로 부터는 서약을 받아내야 한다. 무슬림들끼리 합의를 하는 것은 가능하
지만 , 그 합의는 금지된 어떤 사항을 용인하는 것이나 혹은 허용된 어떤 사항을 그지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대가 어제(잘못된) 판결을 내렸으나, 오늘 제고한 결과 올바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을 경우, 첫 번째 판결을 철회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라. 왜냐하면 정의가 가장 우선적인 것이고
가치 없는 것을 고집하기 보다는 철회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코란]이나 순나를 적용하기 어려워 그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대의 두뇌를 활용하라.
유사한 사건들에 관해서 연구하고 유추를 통해서 상황을 판단하도록 하라. 어떤 사람이 증명 여부가 불확실한 문제를
가지고 고소했을 때, 그에게 일정한 시간을 주도록 하라.
만약 그가 기한안에 증거를 제출한다면 그대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에게 반대
되는 결정을 내려도 좋다.
이것이 의심의 여지를 없애는 보다 나은 방법이다.
무슬림이라면 누구라도 증인으로 채택되어도 좋으나, 다만 위증을 범했거나 혹은 주종관계나 친족관계로 인해 (편파
적인 증언을 했다는) 의심을 받는 사람은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신께서는 서약을 한 뒤에 행하는 증언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처벌을 연기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소송인들에 대해서 피곤하거나 짜증스러움을 보이지 않도록 하라. 정의의 법정에서 정의를 확립하는 일에 대해서 신
께서는 그대에게 공부한 보상과 좋은 명성을 부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칼리프위의 성격과 양상이 변하고 왕권과 정부권력이 그것을 대체하면서 종교적인 직무는 권력과의 연관성을 상당히
상실하게 되었고, 그 직책도 왕권을 상징하는 칭호나 영예와 점차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다.
후일 아랍인들은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투르크인이나 베르베르족이 그것을 장악했다.
칼리제에도 존재하는 직책들도 전임자들의 경우와 비교할 때 그 성격이나 연대의식 이라는 면에서 더욱 더 권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가 초래된 까닭은 아랍인들의 눈에는 종교법이 그들의 종교에 기반을 둔 것이고 예언자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제정한 종교법은 그들의 신앙이요, 행동이므로 다른 민족들의 것과 다르다고 생각한 데에
반해, 비아랍인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결정권은 그 결정을 강제할 수 있는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일 뿐, 그런 힘이 없는 사람이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종교법에 관해서만 권위를 지니며 적어도 그들이 법적인 결정은 받아들여 진다.
연대의식을 지니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사무에 대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 또한 자신을 방어할 수 없
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 회의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들의 조언이 경청되어야 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종교법에 관한 지식에서 도출된 그들의 조언은 법률적 결정에 관해서 자문을 구할 때만 비로소 고려의 대상이 된다.
정치에 관해서 조언하는 것은 그들의 영역이 아니며, 이는 그들이 하등의 연대의식을 가지 못하고 연대의식을 지배
하는 조건과 법칙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슬림 공동체에게 성전은 종교적 의무이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포교는 보편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사항이고, 또 모든 사람은 반드시 설득이나 강제에 의해서 이
슬람으로 개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리프의 지위와 군주의 지위는 이슬람 안에서 통합되어, 그 지위를 담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그 두
가지에 모두 동시에 쏟을수 있게 된다.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집단들은 보편적인 포교의 의무가 없고, 따라서 방어를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전도 그들
의 종교적 의무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서 종교적 사무를 관장하는 사람은 정치권력과 전혀 무관하다.
그들의 경우, 왕권은 어떤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 종교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그것을 장악한 사람의 수중으로 들어
간다.
즉 왕권은 연대의식 –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것은 본질상 왕권의 장악을 추구한다. - 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지,
이슬람의 경우처럼 다른 민족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해야 할 의무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 민족 내부에 종교를 확립하는 정도의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400년 동안 왕권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기들의 종교를 확립하는 것이였다.
그뒤 알렉산드로스와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를 무너뜨렸고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지배하게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약해지자 유태인은 자기들 고유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저항하여 일어나서 그 속박
에서 벗어났다. 유태인들의 왕권은 하스몬 가문의 사제들에게 위임뒤었다.
하스몬 가문은 그리스인들과 싸워 마침내 그들을 무너뜨렸지만, 로마인들이 다시 그들을 패배시켜 유태인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하스몬 왕조의 최후의 후예들의 근거지이자, 하스몬가문과 혼인으로 맺어진 헤롯왕의 후손들이 살고있
던 예루살렘을 향해진격했다.
그들은 한동안 그곳을 포위한 끝에 마침내 힘으로 밀고 들어가서 피비닌내 나는 살육과 파괴와 방화와 함께 예루살
렘을 정복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황폐화 했고 유태인들을 로마나 그보다 더 먼 곳으로 추방했다.
이것이 제2차 성전파괴이며 이를 대유수(大幽囚)라고 부른다.
그뒤 그들은 왕권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연대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인과 그 후계자들의 지배를 받았고, 그들의 종교적인 사무는 코헨이라고 불리는 사제가 돌보았다.
사도들은 여러 무리로 나누어졌다. 대부분은 로마인들의 고장으로 가서 기독교를 전파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은 베드로였다.
그는 황제의 수도인 로마에 정착했다. 사도들은 예수에게 계시된 복음을 기록했는데, 서른 다른 전승에 의거하여
네 종류가 생겨났다.
마태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서을 썼는데, 세베대의 아들인 사도 요한이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누가는 로마의 어떤 귀족을 위해서 복음서를 썼고,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로마에서 복음서를 썼다.
베드로는 라틴어로 복음서를 썼는데 제가인 마가의 이름으로 했다.
이 네 종류의 복음서는 서로 다르다. 그것들 모두 오로지 계시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말과 사도들의 말이
섞여 있으며, 주로 설교와 일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법에 관한 것은 매우 적다.
기독교의 지도자이자 종교적 제도들을 관장하는 사람을 총주교라고 부른다.
그는 종교적 수장이자 동시에 메시아의 대리인이다. 그는 자신의 특사와 대리인을 먼 곳에 사는 기독교들에게 파견
했는데, 이들은 주교라고 불렀으며 총주교의 대리인을 뜻한다.
기도를 주관하고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을 사제라고 부르며, 세속에서 물러나 신앙을 위해서
은거하는 사람을 수도사라고 부른다. 수도사는 흔히 수도원의 승방에 은거한다.
전도사 마가는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마드리브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7년간을 보냈다. 그의 뒤로는 총주교라고
불린 아니니아스였고, 그가 그곳의 초대 총주교 였다.
그는 자기와 함께 할 12명의 사제들을 임명했고, 총주교가 사망하면 12명의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잇고
평신도 가운데 한 사람이 12번째 사제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총주교직은 사제들에게 귀속되었다.
후일 종교의 기원적 원칙 및 조항들에 관해서 기독교도들 사이에 내분이 벌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대에 그들은 기독교의 진정한 교의를 확정하기 위해서 니케아에 모였다.
318명 주교들은 기독교의 유일한 교의에 합의했고, 그것을 문서로 남겨(니케아) 신경(creed)이라고 불렀으며, 모두
가 준거해야할 근본적인 원칙으로 삼았다.
총주교는 주교를 항상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주교는 총주교를 일컬어 아버지(Father)라고 불르며 존경을 표시했다.
사제들도 총주교가 동석하지 않았을 때에는 주교를 아버지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호칭의 혼란을 낳았는데, 마침내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 헤라클리우스 시대에 와서 총주교
는 ‘아버지들 중의 아버지’란 의미에서 교황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뒤 기독교도 사이에서 자신들의 교리와 기독론과 관련하여 분열이 일어났다.
그들은 몇몇 집단으로 나누어져, 다양한 기독교 군주들의 지원을 얻은 뒤 서로 대립했다.
마침내 이 집단들은 크게 셋으로 정리되어 중요한 교파의 성립을 보게 되었고, 나머지 교파들은 별 중요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들은 멜키스트파, 야곱파, 네스토리우스파인테, 이 불신자들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책의 페이지를 할애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들 교파는 대체로 잘 알려져 있고 모두 다 불신자들이며, 이 점은 성스러운 [코란]에 분명히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며, 이슬람으로 개종하느냐, 인두세를
내느냐, 아니면 죽음을 택하느냐 그들의 선택일 따름이다.
군주란 개인으로서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고 과중한 업무를 안고 있기 때문에, 동료들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신께서 그에게 백성으로 위탁하신 인간들, 즉 그와 동일한 종에 속하는 인간들에게 대해서 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들도 필요하다.
또한 그는 정치권력을 행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복종하도록 함으로써, 영광을 소유하는 자는
백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군주 한 사람뿐이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사람들을 장악하는 비상한 조치를 필요로 한다. 한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서 있는 산을 움직이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를 움직이는 것보다 더 수월하다.”
징세와 관련된 직책은 왕조의 권력과 지배력이 확고히 자리잡았을 때, 또는 왕권이 보여주는 다양한 면모와 효율적
행적에 대한 왕조측의 관심이 분명해졌을 때 생기는 것이다.
우마르에게 디완을 소개한 사람이 알 후르무잔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원정군이 디완(즉 군적부)도 없이 파견되는 것을 보고 우마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병사들 가운데) 누
가 없어진다고 해도, 누가 그것을 알수있겠습니까?
후방에 머무는 사람들이 임지를 이탈하고 병사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돈을 가지고 도망칠 우려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항들을 정확하게 장부에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이 직책은 왕권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사실 그것은 왕권을 지탱하는 세 가지 기둥들 가운데 하나이다.
왕군은 군대, 재화 그리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의 통신수단이 필요하다.
따라서 군주는 ‘칼’과 ‘펜’과 재정에 관한 업무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며, 징세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왕권의 중요
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
군주가 각종 계층에서 서기를 선발 임용할 때 고려해야 할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다.
그것은 서기 압둘 하미드가 동료 서기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서한]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신께서 서기직을 수행하는 그대들을 보호하시고, 그대들에게 성공과 보살핌을 베푸시기를 기원합니다....중략
지세 장부를 작성할 때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회계를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고상하건 저급하건 모든
편견을 멀리하고, 나태하고 비열한 모든 것을 거부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야말로 수치스러운 것이고 서기직
을 망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의 기술을 낫다고 생각하지 말고, 험담과 비난 그리고 우둔한 자들의 행동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십시오.
오만과 우둔과 자만을 경계하십시오. 그것은 아무 이유도 없이 적대감만 불러일으킵니다.
신에게 의지하고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며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공정함과 재능과 덕성을 갖추었던 선배들처럼
행동하라고 그대의 동료들에게 충고하십시오....중략
만약 업무를 처리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칭찬을 해온다면 그 공을 동료들에게 돌리고, 누군가가 비난을 한다면, 그
허물은 자신이 지도록하십시오.
또한 실수를 범하거나 어떤 일을 간과할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상황이 바뀌면 전전긍긍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대들은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을 망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사고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 서한에서 나는 “충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성공한다.”는 오랜격언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편지에서 신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빼놓고는, 가장 중요한 요체이며 최상의 것입니다.
‘칼’과 ‘펜’은 둘 모두 군주가 국사를 처리할 때에 활용되는 도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력을 확립하는 일에 몰두하는 왕조의 초창기에는 ‘칼’에 대한 필요성이 ‘펜’에 대한 필요성 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펜’은 단지 군주의 권위를 위해서 봉사하는 하인이자 심부름꾼에 불과하지만, ‘칼’은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힘이다.
왕조의 중기에는 어느 정도 ‘칼’을 멀리할 수 있다.
그의 권력은 확고하게 자리잡고, 그의 희망이라고는 세금을 걷고 계산을 유지하며 다른 왕조들을 압도하고 법을 집
행하는 것과 같이 오로지 왕권이 가져다 주는 과실을 향유할 일뿐이다.
펜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되며, 따라서 그것을 활용할 필요성은 더더욱 커진다.
위급한 일이 생겨 그 처방을 위해서 부름을 받지 않는 한 칼은 칼집안에 머룰며 사용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펜을 쥔 사람들이 더 높은 권위를 누리며 고위직을 차지한다.
그들은 더 많은 혜택과 부를 누리고 군주와 보다 더 빈번하고 긴밀한 접촉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재상이나 군부 인사들은 없어도 괜찮은 존재가 되고, 군주의 최측근 그룹에서 밀려나 그의 눈치나 살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무슬림은 이슬람 초기 시대부터 북을 치거나 나팔을 부는 것을 꺼려해왔다.
그들은 왕권의 거친 표현을 싫어했고 제왕적 관습을 없애고자 했으며,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위세를 경멸했다.
설교단은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이집트에 모스크를 건축할 때 처음 도입했다.
칼리프 우마르 이븐 알 하탑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 그대가 설교단을 만들어 자신을 다른 무슬림보다 머리 하나
더 높이 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그대에게는 족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래서 그대에게 권하노니 그것을 남김없이 부셔버리라!”라고 했다고 한다.
왕조의 창건자들은 왕조체제가 아직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어 거칠고 무관심한 태도를 가지고 있을 때, 이와 같은
제도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많았다.
그들은 무슬림들에 관한 일을 책임지며 돌보는 사람이라고 익명으로 간략히 언급되는 정도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안목이 열리면서 왕권이 지닌 모든 측면들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정주 문화의 세밀한 부분들
과 위세, 과시를 표현하는 관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자, 왕권을 표현하는 온갖 외적 치장들을 채용했고 그와 관련
된 모든 방도를 강구했다.
그들은 다른 어느 누가 자신과 왕권을 나타내는 표지들을 공유한다는 것을 싫어했고, 왕조가 그건 것들을 상실하여
그것이 주는 효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했던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반적으로 외적인 요인보다는 내적인 요인의 결과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내적인 요인의 결과로 생긴 기회를 우리는 ‘행운’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바로 이것이 소수의 인원만이 휘하에 있던
무함마드가 생전에 다신교도들에 대해서 승리를 거둘수 있었던 것이나, 적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공포심이야말로
무슬림 정복기간 중에 거두었던 수많은 승리의 원인이며, 이것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요소이다.
이슬람 왕조는 이슬람의 정신에 따라서 구휼세,지세,인두세와 같이 종교법에 규정된 세금만을 부과한다.
이러한 세목은 어느 한도 이상을 넘을 수 없도록 확정한 상한이 있다.
낮은 세금은 만족을 주고 이는 다시 생산활동을 증대시킨다. 생산활동이 증대되면 개인에 대한 부과액과 할당액은
증가하게 되고, 그 결과 징세 총액은 증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관습과 수요는 점점 더 다양해 지는데, 이는 그들이 탐닉하는 번영과 사치 때문이다.
그 결과 백성, 경작자, 농민, 기타 모든 담세자들에 대한 부과액과 할당액이 증가하게 된다.
부과액의 점진적인 증가는 꼬리를 물고 계속되며, 이는 사치습관의 만연과 왕조의 다양한 수요, 그리고 이와 관련하
여 요구되는 지출의 증가에 상응한다. 마침내 세금은 백성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를 넘게된다.
무거운 세금은 의무이자 전통이 되어버리는데, 그 까닭은 그와 같은 증가가 점진적으로 발생할 뿐만 아니라 누가
그것을 증가 시켰는지 누가 징수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백성들 위에 마치 의무와 전통처럼 짐지워지는 것이다.
부과액이 평형의 한계를 넘어 증가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생산활동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의 소멸로 나타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개인에 대한 부과액과 과세액은 마침내 그 한계에 봉착하고, 더 이상 그것을 증대시키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제 모든 생산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는 너무 높고 세금도 지나치게 무거워져서, 예상되는 이익
을 실현시킬 수 없다.
결국 생산활동을 유도하는 동기가 사라지면서 문명은 파괴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왕조일 수밖에 없으니, 그 까닭은 생산활동의 수혜자가 바로 왕조이기 때문
이다.
왕조 후기가 되면 세금은 과도하게 된다.
따라서 이익을 거둘 희망이 깨어지면서 상거래는 쇠퇴하고, 이는 문명의 해체를 낳고 왕조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왕조가 해체될 때 까지 점점 더 악화되어간다.
군주가 행하는 교역은 문명을 파괴하고 왕조를 해체할 수도 있다.
백성들이 농업이나 상업을 통해서 더 이상 자신의 자본을 증가시키지 못하게 될 때, 자본은 감소되고 비용의 지출로
말미암아 마침내 탕진되고 말것이니, 이는 상황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
페르시아인들은 왕가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왕위에 앉히지 않았다.
아나가서 그들은 덕, 신앙, 교육, 관용, 용기, 고귀함 등의 자질을 소유한 사람을 선출했다.
또한 왕이 공정해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로 명시했고,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게 하려고 농경지조차 소유하지 못
하도록 했다.
그는 교역에 종사해서도 안 되었는데, 만약 그렇게 한다면 모든 상품의 가격이 반드시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또한 노예를 하인으로 부리지도 못하게 했는데, 이는 그들이 유익하고 좋은 충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라안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아미르와 같은 사람들은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여, 마침내 자기가 만족할 만한 가격에
농산품과 상품을 매입하는 단계에 도달하게된다.
그뒤에 그들은 예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시점에 자신들이 정한 가격에 그것들을 되판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군주가 개입하는 것보다 백성들에게는 훨씬 더 위험하고 유해하며 파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군주와 함께 일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할 뿐이고, 지세나 상세를 지불하지 않고 교역을 함으로
써 가능한 한 단기간에 돈을 축척하려고 한다.
따라서 군주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며, 그의 조세수입과 통치를 해롭게 하는 건의에 귀를 기울여서도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이 생계를 위한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그리고 이윤을 창출하는 모든 활동을 중지할 때, 문명의 활동은
침체에 빠지고 모든 것은 쇠퇴해버린다.
사람들은 생존수당을 찾으려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현 정부의 관할범위 바깥으로 나간다. 따라서 그 지역의 인구는
희소해지고 거주지는 텅 비게되며, 도시는 황폐해진다. 이와 같은 붕괴는 왕조와 군주의 지위를 붕괴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위가 문명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고, 그 형상은 질료(즉 문명)가 쇠퇴되면 반드시 쇠퇴하기 때문
이다.
경작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은 정의입니다. 정의는 인류사이에 세워진 천칭입니다.
신께서는 그 천칭을 세우시고 감독자를 두셨으니, 그가 바로 군주입니다.
오 왕이시여! 전하는 농경지를 뒤져서 그 주인과 경자들로부터 그것을 빼앗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지세를 내는 사람들이며 전하는 그들로부터 재화를 거두어 드립니다. 전하는 그들의 농토를 측근과
가신과 건달들에게 봉토로 주어버렸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경작하지도 않거니와 그 결과에 대해서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가 검토했듯이 불의는 문명을 황폐화 시킴으로써 인류의 파멸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금지되어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따라서 불의를 금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불의가 누구나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형벌의 목록은 간통, 살인, 술중독처럼 모든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를 비롯하여 인류
를 파멸로 이끄는 온갖 종류의 범죄들의 목록만큼이나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불의는 오로지 남이 저지할 수 없는 사람. 즉 권력과 권위를 사람들에 의해서만 저질러진다.
따라서 불의에 대해서 강도높게 비난하고 그 위험성을 거듭해서 지적하여 위협하는 것은 불의를 행할 만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 스스로 지배력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다.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 자신의 생계수단을 확보하고 그런 행위를 통해서 이윤을 얻는다.
만약 그들이 자기 토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도록 강요되고 자신의 생계와는 무관한 일로 강제노역에 동원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이윤도 얻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가장 큰 자산인 노동의 대가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들은 고통받게 되고, 생계의 대부분 아니 전부가 날아가 버린다.
만약 이런 일이 거듭해서 일어난다면, 토지를 경작할 모든 의욕은 파괴되고 일체의 노력은 중지될 것이다.
이것은 문명의 파괴와 황폐화를 초래한다.
왕조의 노쇠가 보여주는 최초의 결과는 왕조의 분열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왕권이 확립되고 최고의 사치와 번영을 이룩했을 때, 군주가 모든 영광을 장악하고 스스로
독차지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런 것들을 어느 누구와도 나누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자부심이 크다.
그는 옥좌를 두고 자신과 경쟁할지도 모를 일족이나 기타 수상한 사람들을 파멸시켜버림으로써 가능한 한 그와 같은
도전을 모두 제거한다.
따라서 지배자와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여 영내에서 아주 먼곳으로 피신한다.
그러면 그들과 똑같은 처지에 있음으로써 의심을 받고 위험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들과 연합하면서 그 주위에 모이
게 된다.
이때쯤 되면 왕조의 권력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영토의 먼 곳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된다.
도피자의 세력은 계속해서 커지는 반면 왕조의 권력은 약화되며, 마침내 그들은 왕조 안에서 대등한, 아니면 거의
대등한 상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랍인의 왕조는 셋으로 나누어졌다.
압바스조는 아랍세계의 근거지 이자 이슬람의 원천인 중아에, 우마이야 왕조는 동방에서의 과거의 칼리프의 권위
를 재생시켜 스페인에, 파티마 왕조는 이프리키야,이집트,시리아,히자즈 지방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노쇠는 무엇인가 자연적인 것이며 자연적인 것은 변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치유될 수도 또 제거할 수도 없는
고질적인 질환이다.
왕조말기에는 때때로 마치 왕조의 노쇠함이 사라져버린 듯한 인상을 주는 힘의 시위가 나타나기도한다.
그것은 마치 꺼지기 직전에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의 심지와 같아서, 겉으로는 새로 타오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꺼저가는 것이고 소멸하기 전의 마지막 작열에 불과하다.
여하한 왕권도 구 가지 기초위에 세워져야만 한다. 하나는 무력과 연대의식이며 , 그것의 표현은 군대이다.
또 하나는 자금인데, 이것이 군대를 지원하고 왕권이 필요로 하는 전체 구조를 제공한다.
왕조는 이제 더 이상 연대의식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의 영혼이 오랜 세월 동안 굴종과 복속에
물들어 생존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왕조의 시작과 기원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주에게 공손하게 복속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군주도 연대의식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게되고, 자기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면
충분했다.
왕조가 노쇠와 파멸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할 때 신왕조이 흥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왕조가 멀리 떨어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 총독들이 지배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는 또 다른 방식은 이웃 민족이나 부족들 가운데 일부반란 지도자가 왕조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보통 가상의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 물론 병력의 수, 무기, 적절한 전술 등이
승리를 보장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것들은 심리적 요인에 비해 덜 효과적이다.
계략은 전투에서 활용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고, 승리를 가져오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다.
널리 받아들여진 관습으로 인해서 현왕조에 대한 복종은 불가피하며 의무이기도하다.
이것은 신왕조의 창건자를 여러 가지로 방해하며, 그의 추종자와 지원자들의 용기를 꺾는다. 그와 가장 가까운 측근
들은 혼신을 다해 그를 따르며 도우려고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현왕조에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에
영향을 받아 약해지고 임무를 소홀히 하며 의욕은 감소된다.
따라서 신왕조의 창건자가 현왕조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현왕조의 노쇠가 분명해질 때
까지 인내할 수밖에 없다.
무슬림의 정복전은 이상의 주장에 대한 반대 논거가 될 수 없다.
무슬림들은 예언자가 사망한 뒤 3-4년 만에 페르시아와 비잔틴에 대해서 우위를 점했고, 거기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예언자가 행한 기적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비밀은 올바른 종교적 통찰력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적과의 성전에서 기꺼이 목숨을 던지려고 했던 무슬림들의
열정에 있고, 또 신께서 적들의 마음 속에 불어넣어주신 공포와 패배주의에 있다.
이 모든 기적같은 일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신왕조와 현왕조 사이에 벌어지는 길고긴 기다림의 대결과 상치된다.
이슬람에서 이와 같은 기적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기적들은 통상적인 사건에 대한 유추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을 반대하는 논거가 될 수 없다.
이미 앞에서 사회조직은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지적했다.
우리가 말하는 ‘문명’이 의미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사회조직에서도 억제력을 발휘하고 자신들을
지배하며 의존할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런 인물에 의한 지배는 때로 신에 의해서 계시된 종교법에 바탕
을 둔 것일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사람들은 내세에서의 보상과 형벌을 믿기 때문에 그런 지배에 순종한다.
때로는 그런 인물의 지배가 현실정치에 바탕을 둔것일 수 있는데, 사람들이 군주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지시하는
행동을 순순히 따르는 것은 군주로부터 받으리라고 예상하는 보상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세 군데, 즉 메카,메디나,예루살렘의 모스크이다. 메카는 아브라함의 집
이고, 신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지으라고 명령했으며 사람들에게는 그곳으로 순례를 가라고 권유하셨다.
예루살렘은 다윗과 솔로몬의 집이다.
신께서는 그들에게 그곳에 성전을 건설하고 기념물을 세우라고 명령하셨다.
이삭의 후손들중 많은 예언자들이 그 주위에 묻혔다. 메디나는 우리의 예언자가 신의 명령에 따라서 이주하여 이슬람
에라는 종교를 세운 곳이며, 그는 메디나에 성스러운 모스크와 자신이 묻힐 묘소를 지었다.
비아랍인들 사이에서 순수하고 폐쇄적인 혈통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며 보존하려는 경우는 극히 드
물다. 전야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통의 혈통을 가졌는데, 그 까닭은 긴밀한 공통의 혈통이야말로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더 강력하고 긴밀한 유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의 혈통에 수반되는 연대의식도 강력하다.
나아가서 이슬람 출현 이전에 아랍인들은 후일 정복하게 된 지역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들이 그곳을 통치하게 되었지만, 도회문화의 모든 제도들이 완전히 발달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못했다.
또한 아랍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 건축해놓았던 건물들 만으로도 만족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는 지나치게 건축에 몰두하여 별다른 목적도 없이 건물을 짓는데에 돈을 낭비하는 것을
금지했다.
노동의 결합은 노동자들의 필요보다 더 많은 생산물을 낳는다.
이윤은 노동에 의해서 실현된 가치이다. 원초적 노동이 생활필수품의 획득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체의 잉여노동은 사치와 재화를 위해서 봉사한다.
다른 도시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는 증대된 이윤과 번영, 혹은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치의 풍습을
통해서도 다른 도시에 대해서 우위를 가지게 된다.
한 도시의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주민의 생활은 그만큼 더 사치스러워진다.
풍요한 문명의 도시에서는 기술과 노동도 고가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인구가 사는 도시에서는 사치가 극도로 증대되어 그런 것들에 대한 수요
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둘째, 도시에서는 식량이 풍부하여 편안하게 살수도 있으므로 사람들은 일을 안 해도 되고 따라서 근로자들은 자신
의 노동에 높은 가격을 매기기 때문이다. 셋째, 돈이 있어 쓰려고 하는 사람들의 수는 많고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도 많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다수의 노동자와 그들의 기술을 이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노동에 통상적으로 매겨지는 가치 이상의 대가를 노동자에게 지불하는데, 이는 노동력을 얻으려는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제한 채 자신이 그것을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기술자,전문인들은 오만해지고, 그들의 노동은 고가가 되며, 그런 것을 확보하기 위한 도시 주민의
지출은 증대된다.
반면 유목민들은 이윤이 원천이 되는 노동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는 지역에 살기 때문에 수입도 많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하한 이윤이나 재산도 축적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편의품이 매우 비싸고 구매해야 할 물건
들의 가격이 매우 높은 대도시에 그들이 정주하기는 어렵다.
사치에 물들지 않는 그들은 황야에서 최소한의 노동만으로도 자신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있다.
왕조의 강약,민족이나 종족 인구의 다과, 도시규모의 대소, 번영과 재화의 대소 등은 서로 모두 연관된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왕조와 왕권은 세계와 문명의 형상이지만, 반면 백성과 도시와 기타 많은 것
들은 왕조와 왕권의 질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세금으로 거두어진 돈은 백성들에게 환원되고, 그들의 재화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거래나 상업활동을 통해서축적
된다.
만약 군주가 백성들에게 증여물과 금전을 쏟아 부으면, 그것은 그들 사이에서 유통되다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고,
그것은 다시 그에게서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재화는 세금과 지세를 통해서 백성들로부터 걷히고, 증여물의 형태로
백성들에게 환원된다.
백성들의 재화는 왕조의 재정에 상응하고, 왕조의 재정은 백성의 숫자와 재화에 상응한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이 문명이자 그 문명이 지니는 규모이다. 만약 왕조에 관해서 이러한 점들을 고찰한 다면,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정교함이 정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욕망에의 추종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런 모든 관습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종교와 세속적 영화를 해치는 여러 가지 낙인을 받게된다.
이제는 버리기 힘든 관습에 깊이 물들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를 온전히 보존하기 어렵고, 수입만으로는 감당
하기 힘든 온갖 물품에 대한 수요로 인해서 세속적인 영화도 보장받기 어렵게 된다.
상업은 이윤을 창출하는 자연적인 방식의 하나이다.
그러나 상업을 행하는 방법과 실제는 교묘하며 구입가와 판매가 사이의 잉여 차액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잉여가 이윤획득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상업은 도박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고, 법률도 상업의 경우에는
계략을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타인의 재산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작정 빼앗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한 가지 남은 선택은 다른 두 종류의 하인, 즉 신뢰는 가지만 능력이 없거나, 신뢰할 수는 없어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 두 부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은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라진다.
그런 주장에는 각자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만, 믿기는 어려워도 능력이 있는 하인이 더 낫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손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점은 확신할 수 있으며, 그가 사기를 치는 것에 대해서는 최대한 경계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믿을만 하다고 하더라도, 손해를 끼치는 하인은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
그가 끼치는 손해를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하인을 찾을 때 분명히 인식해둘 필요
가 있다.
질병의 근원은 음식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무함마드가 의학에 관해서 말했던 포괄적인 말이 의사들 사이에 전승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종교학자들은 그것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즉 “위장은 질병의 고향이고, 식이요법은 가장 중요한 약이다.
모든 질병의 근원은 소화불량에 있다.”는말을 그가 했다는 것이다. ‘위장이 질병의 고향이다.’라는 진술은 명백하다.
그러나 ‘식이요법은 가장 중요한 약이다’라는 진술에서 ‘식이요법’은 ‘굶는 것’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굶는 것’은 음식을 멀히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굶는 것이 가장 훌륭한 약이고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모든 질병의 근원은 소화불량에 있다.’
는 구절에서 ‘소화불량’이란 위장 속에 있는 음식이 채 소화되기도 전에 새로운 음식이 첨가된다는 의미로 이해되
어야 할 것이다.
제6장 다양한 학문분야, 교육방법, 이와 관련된 사항들
인간의 사고능력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고 생계를 획득하게 하며, 이를 위해서 동료들과 협동케하고, 숭배의 대상
인 조물주와 그가 보낸 사도들을 통해서 계시된 내용을 탐구케 한다.
신은 모든 동물이 인간에게 복종하고 그 지배를 받도록 했으며, 인간에게 사고의 능력을 주고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신은 인간에게 사고능력을 부여하여 다른 모든 동물들과 구별되도록 하셨다.
사고력은 신께서 인간을 완전한 존재로 만든 그 시작이자, 동시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고귀한 지배권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그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각 – 어떤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사람이 지니는 의식 – 은 생물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생물은 신이 부여한 외적인 감각, 특히 청각,시각,후각,미각,촉각 등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획득한다.
사고력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는 외부세계에 자연적,임의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인간이 이성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런 사물들을
자신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배열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대부분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생계에 유용한 것을 취하고 새로운 것은 거부하는 ‘분별적 지성’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단계는 인간에게 자기 동료를 상대하고 지휘하는 데에 필요한 생각과 행동을 부여하는 사고력이다.
이것은 대부분 ‘확인’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데, 그것이 진정으로 유용하게 되려면 경험을 통해서 하나씩 획득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경험적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아무런 실질적인 활동이 없이도 감각계 너머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 혹은 가설적 지식을 부여
하는 사고력이다. 이것이 바로 ‘사유적 지성’이다. 이것은 감각과 확인을 모두 포괄하며, 그런 것들이 특별한 조건에
따라서 특별한 순서에 의해서 배열됨으로써, 감각이건 확인이건 인식 대상들이 동일한 종류일지라도 구별된 지식
을 가지게 해준다.
그뒤 그것들은 또 다른 어떤 것과 결합되어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해준다.
이러한 과정의 최종점에서 인간은 다양한 종류, 차이 ,이유, 원인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진실성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순수한 지성과 지각적 영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적 진실성이 의미하는 바이다.
사고력은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별시키는 고유한 자질이다.
한 인간이 어느 정도로 질서있는 인과관계를 수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의 인간성의 정도를 결정한다.
어떤 사람은 둘 혹은 세 단계의 인과관계만을 세울 수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넘어서 다섯 혹은 여섯 단계로
나아가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인간성은 더 높은 단계에 있다.
자신의 전인생을 통해서 이러한 과정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문제들을 잘 알게된다.
경험에 의존하는 것들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신은 사람들이 조상, 스승, 장로들의 경험을 따르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배우기만 한다면, 오로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그러한 사회적 지식을 얻는데에 소요되는 시간
보다 더 짧은 시간안에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건들을 스스로 장기간에 걸쳐 연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관념들을 도출하려고 시도하지 않아도
괜찮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방면에 아무런 지식도 전승도 가지지 않은 사람,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장기적이고 세밀한 연구를 통해서 스스로를 교육시키지 않
으면 안 된다.
“부모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시간의 교육을 받을 것이다.”라고 유명한 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모 – 교사와 장로들을 포함하여 – 로부터 다른 사람을 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배우는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간이 그를 가르치고 교육시키게 된다. 그는 본질적으로 타인의 협력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교육은 필수적이다.
천사의 본질은 그 세계의 본질과 동일한 종류로서 육체성과 물질성에서 자유롭고, 사유와 사유자와 사유대상이
하나인 순수사유이다. 어떤 면에서 지각과 이성을 실체로 가진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특정한 기술은 분명히 전체 기술들의 배열속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가지고, 정신에 대해서는 영향을 미치며
부가적인 지식을 획득하도록 유도하고, 나아가서 또 다른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신을 준비시킨다.
이렇게 해서 이성은 지식의 신속한 수용을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
법학은 책임있는 모든 무슬림들의 행동을 의무적인 것, 금지되는 것, 권장되는 것, 기피할 것, 용인되는 것, 등으로
분류하는 신의 종교법에 관한 지식이다.
이런것들은 [코란]과 순나에서 그리고 무함마드가 확립한 근거들로부터 도출되며 이러한 근거들에서 도출된 규정
들을 법학이라고 부른다.
많은 경우. 특히 법적인 개념과 관련해서, 단어들 속에 내재된 의미에 관해서 상이한 견해들이 제기되었음은 잘 알
려진 사실이다.
나아가서 전승도 교정본들의 신뢰성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 법적인 내용은 상충되고 따라서 어느것을 따르느냐 하는 결정이 요구되며, 이것이 견해의 차이를 낳
았다. 뿐만 아니라 원전에서 도출되지 않은 근거들은 견해의 차이를 더욱 심화시킨다. 게다가 원전의 내용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는데, 이런 것들은 원전에서 언급된 것을 근거로 유추함으로써 처리된다.
이러한 상황은 불가피하게 견해 차이를 불러왔고, 초기 무슬림들과 그 후에 나타난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게 된 까닭이 되었다.
더구나 무함마드의 교우들이라고 모두 법적인 결정을 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모두 다 종교적인
실천의 근거가 될 만한 것도 아니였다. 그렇게 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은 [코란]을 잘 알고 거기에 나오는 ‘취소하는
구절’과 ‘취소되는 구절’, 애매한 구절과 명백한 구절들을 숙지하고 있으며, [코란]에서 도출된 다른 모든 증거들을
잘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언자로부터 직접적으로 혹은 그에게서 배운 고위 교우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讀經師’, 즉 [코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당시 아랍인들은 문맹 민족이었고, 그들이 글을 읽을수 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법학파들은 종교법에 대해서 두 가지 상이한 접근 방법을 발전시켰다. 하나는 ‘견해’와 ‘유추’를 근거를 둔 것으로
이라크 학파에 의해서 대표되었고, 또 하나는 ‘전승’에 근거를 둔 것으로 하자즈 학파에 의해서 대표되었다.
법원(法源)에 관한 학문은 종교법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하며 가장 유용한 분야다.
이것은 무슬림들이 준수하는 법과 법적 의무가 도출되는 종교법의 근거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법적 근거의 기본 원천은 [코란]이고 그 다음에는 코란을 명백하게 해주는 ‘전승’(즉 순나)이다.
코란과 전승 다음으로는 ‘합의’가 있다.
그런데 예언자가 사망한 뒤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은 확정된 원전에 포함되지 못했다.
따라서 학자들은 그런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원전에 있는 이미 확정된 근거와 비교, 결합시켰는데
그와 같은 비교와 결합은 일정한 원칙에 따라서 행해졌다.
이 원칙은 유사한 사건을 비교, 결합시키는 행위의 정당성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두 사건에 대해서 동일한 종교법의
적용을 가능케 했다. 이에 대해서는 초기의 무슬림들이 모두 동의했고, 따라서 또 다른 종류의 법원이 되었다.
이것이 네 번째 법인인 ‘유추’이다.
‘변증법’은 법학파에 속하는 인물들이나 기타 사람들이 논쟁을 벌일 때에 취하는 적절한 행동방식에 관한 지식을
포괄한다.
논쟁을 하는 도중에 부인하든가 시인하든가 선택하든가 해야 할 경우가 자주 생긴다.
또 자기 주장을 펴거나 답변을 할 때에 논쟁 참가자는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주장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따라서 권위자들은 논쟁 당사자들이 준수해야 할 적절한 행동방식
을 정해 놓아야한다.
그것은 거부와 수용에 관한 것, 즉 자신의 주장을 펼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답변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가, 언제 상대방의 말을 제지하거나 반박해야 하는가, 언제 침묵을 지키고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언제 침묵을 지키고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도록 내버
려 두어야 하는가 등에 관한 규정이다.
사변신학은 신앙의 신조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논리적 증거들을 제시하고, 나아가서 초기 무슬림이나 무슬림 정통파
의 교리에서 일탈하는 이단의 ‘혁신파’를 반박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학문이다.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신조는 신의 유일성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신의 유일성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논리적 주장의 훌륭한 예를 하나 들어보고
자 한다.
그리고 난 뒤에 사변신학과 그것이 탐구하는 주제들로 들어가서 정확한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나아가서 우리는 왜 그것이 이슬람에서 발달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탄생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겠다.
신의 유일성을 보여주는 주장은 이러하다.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생긴 것들은, 본질에 속하는 것이건 아니면 인간적, 동물적 행위에 속하는 것이건,
모두 다 자신의 존재 이전에 적절한 원인들을 필요로 한다.
그 원인들은 습관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사물들을 창조하고 또 그것을 발전시킨다.
그런데 이 각각의 원인들 역시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원인을 필요로 한다.
원인에 원인이 꼬리를 물고 상향적으로 진행하다가 마침내 원인들의 ‘원인자’, 즉 그 모든 원인들을 창조하고 존재
하게 하는 ‘그’에게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원인들을 탐색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결국은 실족하여 방향을 잃고 멸망의 길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인간이 그러한 탐색을 하다가 자신의 의지로써 걸음을 멈추거나 되돌아 오는 것을 선택할 힘이 있다고 생각
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처음부터 원인에 대한 탐색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아가서 원인을 유발하는 결과에 대해서도, 어떤 방식으로 영향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려진 것이라곤 오로지 습관적인 경험을 통해서일 뿐이고, 명백한 인과관계가 입증괸 결론을 통해서일 뿐이다.
정말로 무엇이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이 어떻게 일어나는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한
사유를 완전히 억제, 포기하고, 모든 원인들의 ‘원인자’에게 집중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신의 유일성에 의해서
확실하게 젖을 수 있도록 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원인의 탐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절망한다. 그는 불신자라고 불려도 마땅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각각의 원인들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유발되는지를 알기 위해서 사유와 탐색의 바다
로 헤엄쳐 들어가려고 한다면, 내가 단언컨대 그는 성공을 거두고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우리에
게 원인에 대한 탐색을 금했던 것이다. 우리는 다만 신의 절대적 유일성을 인정하라는 권유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신의 유일성,내세, 예언의 진실성, 신적인 속성의 진정한 특징, 혹은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 존재하는 다른 것
들을 측량할 때, 이성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곧 불가능을 희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 금의 무게를 측량하는 데에 쓰는 저울로 산을 측정하려고 하는 사람에 비유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은 신과 신의 속성을 이해할 수 없다. 이성은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의 세계에 속하는 수많은 원자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신의 유일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원인들과 그것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의 불가능함과 동의어인
셈이고, 이 점에서 모든 원인들을 포괄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의 불가능함과 동의어인 셈이고, 이 점에서 모든 원인
들을 포괄하는 그 원인들의 창조자에 대한 의존과 동의어인 셈이다.
그들 제외하고는 어떤 창조자도 없다. 모든 원인들은 그에게로 연결되며 그의 힘으로 회귀한다.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가 허용해준 부분까지일 뿐이다.
어떤 신실한 사람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구절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비는 ‘지식’의 단계에 도달한 결과이지, ‘상태’나 ‘자질’의 단계에서 나온 결과는 아니다.
그런데 빈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신께 가까이 가는 것을 아는 ‘지식’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서 하나 더 높은 ‘상태’
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비의 자질과 습관을 체득한 사람들이고, 고아나 빈자를 보면 다가가서
자비를 베푼다. 그들은 자비를 베풂으로써 하늘의 보상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식이 있다고 반드시 거기서 자질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 따라야 하고 수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굳게 정착된 습관,자질, 지식의 획득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종류의 지식이 나타나고, 그것은 내세에서 유익한 지식이 되는 것이다.
자질을 결여한 원초적 지식은 거의 아무런 이점도, 소용도 없다. 대부분의 사변가들이 가진 지식이 그렇하다.
그러나 진정한 목표는 ‘상태’로서의 지식이고 그것은 신의 숭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 의무의 기반이자 근원이 되는 신앙에는 여러단계가 있다.
최초의 단계는 혀로 말하는 것을 마음으로 확인하는 단계이다.
최고의 단계는 마음 속의 신조와 그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통제하는 자질을 획득하는 단계이다.
그것은 사지에 행동을 지시하고, 모든 행동은 그것에 따라서 취해진다.
그래서 모든 행동은 궁극적으로 신앙에 의한 이와 같은 확인에 종속되게 되니, 이것이 최고 단계의 신앙이며 완전한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신자는 크고 작은 어떤 죄도 범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인 연구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하여 또 존재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본질에
대하여 탐구하지만, 신학적 연구는 존재를 가능케 한 ‘그’를 입증하기 위해서 존재의 세계를 탐구한다.
[코란]에 보이는 이러한 부분들은 ‘불확실한 것’이라고 불렸고,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다음 구절에서 보이듯이
비난을 받았다. “그 분은 이 계시를 너희들에게 내리신 분이다. 그 안의 어떤 구절은 명백한 것이어서 경전의 근간이
고, 다른 구절은 불확실하다.
그래서 마음이 사악한 자는 불확실한 부분에 얽매여 그 감추어진 의미의 결합을 추구하여 아음대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에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지식의 기초가 견고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이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신은 죽은 사람의 소생을 언급한 [코란]의 여러 구절을 통해서 그것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 구절에서 언급된 내용이 옳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 이외에, 인간이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각자에게 적절한 조건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애당초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죽음이 비존재라면 그것은 인간이 비존재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인간을 창조해야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셈이다.
수피들의 수행은 신에 대한 끊임없는 숭배, 신에 대한 완전한 헌신, 현세의 헛된 영화에 대한 기피, 수많은 대중이
열망하는 쾌락과 재산과 지위와의 절연, 신을 숭배하려고 현세를 떠난 고립으로서의 은둔 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무함마드의 교우들과 초기 무슬림들에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구도자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잘 살피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결과는 반드시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결과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행동에서의 결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피 구도자는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통해서 그러한 결함을 찾아내고 그 원인에
대해서 스스로를 정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장막의 제거, 고차원적인 실체의 수용, 창조된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등에 관한 수피들의 논의는 대부분 어떤
면에서 모호한 전술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것은 직관된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고 그와 같은 직관적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동일한 신비적 체험을 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수피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언어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들이 표현을 위해서만 고안된 것이고 그 대부분은 감각의 세계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꿈은 그와 같은 형상이 이성적 지각에 의해서 지작되어 생기는 것이지만, ‘혼란된’ 꿈은 기억력 속에 보존된
형상들, 즉 개인이 깨어 있는 동안 상상이 보존해두었던 형상들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는 우마르 이븐 알 하팁에게 서한을 보내 그것들을 모두 빼앗아 무슬림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누어줄 수 있도록 허가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우마르는 “그것들을 모두 강물에 던져버려라.
만약 거기에 담긴 내용이 올바른 인도라면, 신께서 우리에게 더 훌륭한 인도를 주실 것이다. 만약 거기에 담긴 내용
이 그릇된 것이라면 , 신께서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이다.”라고 썼다고 한다.
주지하듯이 동일한 사물이 두 개의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운행이 어떤 결과를 낸다고 우리가 말할 때,우리는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사물로부터 그 결과가 존재한
다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이 결코 결과를 내는 그 사물의 진정한 특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신은 인간 안에 사고의 능력을 창조했고, 인간은 그것을 통해서 학문과 기술을 인식한다.
지식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각, 즉 판단을 수반하지 않는 원시적 지각이거나, 아니면 어떠한 사물이 그러하다는
판단을 수반하는 통각,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사고력이 이와 같은 과정을 밟아나갈 때 옳은 길로 혹은 그른 길로 진행 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력이 구하고자 하는 지식을 획득하려고 노력을 기울일 때, 이 두 길 가운데 어느 한쪽의 선택이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요한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논리학의 규범이 되었다.
따라서 논리학은 구하고자 하는 지식의 관점에서 추론을 연구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그 지식의 전제는 무엇이 되어
야 하며, 구하고자 하는 지식은 분명한 것인지 아니면 가설적인 것인지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이다.
무함마드가 우리에게 어떤 지각으로 인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각보다는 그것을 선택해야 하며 그것에 더 큰
믿음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설사 합리적 이성과 상치된다고 할지라도, 그 정당성을 이성적으로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종류의 사항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무함마드에게 맡기고 이성을 배제시켜야만 할 것이다.
수피의 지작은 가장 비학문적인 것이다.
수피들은 자신들의 지각과 관련하여 직관적 체험을 주장하고 이성적 증거를 기피한다.
그러나 직관적 체험은 학문적 지각과 방법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다.
이성적으로 타락한 일부 사람들은 모든 존재물의 본질과 조건 – 감각에 의해서 그 일부가 지각되는 것이건 혹은 감각
적 지각 너머에 있는 것이건 –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본질과 조건의 이유와 원인이 정신적 사유와 이성적 추론에 의해
서 인식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신앙의 신조도 이성적 지각의 대상에 속하기 때문에, 그 정당성도 전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적 사유에 의
해서 확립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철학자 라고 불리며,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왔다.
인간은 사고력을 통해서 이와같은 추상화된 이지를 연구하고, 그 이지를 통해서 존재물을 그 자체로서 지작하려고
한다. 마지막에 가서 철학자들은 통각을 지작보다 우선시하지만, 처음에는 그리고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는 지각을
통각보다 우선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완성된 지각이 탐구의 궁극적 목표이고, 통각은 단지 그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논리학자들의 저술들 속에서 우리는 지각이 우선이고 통각은 그것에 의존한다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은 의식에 도달한다는 의미로서 이해되어야 할 뿐, 완전한 지식을 획득한다는 의미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논리학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이다.
그들은 행복이란 인간이 그와 같은 결론의 도움을 받아 존재물을 지각하고 동시에 그러한 지각에 의해서 영혼이 개선
되고 덕성을 수용하게 될 때 성취된다고 생각한다.
설사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을 구별하게 하는 종교법이 계시되지 않는 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사유와 사유하는
능력, 선행을 선호하고 악행을 기피하는 천성 등으로 인해서 선을 성취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은 영혼이 덕성을 성취하면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되지만, 도덕적 자질에 대한 무지는 영원한 고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저승에서의 지복과 형벌의 의미라고 한다.
그들은 이런 방식을 더욱 밀고 나가고,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통해서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그들의 우둔함을
과시한다.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견해는 모든 면에서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들은 존재계의 모든 것을 ‘제일 이지’에 연관시키고, ‘필연자(즉 신)’로 소급해가는 과정에서 ‘제일 이지’의 이론에
만족한다. 이는 곧 그들이 ‘제일 이지’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단계의 신적 창조를 무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감각이 드리우는 장막으로 인해서 정신적 본질을 지각할 수 없고 거기에서 더 이상의 본질적인 것을 추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에 관해서 하등의 논리적 증명을 할 수 없고, 그 존재를 확인할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한다.
정신적인 영혼이 아무런 매개 없이 자신의 본질을 통해서 지작을 한다고 느꼈을 때, 거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나올 것이다.
그러한 지작은 이성적 사유와 학문에 의해서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 지각의 장막이 제거됨으로써 또 모든 육체적 지작을 잊어버림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논리적 증명과 증거가 이러한 종류의 지작을 낳고 커다란 기쁨을 준다는 주장은 허위이다.
논리적 증명과 증거는 육체적 지작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상상, 사고, 기억과 같은 두뇌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영혼이 아무런 매개없이 수행하는 지작을 가지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관심을 두는 것은 두뇌의
모든 힘을 죽이는 것이다. 그 까닭은 두뇌의 힘이 그러한 종류의 지각에 반대하고 역행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이 바로 학문의 저장고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속에 신은 사고를 하고 학문적 지식을 획득케 하는 지작을 심어주었다. 그 과정은 실체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하여,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실체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긍정과 부정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력은 궁극적으로 긍정을 하건 부정을 하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낳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마음 속에 어떤 학문적 형상을 확립하면, 그 형상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마음을
닦기 위해서, 교육이나 토론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반드시 교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천체적이건 원소적이건 추상적이건 물질적이건,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지각
하려고 하는 사고 그 자체의 본질 때문에 철학적 학문들은 어디에서나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차이는 종교를 서로 달리하는 종교적 학문에서 또 역사적 정보의 외적 성격을 달리하는 역사적 학문에서 생긴다.
이제 저술할 때에 유념해야 할 목적,즉 그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무용한, 일곱가지의 목적을 설명하도록 하자
(1) 주제를 지닌 학문을 제기하고 그 장과 절의 구분과 문제점들을 논의 하는 것, 또는 유능한 학자들이 자기 마음 속
에 떠오르는 문제점과 연구 주제를 제기 하는 것, 또는 유능한 학자들이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문제점과 연구 주제
를 제기하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것, 이런 것들을 책 속에
담아서 후세 사람들이 거기에서 혜택을 얻을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어떤 학자는 고대의 학자들의 논의와 저술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신의 도움을 받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는 동일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 주어, 가치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통해서 혜택을 받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
이다. 이것은 이성적, 전승적 학문에 관한 서적들에 대한 해석적 접근방식이며, 학문에서 고귀한 부분이다.
(3) 그는 이러한 오류의 발견을 글로 남겨 후대의 연구자들이 그것에 관한 설명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학자는 그 결여된 부분을 보충함으로써, 그 분야가 모든 문제점과 세부사항들을 부족함
이 없이 갖출 수 있도록 완전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자가 지켜야 할 목적들을 열거하면서 최후의 항목에 이르러 “다른 모든 것들은 무용한 것이고
욕심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이는 무지와 무례를 의미했다.
학자들은 각 분야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매우 많은 분량의 학문적 저술을 축약해줌으로써, 학생들이 그것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익히기 쉽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교육과정과 학문성취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초심자에
게 그 분야의 최종적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생들에게는 매우 나쁜 교육방법 이
었다.
따라서 학생의 입장에서도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은 수많은 개념들이 뒤섞여 이해하기 힘
든 축약된 표현들을 꼼꼼히 살펴서 그 분야의 문제점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렇게 축약된 개설서의 문장은 난해하고 복잡한 것이 보통이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투자할 수 밖에 없다.
간략한 개설서를 통해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생기는 학문적 습관은, 설사 그 개설서가 아무런 결점이 없는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보다 포괄적이고 긴 저술을 연구함으로써 생기게 되는 학문적 습관에 비해서는
열등하다.
후자는 비록 수많은 반복과 장황함으로 가득차 있지만, 반복과 장황함은 모두 완전한 습관을 체득하는데 도움이 된다.
만약 반복이 별로 없다면, 그 결과로 얻는 습관은 열등한 것이 되며, 축약본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 의도는 학생들이 전문적 지식을 용이하게 습득케 하려는데 있지만, 결국은 그들이 유용하며 확고하게 뿌리내린
습관을 체득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더욱 곤란에 빠트리는 결과를 낳는다.
학생이 어떤 한 분야에서 학문적 습관을 체득하게 되면, 다른 모든분야를 배울 준비를 갖추게 되며, 마침내 학문에
대한 완전한 통달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학생을 혼란시키게 되면
그는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나태해져서 사고를 멈추게 된다. 그는 학자가 되는 데에 절망하고 학문과 교육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논리학이라는 기술은 선천적인 사고력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이다.
논리학은 그것을 묘사함으로써 올바른 작동과 그릇된 작동을 구별한다.
올바른 작동이 물론 사고력의 본질이지만, 아주 드물게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결론이 도출되는 전제들의 순서와 배열에 혼란이 일어난 결과, 어떤 대상의 양 극단을 그 대상 본연의
것 이외의 형태로 인식하기 떄문에 발생한다. 논리학은 그와 같은 함정을 피하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사고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부합되고, 그것과 병행하여 이루어지는 기술적 과정이다.
그것은 기술적 과정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것이 없어도 무방하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어려움으로 고통받거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안이나 혼란스런 회의로 이해에 장애를 받는다
면, 그런 것들은 던져버려라! 말의 장막과 회의의 장애물을 치워버려라! 모든 기술적 장애에서 벗어나서 자연이 여러
분에게 준 선천적 사고력의 왕국에 피신하라! 여러분의 사고를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보하게 하고, 여러분이 무엇을
추구하건 그것에 따라서 마음을 그 속 깊이 잠기게 하라!
여러분이 있기전에 위대한 사상가들이 있었던 자리에 발을 들여 놓으라! 신이 자비 속에서 그들을 도와 그들이 알지
못하던 것을 가르쳐주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자신을 신의 도움에 맡겨라!
그렇게 한다면, 도움을 주는 신의 빛이 여러분 위에 비치고 여러분이 추구하는 대상으로 여러분을 인도할 것이다.
영감은 여러분에게 중용의 개념을 보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인간의 사고가 필연적으로 그것을 지향하지 않
으면 안 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에 중용의 개념을 가지고 다시 논증의 형태와 형식으로 되돌아가서 그 속에 침잠하며, 그것에 논리학의
기술적 원칙을 부여하라! 그리고 나서 거기서 말의 형식을 옷으로 입히고, 단단히 허리띠를 매어주고 건전하게 차려준
뒤, 구어로 된 세계 속으로 끌고 나오라!
그들은 논리학이 진리를 인식하는 자연적인 수단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논거에 회의와 불안이 생기면 그들은 혼란을 느끼지 때문에 , 그러한 회의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진리를 인식케 하는 자연적인 수단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사고하는 사람이 온갖 상상에서 해방되고 신의
자비에 의탁했을 때에 발휘되는 자연적인 사고력이다.
논리학은 단지 사고의 과정을 묘사할 뿐이고 그 과정과 대부분 병행된다.
아랍어학이나 논리학과 같이 다른 학문을 보조하는 학문들은 다른 학문에 도움을 주는 정도까지만 공부해야 한다.
그것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길어져서는 안 되고, 문제점들도 세세한 것까지 다루어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학문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원래의 목적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보조학문이 다른 학문에 대한 보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원래의 목표를 저버린 상태에서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
린다면, 그것은 한가한 시간낭비만 될 것이다.
이븐 알 알라비는 “아들이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코란]을 가르치는 요즈음의 동료들은 얼마나 사려가 없는가?
아이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읽고,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할 것도 없는 것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학생들은 이슬람의 원리,법학의 원리, 논증법, 예언자의 전승 및 그와 연관된 학문들을 순차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명석한 마음과 충분한 능력이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구 가지 분야를 동시에 가르치는 것도
금했다.
이것이 바로 판단 압둘라의 조언이며, 정말로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기왕에 받아들여 지고 있는 관행은 그렇지 못하고, 관행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상황에 대해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통용되는 관행에 의하면 [코란]의 교육이 가장 우선시된다.
그 이유는 내세에서의 축복과 보상에 대한 희망 그리고 어리석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해악을 주고 공부로부터
멀어지도록 할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이다.
아부 무함마드 이븐 아비 자이드가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대한 규율을 적은 책에서, “만약 아이들을 체벌하려고 한
다면, 교육자는 세 차례 이상 때려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또한 칼리프 우마르는 일찍이 “종교법에 의해서 훈도되지 않은 사람은 신에 의해서 교육받지 못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체벌이 주는 굴욕으로부터 영혼을 보호해야 한다는점 그리고 종교법이 규정한 처벌의 수준은 사람을 통제하기
에 적절한 정도가 좋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학자의 연구는 지식추구의 여행에 의해서 또 당대의 권위있는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서 크게 발전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학습, 교육, 강의, 스승에 대한 접촉 및 모방 등을 통해서 자신의 지식과 성격과 주관과 덕성을 갖
추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스승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 획득된 습관은 보다 강하고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권위있는 스승을 많이두면, 그만큼 제자가 획득하는 습관은 더 깊이 뿌리를 내
린다.
학자들은 일반화 및 유추를 통한 결론에 익숙해져 있다. 정치를 바라볼 때에도 그들은 관찰결과를 자신의 견해의 틀
속에 그리고 유추의 방식속에 집어넣는다. 따라서 그들은 많은 잘못을 범하고 신뢰하기 힘들다. 문명인들 가운데
지성적이고 명민한 사람들은 학자와 동일한 부류에 속한다. 그들의 통찰력으로 인해서 그들은 법학자들이 그러하
듯이, 개념,유추.비교 따위를 추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 역시 오류를 범하게 된다.
건강한 기질의 보통사람이나 평범한 지성의 사람들은 그런 사유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의
견해를 외부의 사실과 일치시키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각종 상황과 개인들을 그 개별적인 측면으로 판단하는 데에 그친다.
그의 판단은 유추나 일반화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그의 사유는 대부분 감각에 의해서 지각되는 사물에 국한될 뿐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언어적 표현은 마음 속에서 생기는 개념의 설명일 뿐이며, 그것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토론, 교육, 지속적인 학문
적 탐구를 통해서 전달한다. 단어와 표현은 개념들 사이에 존재하는 매개이자 동시에 장막이며, 개념들 사이에서 유대
를 이루어주고 그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개념을 다루는 연구자는 개념으로부터 그 개념을 표현하는 말을 도출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그는 언어적 의미에 대한
지식과 상당한 언어학적 습관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마음 속에서 개념을 이끌어내는 통상적인 어려
움은 차지하고라도, 그 개념을 말로 표현하는 데에서조차 애를 먹을 것이다.
누군가 단어들의 의미에 관해서 확고한 습관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단어를 들으면 자신의 마음 속에 그 단어에 관한
정확한 개념이 자동적, 자연적으로 떠오르게 될 때 비로소 개념과 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장막이 완전히 제거되거나
가벼워지게 되고, 개념 속에 내재된 문제점을 탐구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과제가 될 것이다.
“자이드가 내게로 왔다”라는 문장은 “왔다 내게로 자이드가”와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먼저 언급된 것(첫 문장에서는 자이드)이 화자의 마음 속에 더 큰 중요성을 차지하지만, “왔다 내게로 자이드가”라고
말한 사람은 온 사람보다 왔다는 것에 더 관심이 있음을 나타낸다. 반면 “자이드가 내게로 왔다”라고 말한 사람은
문법적으로 술어인 ‘왔다’라는 것보다는 온 사람에게 더 관심이 있음을 드러낸다. ....
유창함이란 말과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모든 면에서 합치시키는 것을 뜻하며, 단어들의 결합에 그와 같은
합치를 부여할 수 있는 자질을 통해서 성취된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랍어 화법에 따라서 그와 같은
합치를 가능케 하는 표현형식을 선택하므로, 이런 점에서 그는 아랍어 화법의 유창함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습관은 아랍어를 말하는 것을 끊임없이 훈련하고 또 반복해서 들음으로써 단어들의 결합이 지닌 독특한 속성
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것은 문학비평가들이 만들어낸 학문적 규칙들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규칙들은 단지 아랍어에 대한 지식을 줄 뿐, 혀와 같이 적절한 장소에 실제적인 습관을 가지도록 해주지 못한다.
문법학자들은 언어교육이 문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랍의 언어와 화법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획득되는 언어적 습관을 가르쳐줄 때 비로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시란 은유적 용법과 묘사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유창한 말이고, 운율을 지닌 문자들로 구성된 행들로 나뉘
어져 있으며, 각 행은 그 전쟁이나 후행으로부터 목적이나 의미라는 면에서 독립적이고, 그것에 특유한 아랍어의 방법
을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시인은 자신이 암기한 시적 자료로 충만해지고 자신의 재능을 날카롭게 연마한뒤, 위해한 선례들을 본받기 위해서
스스로 운율을 만드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더욱 더 많은 연습을 거치며 운율를 짓는 습관은 굳게 뿌리내린 습관이
된다.
시인은 가장 정확한 구문을 써야 하고, 시적 방종이 없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 것의 사용은 언어적 습관이라는 면에서 결함을 지닌 것이다.
그는 시어의 유창함을 파괴할지도 모를 그런 것을 피해야 한다. 대표적인 권위자들은 후배 시인들의 시적 방종을
금지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가장 모법적인 언어습관을 획득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은 가능한 한, 복잡한 구문을 멀리해야 하며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신속하게 이해될 수 있는 구문들만 사용
해야 한다. 한행에 너무 많은 관념을 집어넣어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멋진 행은 거기에 있는 단어들이 그것이 나타내려는 관념과 합치하는 경우이며, 그렇지 않다면 중언부언 하는
셈이다.
만약 너무 많은 관념이 넘친다면, 시행은 복잡해지고, 그 관념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집중력을 잃게된다.
그 결과 시를 듣는 사람의 문학적 감각으로는 시행이 지닌 유창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개념이 말보다 더 빨리 마음 속에 잡힐 때만이 쉬운 시가 된다.
언어는 말과 관련된 습관이며, 사람은 다른 모든 습관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혀의 반복적 훈련
이 필요하다. 그런데 혀와 말은 오로지 어휘를 다루는 것이고, 관념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생각(관념)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생각은 어떤 것이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생각하기 위해서 어떤 기술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말은 생각을 담는 틀과 같은 것이다.
바다에서 물을 퍼는 그릇은 금, 은, 조개, 유리, 진흙 등으로 만들어진 것 일 수 있으나, 그 속에 담긴 물은 모두 동일
하다. 물이 가득찬 그릇의 특징은 그것이 만들어진 재료에 따라서 다른 것이지, 그 속에 담긴 물에 따라서 다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특징과 그 유창함은 말을 만드는 상이한 단계에 따라서 다른 것이며, 그것은 말이 얼마
나 정황에 합치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생각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
말을 만드는 방법은 아랍어의 언어습관에 의해서 요구되는 것인데, 그런 방법을 모르거나 혹은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일어서려고 하지만 힘이 없어서 일어나지 못하는 장애인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사용한 언어의 질은 그가 학습하거나 암기한 자료의 질에 달려있다.
암기하는 문학적 자료들의 수준을 높이면, 그의 습관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후천적 성질은 습관을 자기 모형으로 삼고, 그것을 배양시킴으로써 강화되기 때문이다.
관념을 전달하는 완벽한 방법이 유창함이다. 이 점은 유창함에 대한 문학비평가들의 정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유창함이 주어진 조건과 말 사이의 합치라고 규정한다.
그와 같은 조건이 무엇이며, 또 그 조건과 구문의 합치를 지배하는 법칙들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유창함의 학문
(즉 수하학)이다.
억지에 의한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미사여구는 말의 기본적인 구문을 무시하고 말의 의미를 나타내는 모든 기
반을 파괴한다.
그것은 말에서 모든 유창함을 없애고 오로지 장식만을 남긴다.
미사여구의 사용을 지배하는 또 다른 조건은 그것을 드물게 사용해야 하며, 한시에서 두세 행 이상 그것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장시과 광채를 주기에 충분하며, 지나치게 많은 미사여구의 사용은 오히려 흠이 된다.
이븐 할둔 Ibn Khaldūn
14세기 아라비아의 최대 역사철학가로 정치·외교 방면에도 중요 역할을 하였다.
세계사《이바르의 책》은 베르베르 종족을 서술한 최초 문헌이다.
그 중 역사 서설《Muqaddimah》는 세계적 명저이다.
출생-사망 1332.5.27 ~ 1406.3.19
국적 이집트
출생지 튀니지
주요업적 이슬람 역사의 집대성
정치 ·외교 방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원래 남아라비아의 하드라마우트에서 8세기에 에스파냐로 이주한 할둔족 출신으로, 이 일족이 13세기에 북아프리카
의 튀니스로 이사하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튀니스의 하프스왕조의 궁정이나, 페즈의 마린왕조, 에스파냐의 그라나다 궁정 등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는 등 파란
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1375∼1378년에는 알제리의 오랑 지방의 콸라트 이븐 살라마 마을에 칩거하면서 아랍족 ·페르시아인 ·베르베르족 등
시대의 개시와 경과의 실례와 기록인 《이바르의 책: Kitab al-‘Ibar》이라는 제목의 세계사를 완성하였다.
이 가운데서 베르베르의 여러 종족사는, 이 민족의 기원 ·계통 ·변천 등을 서술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중요시된다.
이 저서의 권두(卷頭)에 실은, 역사 서설(歷史序說)로 통칭되는 《Muqaddimah》는 사회의 형성과 변화의 사정 법칙
을 고찰하였고, 문화사의 근본적인 여러 문제에 해답을 부여하려고 했던 것으로 세계적 명저로 평가받는다.
1382년 이집트로 이주하여 맘루크왕조를 섬겼다. 그는 대법관(大法官)으로서나 저술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당시 최대
의 역사철학가이다.
작성자 (hc950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