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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里記①> 안동도(安東道)는 고대의 고속도로
* 들어 가면서 : 도리기(道里記) 씨리즈(series)을 쓰게 된 까닭 *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를 아주 상세(詳細)하게 지리비정(地理比定)을 한 해석(解釋) 씨리즈(series)를 쓰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 이 도리기(道里記)에 대해서 경악심을 가진 것은 삼국사기를 찬술(撰述)한 김부식 선생께서 “고구리 평양성
은 고리(高麗)의 서경(西京)이고, 패수(浿水)가 대동강(大同江)인 듯하다.”는 논리를 펴면서 가탐(賈耽)의 도리기
(道里記)를 인용해서 자신의 학설을 사학자(史學者)로써 논증(論證)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를 읽어보면, 발해(渤海)의 오늘날 경박호(鏡泊湖) 동쪽에 있었던 발해의
수도(首都)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인 방향과 이수(里數)로써 언급하였는데, 그 정확성이 오늘날 지리(地理)와 비정
(比定)해 볼 때에 정확하게 들어나게 됩니다.
이 도리기(道里記)는 발해에 이르는 길을 2개 즉 육로(陸路)로 가는 길인 안동도(安東道)와 해로(海路)로 가는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 두 길에 대해서 정확하게 그 지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2개의 길이 중국대륙에서 한반도 북부에 걸치고 있기 때문에, 이른바 대륙삼국설과 반도삼국설을 시원
스럽게 정리할 수 있는 ‘잣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를 오늘날의 지명과 관련해서 상세하게 지리비정(地理比定)을
하는 해석, 해설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가 중요한 것은 한반도와 만주에 걸친 지리(地理)와 역사(歷史)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엉뚱한 사실(史實)’을 듬뿍 들어내고 있는 ‘연결고리’를 한다는 면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여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는 그간 ‘모호했던 한반도와 만주’에 대해서 명확한 지리인식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새로운 역사해석의 문(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탐의 도리기(道里記)가 일으키는 파급성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강역(疆域)의 문제를 전혀 새롭게
한다는 점입니다.
즉 “‘고구리 평양성’이 하북성의 거대한 호수였던 대륙택(大陸澤) 위에 있었고, 장야분지(長冶盆地)쪽에 신라서북
(新羅西北)이 있었다.”는 것을 통해서 고리(高麗) 서경(西京)의 대륙택(大陸澤) 위에 있었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고리
(高麗)의 강토(疆土)의 결정적인 바탕이 됩니다.
그러나 안동도(安東道)는 신기하게도 오늘날 혼하(渾河)를 타고서 올라가서 계속 <류하(柳河)-휘발하(輝發河)-
송화강(松花江)-표하(漂河)-목단강(牧丹江)-경박호(鏡泊湖)>로 이어지는 긴 강변(江邊)의 길임이 들어납니다.
문제는 “이 길을 중심으로 해서 조선조(朝鮮朝)의 국경(國境)이 설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는 비단 관경사국(管境四國)시대 때의 강토(疆土)비정과 고리조(高麗朝)-조선조
(朝鮮朝)의 강토비정을 함에 있어서 모두 결정적인 ‘바탕’이 되는 중요한 ‘지리적 인식’과 역사적인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즉 가탐의 도리기(道里記)는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 역사의 강역(疆域)의 변천(變遷)에 관한 핵심지리(核心地理)>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씨리즈(series)형태의 글을 쓰는 까닭이 여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탐의 도리기에서 안동도(安東道)와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는 서로 크로스-첵크(closs-check)를 하게
되어 있어서 한 치의 오류(誤謬)도 허용치 않는 엄밀함이 갖추어진 기록(記錄)입니다.
신기하게도, 안동도(安東道)는 당(唐)에서 발해 수도까지 ‘사신(使臣)이 가는 길’이라면,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는
당(唐)이 천자국(天子國)으로써 신라(新羅)와 발해(渤海)에 ‘투자’를 하고 마치 한사군(漢四郡) 처럼 <중재(仲裁)
배달화백>에서 당(唐)의 대리천독(代理天毒)들을 지휘통제하기 위한 사신단(使臣團)이 가는 길로 전혀 다른 성격의
길임이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이 ‘중재 배달화백’은 갑문(閘門)을 만들어서 배(船)가 ‘한반도 서북(西北)’-요동반도 쪽에 호수(湖水)나 포구(浦口)인
소도(蘇塗)에서 열였는데, 안동도(安東道)와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를 연결해서 크로스-첵크(closs-check)를
하게 되면, 소도(蘇塗)가 6개가 들어납니다.
즉
① 문무왕의 철관성(鐵關城) 소도(蘇塗)
② 부루(扶婁)태자의 본계호(本溪湖) 소도(蘇塗)
③ 해모수(解慕漱) 성제(聖帝)의 대화방호(大伙房湖) 소도를 중심으로 해서
④ ‘피라미드’의 불(火)로써 사회통합을 하는 박작호(泊汋湖) 소도(蘇塗)와
⑤이에 관련된 신주호(神州湖) 소도(蘇塗)가 있음이 들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고구리(高句麗)의 환도현성(丸都縣城)에 대해서 거론이 되고. . .
그런데, 이 6개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께서 만든 소도(蘇塗)인 요양시(遼陽市)-평양성
(平壤城)까지 언급하게 됩니다. 따라서 한반도 서북부에 있는 소도(蘇塗)는 전부 7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안동도(安東道)의 길>에 대한 해석과 지리비정(地理比定)을 마친 다음에,
잠시 도리기(道里記)-씨리즈(series)의 글을 중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반도 서북부에 강하(江河)의 흐름이 연결되어 7개의 소도(蘇塗)가 있었음을 신라(新羅)와 발해(渤海)가
남북으로 있었던 시절의 기록인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를 바탕으로 언급하면서도, 한반도 동북부에서 신라
와 발해의 ‘사이’에 경계로 있었던 니하(泥河)가 만들어낸 삼련(三連)소도 - 즉 슬해(瑟海)와 금해(琴海)-이는 원슬해
(原瑟海)인 오늘날 ‘블라디보스톡’이 있는 만(灣)을 뜻합니다. - 그리고 흥개호(興凱湖)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한반도 동북부의 삼련(三連) 소도가 고리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어찌 연결되는가?”를
언급하지 않으면, 마치 한반도의 왼쪽 날개인 요동반도 쪽만을 거론하고, 오른쪽 날개인 오늘날 연해주(沿海州)를
언급 안하였기 때문에,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린 ‘강역(疆域) 변천(變遷)의 바탕’에 대한 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 신라(新羅)와 발해(渤海) 사이에 있었던 니하(泥河)의 정확한 지리비정과 이에 연결되어 있는 삼련(三連) 소도
(蘇塗)인 슬해(瑟海)-금해(琴海)-흥개호(興凱湖)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탐의 도리기(道里記)들 하나의 중심 재료로 삼아서 “우리 역사 - 특이 한반도(韓半島)가 관련된 역사가 어찌
한반도 밖과 연결되는가?, ”가 이 씨리즈(series) 형태의 글에서 규명해 보려고 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아무튼 한반도 동북부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거론한 다음, 다시 가탐의 도리기(道里記)의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
를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는 형태로 글을 쓰려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즉 한반도 서북부와 동북부에 대한 명확한 지리적 인식과 역사의 진행과정의 핵심 자료로써 가탐(賈耽)의 도리기
(道里記)로써 활용하고져 하기 때문입니다.
미리 언급하자면, 오늘날 <간도(間道) 문제와 연해주(沿海州) 문제>인 조선조(朝鮮朝) 강역(疆域)의 문제 까지도 이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의 여정(旅程)에 들어난 <독특한 서북(西北)-북(北)-동북(東北)에 걸친 지정학적 이해
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매우 까다롭고 엄격하기 까지한 긴 글을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가 제기한 한반도의 <서북부-북부-동북부>에 관련된 지정학적 지리인식이
우리역사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씀에 있어서 좌계가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두 분이 계십니다.
늘 그러하듯이 지도(地圖)를 바탕으로 역사를 현장감있게 살펴볼 수 있게하는 ‘향고도 님’과 ‘솟대 님’이십니다.
‘향고도 님’께서는 가탐의 도리기(道里記)에서 해로(海路)를 검토함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주해도편(籌海圖編)을
이번에 올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의 홈페이지에 만주(滿洲)에 관한 많은 지도를 보게 되어서 강역(疆域)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또한 ‘솟대 님’께서는 ‘수계(水系)가 명확히 들어나는 지도’와 사전(事前)의 만주(滿洲) 지역에 대한 연구로써 좌계가
혼란을 벗어나는데 결정적인 길(道)을 미리 뚫어주신 것입니다.
이 점 두 분 선생님께 머리 숙여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선생님과 동학(同學)들께서는 좌계가 이 두 분 선생의 사전(事典) 연구를 바탕으로 관경사국(管境四國)-고리조
(高麗朝)-조선조(朝鮮朝)에 이르는 강역(疆域) 문제의 핵심문제를 거론하는 과정에서 혹 부족한 점이 있으시면,
‘남김없이 질정(質正) 보완(補完) 하는 댓글과 답(答)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 들어 가는 길 마침 : (도리기(道里記) 씨리즈(series)을 쓰게 된 까닭) *
1.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서 발해(渤海)에 이르는 길은 두 곳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가. 가탐(賈耽)에 대한 소개
‘김부식 선생’께서 서경(西京)이 “고구리 평양성이다.”라고 밝히고 더군다나 이를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를
인용해서 거론(擧論)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리(高麗)의 강역(疆域)을 완전히 제로-베이스(zero-base)에서
다시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가탐(賈耽)이란 분이 당(唐)의 재상(宰相)이었다는 것입니다.
naver.com 의 백과사전에는 이 가탐(賈耽)이 다음과 같이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 naver 백과사전 옮김 (*)
가탐 [賈耽, 730~805]
요약
당(唐)나라의 정치가, 지리학자. 13년 동안 재상으로 국정을 다스렸다.
지리학에 관심이 많아 《해내화이도(海內華夷圖)》와 《고금군국도현사이술(古今郡國道懸四夷述)》을 저술하였다.
본명 가돈시(賈敦詩)
별칭 시호 원정(元靖)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지리학
출생지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청지(淸池)
주요저서 《해내화이도(海內華夷圖)》 《고금군국도현사이술(古今郡國道懸四夷述)》(40권)
본문
751년 과거에 급제하고 지방과 중앙의 여러 관직을 거쳐 만년에는 재상으로 13년간 국정을 다스렸으며, 위국공
(魏國公)에 책봉되었다.
지리학을 좋아하여 외국사신이나 외국에 갔다온 사람에게서 그곳 지리 ·풍속을 들어, 약 30년 동안 모은 지리 ·풍속에
관한 자료를 기초로 축척(縮尺) 약 150만분의 1의 《해내화이도(海內華夷圖)》와 《고금군국도현사이술(古今郡國道
懸四夷述)》(40권)을 저술하였다.
이는 중국 본토뿐만 아니라, 기타 지역도 포함하는 당시 세계지도 ·세계지지로서 믿을 만한 것이었다고 하나 유실
되고 말았다.
(*) naver 백과사전 옮김. 마침 (*)
이런 가탐(賈耽)에 대한 정보 가운데 중요한 것은 그가 지리학(地理學)의 대가(大家)였는데, 비록 실전(失傳)되긴
하였지만, 가탐(賈耽) 선생께서 만든 지도 가운데, <해내화이도(海內華夷圖)>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왜냐?
<해내(海內)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사해(四海) 안(內)쪽을 설명하는 지도>인데, 여기에 화(華)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夷)도 공존(共存)하고 있어서, 그 지리적 관계가 얽혀있음이 복잡해서 이를 지도(地圖)로 나타내고 있음을 의미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도리기(道里記)의 내용 가운데, 신라(新羅)와 발해(渤海)가 “왜 오늘날 중국대륙 안(內)쪽에 있는가?!”를
설명을 해 줄수 있는 지도(地圖)이기도 하였음을 명백히 지도 이름 자체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唐)의 재상(宰相) 자신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나. 신당서(新唐書) 지리지(地理志)에 있는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
신당서(新唐書) 지리지(地理志)에는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입사이지로여관수주집(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
: ‘사이(四夷)로 들어가는 길’과 ‘관문(關門)과 <수자리> 배치(配置) 모음’
① 唐置羈縻諸州,皆傍塞外,或寓名於夷落。而四夷之與中國通者甚眾,若將臣之所征討,敕使之所慰賜,宜有以記
其所從出。
: 당(唐)이 여러 주(州)를 <‘고삐’를 쥐어서 종속(從屬)시키는 것>(=기미(羈縻))하는 것은 모두 새외(塞外) 지역을 곁
으로 하고 있었다.
혹 이(夷)들의 부락(部落)이 이름을 ‘임시로 붙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이(四夷)가 중국(中國)고 (지속적으로) 통
(通)하는 것은 심(甚)히 많았다.
만약 장수(將帥)가 정토(征討)를 할 때에나, 칙령(勅令)을 전하는 사신(使臣)이 위무(慰撫)하고, 하사(下賜)를 하려고
함에는 마땅이 ‘따라서 나가야하는(=종출(從出))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마땅하다.
② 天寶中,玄宗問諸蕃國遠近,鴻臚卿王忠嗣以《西域圖》對,才十數國。
: 천보(天寶=742년 ~ 756년) 중에 현종(玄宗)은 여러 번국(蕃國)의 원근(遠近)을 물었다.
홍려경(鴻臚卿) - 외국(外國)의 사신(使臣)들과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관직(官職)입니다. - 왕충사(王忠嗣)가 십여
개의 나라를 바탕(=재(才))으로 해서 서역도(西域圖)로써 대답(對答)하였다.
(의미해설)
여기서 홍려(鴻臚)라는 말이 나오는데, 홍(鴻)은 ‘큰 기러기’를 의미하고, 려(臚)는 ‘살갗’ ‘가죽’등을 뜻하지만,
‘순서(順序)대로 늘어놓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홍려(鴻臚)는 사신(使臣)이나 외국(外國)에서 온 귀빈(貴賓)인 “먼 거리를 ‘순서대로 밟아서’ 큰 기러기 처럼 날아서
왔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홍려(鴻臚)는 외국의 사신(使臣)과 귀빈(貴賓)에 대한 문화적인 미칭(美稱)이 되는 것입니다.
③ 其後貞元宰相賈耽考方域道里之數最詳,從邊州入四夷,通譯於鴻臚者,莫不畢紀。
“ 그 후에 정원(貞元=785년∼794년)에 재상(宰相) 가탐(賈耽)이 (당(唐)의) 주(州) 변경을 따라서 사이(四夷)로 들어
가는 것을 홍려(鴻臚)들에게 통역(通譯)을 통해서 그 방역(方域) 도리(道理)의 수치를 가장 상세(詳細)하게 고증(考證)
하여 ‘밑바탕의 되는 기록(紀錄)’을 마치지 않은 바가 없었다.
④ 其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最要者七:一曰營州入安東道,二曰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三曰夏州塞外通大同雲中道,
四曰中受降城入回鶻道,五曰安西入西域道,六曰安南通天竺道,七曰廣州通海夷道。其山川聚落,封略遠近,皆概舉
其目。
: 사이(四夷)로 들어가는 길과 관문(關門)과 숫자리의 배치를 모아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일곱(=7)이 있는데,
1) 그 하나를 말하자면, 영주(營州)로 해서 안동도(安東道)로 들어가는 가는 것이며,
2) 그 둘을 말하자면, 등주(登州)에서 바닷길로(=해행(海行))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로 들어가는 가는 것이며,
3) 그 세 번째는 하주(夏州)로 새외(塞外)와 대동운중도(大同雲中道)로 통하는 것이며,
4) 그 네 번째는 중수항성(中受降城)으로 부터 회골도(回鶻道)로 들어가는 것이며,
5) 그 다섯 번째는 안서(安西)로 부터 서역도(西域道)로 들어가는 것이며,
6) 그 여섯 번째는 안남(安南)으로 부터 천축도(天竺道)로 들어가는 것이며,
7) 그 일곱째는 광주(廣州)로 부터 해이도(海夷道)로 통하는 것이었다.
그 산천(山川)과 부락(部落)의 모임, 봉토(封土)의 원근(遠近)의 대략(大略)이 모두 그 세목(細目)에 이르기 까지
‘대부분(=개(槪)’ 열거(列擧)되어 있었다.
⑤ 州縣有名而前所不錄者,或夷狄所自名雲。
: 주현(州縣)가운데 이름은 있으되 전(前)에 기록되지 않는 것과 혹은 이적(夷狄)이 ‘스스로 일컫는 이름’까지도
언급되어(=운(雲): 이는 운(云)과 같습니다.) 있었다.
- 각설(却說)
위 내용은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가 만들어지기 까지의 유래(由來)가 상세히 언급되고 있는데, 7가지의 핵심
된 사이(四夷)로 들어가는 것과 가운데, 발해(渤海)와 신라(新羅)와 관련된 것은 <一曰營州入安東道>와 <二曰登州
海行入高麗渤海道>입니다.
즉 ‘영주(營州)로 해서 안동도(安東道)라고 일컫는 길’을 따라서 들어가는 길과, 등주(登州)로 해서 바닷길로 고리
발해도(高麗渤海道)라는 길을 따라서 들어가는 두 가지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안동도(安東道)와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 대한 내용을 모두 살펴보면, 이른바 입체적(立體的)인 관점
(觀點)에서 <발해(渤海)>라는 국가의 강역(疆域)과 이에 관련된 신라(新羅)의 강역(疆域)이 모두 들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 해석에 있어서 몇 가지 전제(前提)의 검토
그런데, 안동도(安東道)와 해행(海行)의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를 살펴봄에 있어서, 몇 가지 도리기(道里記)를 해석
함에 있어서 ‘전제(前提)가 되는 기본바탕’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 당(唐)의 “1리(里)는 얼마인가?” 하는 문제
먼저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나오는 이수(里數)에서 “1리(里)는 얼마인가?”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솟대 선생’께서 상세한 연구를 해주었습니다.
즉 이 싸이트(site)의 ‘[re] 1里 거리의 시대별 변천정리 - 단군조선의 해양문화근간 동이척이 도량형 효시’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唐大尺 1里 = 360步 = 360 X 5尺 =360 X 5 X 29.591cm = 532.6m
이는 오늘날 10리(里)가 4 (Km)되는 것은 결국 1리(里)가 400.미터(m)임에 비해서 당(唐)의 1리가 약 132.6미터(m)
더 큰 것을 뜻합니다.
이런 도량형(度量衡)의 정확한 파악이 있어야만 발해(渤海)과 신라(新羅)의 강역(疆域)에 대해서 상세한 검토를 할
수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나. 지리 비정의 ‘작은 원칙’ 인위적(人爲的)인 지명(地名)보다는 자연적(自然的)인 지명(地名)을 우선하여 비정
(比定)하여야한다
또 하나 기본적으로 검토해야할 것은 지명(地名)은 인위적(人爲的)인 지명과 자연적인 지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동도(安東道)의 첫머리는 ‘영주서북백리왈 송경령(營州西北百里曰松陘嶺)’ - 즉 “영주(營州)에서
서북(西北)쪽으로 100리(里) 되는 곳에 송형령(松陘嶺)이 있다.”라고 했을 때에 영주(營州)는 인위적인 지명(地名)
이 되는 것입니다.
영주(營州)의 뜻은 ‘경영(經營)하는 주(州)’라는 뜻인데, 이는 경영(經營)하는 주체가 누구이고, 또 ‘경영되어야할
대상(對象)’에 따라 <위치>가 변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송형령(松陘嶺)은 그 뜻이 ‘소나무가 많이 우거진 지구대(地溝帶)가 있는 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산맥(山脈)이 지나가는데, 길게 영어의 유(U)자 처럼 되어 있는 지구대(地溝帶)가 있고, 그곳에 ‘소나무’
가 많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럴 경우, 이런 산맥(山脈)을 뚫고 지나가는 지구대(地溝帶)가 있을 경우, 오늘날의 지도(地圖)에는 십중팔구는
철도(鐵道)가 나있는 지역일 개연성이 큰 것입니다.
따라서 이 철도가 난 송형령(松陘嶺)을 찾고, 역(逆)으로 동남(東南)쪽 100리 - 즉 당대척(唐大尺)을 적용시키면,
(100X 532.6m=53.326Km)가 되는 곳에 영주(營州)를 찾을수 있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지명(地名)이 ‘지리적 특성’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변경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가지의 기본적인 전제(前提)를 바탕으로 해서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를 해석하도록 하겠습니다.
3. <一曰營州入安東道>의 전반부(前半部)의 해석(解釋)
① 營州西北百里曰松陘嶺,其西奚,其東契丹。
: 영주(營州)에서 서북 100리에는 송형령(松陘嶺)이 있다. 그 서쪽에는 해(奚)가 있고 그 동쪽에는 거란이 있다.
(의미해설)
‘거란 지리도’를 보면 오늘날 난하(灤河) 하구(河口)에 영주(營州)가 그려져 있습니다.
(*) 난하(灤河) 하구(河口)에 영주(營州)가 그려진 ‘거린지리도’
http://www.coo2.net/files/cc031221-1.gif
그런데, ‘소나무가 우거진 지구대(地溝帶)가 있는 송형령(松陘嶺)’은 오늘날 중국전도를 보면, 발해(渤海) 북안(北岸)
에 브이(V)자 모양의 두 산맥이 그려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즉 왼쪽의 칠로도산(七老圖山) 산맥과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산맥이 있는 것입니다.
이 브이(V)형 두개의 산맥 사이에 적봉(赤峰)이 있는 것이지요.
(*) 브이(V) 모양의 칠로도산(七老圖山) 산맥과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산맥을 볼수 있는 중국전도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그런데, 오늘날 요녕성(遼寧省) 지도를 보면, 이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산맥 아래에 조양(朝陽)이라는 도시(都市)
가 있는데, 그 좌(左)측에 건평(建平)이라는 도시(都市)가 있습니다.
이 이 건평(建平)에서 적봉(赤峰)쪽으로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산맥을 뚫고, - 서북(西北)쪽으로 (↖) 넘어가는
철도(鐵道)가 있는데, 이 철도(鐵道)가 나있는 곳을 좌계는 송형령(松陘嶺)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건평(建平)의 남(南)쪽에 보면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이라는 긴 이름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큰 기역(ㄱ)자로 발해(渤海)로 들어가는 대능하(大陵河) 주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대능하(大陵河)의
두 지류(支流) 북(北)에서 내려오는 능원(凌源)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水)와 남(南)의 건창(建昌)에서 올라오는
물(水)을 합치는 교통의 요지(要地)임을 알수 있습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이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이 바로 당(唐)나라 때의 영주(營州)로 볼 수 있습니다.
(*) 서북(西北)쪽으로 철로(鐵路)가 나있는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 - 당(唐) 나라 시대의 영주(營州)로 추정되는
곳을 볼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 지도
(*)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과 송형령(松陘嶺)으로 넘어가는 철도(鐵道)가 잘 표시된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yonyung.JPG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milpic&mode=read&num=17518
그런데, 이 송형령(松陘嶺) 다시 말하여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산맥 동쪽은 거란(契丹)이 자리잡고, 그 서쪽은
해(亥)가 자리 잡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지도에서 비정하건데, 이 송형령(松陘嶺)이 있었던 위치는 대략 요녕성(遼寧省) 건평(建平)에서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으로 넘어가는 철도 즉 ‘내몽고자치구 영성현(寧城縣)’ 까지의 지구대(地溝帶)가 있는 곳
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이 영성현(寧城縣)은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으로 부터 약 53키로 정도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영주(營州)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으로 부터 영성현(寧城縣)까지 약 53키로(당대척(唐大尺)의 100리)가 됨을 알수 있는
요녕성(遼寧省) 지도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milpic&mode=read&num=17518
② 距營州北四百里至湟水。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
: 영주(營州)로 부터 북(北)쪽으로 400리 떨어지게 되면 황수(湟水)에 이르게 된다.
영주(營州)로 부터 180리(里)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이르게 된다.
(의미해설)
그런데, 오늘날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인 당(唐) 나라의 영주(營州)로 부터 북 쪽으로 400리 즉 당대척(唐大尺)으로
계산하면, (4 X 53.26 Km = 213.04 Km)가 되는 곳까지 올라가게되면, 황수(湟水)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요녕성(遼寧省) 지도에서 213 키로 미터 정도 북(北)쪽으로 올라가면서 약간 서쪽으로 기울이면,
적봉(赤峰)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이 동류(東流)하다가 북류(北流)로 바꾸어 이것이 홍산(紅山) 수고(水庫)로 들어
갔다가 계속 북류(北流)하는 강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 강(江)의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수는 없으나, 우측(右側)의 지류(支流)는 분명히 교래하(敎來河)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를 ‘모르나 님’의 세부지도로 보면 적봉(赤峰)을 지나는 것은 노합하(老哈河)(=Lao-Ho)의 지류(支流)인 서로우하
(西路嚘河) (Hsi-lu-k̀a-Ho)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적봉(赤峰) 앞을 지내는 노합하(老哈河) 지류(支流)인 서로우하(西路嚘河)를 볼수 있는 ‘모르나 님’의 지도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0-6.jpg
그런데, 이 서로우하(西路嚘河)는 오늘날 황금하(黃金河)로 불리워지는 노합하(老哈河)이고, 또 이 노합하(老哈河)
와 교래하(敎來河)의 중간에서 맹극하(孟克河)라는 강이 있는데, 이는 교래하(敎來河)의 지류(支流)이고,
이런 교래하(敎來河)와 노합하(老哈河)가 만나서 결국에는 서요하(西遼河)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수계(水系)를
보여주는 지도가 있읍니다.
바로 ‘솟대님’의 아래의 지도입니다.
(*) 황금하(黃金河)를 지류(支流)로 하는 노합하(老哈河)와 맹극하(孟克河)를 지류(支流)로 하는 교래하(敎來河)가
만나서 서요하(西遼河)가 됨을 보여주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3/Fig_4___Chillodo_Mountain.jpg
이 지도(地圖)는 서요하(西遼河)이 수계(水系)를 또렷이 보여주고 있는데, 브이(V)자로 되어 있는 오늘날의 칠로도
산(七老圖山) 산맥과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산맥 속으로 들어가는 서요하(西遼河)의 지류들이 나타날 뿐만이
아니라, 이 브이(V)자의 산맥 속을 전혀 들어가지 않고, 서요하(西遼河)의 상류(上流)가 서납목타하(西拉木佗河)
(=시라무렌 강)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 ‘시라무렌 강’은 한자(漢字)로 서납목륜하(西拉木倫河)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는 원래 몽골어로써 ‘누런 강’이란
뜻입니다.
아무튼, 만주(滿洲)를 장악한 세력은 해안(海岸)쪽으로 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중국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요하(西遼河)를 타고, 오늘날 적봉(赤峰)이 있는 브이(V)자 모양의 산맥을 넘어 올수도 있고, 아니면,
그대로 서(西)쪽으로 가서 남하(南下)할수 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정학(地政學)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청광여도>를 보면, 이 황수(湟水)가 황수(潢水)로 표현이 되어 있어서 ‘시아무렌 강’ 즉 ‘누런 강’으로
부른 것을 한자(漢字)로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대청광여도>에 서요하(西遼河)가 황수(潢水)로 표현되어 있음을 볼수 있는 곳
http://www.coo2.net/files/dc070117-1.gif
아무튼 황수(潢水)의 황(潢)는 “수(氵)+황(黃)”이어서 ‘노란 강’임이 노골적으로 들어나는데, 황수(湟水)의 황(湟)
역시 그 뜻은 ‘우묵한 해자(垓字)’라는 것이지만, 어감(語感) 자체가 ‘노랗다’는 것은 여전히 띠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의 첫머리에서 먼저 “영주(營州)에서 서북 100리에는 송형령(松陘嶺)이 있다.
그 서쪽에는 해(奚)가 있고 그 동쪽에는 거란(契丹)이 있다.”라고 이야기 한 다음에, “영주(營州)로 부터 북(北)쪽
으로 400리 떨어지게 되면 황수(湟水)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발해(渤海)로 가는 안동도(安東道)를 설명함에 있
어서 가탐(賈耽)이 이를 처음부터 언급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발해(渤海)라는 나라가 발해(渤海)라는 ‘바다’를 신라(新羅)혹은 다른 세력에게 잠시 넘겨준다고 할지라도,
서요하(西遼河)를 타고 나오면, 얼마든지, ‘중국대륙’을 직격(直擊)할수 있음을 처음부터 상세히 설명하기 위한 것
입니다.
실제 발해(渤海)는 마도산(馬都山) 전쟁에서 당(唐)과 격돌하게 되는데, 이는 발해(渤海)가 서요하(西遼河)를 타
고서 오늘날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산맥(山脈)을 넘어서 영주(營州)를 직격할수 있는 중간 지점인 마도산
(馬都山)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 마도산(馬都山)의 개략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기사(記事)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210/060020070210.1020163309.html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이 브이(V)자로 되어 있는 산맥 역시 바로 발해(渤海)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서요하(西遼河) 즉 ‘시아무렌 강’을 장악하고 있는 만주(滿洲) 지배 세력이 중국으로 접근하는 길이 두 가지
임을 뜻합니다.
하나는 바로 ‘시아무렌 강’을 통해서 오늘날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이거나 하북성(河北省) 북안(北岸)을 직격하거
나 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해로(海路)로써 하북성(河北省)의 해안(海岸)이나 산동성을 직격하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 발해(渤海)는 건국(建國) 초기부터 이런 일들을 하였던 것입니다.
각설(却說)하옵고,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는 영주(營州)가 황수(湟水)에 이르는 것을 거론(擧論)하면서 잠깐 연군성(燕郡城)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영주동백팔십리지연군성(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
: 영주(營州)에서 동(東) 쪽으로 180리에 이르면 연군성(燕郡城)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당대척(唐大尺)으로 180리 이면, (180리(里) X 532.6미터(m)/리(里)= 95.868 키로미터(Km))가 됩니다.
즉 96키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지도에서 찾아보면, 소능하(小陵河)가 바다로 들어가기 바로 ㅣ직전(直前)에 있는
금주시(錦州市)의 오른편에서 대능하(大陵河)가 바다에 들어가기 직전(直前)에 있는 능해시(陵海市)로 비정할 수
있습니다.
(*) 연군성(燕郡城)인 능해시(陵海市)임을 볼수 있는 요녕성(遼寧省)지도
(지도(地圖)의 옆 스케일(scal)로 재어보면, 영주(營州)인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에서 능해시 까지는 약 96키로
정도 나옵니다.)
http://parkchina.com.ne.kr/map/yonyung.JPG
(*) 대능하(大陵河)와 소능하(小陵河)의 수계(水系)를 볼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3/Fig_4___Chillodo_Mountain.jpg
아무튼 영주(營州)를 거론하면서, 연군성(燕郡城)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영주(營州)에 들어오는 보급이
대능하(大陵河)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연군성(燕郡城)이 영주(營州)에 자리잡은 세력의 수군(水軍) 기지(基地)
가 될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주(營州)를 출발점으로 해서 육로(陸路)로 발해(渤海)의 수도(首都)가 있는 곳에
이르는 길을 도리기(道里記)가 이야기 했기 때문에, 영주(營州)에서 그 다음 행로가 바로 연군성(燕郡城)임을 이야기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송형령(松陘嶺) 등을 지나서 황수(潢水)가 흐르는 것을 언급한 것은 전체 지리(地理)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지, 안동도(安東道) 자체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안동도(安東道) 자체의 길은 <영주(營州) → 연군성(燕郡城)>이라는 것입니다.
③ 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也
: (이 연군성(燕郡城)으로 부터) 또 <여러(=여라(汝羅)) (배다리(=주교(舟橋))를 설치할 수 있는 선박(船舶)기지(基地)
인) 수착(水捉)들>을 지나서 요수(遼水)를 건너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까지는 500리가 된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옛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의미해설)
일단 위 문장에서 수착(水捉)이라는 ‘특이한 용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착(捉)>의 원래 뜻은 ‘잡는다’는 의미인데, 선박(船舶)의 전문용어로써 특정 부위(部位)를 뜻합니다.
즉 노(櫓)가 선체(船體)에서 밖으로 ‘뻗어나가는 윗부분’에서 수평(水平)으로 마치 ‘서까레’처럼 나와 있는 것이 있
습니다. 이를 착(捉)이라고 합니다.
이 착(捉)은 ‘밧줄’로 노(櫓)를 묶어두는 ‘수평으로 튀어나온 지주(支柱)’인 셈인데, 급류(急流)나 역류(逆流)가 있을
시 노(櫓)를 저을 때에 노(櫓)가 물(水)에 밀려서 ‘떠내려가는 한도(限度)’가 있게 함으로써 노군(櫓軍)의 힘을
절약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착(捉)이 ‘서까레’처럼 나와 있기 때문에, 그 위에 마치 ‘대들보’ 같은 현란(舷欄)을 올려다 놓을 수 있게 됩니다.
(아래 <판옥전선도>에 보면, 판옥(板屋)된 부분에 용(龍)이 그려져 있는데, 그 밑에 선장(船長)의 길이 방향으로
길게 나 있는 것이 현란(舷欄)입니다.)
(*) ‘서까레’처럼 나와 있는 착(捉) 위에 ‘대들보’ 같은 현란(舷欄)이 쳐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판옥전선도>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eafight&page=84&sn1=&divpage=1&banner=&sn=off&ss=on&sc=off&
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61
그런데, 수착(水捉)은 ‘물(水)인 강(江)’ 자체가 ‘떠내려 가는 것’을 붙들어 매는 것(=착(捉))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는 배다리(=주교(舟橋))에서 마치 ‘서까레’처럼 배(舟)를 늘어놓고, 그 ‘위’에 다리(=교(橋))를 ‘대들보’처럼
얹혀놓게 되면, 이것이 바로 수착(水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배다리(=주교(舟橋))’라고 하지않고, ‘수착(水捉)’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배다리(=주교(舟橋))는 “왕(王)의 중요한 의전(儀典) 행차(行次) 때 일시적으로 설치하고, 해산
(解散)시키는 것”이 전제(前提)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착(水捉)는 ‘고정(固定)된 장소’에서 하시(何時)라도 즉각적으로 배다리(=주교(舟橋))를 설치할수 있는
선박(船舶)기지가 있는 곳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수착(水捉)의 앞에 여라(汝羅)라는 말이 앞에 붙어있는데, 이는 한국어(韓國語) ‘여러’를 한자(漢字)로
옮긴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즉 강(江)들이 중첩되어서 있기 때문에, ‘배다리’가 있는 수착(水捉)을 육행(陸行)으로 건너면, 곧 다시 그러한
‘배다리’가 있는 수착(水捉)들이 모여 있는 것이 ‘여러 곳’이 모여있는 지역이 있을 때, 이를 통괄해서 칭(稱)하는
것이 바로 ‘여러(=여라(汝羅) 수착(水捉))’인 것입니다.
이 여라(汝羅)의 뜻을 ‘한국어(韓國語) 여러’에서 나왔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발해(渤海)로 가는 육로(陸路)인 안동도(安東道)가 있던 시절 이 발해(渤海) 해안가에 일체의 수운(水運)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신라인 아니면 발해인 밖에 없고, 이들의 수운(水運)과 선박에 대한 용어가 ‘국제적인 언어’로써 널리 쓰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여러 수착(汝羅水捉)>은 오늘날 요하(遼河)가 발해(渤海)로 들어가는 주변의 여러 강(江)들인 곳입니다.
즉 대능하(大陵河)의 연군성(燕郡城)에서 -이는 오늘날의 ‘능해시(陵海市)’입니다. - 5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옛 한
(漢)의 양평성(襄平城)이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위치’를 오늘날 지리(地理)에서 좌계는 오늘날의 무순시
(撫順市)로 보고 있습니다.
왜 ‘옛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 오늘날의 무순시(撫順市)인지에 대해서는 곧 증명하기로 하고,
일단 능해시(陵海市)와 무순시(撫順市)사이에 육행(陸行)으로 갈 경우, 건너야할 강(江)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아래 ‘솟대님’의 지도에 이런 ‘여러 수착(汝羅水捉)’이 있는 곳의 수계(水系)가 잘 들어나고 있는데,
(*) 능해시(陵海市)
(1) 대능하(大陵河)
(2) 감하(堿河) :
(참고: 이는 대능하(大陵河)와 요양하(繞陽河) ‘사이’에서 불(乀)자 방향으로 흐르는 강인데,
‘솟대님의 지도’에서 그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서, ‘모르나 님의 지도’에서 이름을 찾았습니다.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7.jpg )
(3) 요양하(繞陽河)
(*) 반산현(盤山縣)
(*) 태안현(台安縣)
(4) 쌍태자하(雙台子河)
(5) 요하(遼河)
(*) 요중현(遼中縣)
(*) 심양시(沈陽市)
(6) 혼하(渾河)
(*) 무순시(撫順市)
(*) 연군성(燕郡城)(=능해시(陵海市))에서 여러수착(汝羅水捉) 인 (1)대능하(大陵河)-(2)감하(堿河)-(3)요양하
(繞陽河)-(4)쌍태자하(雙台子河)-(5)요하(遼河)-(6)혼하(渾河)를 지나야 무순시(撫順市)(=안동도호부인 양평성
(襄平城))에 이를 수 있음을 볼 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는 <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분명한 것은 이 때의 요수(遼水)는 분명히 오늘날의 요하(遼河)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도시(都市) 이름 자체’가 위 문장에는 없지만, 그 다음에
<府,故漢襄平城也>이라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옛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인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까지 연군성(燕郡城)으로 부터의 거리가 500
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연군성(燕郡城)이 “오늘날 능해시(陵海市)이고, 이곳으로 부터 500리면 도대체 오늘날 지리(地理)에서 어디인가?”
하는 것을 먼저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500리면 당대척(唐大尺)으로 (500 리(里) X 532.6 미터(m)/리(里)=266,300미터(m)=266.3 0키로미터(Km))가 됩니다.
그런데, 연군성(燕郡城)인 오늘날 능해시(陵海市)에서 양평성(襄平城)인 무순시(撫順市)까지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지도에서 직선(直線)으로 재게 되면, 약 230키로 정도 나옵니다.
(요녕성(遼寧省)지도의 우하단(右下端)에 스케일(scale)이 있습니다.)
(*) 연군성(燕郡城)인 오늘날 능해시(陵海市)로 부터 직선(直線)으로 230 키로 미터(Km) 떨어진 곳에 무순시(撫順市)
가 있음을 살필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yonyung.JPG
따라서 원래 당대척(唐大尺)으로 266.3 키로미터 걸리는 곳에 오늘날 무순시(撫順市)가 ㅣ있으므로, 양평성(襄平城)
은 이 무순시(撫順市)에서 동(東)쪽으로 약 36.3키로 간곳 즉 서류(西流)하는 혼하(渾河)와 서북류(西北流)하는
소자하(蘇子河)가 만나서 오늘날 대화방(大伙房) 수고(水庫)를 형성하는 곳으로 볼수 있습니다.
(*) 고대의 양평성(襄平城)인 무순시(撫順市) 동쪽의 ‘대화방(大伙房)수고(水庫)’를 볼 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즉 연군성(燕郡城)인 오늘날 능해시(陵海市)에서 500리 떨어진 ‘옛 한(漢)의 양평성’은 오늘날의 무순시(撫順市)
동쪽에 있는 대화방(大伙房) 수고(水庫)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산은 능해시(陵海市)로 부터 무순시(撫順市)로 가는 길을 평지(平地)의 직선(直線)ㅇ로 계산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강(江)가의 평지(平地)이기 때문에, 돌 필요가 없고, 또 실제의 행정(行程)인 능해시(陵海市)→
반산현(盤山縣)→태안현(台安縣)→요중현(遼中縣)→심양시(沈陽市)→무순시(撫順市)로 가는 길은 거의 직선(直線)
이긴 하나,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는(∪+∩) 웨이브(wave)가 있긴 하나,
옛 사람의 지리감각으로써는 500리에서 더 늘어나게 할 정도는 아닌 것입니다.
(*) <능해시(陵海市)→반산현(盤山縣)→태안현(台安縣)→요중현(遼中縣)→심양시(沈陽市)→무순시(撫順市)>가 이런
(∪+∩) 모양으로 웨이브(wave)지긴 하나 직선(直線)에 가까움을 알수 있게 하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따라서 “연군성(燕郡城)에서 양평성(襄平城)까지 500리(266.3Km)가 된다.”는 것에서 우리는 연군성(燕郡城)이 오늘
날 능해시(陵海市)이고, 양평성(襄平城)이 무순시(撫順市) 동쪽의 대화방(大伙房) 수고(水庫)라고 비정(比定)하는
것은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 내용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서 이 ‘옛 한(漢) 양평성(襄平城)의 위치’를 정확히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는 이 양평성(襄平城)을 원점(原點)으로 해서
무려 4개의 중요힌 지점(地點)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1) 동남(東南)쪽으로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는데, 800리가 된다. (東南至平壤城八百里)
(2) 서남(西南)쪽으로 도리해구(都里海口)까지 600리가 된다. (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
(3) 서(西)쪽으로 건안성(建安城)에 이르는데, 300리가 된다. 이는 옛 중곽현(中郭縣)이다.
(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
(4) 남(南)쪽으로 압록강(鴨綠江) 북(北)쪽의 박작성(泊汋城)까지 700리가 된다. 이는 옛 안평현(安平縣)이다.
(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 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4개의 문장을 모두 만족(滿足)시키는 곳에 양평성(襄平城)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이는 위 4개의 문장이 “양평성(襄平城)으로 비정하는 도시(都市)의 <제약조건>이 됨을 뜻합니다.
그런데, 4개의 제약조건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이 “(4) 남(南)쪽으로 압록강 북(北)쪽의 박작성(泊汋城)까지 이르
는데,700리가 된다.(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라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에는 박작성(泊汋城)이 등장하는데,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서 발해(渤海)의 도읍(都邑)이 있는
곳으로 해행(海行)으로 가는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도 박작구(泊汋口)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박작구(泊汋口)는 물(水)의 입구(入口)임은 틀림없으나, 박작호(泊汋湖)의 입구인지, 아니면 박작하(泊汋河)의
입구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호수(湖水)이름과 강(江)의 이름이 같은 경우는 오히려 드뭅니다.
경박호(鏡泊湖)가 있다고 경박수(鏡泊水), 경박하(鏡泊河), 혹은 경박강(鏡泊江)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목단강(牧丹江)이 있는 것을 통해서 그 예가 되겠습니다.
박작구(泊汋口)를 ‘박작호(泊汋湖)의 입구’ 혹은 ‘박작하(泊汋河)의 입구’라는 두가지 가능성을 두고 도리기(道里記)
의 원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압록강(鴨綠江) 입구(入口)로 부터 배를 타고 100여리를 가서 ‘작은 쌍동선(雙胴船)(=소방(小舫))’으로 갈아타서
동북(東北)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를 30리를 하게 되면, ‘박작하(泊汋河) 혹은 경박호(鏡泊湖)의 입구(入口)’에
도달하게 된다. 이곳이 발해(渤海)의 경계이다.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
그런데, 위 문장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압록강구(鴨綠江口)라는 표현입니다.
이 문장은 많은 사람들이 매우 ‘강(江)의 입구(入口)’와 관련해서 오해하는 대표적인 문장이기도 합니다.
강구(江口)는 ‘바다(=해(海))에서 강(江)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강(江)이 대하(大河)에서 지류(支流)가
합류(合流)하는 것도 강구(江口)라고 칭하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혼강(渾江)이 압록강(鴨綠江)과 만나는 입구(入口)인 ‘혼강구(渾江口)’가 바로 ‘압록강구(鴨綠江口)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대척(唐大尺)으로 100리이면 53.26 키로미터입니다.
따라서 혼강(渾江)으로 100여리 즉 약 60 키로 정도 올라가면, 배를 갈아타야하는 강이 나타나고, 이것이 박작하
(泊汋河)인데, 동북(東北)쪽으로 30리 즉 (30리(里) X 532.6 m/리(里)=15.978 Km=약 16 Km)가 되기 때문에, 16
키로미터 동북쪽으로 가면 박작구(泊汋口)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강(渾江)은 마치 영어의 씨(C)자 모양으로 합류하기 때문에, 백여리(약 60키로 정도)되는 곳은 오늘날의
환인(桓因=(회인(懷仁))이 되는 것입니다.
또 혼강(渾江)이 동북(東北)으로 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은 실제로 오늘날의 지도에서도 이 환인(桓仁)에서 부터
동북(東北)쪽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 물을 박작하(泊汋河)라고 칭하였던 것이라고 추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는 오늘날 환인수고(桓仁水庫)가 있는 곳인데, 이 수고(水庫)가 만들어지기 전에 고대(古代)에도 역시
어떤 호수(湖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호수 이름을 박작호(泊汋湖)라고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날의 ‘환인수고’가 똑같이 고대에 있었다면 이를 “환인호(桓仁湖)라고 칭해야하는가?
아니면 회인호(懷仁湖)라고 칭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원래 회인(懷仁)이란 지명인데, 일제(日帝) 시절에 환인(桓仁)으로 고쳤음은 분명한 듯 합니다.
그런데, 일제(日帝)가 “원래 회인(懷仁)이란 도시(都市) 이름을 ‘환국(桓國)에 대한 기억’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의도
적으로 환인(桓仁)으로 고쳤는지? 아니면 이칭(異稱)으로 내려오는 환인(桓仁)을 취해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일단 좌계는 이를 지금 환인현(桓仁縣)이라 칭하고 있고, 또 이 도리기(道里記)의 긴 글을 통해서 고대에 이곳에
거대한 호수(湖水)가 있었고, 이 호수가 ‘환(桓)-문명’의 핵(核=인(仁))이라는 관점에서 환인호(桓仁湖)이라고 부르
기로 합니다.
현지(現地)에서는 최근 환룡호(桓龍湖)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 ①압록강구(鴨綠江口)인 혼강구(渾江口)와 ②여기서 북(北)으로 100여리(약 60키로) 떨어진 환인(桓仁)을 볼
수 있고, ③ 환인(桓仁)에서 부터 상류(上流)가 동북(東北)쪽으로 놓여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지도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milpic&mode=read&num=17518
아무튼, 이런 박작구(泊汋口)가 발해(渤海)의 강역(疆域)이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박작성(泊汋城)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서 안동도(安東道)를 설명하는 글에는 “(양평성(襄平城)으로 부터) 남(南)쪽
으로 압록강(鴨綠江) 북(北)쪽의 박작성(泊汋城)까지 700리가 된다. (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향에서 남(南)이라고 하면, 정남(正南)에서 20도 까지는 동(東)으로 치우쳐져있거나 서(西)로 치우쳐
있어도 허용이 됩니다.
그러나 정남(正南)에서 45도 정도까지 동(東)으로 치우쳐 있거나, 혹은 서(西)로 치우쳐져 있을 경우,
이를 절대로 남(南)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남(東南) 서남(西南)이란 표현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옛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 오늘날 무순시(撫順市) 이서(以西)에는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무순시(撫順市)에서 동남(東南)쪽이면, 바로 혼강(渾江)과 압록강(鴨綠江)이 만나는 압록강구(鴨綠江口)가
정확히 되기 때문입니다.
(*) 무순시(撫順市)에서 동남(東南)쪽에 압록강구(鴨綠江口=혼강구(渾江口))가 있음을 볼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이런 이야기는 ‘옛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 무순시(撫順市) 동쪽의 대화방(大伙房) 수고(水庫)에 있으되 그 정확
한 위치가 혼하(渾河)와 소자하(蘇子河)가 마치 꺽쇠(<)처럼 만나는 곳 주변에 있었을 개연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
니다.
그런데,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서 안동도(安東道)는 당(唐)나라의 사신(使臣)이 육로(陸路)로 영주(營州) -
즉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으로 부터 출발하여서 오늘날 경박호(鏡泊湖)인 홀한해(忽汗海) 근처의 발해(渤海) 왕성
(王城)까지 가는 노정(路程)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하(遼河) 입구에서 경박호(鏡泊湖) 부근으로 ‘최근거리’로 육로(陸路)로 가는 방법은 바로 혼하(渾河)를
타고 올라가서 오늘날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의 경계를 넘어서서 휘발하(輝發河)의 원류(原流)인 류하
(柳河)를 타고, 다시 휘발하(輝發河) 그리고 송화강(松花江)으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현실 지도를 보아도, 이 길보다 더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 발견이 되지를 않습니다.
(*) 혼하(渾河)-(요녕성,길림성 경계)-류하(柳河)-휘발하(輝發河)-송화강(松花江)이 요하(遼河) 입구(入口)에서
경박호(鏡泊湖)에 이르는 ‘최단거리’임을 볼 수 있는 ‘솟대 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위 지도’는 송화강(松花江)까지는 수계(水系)가 표시되지만, “그 다음에 경박호(鏡泊湖)까지 어떻게 이어
지는가?”가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표현되어 있는 또 다른 ‘솟대님의 지도’가 있습니다.
‘아래 지도’를 보면, 휘발하(輝發河)가 송화강(松花江)과 합류해서 오늘날 송화호(松花湖)를 형성하기 직전(直前)에
표하(漂河)라는 강이 등장하는데, 이 표하(漂河)는 흥미있게도 대평정산(大平頂山: 1283미터) 남쪽을 통과해서
목단강(牧丹江)과 연결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목단강(牧丹江)은 자연스럽게 경박호(鏡泊湖)로 들어감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표하(漂河)는 인공호수인 송화호(松花湖)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수위(水位)가 올라와서 송화강(松花江)
과 목단강(牧丹江)을 연결하게 됨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표하(漂河)가 흐르는 곳은 그 지역이 낮은 ‘골짜기’로 되었기 때문에, 송화호(松花湖)가 만들어졌을 때에
물이 흐를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당(唐)의 사신이 발해(渤海)로 갈 때에, “과연 오늘날과 같은 송화호(松花湖)가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입
니다.
이는 나중에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를 처음부터 다시 해석할 때에 다시 살펴보게 되는 문제이지만, 분명히 있었
습니다.
즉 발해(渤海) 시절에는 오늘날의 송화호(松花湖)를 현주호(顯州湖)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현주호(顯州湖)의 현(顯)은 ‘나타내다, 드러내다’라른 의미입니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숨었던 통로(通路)가 드러내도록 하는 호수(湖水)’이고, 이는 다분히 표하(漂河)가 송화강
(松花江)가 목단강(牧丹江)을 연결하도록 하는 것과 관련해서 현주(顯州)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
니다.
중요한 것은 휘발하(輝發河)-송화강(松花江)-표하(漂河)-목단강(牧丹江)-경박호(鏡泊湖)가 거의 거의 별(丿)자
방향으로 직선(直線)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휘발하(輝發河)-송화강(松花江)-표하(漂河)-목단강(牧丹江)-경박호(鏡泊湖)>가 직선으로 놓여져 있음을 볼
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11922829221.jpg
위 ‘솟대님의 지도’를 그 앞의 지도와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①혼하(渾河)-(막일홍산(莫日紅山: 1013미터) 남(南)쪽
- ②류하(柳河)-③휘발하(輝發河)-④송화강(松花江)-(대평정산(大平頂山:1283미터) 남(南)쪽 - ⑤표하(漂河)-
⑥목단강(牧丹江)-경박호(鏡泊湖)에 이르는 과정이 신기하게도 별(丿)자 방향으로 거의 직선(直線)으로 놓여 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동반도에서 강(江) 옆을 따라서 육로(陸路)로 갈 경우, 발해(渤海)의 수도가 있는 홀한해(忽汗海) 즉
경박호(鏡泊湖)로 감에 있어서 이런 6개의 강을 따라가는 방법 이외의 최단거리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무순시(撫順市) 동쪽의 대화방(大伙房)수고(水庫)가 ‘옛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임은 더욱 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4.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와 삼중소도(三重蘇塗), 이를 에워싸는 천리장성(千里長城)
그런데,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등장하는 문장인 <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也>은 많은
오해(誤解)의 원천(源泉)이 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의 뜻은 “요수(遼水)를-이는 요하(遼河)를 의미합니다.
-건너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500리이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옛 한(漢)의 양평성이다.” 입니다.
가. 도호부(都護府)와 총독부(總督府)는 어찌 다른가?
먼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호부(都護府)와 총독부(總督府)가
어찌 다른지?”에 대해서 명확한 구분을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총독부(總督府)이든 도호부(都護府)이든지 점령군(占領軍)이 주둔(駐屯)하면서 일종의 ‘흡수 통합’을 하기 위한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을 칭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唐)은 그당시 고구리(高句麗)를 단독으로 점령을 한 것이 아니라, 신라(新羅)와 연합을 해서 점령을
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총독부(總督府)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이 도호부(都護府)를 운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동맹(同盟)을 맺은 신라(新羅)가 ‘소도(蘇塗)’를 국가권력 보다 상위(上位)에 놓는 국제기구 역할까지 담당한
나라였기 때문에, 더욱더 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성격은 달라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점령국(被占領國)의 백성들이 여전히 준(準)-천독(天毒)으로써 존중받아야하는 권리가 있음을 점령국
(占領國)인 신라 자체에서 지킬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상한 특성때문에, 소도(蘇塗)를 왕권(王權)보다 더 우월하게 생각하는 나라와 연맹(聯盟)을 하게 된 경우,
도호부(都護府)의 성격은 총독부(總督府)의 개념하고는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일단 들 수 있는 특징이 “도호부(都護府)의 치소(治所)가 유난히 자주 이동(移動)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6번 정도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이동한 것은 확실합니다.
(아래의 글에서 ‘위치 비정’은 좌계는 찬성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6번 이동한 것을 보여주는 글
http://shaw.egloos.com/1828258
그런데, 이런 도호부(都護府)의 이동 현상은 오늘날 사학자(史學者)들은 점령국(占領國)과 피점령국(被占領國)의
유민(遺民)들의 ‘알력’ 때문이라는 전제(前提)를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점령국(占領國)이 ‘소도(蘇塗)’를 중심으로 해서 배달화백(倍達和白)으로써 피점령국(被占領國)의
백성들의 ‘정치적인 권리’를 오히려 존중하는 차원의 순방체제를 따르고 있을 때 더욱더 도호부(都護府)가 이동하는
정도가 심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한사군(漢四郡)입니다.
‘운영자 컬럼’에서 한사군(漢四郡)이 자리잡았던 지역(地域)을 비정한 곳은 오늘날 <산서성-하북성-산동성>에 걸친
광대한 곳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 참고 : 아래의 지도는 이 싸이트(site)의 ‘운영자 칼럼’에서 <(역사왜곡 분쇄) 한사군에 대한 정부의 공식입장
'한반도내 없음' - 6> 속에 있는 것을 옮긴 것입니다.(*)
(*) 한사군(漢四郡)이 광범위하게 옮겨다녔음을 볼 수 있는 지도
http://www.coo2.net/files/wang090510-1.gif
먼저 위 지도에는 <온양후-추저후-획청후-기후-평주후>라는 속칭 한사군(漢四郡)을 담담한 ‘준(準)-제후(諸侯)’가
자리잡은 지역이 총괄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지역(地域) 자체가 사실은 부여(夫餘)의 점령지(占領地)라는 것입
니다.
사마천의 조선열전(朝鮮列傳)을 읽어보아도, 당시 한(漢)은 멸망(滅亡)에 이를 정도의 대패배를 했고, <부여(夫餘)-
고조선(古朝鮮) 연합군>이 이 지역을 총괄해서 점령(占領)하되, 당시 피점령국(被占領國)이던 한(漢)나라의 ‘황제
(皇帝) 직속(直屬)’으로 되어 있는 군(郡)에서 해외(海外)로 투자하는 한인(漢人)들을 대거(大擧) 배치(配置)할수
있는 타협으로 설치된 것이 한사군(漢四郡)이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역사’의 첫 틀(frame)을 만든 사람들이 총독부(總督府)의 용역(用役)을 받아서 연구하는 습관 때문
에, 총독부(總督府) 체제에만 익숙해서 한사군(漢四郡)이 식민지(植民地)라고 규정하는 ‘황당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승전(勝戰)을 하고, 식민지(植民地)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학문(學問)의 세계에서 ‘과감한 상상력’이 존중된다고
하지만, 지나치게 황당합니다.
아무튼 한사군(漢四郡)이 “왜 이다지도 광범위하게 이동하는 현상을 띠게 되는가?” 하는 이유는 극히 간단합니다.
첫째는 배달화백을 운영하는 주체(主體)인 천독(天毒)들이 ‘회의장(會議場)’을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안전보장이 잘되고, 정보(情報)-써비스(service)할 뿐만 아니라,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그때마다 지정
(指定)한 곳에서 ‘배달화백’이 열리는 회의장(會議場)이 선택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점령국(被占領國)이었던 한(漢)나라의 황실(皇室)이 임명한 대리(代理)-천독(天毒)들 입장도 고려
해서 그들이 불안(不安)해 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배달화백이 열리는 장소가 그때마다 변경이 되었기 때문에,
한사군(漢四郡) 점령지는 ‘풍부한 선택성’을 주기 위해서 역시 한사군(漢四郡)은 넓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역시 신라(新羅)의 천독(天毒)들의 선택권은 물론, 고구리(高句麗) 유민
(遺民)들의 ‘참여한 배달화백’을 개최할 때, 고구리 유민과 신라의 천독(天毒)들의 입장을 존중하기 위해서 그 때
마다 도호부(都護府)가 이들에게 가장 안전보장(安全保障)이 확보되고, 정치적 권리에 대한 써비스(service)를 원할
하면서도 접근성(接近性)이 편리한 곳을 택하다보니,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이동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道里記②>:기점(起點)인 양평성(襄平城)과 ‘삼겹 소도’
나. 삼중(三重)으로 소도(蘇塗)가 설치되어 있는 요동반도(遼東半島)
그런데,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옛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다.(府,故漢襄平城也)”는 말에서 한(漢)이란
나라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를 의외로 사학자(史學者)들은 깊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이 ‘옛 한(漢)의 양평성(襄平城)’이 절대로 유방(劉邦)세운 중국(中國)의 한(漢)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때의 한(漢)은 유방(劉邦)이 건국한 한(漢)나라가 아니라, 해모수(解慕漱) 성제(聖帝)께서 세운 환중국(環中國)
즉 ‘중국(中國)을 에워싸는’ 전(前) 가락국(駕洛國)과 북부여(北夫餘)를 합친 ‘나라’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부여(北夫餘)와 전(前)-가락국(駕洛國)’을 합쳐서 부를 때의 명칭인 것입니다.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나오는 이른바 ‘옛’이란 의미의 <고(故)>가 붙는 것은 모두 해모수(解慕漱) 성제께서
세운 한(漢)의 성곽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中國)의 한(漢)나라는 부여(夫餘)의 점령지인 하북성의 한사군(漢四郡) 밖으로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무튼, 똑같은 <한(漢)>이란 글자를 쓰기 때문에, 나중에 이를 대한국(大漢國)이라고 구분해주기도 하였지만,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과는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평성(襄平城)의 양(襄)의 뜻은 ①‘높은 곳에 오르다’ ②‘돕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가지 의미를 합치면,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돕다’는 뜻이고, 여기에 평(平)을 평이(平易)로 보면 양평성
(襄平城)은 ‘높은 곳에 평이(平易)하게 오르도록 돕는 성(城)’이란 뜻을 지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이 양평성(襄平城)이 무순시(撫順市) 동쪽의 대화방(大伙房) 수고(水庫)가 있는 지역이라는 것
입니다.
대화방(大伙房)의 화(伙)는 ‘①불(火) ②세간(살림살이 물품) ③패거리’이란 뜻을 지니고 있고, 과(伙)로 읽을 때에는
‘넉넉하다’라는 지니는 글자입니다.
그런데, 이 화(伙)라는 글자는 배달화백(倍達和白)을 할 때에 곡옥(曲玉)을 본위화폐로 해서 ‘호수(湖水)위에 띄운
연등(蓮燈)’이란 이미지(Image)를 준다는 것입니다.
한자(漢字)로 보면 <인(亻)+화(火)>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정치적 권리의 불(火)’이란 함의(含意)를 역시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화방(大伙房)은 ‘크게 배달화백의 정치적 권리의 불(火)을 밝히는 방(房)’이란 의미를 띤다고 하겠습니다.
원래 오늘날 무순시(撫順市) 동쪽에 새로운 수고(水庫)를 만들 때에 ‘원래(原來) 이 주변에 전래(傳來)되는 지명(地名)’
을 옮겨서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慣例)이기 때문에, 이런 명칭 자체가 까마득한 옛날에 이곳에서 오늘날과 마찬
가지로 인공호수(人工湖水)를 마련했을 가능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솟대 선생’의 글 가운데, ‘임고타林古打는 건주建州려진 치소 노추성奴酋城일대인 포아랍佛阿拉’이란 글이
이 싸이트(site)의 자유게시판에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깜짝놀랄만한 이야기가 적혀있는데, 그것은 “청(淸) 태조 누르하치(奴酋)의 첫 도성인 계번성界蕃城의
위치는 소자하(임고타천林古打川)와 혼하상류(납록하)가 합쳐지는 두물머리로 아래위성사진의 위치입니다.”라고
소개하면서 이런 사실이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의 ‘아방강역고’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깜짝놀란 만한 이야기’가 되는 것은 이 계번성(界蕃城) 위치가 바로 양평성(襄平城)이기 때문입니다.
(*) 양평성(襄平城)이자, ‘누르하치’의 첫 도성인 계번성(界蕃城)에 대한 ‘솟대님의 고증(考證)에 의한 위성사진’
http://www.coo2.net/bbs/data/con_4/1188896943castle_jiebo.png
그런데, ‘솟대님의 위 글’이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이 계번성(界蕃城) 근처에 바로 ‘누르하치’의 집(=노추가(奴酋家))이
-이를 ‘포아랍(佛阿拉)’이라고도 하는 듯 합니다. - 있을 당시의 건주(建州)가 바로 이곳이라는 것입니다.
즉 ‘솟대 선생’은 아래의 <그림 2. 1595년 건주建州려진에 조선의 사신으로 다녀온 남부주부(南部主簿) 신충일
(申忠一)의 보고서를 옮긴 청淸 태조太祖 누르하치의 임고타林古打(포아랍佛阿拉)거주 당시의 건주建州지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 신충일(申忠一)의 보고서를 옮긴 건주(建州) 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Map_4_Numbering___GunJu_Journey_Document.jpg
위 ‘건주(建州) 지도’에는 ‘파란 원(圓)’이 조가(朝家)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 이는 ‘유목민(遊牧民)들이 파오(Pao)
형태로 된 조정(朝廷)’이 있는 곳을 뜻합니다.
47로 표시한 곳에 노추가(奴酋家)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누르하치의 집’ 즉 황실(皇室)이 있던 곳을 뜻합니다.
그런데, 위 ‘신충일(申忠一)의 건주(建州) 지도’를 보면, 소자하(蘇子河)와 혼하(渾河)가 합류하는 지점에 30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이는 추호대(酋胡臺) 즉 ‘누르하치의 대(臺)’가 있었던 곳을 뜻하는데, 이를 ‘솟대 선생’께서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습니다.
(*) 추호대(酋胡臺)에 대한 설명문(說明文) 옮김 (*)
30) 酋胡臺加可奴酋世居此部今移林古打十年
“추호대酋胡臺 거주지, 노추奴酋때 이 부部에 거주하였다가 지금의 임고타林古打로 옮긴 지 10년이다.”
역시 ‘대臺’는 ‘돈대墩臺’를 뜻함
원래의 설명문(說明文)은 이 대(臺)를 - 치성(雉城) 처럼 ‘튀어 나온 성곽(城郭)’인 돈대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이 대(臺)가 사실은 흥경(興京)이라 칭할 정도로 큰 성(城)임을 그 대음의 설명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D. 1585년(?) ~ 1587년 : 임고타천林古打川중류 북안北岸 추호대酋胡臺, 후대後代 이칭異稱 흥경노성興京老城
[현 영릉진永陵鎭 치소
즉 소자하(蘇子河)와 혼하(渾河)가 합류하는 지역이 바로 흥경(興京)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곳이 ‘청(淸)이 일어나는(=흥(興)) 서울’ 즉 흥경(興京)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이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주 웅변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는 지도(地圖)인 것
입니다.
(*) 추호대(酋胡臺)에 대한 설명문(說明文) 옮김. 마침 (*)
그런데, 위 ‘신충일(申忠一)의 건주(建州)지도’를 보면, 노추가(奴酋家)에서 불(乀)자 방향으로 길게 나있는 소자하
(蘇子河) 밑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유차질치동남(由此疾馳東南) 삼일가달(三日可達) 대길호보(大吉號堡)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곳을 따라서 말(馬)을 질주(疾走)하면 삼일(三日)이면 닻기 때문에, ‘대길(大吉)’이라고 부르는 보(堡= 작은 성(城)))
이 있다.”
이는 오늘날의 지도를 볼 때에 소자하(蘇子河)의 원류(源流)가 있는 곳에서 ‘고개’를 넘게 되면, 부이강(富爾江)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이 부이강(富爾江)은 혼강(渾江)의 중요한 지류(支流)인 것입니다.
따라서 혼강(渾江)과 연결이 되면 자연히 강물을 따라가면 압록강(鴨綠江)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물론 위 문장에서 “삼일(三日)이면 도달할 수 있다.”라고 말한 그 대상은 바로 조선(朝鮮)의 수도인 한양(漢陽)을
뜻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신충일(申忠一)은 조선(朝鮮)의 신하인지라, “삼일이면 도달할수 있기 때문에 대길(大吉)이라고 부르는 ‘작은
성(城)’이 있다는 그 대상이 바로 한양(漢陽)이라고 글로 쓰는 것은 기휘(忌諱=꺼리낌)가 되어서 쓰지 않는 것이
그당시 예의(禮義)인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소자하(蘇子河)-부이하(富爾河)-혼강(渾江)-압록강(鴨綠江)을 말을 달려서 접근할 수 있음을 잘
말해주고 이는 것입니다.
(*) 대화방(大伙房)-소자하(蘇子河)-부이하(富爾河)-혼강(渾江)-압록강(鴨綠江)의 강변으로 한반도로 진출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는 ‘솟대 님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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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는 결국 대한국(大漢國)의 양평성(襄平城)이 매우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중요한 요충지(要衝地)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혼하(渾河)를 타고 가면 류하(柳河)-휘발하(輝發河)-송화강(松花江)으로 연결되어서 만주(滿洲)의 중추지대로 나갈
수 있는 동시에, 소자하(蘇子河)를 타고 가면 부이강(富爾江)-혼강(渾江)-압록강(鴨綠江)으로 연결되어서 한반도로
나갈수 있고, 또 혼하(渾河)의 강흐름을 따라서 내려가면, 그대로 요동반도로 갈수가 있기 때문에, 요충지(要衝地)
중의 요충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화방(大伙房) 수고(水庫)>이 있는 곳의 고대(古代) 다시 말하여 대한국(大漢國) 시절때에 이곳
에 ‘갑문(閘門)을 여러개 설치한 인공호수(人工湖水)’가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겠는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료가 있습니다.
그것이 <북사(北史) 고리열전(高麗列傳)>입니다.
(*) <북사(北史) 고리열전(高麗列傳)>옮김 (*)
① 其國,東至新羅,西度遼,二千里;
: 고구리(高句麗)는 동(東)으로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西)로는 요(遼)를 (기점(起點)으로) 2,000리를 제도(濟度)
하였다.
② 南接百濟,北鄰靺鞨,一千餘里.
: 남(南)쪽으로는 맥제(百濟)와 접(接)했으며, 북(北)쪽으로는 말갈(靺鞨)과 선린(善隣)하여 (말갈(靺鞨)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부터) 일천여리를 (그 경계(境界)로) 하였다.
③ 人皆土著,隨山谷而居,
: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을 모두가 ‘해운(海運)하는 선박이 육지에 옮겨지는 수륙양용(水陸兩用)’의 토착(土著) 생활
을 하였기에 , 산(山)과 계곡(溪谷)을 따라서 거주(居住)하였다.
④ 衣布帛及皮.土田薄瘠,蠶農不足以自供,
: 옷을 만드는 베와 비단, 나아가 가죽은 ‘땅과 밭이 척박하여서 자급자족하기 부족하였고, 잠업(蠶業)과 농업(農業)
역시 그러하다.
⑤ 故其人節飮食.其王好修宮室,
: 그러므로 고구리 사람들은 음식(飮食)을 절약하고, 그 나라 왕(王)은 (태행산맥 주변에 댐(dam)과 갑문(閘門)
-부두(埠頭)를 갖춘) 궁실(宮室)을 짓고, 수리(修理)하기를 즐겨했다.
⑥ 都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城內唯積倉儲器,備寇賊至日,方入固守.王別爲宅於
其側,不常居之.
: 도읍(都邑)을 평양성에 두었는데, 이를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칭했는데, 동서(東西)의 길이가 6리에 이르르는데,
산(山)을 따라서 굽이쳐 있다. 남쪽으로는 패수(浿水)를 내려다 본다.
성(城)안에 음식창고와 동시에 여러 무기시설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서, 적(賊)을 대비하였는데, 적병(賊兵)이
오는 날에는 들어가서 굳게 지키는 방도(方途)로 삼았다.
왕(王)은 별도의 궁궐이 그 옆에 있어서 (이 성(城)안에 못 들어갔었는데, 그나마) 이 장안성(長安城)의 별도의 궁궐
에 항상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⑦ 其外復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其國中呼爲三京.
: 그 이외에도 다시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었는데, 역시 ‘호수(湖水)를 중심으로 펼쳐진 소도(蘇塗)’라는
별도(別都)가 있었다.
이 나라에는 이 평양성(平壤城)과 국내성(國內城), 한성(漢城)을 삼경(三京)이라고 칭했다.
⑧ 復有遼東、玄菟等數十城,皆置官司以統攝.
: 다시 요(遼)의 동(東) 쪽과 (역시 별도(別都)들이) 있었는데, 현토(玄菟) 등의 (지역(地域)에)수십 개의 성(城)이 있었
는데, 모두 (‘댐(dam)을 바탕하는 궁궐(宮闕)을 짓고’ 이를 관리하는) 궁사(宮司)를 두어서 이를 통섭(通攝)게 하였다.
(*) <북사(北史) 고리열전(高麗列傳)> 해석 옮김. 마침 (*)
위 북사(北史) 고리열전(高麗列傳)에서는 ‘갑문(閘門)이 설치된 인공호수(人工湖水)를 만들어서 선박(船泊)이 올라올
수 있는 것’을 궁실(宮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궁실(宮室)이 요동(遼東)에도 있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동(遼東)의 개념이 사서(史書)에서는 주로 3가지의 의미로 쓰인다는 점입니다.
(1) 하나는 청장하(淸漳河)의 원류(源流)가 나오는 오늘날 좌권현(左權縣)이 바로 ‘지리 구획선’으로 여겨서 이
<요(遼)-지리 구획선>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요동(遼東)을 쓰는 경우가 있고,
(2) 또 하나는 오늘날 난하(灤河)를 요수(遼水)로 보면서 그 동쪽이라는 의미로 요동(遼東)을 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난하(灤河)를 요수(夭壽)로 언급한 대표적인 사서(史書)는 고리도경(高麗圖經)입니다.)
(3) 그리고 오늘날 요하(遼河) 동쪽을 요동(遼東)이라고 칭한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위 북사(北史) 고리열전(高麗列傳)에서는 이미 오늘날 태행(太行)산맥의 산록(山麓)에 궁실(宮室)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였기 때문에, 부유요동(復有遼東)은 (2)의 난하(灤河) 동(東) 쪽인 브이(V)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
칠로도산(七老圖山) 산맥과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산맥에 있는 성곽이 궁실(宮室) - 즉 ‘갑문(閘門)을 설치한 인공
호수(人工湖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조선(古朝鮮)의 왕험성(王險城)이 있었던 오늘날 창려(昌黎)에 있었던 명해(溟海)라는 자연호수
(自然湖水)입니다.
이 창려(昌黎)는 분명히 오늘날 난하(灤河) 우측에 있고, 이 난하(灤河)는 우측의 칠로도산(七老圖山) 산맥을 벽(壁)
으로 흘러 내리는 것입니다.
(*) 창려(昌黎)에 명해(溟海)라는 이름의 자연호수(自然湖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대청광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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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高句麗)의 성(城)을 이야기하면서 고조선(古朝鮮)의 왕험성(王險城)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이상하게도 이
왕험성(王險城)을 ‘평양성(平壤城)’이라고 말하면서 바로 그 옆에 요동성(遼東城)이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이야기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고구리 평양성(平壤城)이 옛날의 대륙택(大陸澤)이란 호수(湖水)가 있음을 떠올리고, 또다시 요양시
(遼陽市)도 평양(平壤), 그리고 환인(桓仁)도 평양(平壤)이라고 표현된 사료(史料)를 보면서, “고대에는 ‘호수(湖水)’
가 - 그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었던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인지는 불물하고 - 있으면서 ‘국제평화’를 배달화백을
열어서 주도하는 도시(都市)일 경우, 이를 평양성(平壤城)으로 부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좌계는 굳히고 있습
니다.
따라서 명해(溟海)를 지니고 있는 이를 표현하자면 창려(昌黎)-평양성(平壤城)이라고 일단 이름 지어서 다른 평양성
과 구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요동성(遼東城)은 오늘날 난하(灤河) 바로 우측(右側)에 있으면서, 창려(昌黎)-평양성을 -이는 고조선
(古朝鮮)의 왕험성(王險城)을 뜻합니다.- 지키면서 ‘왕(王)의 전투지휘권’이 있는 성(城)인 듯한 느낌을 가집니다.
(계속 검토하고 있는 사항이긴 하지만, 고구리(高句麗)의 한성(漢城)이 바로 이 창려(昌黎)-평양성 즉 왕험성(王險城)
이라고 좌계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수계(水系)를 보면, 이 명해(溟海)의 수원(水源)은 바로 양하(洋河)입니다.
(이는 양하(洋河)수고(水庫)가 있는 것을 통해서 잘 알수 있습니다.)
그 좌측에 난하(灤河)의 중요한 지류(支流)인 청룡하(靑龍河)에서 물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창려(昌黎)-평양성(平壤城) 즉 한성(漢城)은 청룡하(靑龍河)와 양하(洋河)의 두 가지 물을 합류시키는 명해
(溟海)를 지닌 궁실(宮室)이었던 것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요동성(遼東城)은 ‘요수(遼水)즉 난하(灤河)의 동쪽에 있는 성(城)’이란 의미이고,
이 성(城)은 난하(灤河) 동쪽에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 난하(灤河) 지류인 청룡하(靑龍河)와 양하(洋河)가 합류되어 명해(溟海)를 더욱더 강화시킬수 있음을 볼 수
있는 수계(水系)가 나타난 ‘솟대님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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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날 칠로도산(七老圖山) 산맥과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산맥에서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선박이 올라
올수 있는 궁실(宮室)’을 만들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사(北史) 고리열전(高麗列傳)에서는 궁실(宮室)이 ‘다시 요동(遼東)에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수십성
(數十城)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일단 요동반도(遼東半島)에 이러한 ‘고구리 궁실(宮室)’이 반(半)이상은 있었
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갑문(閘門)들을 설치해서 선박이 올라오는 인공호수(人工湖水)를 만듬으로써
배달화백(倍達和白)이 열리는 것이 가능하도록 한 인물로 후세에 그 흔적을 보이고 있는 분은 해모수(解慕漱) 성제
(聖帝) 이외에도 한분이 더 있습니다.
바로 고조선(古朝鮮)의 2대 단군이 되신 부루(扶婁) 태자(太子)이십니다.
이는 현장지리에서 태자하(太子河)라는 명칭이 매우 오래전부터 전(傳)해져 내려옴을 통해서 눈치 챌 수 있는 것
입니다.
오늘날 중국(中國)은 태자하(太子河)의 어원(語源)에 대해서 진시황(秦始皇)에게 자객(刺客)을 보낸 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으로 추정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燕)나라가 요동반도에 진출한 역사적 흔적을 좌계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부루(扶婁)태자는 일단 우(禹)임금 때의 홍수(洪水)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 치수(治水)의 명인(名人)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태자하(太子河)는 놀랍게도 요동반도 위에 있는 천산산맥(千山山脈)의 주봉(主峰)인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6미터) 북쪽에서 발원(發源)해서 서류(西流)하다가 요양시(遼陽市)에 와서 별(丿)자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고 긴
강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도를 보면, 태자하(太子河)가 거의 수평(水平)으로 나있는 곳에 요양시(遼陽市)와 본계시(本溪市)
사이에 ‘거대한 참와(參窩) 수고(水庫)’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부루(扶婁) 태자께서 오늘날의 참와(參窩) 수고(水庫)가 있는 곳에 선박이 올라올 수 있는 갑문
(閘門)을 설치하고, 이곳에 거대한 인공호수인 참와호(參窩湖)를 만들었던 어떤 기억이 이 참와(參窩)라는 수고(水庫)
이름에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와(窩)는 ‘굴(窟)’, ‘움집’등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참와(參窩)의 의미는 “움집까지도 모두 참여(參與)하는”이란 이상한 뜻이 있는데, 이는 고대에 댐(dam)을
만들고 ‘배달화백을 운영하였던 기억’이 없는 한, 현지(現地)에 남아있기 힘든 명칭인 것입니다.
(*) 태자하(太子河)가 수평으로 된 요양시(遼陽市)-본계시(本溪市) 사이의 참와(參窩) 수고를 볼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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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요양시(遼陽市)에서 동(東)쪽으로 40키로 정도 가면 본계시(本溪市)가 있는데, 본계(本溪)의 뜻은 ‘근본된
계곡(溪谷)’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이런 이상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 본계시(本溪市)를 향하여 정북(正北)으로 문자(文字) 그대로 ‘매우 가느다란 강’ 즉 세하(細河)가 흘러
들어오는데, 그 연원은 흑산(黑山: 1181미터)입니다.
이 세하(細河)가 바로 본계(本溪)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북극성(北極星),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있는 쪽을 향하여 정북(正北)으로 흐르는 강을 매우 신성
(神聖)시 여겼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북두칠성이 천인(天人)들이 모여서 배달화백을 하는 ‘하늘의 호수(湖水)’이듯이 이곳에 ‘배달화백을
하는 호수(湖水)’를 만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더군다나 부루(扶婁) 태자는 도호(道號)를 ‘북극(北極) 수정자(水精子)로 쓰고 계신 분입니다.
좌계는 전설(傳說)은 ‘간과(看過)되거나 혹은 매몰(埋沒)된 역사적 사실(fact)’에 대한 조명(照明) 장치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루(扶婁) 태자께서 ‘공인(公認)받는 큰 업적’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북극(北極) 수정자(水精子)’라는 도호(道號)를
썻다고는 볼 수가 없고, 또 실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치수(治水)의 업적 없이 우(禹)임금에게 대홍수를
다스리는 방법을 전수(傳受)하였을 시, 우(禹)임금이 “과연 이를 신뢰하고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루(扶婁) 태자께서 “세하(細河)인 본계(本溪)를 태자하(太子河)와 합류(合流)해서 참와호(參窩湖)를 만들
어서 ‘움집에 사는 모든 민초(民草)까지 참여할 수 있는 배달화백을 열었다.”는 전설이 충분히 깃들 수 있는 장소인
것이고, 이런 면에서 이곳의 강 이름이 태자하(太子河)로 전해져 내려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특히 백산(白山) - 태백산(太白山) 즉 백두산(白頭山)을 뜻합니다. - 위에 천지(天池)가 있듯이, 흑산(黑山: 1181
미터)의 물이 북류(北流)해서 ‘움집에서도 참여하는’ 참와호(參窩湖)를 형성한다는 것은 좋은 대비(對比)가 되기
때문에, 이를 실제로 태자(太子) 부루(扶婁)께서 이곳에 궁실(宮室)을 만들었을 개연성은 더욱더 큰 것입니다.
또 <북극(北極) 수정자(水精子)>를 한문(漢文)의 감각으로 보면, “북극수(北極水) 즉 ‘북극(北極)으로 가는 물(水)인
오늘날 세하(細河)가 정(精) 즉 그 엣센스(essence; 본질)가 뭉치게 한 분’이란 의미를 띄기 때문에, 더욱더 참와호
(參窩湖)를 만드신 분이라는 가설(假說)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오늘날 수고(水庫)란 말을 붙일 때에는 <참와(參窩)수고(水庫)>라고 하지만, 호(湖)를 붙일 때에는
본계호(本溪湖)라고 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태자하(太子河)는 거대한 강임에 비해서 본계(本溪)자체는 문자 그대로 세하(細河)인데, 이를 본계호(本溪湖)로
부르는 것 자체가 ‘북쪽으로 흐르는 강’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 태자하(太子河)의 원류(原流)가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미터)에서 발원하여서 서류(西流)하고 있
는데, 이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에서 발원해서 동류(東流)해서 오늘날 환인(桓仁) 수고를 형성하는 혼강(渾江)과
합수되어서 이윽고 다시 이곳이 압록강(鴨綠江)에 합류되는 매우 놀라운 지형적 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극(北極) 수정자(水精子)라는 도호(道號)를 쓰는 분이 이런 모든 수계(水系)와 지리적 특성을 최대한 살려서 참와
호(參窩湖)를 만들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이 요동반도(遼東半島) 주변에서 훗날 발생하는 ‘역사의 미스테리’를 규명
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상상력이 되는 것입니다.
일단 태자하(太子河)가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에서 서류(西流)한다면, 반대로 이 노독정자산에서 동류(東流)하는
강(江)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나 님’의 만주지도에서 세부(細部)지도를 찾아보면, 이 강(江)이름이 ‘크게 두 갈래가 합쳐져서 흐르는
강(江)’이란 의미로 대이하(大二河)라고 칭하는 강임을 알게 됩니다.
흥미있는 것은 태자하(太子河) 원류와 이 대이하(大二河) 원류가 모두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북쪽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북(北)쪽에서 태자하(太子河)와 대이하(大二河)가 반대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확인
할수 있는 ‘모르나 님의 지도’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태자하(太子河)를 따라서 말(馬)을 타고 계속 상류(上流)로 올라가면,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 1325미터)를 넘지 않고, 손쉽게 다시 대이하(大二河)를 타고 갈수 있는 구릉(丘陵) 사이가 있고, 이 대이하(大二河)
는 오늘날 환인(桓仁) 수고(水庫)를 형성하는 영어의 씨(C)자처럼 흐르는 혼강(渾江)을 통해서 압록강(鴨綠江)으로
나올수 있는 길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 <태자하(太子河)-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미터)-대이하(大二河)-환인(桓仁)수고>를 볼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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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는 마치 ‘해모수(解慕漱) 성제(聖帝)의 대화방(大伙房) 소도(蘇塗)’가 혼하(渾河)의 흐름 반대편에
소자하(蘇子河) 상류로 가서 다시 부이강(富爾江)-혼강(渾江)-압록강(鴨綠江)으로 연결되어 이런 ‘강(江)들의 연결
되는 선(線)을 따라서’ 말(馬)을 질주(疾走)할 수 있는 교통로가 있듯이 똑같은 교통로가 있음을 알수가 있는 것입
니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동반도(遼東半島)에 삼중(三重)으로 소도(蘇塗)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 맨 외곽(外郭)은 바로 ‘해모수(解慕漱) 성제(聖帝)의 대화방(大伙房) 소도(蘇塗)’로써 그 강(江)은 혼하(渾河)-
대화방호(大伙房湖)-소자하(蘇子河)-부이강(富爾江)-혼강(渾江)-압록강(鴨綠江)으로 연결되어서 요동반도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양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2) 그 다음은 ‘부루(扶婁) 태자(太子)의 참와(參窩) -소도(蘇塗)’로써 태자하(太子河)-참와호(參窩湖)-노독정자산
(老禿頂子山)-대이하(大二河)-혼강(渾江)-압록강(鴨綠江)으로 연결되어서 요동반도를 (1)의 안쪽에서 또 한번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그 다음이 웅악하(熊岳河)와 벽류하(碧流河)를 내부(內部)-해자(垓字)로 하는 ‘문무왕(文武王)의 철관성
(鐵關城) 소도’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동반도(遼東半島)에는 놀랍게도 3개의 소도(蘇塗)가 삼중(三重)으로 겹쳐있는 구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무왕의 철관성(鐵關城) 소도(蘇塗)’를 제외하고, ‘해모수 성제의 대화방(大伙房) 소도(蘇塗)’와 ‘부루(扶婁)
태자의 참와(參窩) 소도(蘇塗)’에는 묘한 공통성이 있음을 눈채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발해(渤海)로 직접흐르는 순류(順流) 즉 ‘해모수 성제의 대화방(大伙房) 소도(蘇塗)’의 경우에 혼하(渾河),
또 ‘부루(扶婁)태자의 참와(參窩) 소도(蘇塗)’의 경우에 태자하(太子河) 반대쪽으로 흐르는 강 - 이를 반류(反流)로
이름 짓는다면, 이 반류(反流)은 모두 혼강(渾江) 특히 환인(桓仁) 수고(水庫) 근처로 해서 이윽고 압록강(鴨綠江)으로
들어가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 ① (대호방수고) 소자하(蘇子河)-부이강(富爾江), ② (참와수고) 대이하(大二河)가 환인(桓仁)수고 - 압록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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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특징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요동반도의 삼중소도(三重蘇塗)가운데 가장 안(內) 쪽에 있는 ‘문무왕의 철관성
(鐵關城) 소도’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문무왕의 철관성(鐵關城) 소도’는 ‘해모수 성제의 대화방(大伙房) 소도’와 ‘부루(扶婁) 태자의 참와(參窩) 소도’
와 대조적(對照的)인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호수(湖水)와 포구(浦口)’를 갑문(閘門)을 설치하여 인위적(人爲的)으로 형성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매우 안정스러운 만(灣)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복주만(復州灣)과 호로산만(葫蘆山灣)은 장흥도(長興島)와 서중도(西中島), 봉명도(鳳鳴島)의 세 섬(島)이 둘러
쌓여서 해풍(海風)을 막아주는 벽(壁)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요동반도 안에서 길게 복주하(復州河)가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이 복주만(復州灣)과 호로산만(葫蘆山灣)
에서 ‘배달화백’을 하기는 환경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무왕(文武王)의 철관성(鐵關城) 소도’는 웅악하(熊岳河)와 벽류하(碧流河)를 내부(內部) 해자로 삼고,
그 외곽의 산(山) 꼭대기를 서로 연결하여 철관성(鐵關城)을 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모수 성제의 대화방(大伙房) 소도’나 ‘부루(扶婁)태자의 참와(參窩) 소도’와는 반대로 인위적(人爲的)
으로 만든 것은 산(山) 꼭대기를 연결하는 철관성(鐵關城)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위적으로 만든 철관성(鐵關城)은 웅악하(熊岳河) 위에 있는 개주시(蓋州市) 남쪽으로 흐르는 신개하
(新開河)의 - 이는 서남류(西南流)하는 청하(淸河)와 서북류(西北流)하는 개주하(蓋州河)를 합친 강 이름입니다.
- 남쪽에 있는 면양정자산(綿羊頂子山: 1045미터)을 중심으로 서(西)쪽으로 철관성(鐵關城)을 쌓아야만이 웅악하
(熊岳河)를 내부 해자로 삼을수 있습니다.
또 벽류하(碧流河)를 내부 해자로 삼기 위해서는 보운산(步云山: 1129미터) 에서 발원해서
오늘날 장하시(莊河市) 우측으로 남류(南流)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영나하(英那河)의 좌측 - 즉 보운산(步云山)에서
석성도(石城島)를 향한 낮은 산(山)들 위를 연결하여서 철관성(鐵關城)을 만들어야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철관성 소도’의 외부(外部) 해자는 신개하(新開河)와 영나하(英那河)가 되는 것입니다.
(*) ‘아래의 네 가지 사항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① <자연적 대형 포구(浦口)> : 복주만(復州灣), 호로산만(葫蘆山灣)과 복주하(復州河), ② <내부(內部) 해자(垓字)>
웅악하(熊岳河)와 벽류하(碧流河)
③ <외부(外部) 해자(垓字)> 신개하(新開河)와 영나하(英那河)
④ <철관성(鐵關城)> 면양정자산(綿羊頂子山: 1045미터), 보운산(步云山: 1129미터)과 석성도(石城島)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즉 ‘문무왕(文武王)의 철관성(鐵關城) 소도’는 요동반도의 삼중소도(三重蘇塗) 가운데, 산(山)을 연결하는 인위적
(人爲的)인 철통같은 관성(關城)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무왕(文武王)의 철관성(鐵關城)’이 놓였던 흔적을 두 산(山) 이름에서 그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외부 해자 역할을 하는 신개하(新開河)와 내부 해자(垓字) 역할을 하는 웅악하(熊岳河) ‘사이’에 수평(水平)으로 놓여
진 철관성(鐵關城)을 바탕은 면양정자산(綿羊頂子山: 1045미터)인데, - 이 면양정자(綿羊頂子)란 말 자체가 ‘양(羊)
의 정수리처럼 이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관성(關城)을 쌓았음을 느끼게 하는 명칭입니다.
또 내부 해자(垓字)인 벽류하(碧流河)와 외부 해자(垓字)인 영나하(英那河) ‘사이’에서 수직(垂直)으로 놓여지는 관성
(關城)은 보운산(步云山: 1129미터)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운산(步云山)의 원래 명칭은 보무산(步霧山) 이었는데, 이렇게 지어진 까닭은 고대(古代)에 벽류하
(碧流河) 우측과 오늘날 장하시(莊河市) 우측에서 남류(南流)하는 강인 영나하(英那河) 좌측(左側) ‘사이’에서 ‘얕은
산맥’이 이어지고, 이 능선(稜線) 위로 ‘걸을 수 있는 관성(關城)이 있고, 이 위를 걸을 때에, 요동반도 남쪽의 해풍
(海風)과 벽류하(碧流河)와 영나하(英那河)의 영향으로 안개(=무(霧))가 많이 낀 것에서 유래한다고 추측을 할수
있습니다.
이 역시 보무산(步霧山)이란 이름 자체에서 철관성(鐵關城)이 있었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날 보운산(步云山)을 ‘바탕’으로 해서 수직(垂直)으로 놓인 관성(關城)은 밑에 놓이지게 되는 산(山)들이
점점 낮아지게 마련인데 그 남 쪽 끝은 광명산(光明山)이었고, 바다에서는 석성도(石城島) 였음을 추측케 하는
지명(地名)들이 오늘날도 남아 있습니다.
(*) 영나하(英那河)를 확인할 수 있는 ‘모르나 님의 지도’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j51-3.jpg
(*) 장하시(莊河市) 좌측에 (305번 도로(道路))에 광명산(光明山)이 있고, 그 맞은 편에 석성도(石城島)가 있음을
보여주는 요녕성(遼寧省)지도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milpic&mode=read&num=17518
결국 오늘날의 요동반도에는 매우 특이하게도 삼중소도(三重蘇塗)가 쳐져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것은 이른바 ‘고구리(高句麗)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이라고 칭하는 것이 놀랍게도 ‘요동반도’의
삼중소도(三重蘇塗)의 외곽(外廓)을 또 한번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고구리(高句麗)의 천리장성’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이 싸이트(site)의 ‘운영자 칼럼’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에 3가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첫번 째는 ‘해모수 성제의 대화방(大伙房) 소도’와 ‘부루(扶婁) 태자의 참와(參窩) 소도’가 자리잡은 도시 이름이
선명(鮮明)하게 드러나는 ‘천리성 지도’입니다.
즉 심양시(沈陽市) 오른편에 무순시(撫順市)와 본계시(本溪市)가 모두 ‘천리장성’ 안(內)에 있음을 잘 나타내는
지도 입니다.
(*) 무순시(撫順市)와 본계시(本溪市)가 모두 ‘천리장성’ 속에 있음을 드러내는 지도
http://www.coo2.net/files/ju030431-1.gif
(2) 두번 째는 흥경(興京) 즉 ‘해모수(解慕漱) 성제의 대화방(大伙房) 소도’가 있는 곳에서 동북(東北) 쪽으로(↗)
으로 길게 (류하(柳河))-휘발하(輝發河)가 나가는 것이 그려져 있는 지도 입니다.
이점이 중요한 것은 ‘천리장성’의 동북(東北)쪽은 오늘날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의 경계(境界)를 타고
장성(長城)이 형성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만주(滿洲) 지역의 산맥의 흐름은 모두 별(丿)자 방향으로 흐르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날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의 경계 부분이 높아서 분수령(分水嶺) 역할을 하는데, 이 분수령(分水嶺)을 연결하여서 천리장성
동북(東北)쪽을 연결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면서도, 무려 16개의 이 천리장성의 문(門)이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 지도입니다.
이는 이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외적(外敵)을 막는 장성(長城)’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삼중소도(三重蘇塗)로 접근
하는 길을 많이 지닌 아시아(Asia) 최대의 소도(蘇塗)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봅니다.
(*) 흥경(興京), 휘발하(輝發河) 장성(長城)의 동북(東北)쪽이 분수령(分水嶺)을 연결하였음과 16개의 문(門)이
있음을 보여주는 지도
http://www.coo2.net/files/jang030724-1.gif
(3) 세번 째는 이 천리장성(千里長城)이 ‘고구리(高句麗)가 쌓은 것’과 ‘고리(高麗)가 쌓은 것’을 구분해주는 지도입
니다.
생각컨데, 고구리(高句麗)장성은 고구리 사람들이 쌓고, 또 고리(高麗)장성으로 표시된 부분은 신라 사람들이 쌓았
으나, 이것이 낙후(落後)되어 고리(高麗) 사람들이 쌓은 것으로 좌계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 고구리 장성과 고리 장성을 구분해주는 ‘천리장성 지도’
http://www.coo2.net/files/gojang030328-2.gif
각설(却說) 하옵고,
천리장성은 아무튼 관경사국(管境四國) 중의 ‘하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성(城)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중소도(三重蘇塗)를 통해서 동(東) 아시아(Asia)의 평화를 ‘배달화백’이라는 직접민주주의로써 천독
(天毒)들이 직접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그 흔적으로써 매우 중요한 유산(遺産)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중국(中國)의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아주 대조적인 것이 바로 이 삼중소도(三重蘇塗)를 지키는 요동(遼東)의 천리
장성(千里長城)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만리장성은 외적(外敵)에 대해서 배타적인 반면, 천리장성은 외적(外敵)이라고 할지라도 직접민주주의로써 평화
를 공참(共參)하게 설계할 수 있는 삼중소도(三重蘇塗)를 지키는 성인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 천리장성(千里長城)은 놀랍게도 관경사국(管境四國)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삼중소도
(三重蘇塗)임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여순(旅順)인 매초성(買肖城) 전역(戰役)은 비록 삼중소도(三重蘇塗)에 ‘군사지휘권’을 가진 세력이
유일하게 들어올 수 있는 지역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를 당(唐)이 장악한 것을 문무왕(文武王)께서 천보노(千步弩) 포차(抛車)를 동원해서 격멸하고, 인류역사
상 최대의 군마(軍馬)를 획득한 것의 의미는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즉 ‘삼중소도(三重蘇塗)에 대한 당(唐)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排除)시키는 역사상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이후로 당(唐)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여러 번 옮기게 되는데, 최후(最後)로 오늘날 무순시
(撫順市) 동쪽의 대화방호(大伙房湖) - 즉 해모수(解慕漱) 성제(聖帝)의 소도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다는
사실은 ‘배달화백’에 의해서 발해(渤海)가 탄생하는 것을 인정하는 절차(節次)를 밟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이끌어낸 것은 통일신라였다고 좌계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가설(假說)이긴 하지만, 이런 가설(假說)이 중요한 것은 ‘발해(渤海)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될 동안, 왜 당(唐)과
신라(新羅)가 가만히 방치하고 있었는가?!“를 해명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라(新羅)는 천리장성으로 되어 있는 “삼중소도(三重蘇塗)에서 고구리(高句麗)가 발해로 부활하는 것을 적극적
으로 도왔다.”는 것이고, 이런 면에서 당(唐) 역시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당(唐)은 대화방호(大伙
房湖)인 양평성(襄平城)에 최후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둘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唐)에서도 발해(渤海)을 ‘고구리(高句麗)’가 다시 태어난 나라라는 의미로 <고리발해(高麗渤海)>로 칭하고,
해행(海行)으로 발해 수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
니다.
이제 원래의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의 해석을 나가기로 합니다.
지금까지는 아래 문장의 (나)부분의 의미를 자세히 해설한 것입니다.
③ (가)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나)府,故漢襄平城也
: (가) 또 여러 수착(汝羅水捉)을 지나 요하(遼河)를 건너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있는 곳 까지 (연군성(燕郡城)
으로부터 -이는 능해시(陵海市)입니다. -) 500리가 걸린다.
안동도호부는 옛 대한국(大漢國)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즉 (나)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들어선 오늘날 무순시(撫順市) 동쪽의 대화방호(大伙房湖)가 대한국(大漢國)의
양평성(襄平城)임을 해설한 것입니다.
즉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가운데, 오늘날 대화방호(大伙房湖)인 이 양평성(襄平城)이 발해 지역으로 넘어
가는 가장 ‘빠른 길’이고, 또 요동반도(遼東半島) 주변의 핵심 지역과의 까지의 거리를 재는 원점(原點)즉 기점(起點)
이되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화방호(大伙房湖)가 중요한 것은 이 ‘위치’가 혼하(渾河)를 타고 오늘날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의
경계의 분수령(分水嶺)을 넘으면서도도 가장 빨리 만주(滿洲) 지역으로 갈수 있는 고속도로(高速道路) 임을 잊지 말
아야합니다.
문제는 이 고속도로에 설치된 대화방호(大伙房湖) - 이 ‘화’를 ‘과’로도 읽습니다. - 혹은 ‘대과방 수고’가 있는 곳에
들어오는 혼하(渾河)의 상류(上流)의 이름이 납록하(納綠河)라는 점입니다.
(*) 대화방호(大伙房湖) 상류(上流)가 ‘납록하(納綠河)’임을 표기한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1188896943castle_jiebo.png
납록하(納綠河)의 뜻은 납(納)이 헌납(獻納), 납입(納入)이란 말에서 보다시피 ‘바치다’, ‘들어가다’의 의미이기
때문에, 쉽게 설명해서 <압록강(鴨綠江)에 들어가는 강하(江河)>라는 뜻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혼하(渾河)도 ‘압록강(鴨綠江)’임을 뜻합니다.
이는 나중에 살펴보다시피, 실제 조선조(朝鮮朝)가 외부 집단과 늘 국경(國境)을 가장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진정한
국경(國境)임을 뜻합니다.
매우 특이한 것은 만주(滿洲) 지역에서 일어난 세력들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해서 천자국(天子國)이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대화방호(大伙房湖) 즉 대한국(大漢國)의 양평성(襄平城)에로 흐르는 납록하(納綠河) 즉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강’인 오늘날 혼하(渾河)를 ‘완전히 점령’한다고 할지라도, 한반도에 거점을 둔 세력에 대해서 매우 특이한
지정학적(地政學的)인 고려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고리조(高麗朝)나 조선조(朝鮮朝)에 대해서 모두 만주(滿洲)에서 일어난 세력은 그것이 요(遼)나라이건 금(金)
아라 이건 원(元)이건, 청(淸)이건 상관없이 절대로 오늘날의 단동(丹東)-신의주(新義州) ‘사이’로 황해(黃海)에 들어
가는 압록강(鴨綠江) 이남으로 바싹 압박하기를 오히려 꺼려했다는 점입니다.
왜냐?
만주(滿洲)에서 일어난 세력이 중국대륙을 차지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만주(滿洲)의 느넓은 지역에 ‘자신들의 세력’
이 희석(稀釋)되어서 약화(弱化)되고, 이 지역이 대륙(大陸)에 진출하는 ‘모판’이 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안동도(安東道)로 이어지는 고속도로(高速道路)를 계속 견제(牽制)할 수 있는 세력이 ‘남아있기를’ 오히려 더 원하
였던 것입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안동도(安東道)는 오늘날의 혼하(渾河)-(분수령(分水嶺))-류하(柳河)-휘발하(輝發河)-송화강
(松花江)-표하(漂河)-목단강(牧丹江)-경박호(鏡泊湖)로 거의 직선(直線)으로 가로지르는 만주의 수로(水路)로된
고속도로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속도로(高速道路)에 늘 ‘참여하면서도’ 격렬하게 대륙을 장악한 자기세력에 대해서 타협할 줄도 아는
측 - 즉 우리민족이 계속 반(半)만 장악하면서, 만약의 사태 때 새로 일어나는 세력에 대해서 견제(牽制)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지정학적(地政學的)인 고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혼하(渾河)가 그 상류의 이름이 납록하(納綠河)이고, 그 의미가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강하’인지라,
또 다른 압록강(鴨綠江)임과 관련해서 이 지역의 지정학적(地政學的)인 특성이 우리민족하고 관련해서 “왜 계속
같은 매랙‘을 보여주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주(滿洲)의 하이웨이(high-way)로 자신들이 중국대륙으로 뻗은 이후에, 새로운 다음 타자(打字)가 등장할 때에
이를 늘 하이웨이(high-way)의 특성을 알면서 새로운 세력에 대해서도 견제(牽制)를 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독식
(獨食)하지 못하도록 ‘잔류(殘留)되는 기지(基地)’를 늘 확보하는 그런 배려를 지정학적으로 항시 배려하는 곳이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제국(帝國)을 경영함에 있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하는 핵심 지정학적(地政學的) 원리로 생각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오늘날 혼하(渾河)로 일컬어지는 ‘또 다른 압록강(鴨綠江)’의 지정학적(地政學的) 비밀(秘密)인 것입
니다.
<道里記③> 환인(桓仁)평양성 ‘위’에 있었던 박작호(泊汋湖)
5.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 위에 있었던 박작호(泊汋湖)
가탐의 도리기(道里記)는 발해(渤海)로 가는 길이 두 가지 - 즉 안동도(安東道)와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로 설명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기점이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오늘날 해모수(解慕漱) 성제께서 만드신 소도(蘇塗)인 대화방호
(大伙房湖)이고, 이는 대한국(大漢國) 시절부터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돕는’ 양평성(襄平城)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점(起點)인 “양평성(襄平城)에서 동남(東南) 쪽으로 800리를 가면 평양성(平壤城)이 있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과 박작성(泊汋城)
1)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18년<19년 (409년)>에 만들어진 독산성(禿山城)!
즉 도리기(道里記)의 안동도(安東道)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는 것입니다.
④ 東南至平壤城八百里;
동남(東南)쪽으로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는 데에는 800리이다.
(의미해설)
일단 800리이면, 당대척(唐大尺)으로 1 리(里)가 532.6m 이기 때문에, (500리(里) X 532.6미터(m)/리(里) = 266,300
미터(m)=266.3 키로미터(Km))가 됩니다.
그런데, 양평성(襄平城) 즉 혼하(渾河)와 소자하(蘇子河)가 합류하는 대화방호(大伙房湖)에서 동남(東南)쪽이면
이는 소자하(蘇子河)의 원류를 따라서 올라 가다고, 부이강(富爾江)을 따라서 오늘날의 환인(桓仁) 수고(水庫)로 가는
방향입니다.
문제는 이 소자하(蘇子河)가 두 갈래의 지류(支流)가 마치 시옷(ㅅ)자 처럼 합쳐져 있는데, 오른쪽의 강 이름은
소자하(蘇子河) 본류(本流)이고, 왼쪽의 지류(支流)는 태자하(太子河)가 흘러나오는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
미터)쪽에서 북류(北流)하는 강이라는 것입니다.
이 강의 이름을 ‘모르나 님의 지도’에서 찾아보면 석인구(石人泃)로 되어 있습니다.
구(泃)가 ‘여울’이기 때문에, 석인구(石人泃)의 원류(源流)에는 자연석이든 인공으로 되어 있든지 간에 ‘돌 사람
(=석인(石人))’이 서 있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석인구(石人泃)란 강(江)이 중요한 것은 그 시원(始源)에서 조금만 더 가면 태자하(太子河) 원류(源流)와 자연히
이어진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해모수 성제의 대화방(大伙房)소도’와 ‘부루(扶婁) 태자의 참와호(參窩湖) 소도’가 육로(陸路)로 자연스럽게
이어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석인구(石人泃)가 흘러오면서도 태자하(太子河)의 원류(源流)가 되는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미터)
주변은 두 개의 소도(蘇塗)- 즉 대화방(大伙房) 소도와 참와호(參窩湖) 소도를 연결시키는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임을 알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북쪽 지역은 환인(桓仁)수고로 들어가는 2개의 동류(東流)하는 강이 모두
발원(發源)하는 곳입니다.
보다 북(北)쪽에서 부이강(富爾江)에 들어가는 강의 이름이 추류하(酋流河)이고, 보다 남(南)쪽에서 오늘날 환인현
(桓仁縣)으로 들어가는 강의 이름이 대이하(大二河)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게 되겠지만, 오늘날의 환인(桓仁)-수고(水庫)는 관경사국(管境四國) 시절에 <신라(新羅)의
평양성(平壤城)>인데, 이곳은 환인호(桓仁湖)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거대한 호수(湖水)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북쪽 지역은 ① 대화방호(大伙房湖)로 연결될수 있는 소자하(蘇子河)의 지류(支流)
인 석인구(石人泃)와 ② 참와호(參窩湖)로 연결될 수 있는 태자하(太子河)와 ③ 환인호(桓仁湖)로 연결될수 있는
북(北)쪽의 추류하(酋流河)와 남(南)쪽의 대이하(大二河)가 그 시원(始源)이 서로 사통오달(四通五達)할수 있는
지역인 것입니다.
(*)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북쪽 지역에서 3개의 소도(蘇塗)의 원류(源流)들인 ①소자하(蘇子河)의 석인구(石人泃)
②태자하(太子河) ③추류하(酋流河)와 대이하(大二河)가 사통오달(四通五達)할수 있음을 볼 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이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에 <독(禿)>이란 글자가 들어가는데, 고구리(高句麗)의 성(城) 가운데, 독산성
(禿山城)이 있습니다.
나중에 요사(遼史) 지리지(地理志) 동경도(東京道)에 언급된 요양(遼陽)-평양성(平壤城)을 설명할 때, 상세히 언급이
되겠지만,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께서는 오늘날 요양시(遼陽市)를 ‘배달화백을 할수 있는 인공호수의 도시’로 만
듭니다.
그런데, 과정에서 오늘날의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북쪽에 무려 4개의 강(江)의 시원이 사통오달(四通五達) 하는
곳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곳에 독산성(禿山城)등 6개의 성(城)을 세운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리본기 광개토왕
(廣開土王) 18년<19년(409년)>에 등장합니다.
[원문(原文)]
十八年 夏四月 立王子巨連爲太子 秋七月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八月 王南巡
: 18년<19년(409년)> 여름 4월에 왕자 거련(巨連)으로 태자를 삼았다. 가을 7월에 ‘나라 동(東)쪽에 독산(禿山)등의
6개 성(城)을 축조하고 평양성(平壤城) 민호(民戶)를 이주(移住)시켰다.
8월에 왕(王)은 남쪽으로 순수(巡狩)하시었다.
그런데, 이주시킨 평양성(平壤城) 사람들은 바로 오늘날 하북성 안국시-진주시에 걸쳐있는 고대의 대륙택(大陸澤)
위에 있는 장안성(長安城)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 평양성(平壤城)을 뜻합니다.
고구리(高句麗)는 주 중심을 오늘날 하북성(河北省)에 두었기 때문에, 동(東)쪽에 높은 산(山)이 있는 지역이 있기
힘듭니다.
오직 천리장성으로 감싸고 있는 요동반도의 삼중소도(三重蘇塗)가 오직 동(東)쪽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산성(山城)
이 있을수 있는 지역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과 <독(禿)>자를 같이 쓰는 산(山)은 이곳 이외에는 찾기 힘듭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태왕께서 “이 독산(禿山) 주변에 6개의 성(城)을 쌌음에 있어서 평양의 민호(民戶)를 이주시켰
는가?” 그 이유는 극히 간단합니다.
대륙택(大陸澤)에서 배달화백을 하는 것에 익숙하고 “이를 어찌 협조해야되는지?”를 고구리 평양성 사람들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날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북쪽에 독산성(禿山城) 뿐만 아니라, 무려 이 삼중소도(三重蘇塗) 속에 태왕
께서는 무려 다른 5가지의 성(城)을 쌓을 정도로 이곳을 중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5개의 성(城) 가운데, 사서(史書)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성(城)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요양시
(遼陽市)인 요양(遼陽)-평양성(平壤城)입니다.
이 요양(遼陽) 평양성(平壤城)은 나중에 아주 상세하게 다루게 되기 때문에, 일단 접어두고,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으로 가는 길부터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합니다.
대화방호(大伙房湖)의 소자하(蘇子河) 본류(本流)는 그 시원(始源)쪽으로 올라가서 그 끝- 모양은 자세히 보면 그
기역(ㄱ)자로 꼬부라져 있습니다.
묘(妙)한 것은 부이강(富爾江) 자체가 와이(Y)자 모양으로 두 갈래의 강이 합쳐져 있기 때문에, 이 기역(ㄱ)자 모양의
소자하(蘇子河) 본류(本流)를 ‘떠받치듯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남(東南)쪽의 평양성(平壤城)으로 가려면 도대체 어느 부이강(富爾江) 갈래로 가야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오른편의 부이강(富爾江)인데, 이 강이 본류(本流)입니다.
왼편의 부이강의 지류(支流) 이름을 ‘모르나 님의 지도’에서 찾아보면 그 이름이 추류하(酋流河)로 나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자하(蘇子河) 본류가 기역(ㄱ)으로 꺽이는 부이강(富爾江)의 허리에서 이 강(江)을 따라가는 것을
선(線)을 그어보면 동남(東南)쪽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환인(桓仁)-수고(水庫)>가 놓이기 전(前)에 있었던 “인위적으로 갑문(閘門)을 설치하여 압록강
에서 배(船)를 타고 올수 있는 ‘거대한 환인호(桓仁湖)’ 어느 쪽에 평양성(平壤城)이 있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요녕성 지도를 보면 환인현(桓仁縣)에서 ‘환인수고’ 아래에서 혼강(渾江)을 동남(東南)쪽으로 건너서 약 20
키로 가면 이붕전자(二棚甸子)라는 마을이 나타나고, 그 동(東)쪽에 원래 사평가(四平街)였던 마을이 사평(四平)으로
축약된 곳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이붕전자(二棚甸子)의 뜻이 <‘두 시렁(선반)’이 있는 경기(京畿)지방>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전(甸)는 도성(都城)이 있는 곳에서 사방 500리를 나타내는 말이고, 이는 후(後)에 경기(京畿) 혹은 기내(畿內)라는
말로 변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붕(二棚)인데, 이는 갑문(閘門)을 2개 설치하고, 그 위에 도로(道路)를 놓았던 과거의 기억이 전해지는 명칭
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또 사평가(四平街)는 ‘사해(四海)를 평화스럽게 하는 거리’라는 뜻인데, 이 역시 평양성(平壤城)에 잘 어울리는 말인
것입니다.
(*) 요녕성 지도에서 환인수고(桓仁水庫) 아래에 -환인현(桓仁縣) 동남(東南)쪽- “이붕전자(二棚甸子)와 사평(四平)”
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곳.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좌계가 볼 때에는 이곳이 바로 고대의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입니다.
고대의 환인호(桓仁湖)에서 이를 유지관리하는 사람들이 갑문(閘門)을 철거하고, 댐(dam)의 방죽들을 해체한후에
- 이 시점이 통일신라 시대인지, 고리(高麗)시대의 어느 시기인지는 연구하기 벅찬 문제입니다.
- 최근세에 와서 다시 인공(人工)으로 수고(水庫)를 만들면서 도시(都市)가 오늘날의 환인현(桓仁縣)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환인(桓仁)-평양성은 오늘날의 <이붕전자(二棚甸子)-사평(四平)>쪽에 자리잡고 있었겠는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집안(集安)의 피라미드>와 관련된다고 봅니다.
집안(集安)은 혼강(渾江)과 압록강(鴨綠江)이 만나는 지점에서 혼강(渾江)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압록강(鴨綠江)쪽
으로 50키로 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 혼강(渾江)과 압록강 합류지점에서 집안(集安)이 50키로 떨어진 곳에 있음을 볼 수 있는 길림성(吉林省)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gillim.JPG
따라서 혼강(渾江)의 물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지류(支流)를 모아둔 환인호(桓仁湖) ‘밑’의 옛 환인(桓仁)-평양성
(平壤城)이 있었던 오늘날의 <이붕전자(二棚甸子)-사평(四平)>의 위치에서 보면, 용강산맥(龍剛山脈)의 남단(南端)
이 되는 동남(東南)쪽 산(山)을 넘으면, 그곳이 바로 집안(集安)의 ‘피라미드 군(群)’이 있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집안(集安)은 압록강(鴨綠江)과 통구하(通溝河) ‘사이’에 마치 영어의 소문자 와이(y)처럼 되어
안(內)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집안(集安)은 최근대에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는 통구(通溝)로 불리워지거나, 즙안(楫安)이라고 불리워졌음을 기억
하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통구(通溝)’의 뜻이 “ ‘봇도랑(=구(溝))’를 통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띠고, 또 즙안(楫安)는 ‘배젓는 노(櫓)를
편안히 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고구리 사람이나 혹은 그 이전의 대한국(大漢國) 사람들이 오늘날 집안(集安) 지역이 태양선(太陽船)을 타고
노(櫓=즙(楫))을 저어서 이승과 저승을 왕래할수 있는 가장 신성한 지역으로 파악하고, 이런 종교성에 걸맞는 대규
모의 수리시설을 하였을 개연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 위성사진으로 통구하(通溝河)와 압록강 사이의 ‘집안(集安) 지도’를 볼 수 있는 곳
http://blog.naver.com/triviamovie/60054692664
(*) 집안(集安)의 배치도(配置圖)
http://blog.naver.com/triviamovie/60054692664
그런데, 이 통구하(通溝河)는 ‘솟대님의 수계(水系)가 잘 표현된 지도’에 표현(表現)이 안되어 있지만,
의외로 그 규모가 큽니다.
(묘(妙)하게도 ‘모르나 님의 지도’나 ‘수계(水系)가 잘 나타난 솟대님의 지도’에서도 통구하(通溝河)를 표현하기를
꺼리는 이상한 태도가 느끼어집니다.)
(*) 통구하(通溝河)의 사진(寫眞)을 볼 수 있는 곳
http://www.encyber.com/comm/board/bl_view.php?idxNo=5482&lskin=list&p=1&tid=travelworld
그런데, ‘솟대님의 지도’를 보면 환인호(桓仁湖) 동북(東北)쪽에서 불(乀)자 방향으로 흘러나오는 부이강(富爾江)과
별(丿)자 방향으로 흘러나오는 혼강(渾江)이 만나서 꼭 영어의 브이(V)자 처럼 만나서 환인호(桓仁湖)를 그 아래에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별(丿)자 방향으로 흘러나오는 혼강(渾江)을 보면, 집안(集安) 쪽으로 넘어가는 두 개의 강(江)이 있는데,
‘윗 쪽’의 강 이름을 찾아보면 대위사하(大葦沙河)이고, ‘아랫 쪽’의 이름을 찾아보면, ‘패왕조(覇王槽)-신개하(新開河)’
로 나옵니다.
(*) 부탁의 말씀: ‘모르나 님의 지도’에는 오늘날 신개하(新開河)에 해당하는 <옛 명칭>이 한자로 적혀 있는데, 판독
(判讀)도 안되지만, 영어로는 Ta-lo-chün-Ho, Hshiao-lo-chün-Ho로 나옵니다.
혹 판독을 하신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하(河)는 합쳐져서 패왕조(覇王槽)로 흘러들어 갑
니다. (*)
그런데, 통구하(通溝河)의 본류(本流)는 마치 영어의 소문자 와이(y)자 처럼 대위사하(大葦沙河)의 시원(始源)쪽으로
올라가지만, 지류(支流)가 불(乀)자 쪽으로 올려가는데, 이를 고리하(高麗河)로고 아직도 집안(集安) 현지(現地)에서
는 통칭을 합니다.
대위사하(大葦沙河)의 지류(支流)가 불(乀)자 모양, 그리고 신개하(新開河)가 니은(ㄴ)자 모양으로 올라오는데,
통구하(通溝河)의 고리하(高麗河)가 다시 세 물의 시원(始源)이 되는 곳에서 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일단 ‘솟대님의 지도’를 통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 혼강(渾江)에서 ‘윗쪽’의 대위사하(大葦沙河)가 불(乀)자로 ‘아랫 쪽’의 신개하(新開河)가 니은(ㄴ)자 모양으로
되어서 통구하(通溝河)의 지류(支流)인 고리하(高麗河)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이러한 이야기는 결국 고대에 ‘집안(集安) 피라미드’에 참배(參拜)하는 사람들이 만주(滿洲)쪽에서 올 경우, 혼강
(渾江)과 부이강(富爾江)을 타고 와서 환인호(桓仁湖) ‘위’의 대위사하(大葦沙河)와 신개하(新開河)를 넘어서서
고리하(高麗河)로 해서 통구하(通溝河)로 들어갔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구리(高句麗)의 뜻이 혈(穴)이라는 ‘남당유고’의 서문(序文)이 중요함을 느낄수 있습니다.
즉 이 고리하(高麗河)는 이승과 저승이라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이어주는 혈(穴)의 의미가 있다고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무튼 “환인호(桓仁湖) 밑에 오늘날 이붕전자(二棚甸子)-사평(四平)을 열결하는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이
있었다”라는 것은 이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이 ‘종교적인 도시(都市)’였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늘의 별(星)인 천인(天人)들에게서 그 영혼이 오기 때문에, 죽어서 다시 별이 되고, 이 별(星)들이
배달화백 회의를 하는 것이 북두칠성(北斗七星)으로 믿었기 때문에, 환인호(桓仁湖) 아래에서 북두칠성이 있는 북
(北)쪽을 향한 곳에 환인호(桓仁湖)가 있어야만, ‘종교적인 의식이 깊은 배달화백’을 하기가 더욱더 걸맞는다고 볼수
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혼강(渾江)에서 집안(集安)으로 넘어가는 강이 ① ‘아래’쪽이 패왕조(覇王槽)-신개하(新開河)이고, ② ‘윗’쪽
이 대위사하(大葦沙河)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래 ‘모르나 님’의 지도를 보면, 이 두 강이 만나는 시원(始源)이 이 집안
(集安)으로 넘어가는 최고봉인 노야령구(老爺岺泃: 1107미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야령구(老爺岺泃) 남(南)쪽에는 대감천구(大坎川泃) (717미터)가 있는데, 이 대감천구(大坎川泃)를
마치 와이(Y)자 처럼 합해서 남(南)쪽으로 흐르는 강(江)이 있는데, 이 강의 좌측(左側)에 쌍차두(雙岔頭)라는 작은
산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구(泃)는 ‘시원(始源)되는 여울’이기 때문에, 노야령구(老爺岺泃)는 <‘시원(始源)되는 여울’을 사방(四方)으로 흘러
내리는 노야령(老爺岺)>이란 의미고 대감천구(大坎川泃)는 ‘크게 물이 빠지는 냇물(=대감천(大坎川))의 시원되는
여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고리하(高麗河)나 혹은 상류(上流)는 대감천(大坎川)으로 남아있음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대감천(大坎川)이 흐르는 좌측에는 쌍차두(雙岔頭)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이는 ‘두 갈래의 머리가 있는 곳’
이란 뜻입니다.
(*) 혼강(渾江)에서 ①패왕조(覇王槽)-신개하(新開河)와 ②대위사하(大葦沙河)의 원류들이 모여서 ③ 노야령구
(老爺岺泃)에서 발원해 북류(北流)하며 ④ 대감천구(大坎川泃)에서 발원한 고리하(高麗河)가 대감천(大坎川)이 되어
쌍차두(雙岔頭) 오른편으로 흘러서 남류(南流)함을 볼 수 있는 ‘모르나 님’의 지도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그런데, 통구하(通溝河)의 지류(支流)인 고리하(高麗河)는 ‘모르나 님의 지도’에서 표기 되어 있지 않지만, 오늘날
별(丿)자 방향으로 매집철로(梅輯鐵路)가 나있는 곳이 바로 ①통구하(通溝河)가 흐르는 본류(本流)이고
② (가) (매집철로(梅輯鐵路)) - 소청구(小淸泃)-대문자구(大蚊子泃)-(횡로(橫路))-(대감천(大坎川)이 지류(支流)인
‘고리하(高麗河)’입니다.
여기서 횡로(橫路)라 함은 옆(←)으로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고리하(高麗河)는 상류인 (노야령구(老爺岺泃)→대감천구(大坎川泃)→대감천(大坎川)→(쌍차두(雙岔頭)
우측)→ (횡로(橫路))→대문자구(大蚊子泃)→소청구(小淸泃)==>통구하(通溝河)(매집철로(梅輯鐵路))로 볼수 있는
것입니다.
(*)
① 집안(集安) 좌측에서 별(丿)자 방향으로 흐르는 통구하(通溝河)(=매집철로(梅輯鐵路))
② 매집철로에서 불(乀)자 방향으로 올라가는 고리하(高麗河)가 <소청구(小淸泃)-대문자구(大蚊子泃)-횡로(橫路)>
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 ‘모르나 님의 지도’
http://www.lib.utexas.edu/maps/ams/korea/txu-oclc-6614383-nk52-7.jpg
아무튼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은 환인호(桓仁湖)를 북두칠성 있는 자리에 놓고, 어떤 종교적인 행사가 짙은
‘배달화백’을 하는 도시였음을 우리는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문(閘門)을 2개 설치해서 선박이 올라올 수 있게 하고, 또 둑을 쌓으려면, 이곳에 물이 최대한 많이 모이
도록 하는 안배(按配)를 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환인호(桓仁湖)는 물을 모으기 매우 적당한 지형입니다.
(1) 먼저 브이(V)자 형에서 좌측에서 오는 부이강(富爾江)은 추류하(酋流河)라는 지류(支流)를 지니고 있습니다.
(2) 또 브이(V)자의 우측에서 오는 혼강(渾江)은 서북류(西北流)하면서, 거슬러 올라가면 집안(集安)으로 성지순례
(聖地巡禮)를 할수 있는 대위사하(大葦沙河)와 신개하(新開河)를 지니고 있습니다.
(3) 그리고 광개토태왕께서 독산성(禿山城)을 쌓은 남쪽의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25미터)의 북쪽에 바싹 붙어서
동남류(東南流) 하는 강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4) 그런데, ‘아래 솟대님의 지도’를 보면,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아래에 화발산(花脖山: 1336미터)나 되는
거대한 산(山)을 촛점으로 해서 마치 ‘갈매기 모양’혹은 ‘큰 상어 이빨 모양’인 브이(V)자로 흐르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 이름이 바로 대아하(大雅河)입니다.
주위 경관(京觀)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 대아하(大雅河)의 경치를 볼 수 있는 곳
http://ppzs.ctnews.com.cn/movfalsh.asp?id=1411&page=1
그런데, 이 대아하(大雅河)는 ‘모르나 님의 지도’ 좌하단(左下端)에 있는 스케일(scale)로 재어보면 환인(桓仁)시
바로 위에서 흐르는 동류(東流)해 들어오는 ‘대이하(大二河)’와 바로 밑에서 역시 동류(東流)해 들어오는 상하의
거리가 불과 7키로 미터 정도 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환인호(桓仁湖)를 만들 때에는 이 대아하(大雅河)의 물 까지를 포함해서 갑문(閘門)을 만들고 방죽을 쌓는
것이 현명함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나 님의 지도’에는 이 대아하(大雅河)가 동류(東流)해 들어오는 남쪽에 팔면욕산(八面峪山: 1267미터)가
있고, 혼강(渾江)을 건너 뛰어 대북차(大北岔: 786미터)를 업고 있는 소호산(小胡山: 846미터)가 있어서 댐(dam)을
만들기 좋을 뿐만 아니라, 이 소호산(小胡山)은 좌측으로 이름이 ‘시원되는 여울의 입구(入口)를 크게 판(板)을 대어
막는’의 뜻을 지닌 대판구구(大板泃口: 1019미터)로 되어 있어서 댐(dam)을 형성하기 극히 좋은 곳임을 알수 있습
니다.
(*)
① 대이하(大二河)남쪽에 대아하(大雅河)가 7키로 되고,
③ 그 아래에 팔면욕산(八面峪山:1367)-혼강(渾江)-대북차(大北岔: 786)-소호산(小胡山:846)-(대판구구(大板泃口):
1019미터)로 이어져 ‘둑’을 쌓기 좋음을 볼수 있는 모르나 님의 지도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모르나 님의 지도’는 오늘날의 환인수고(桓仁水庫)를 만들기 전에 작성한 지도로 추측이 되는데,
결국 이 대아하(大雅河)의 물 까지 받아들인 것이 오늘날 환인수고(桓仁水庫)이고, 이는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고구리(高句麗)나 대한국(大漢國) 시절에 환인호(桓仁湖)를 만들 때에도 마찬가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류(支流)를 빼고 나면, 크게 보아서 환인호(桓仁湖)에 들어오는 것은 부이강(富爾江)에서 부터 ‘시계반대
방향으로’ 말하자면, ①부이강(富爾江), ②대이하(大二河), ③대아하(大雅河) ④혼강(渾江)입니다.
이처럼 강이 4개가 들어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오늘날 환인수고(桓仁水庫) 남쪽에 남있는 지명 명칭이 사평(四平)
이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르나 님의 지도에는 ‘환인수고(桓仁水庫)’가 설치되기 전(前)에 작성된 지도 임에도 불구하고 사평가(四平街)
즉 ‘사평(四平)의 시가지(市街地)’라는 명칭이 남아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는 환인호(桓仁湖) 밑에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지리정보’인 것입니다.
(*) ‘시계반대방향’으로 ①부이강(富爾江), ②대이하(大二河), ③대아하(大雅河) ④혼강(渾江)이 사평(四平)으로
호수를 만들고 있음을 볼수 있는 ‘솟대 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고대에 오늘날 대아하(大雅河)의 물 까지를 포함해서 그 밑에 산(山)을 연결하는 방죽을 쌓아서 인공호수를 만들었
음을 암시하는 또 하나의 증좌(證左)는 대아하(大雅河)가 마치 갈매기 처럼 찍고 가는 화발산(花脖山: 1336미터)의
이름에서 이 발(脖)자의 의미입니다.
이는 ‘배꼽’이란 의미인데, 이는 대아하(大雅河)가 마치 ‘자르기 전의 태(胎)ㅅ줄’처럼 화발산을 찍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발(脖)의 뜻에는 ‘긴 목(=경(頸)’ 그것도 ‘긴 목의 앞쪽’이란 의미로 자주 사용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화발산(花脖山)은 환인호(桓仁湖)의 긴 ‘방죽’이 마치 목(=경(頸))처럼 놓여 있는 앞(=전(前))을 꽃처럼 두른
산(山)이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환인호(桓仁湖) 남쪽인 오늘날 이붕전자(二棚甸子)와 사평(四平)이 있는 지역이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 안동도(安東道)에서는 “‘대한국(大漢國)의 양평성(襄平城)’에서 동남(東南)쪽
으로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는 데에는 800이다.(④ 東南至平壤城八百里)”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양평성(襄平城)이 혼하(渾河)와 소자하(蘇子河)가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 대화방호(大伙房湖)이기 때문에,
‘솟대 님의 지도’를 보면서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까지 육로(陸路)로 오려면 다음과 같은 행정(行程)을 취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입니다.
(1) 소자하(蘇子河) 북안(北岸)을 따라서 동남(東南)쪽으로 가다가 기역(ㄱ)자로 꺽이는 부분에서 계속 산길을 따
라서 간다.
(2) 부이강(富爾江) 중상류(中上流)를 배다리(=주교(舟橋))로 건너서 그 좌안(左岸)을 따라서 계속 동남(東南)쪽
으로 육행(陸行)한다.
(3) 부이강(富爾江)과 혼강(渾江)이 합류(合流)하는 곳을 매우 긴 배다리(=주교(舟橋))로써 건넌다.
(4) 환인호(桓仁湖) 호안(湖岸)을 따라서 평양성(平壤城)까지 온다.
(*) (1)소자하(蘇子河)북안(北岸)-(2)부이강(富爾江)좌안(左岸)-(3) 부이강(富爾江) 혼강(渾江) 합류지점을 배달리
로 건넘 - (4) 환인호(桓仁湖) 남안(南岸)으로 가는 행정(行程)을 짐작할 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이런 행정(行程)이 과연 800리가 걸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800리이면 당대척(唐大尺)으로 ( 800리(里) X 532.6미터(m)/리(里)= 426,080 미터=426.08 키로미터(Km))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지도에서 우하단(右下端)에 있는 스케일(Scale)을 활용해서
(1) (2) 대화방호(大伙房湖)에서 소자하(蘇子河)를 거쳐 부이강(富爾江)까지를 직선으로 재면 대략 110키로 정도
나옵니다. (이는 강산(崗山: 1347미터)까지를 뜻합니다.)
(3),(4) 이 강산(崗山)에서 ‘꺽쇠(>)’모양 이붕전자(二棚甸子)까지 직선으로 재면 대략 60키로 정도 됩니다.
합치면 (110+60=170키로)가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대화방호(大伙房湖)-소자하(蘇子河)-부이강(富爾江)-환인호(桓仁湖)를 우측(右側)으로 선회-이붕전자
(二棚甸子)까지 직선으로 170키로 정도 됨을 볼수 있는 요녕성(遼寧省) 지도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milpic&mode=read&num=17518
그런데, 평양성(平壤城)까지가 무려 426.08키로가 되기 때문에, (426.08/170= 약 2.5배)로 실제 거리가 더 크게 나옵
니다.
그러나 계곡(溪谷)을 따라 가는 길은 대부분이 구불 구불 꺽이어 있고, 때로는 절벽(絶壁)등이 있을 때에는 크게
우회(迂廻)해서 가야하므로 2.5배 정도를 직선거리 보다 더 크게 걸리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것입니다.
2) 박작성(泊汋城)과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
가) 방향은 다르나 남북으로 약 100리 차이가 나는 평양성(平壤城)과 박작성(泊汋城)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서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동도(安東道)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① 東南至平壤城八百里;
② 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
③ 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
④ 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
위 내용에서 ①의 평양성(平壤城)과 ④의 박작성(泊汋城)은 모두 환인호(桓仁湖) 주변에 있어서 서로 그 내용이
얽혀져 있습니다.
즉 ①의 내용은 오늘날 대화방호(大伙房湖)에서 평양성(平壤城)까지가 동남(東南) 쪽으로 800리인데,
④의 내용은 대화방호(大伙房湖)에서 박작성(泊汋城)까지가 남(南)쪽으로 700리로써 그 방향이 약간 다른데,
남북(南北)의 거리는 약 100리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④의 내용이 도리기(道里記) 가운데,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와 연관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안동도(安東道)에서는 단지 이 박작성(泊汋城)이 압록강 북쪽에 있다는 것만이 표명(表明)이 되어 있습니다.
(*) 본문(本文) (*)
④ 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
: (대화방호(大伙房湖)인 대한국(大漢國)의 양평성(襄平城)으로 부터) 남쪽으로 압록강(鴨綠江) 북(北)쪽의 박작성
(泊汋城)까지 700리가 걸린데, 이(박작성(泊汋城)은) 옛 (대한국(大漢國)의) 안평현(安平縣)이다
그러나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는 이 박작성(泊汋城)이 박작하(泊汋河) 근처에 있는 성(城)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 강구(江口)의 의미 -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의 압록강구(鴨綠江口)와 박작구(泊汋口)와 모두 관련이 되는
박작성(泊汋城)이 일으킨 혼란(混亂)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의 도리기(道里記) 중에서 옮긴 원문(原文) (*)
①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
②又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
: ① 압록강(鴨綠江) 입구(入口)로 부터 배(舟)를 타고 100여리를 가서, ‘작은 쌍동선(雙胴船)(=소방(小舫))’으로
갈아타고 물(水)을 거슬러 올라(=소(溯)) 동북(東北)쪽으로 30리를 가면 박작하(泊汋河)의 입구에 도착한다.
이곳부터가 발해(渤海)의 지경(地境)이다.
② 또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500리를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르는데, 옛 고구리(高句麗)의 왕도(王都)
이다.
먼저 ①의 문장에서 압록강구(鴨綠江口)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이를 해구
(海口)로 제한시켜서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황해(黃海)로 부터 압록강(鴨綠江)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압록강구(鴨綠江口)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구(江口)는 그 강(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入口)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류(支流)가 본류
(本流)에 합쳐지는 곳 역시 강구(江口)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압록강구(鴨綠江口)는 오늘날 혼강(渾江)이 압록강과 만나는 곳을 뜻합니다.
오늘날 혼강(渾江)이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의 강의 흐름은 마치 영어의 씨(C)자 혹은 꺽쇠(<)처럼 껵여서
돌아서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당대척(唐大尺)으로 100리이면 53.26키로미터가 되는데, 백여리(百餘里)라고 하였기 때문에, 약 60키로를
잡아주면 됩니다.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지도를 보면, 꺽쇠(<)처럼 꺽이는 곳에 신흥(新興)이란 도시(都市)가 이는데,
이곳까지 혼강(渾江)이 몹시 구불대면서 가는데, 이를 펼치면 약 50키로 정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신흥(新興)으로 부터 환인호(桓仁湖)까지는 동북(東北)쪽(↗)으로 올라가는데, 한 10키로 정도되는
곳부터 환인호(桓仁湖)에서 동떨어진 ‘작은 호수(湖水)’같은 것이 있음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신흥(新興) 동북쪽 ‘작은 호수(湖水)’가 있는 곳까지가 바로 백여리(百餘里) 즉 60키로가 됨을 도리기
(道里記)는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박작구(泊汋口)라는 것이지요.
(*) 혼강(渾江)이 압록강(鴨綠江)까지 꺽쇠(<)의 중심점인 신흥(新興)까지 50키로, 또 신흥(新興)에서 10키로 되는
곳에 환인호(桓仁湖)와 떨어진 ‘작은 호수’를 볼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 지도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milpic&mode=read&num=17518
6. 3개의 갑문(閘門)을 통과해야 박작호(泊汋湖)의 입구인 박작구(泊汋口)에 도달한다.
문제는 “왜 압록강과 혼강(渾江)이 합류하는 곳에서 영어의 씨(C)처럼 백여리 즉 60키로 정도가면, ‘갑자기 작은
호수(湖水)’가 나타나는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계(水系)가 잘 드러난 <솟대님의 지도>’를 보아도, 역시 화발산(花脖山: 1336미터) 좌측에서 혼강(渾江)의
흐름이 유(U)를 왼쪽으로 기울여낸 듯한 (↙) 곳이 마치 환인호(桓仁湖)의 맹장(盲腸)인듯 길게 ‘작은 호수(湖水)’를
형성하고 있음은 마찬가지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는 ‘신흥(新興)으로 부터 동북(東北)쪽 10키로’되는 지점 - 즉 압록강구(鴨綠江口)로 부터 60키로
되는 곳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 화발산(花脖山: 1336미터) 좌측에 환인호(桓仁湖)의 맹장(盲腸)인듯 길게 ‘작은 호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도대체 이 신흥(新興)으로 부터 동북(東北)쪽 10키로 쯤 되는 곳이 어떤 지역이길래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모르나 님’의 지도로써 찾아보기로 합니다.
‘아래 모르나 님의 지도’를 보면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즉 환인호(桓仁湖) ‘밑’에서 호(湖)를 형성하는 방죽은 혼강(渾江)이 팔면욕산(八面峪山: 1267미터)과 대북차
(大北岔: 786미터)를 이고(=재(載))있는 소호산(小胡山: 846미터)를 ‘사이’로 흐르기 때문에, 여기에 수문(水門)을
만드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팔면욕산(八面峪山: 1267) 바로 남(南)쪽에는 빙구자산(冰泃子山: 690미터)로 있고, 그 우측에 회룡산
(回龍山)을 가지로 하고 있는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 798미터)이 있습니다.
일단 이 빙구자산(冰泃子山)의 명칭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는 ‘얼음에서 여울의 시원(始源)이 흘러나오는 산(山)’
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 도에는 빙구자(冰泃子)라고 기재되어서 산(山)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은 왕팔(王八: 왕빠)는 중국어(中國語)로 ‘거북이, 자라’ 등을 의미하는데,
우리말의 ‘개+새+끼’와 같은 욕말로 흔히 알고 있습니다.
‘왕빠단(왕팔단(王八蛋)’은 직역(直譯)하자면 ‘거북이 알 같은 녀석’ 정도가 되지만, 이는 ‘마치 거북이 암컷처럼 이놈
저놈에게 붙어서 알에서 태어난 녀석’이란 의미를 띠게 된다고 흔히들 유감(類感)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는 유감(類感)일뿐, ‘왕빠’가 욕이 된 까닭은 망(亡)의 발음이 중국어의 ‘왕’이고, 팔(八)이 팔덕(八德)을
나타내어서 ‘인의예지(仁義禮智)등의 팔덕(八德)을 망실(亡失)한 놈’이란 의미에서 와전(訛傳)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되는 이유는 <신성(神聖)한 산(山)>에 ‘욕말’을 쓰서 기억하는 것은 아무래도 동양인(東洋人)의 정서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팔(王八)은 그 의미가 <거북>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갑문(閘門)에 대한 은어(隱語)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갑문은 ‘미닫이 식-이는 (← →)로 열고, (→ ←)로 닫는 것을 뜻합니다.-으로 열되 마치 압컷 갑문이 조감도로 보면
디귿(ㄷ)자 모양이 되고, 여기에 숫컷 갑문이 어(ㅓ)자 모양으로 끼여들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 모습이 꼭 귀두
(龜頭=거북머리)가 귀갑(龜甲)에 들락거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함에서 취해졌다고 할수 있습니다.
또 발(脖)은 ‘배꼽’이란 뜻인데, 그 ‘탯줄 처럼 긴 목(=장경(長頸))’을 지닌 것을 발(脖)로 나타낼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이란 - 지도에는 산(山)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 이 산(山)의 산세(山勢)가 혼강
(渾江)을 팔면욕산(八面峪山)쪽으로 갑문(閘門)의 귀두(龜頭)늘 나밀고, 이를 받는 귀갑(龜甲)을 설치하면서도 ‘마치
탯줄처럼 구불거리면서 나 있는 산세(山勢)’를 뜻한다고 보여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의 지산(支山)인 회룡산(回龍山)인데, 이 산은 마치 더불유(W)와 같이
혼강(渾江)이 흐르도록 가운데에 불쑥 이런 (∩) 모양으로 올라오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의 발(脖)이 ‘긴 목’ ‘배꼽을 만드는 탯줄’ 등의 의미를 띠는 것을 감안하면, 혼강(渾江)이
지나치게 이 주변에서 요철(凹凸)을 부리게 된 주범(主犯)이 바로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 때문이고, 이곳에 갑문을
설치하기에 아주 이상적임을 거북을 뜻하는 왕팔(王八)을 앞에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산세(山勢)를 맞장구 치는 산이 바로 팔면욕산(八面峪山)인 것입니다.
팔면욕산(八面峪山)의 욕(峪)은 ‘골짜기’를 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팔면(八面)에 골짜기를 지난 산(山)’이란
뜻입니다.
아무튼 혼강(渾江)은 이 팔면욕산(八面峪山)과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때문에, 유난히도 요철(凹凸)이 많으면서
흘러가게 하는데, 이 두 산이 놓은 것이 별(丿)자 방향으로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빙구자산(冰泃子山)은 팔면욕산(八面峪山) 남쪽에 연결되는 곳이 556미터로 되어 있으면서 분수령(分水嶺)
을 형성하고 있는데, 산세(山勢)가 불(乀)자 방향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혼강(渾江)이 씨-턴(C-tern)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산(山)이 되는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빙구자산(冰泃子山)과 팔면욕산(八面峪山) ‘사이’에서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의 회룡산(回龍山)
이 있는 쪽으로 서북류(西北流)하면서 흐르는 호상하(湖上河)가 - 지도에는 하(河)가 생략되어 호상(湖上)으로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 합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회룡산(回龍山)이 불쑥 튀어나온 곳 우측에 혼강(渾江)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유(U)자 처럼 흐르는 곳에 마치
공작(孔雀)꼬리가 하나로 합쳐져서 서류(西流)하는 듯한 대우구(大牛泃)라는 강이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룡산(回龍山)이 불쑥 튀어나온 좌측(左側)에는 왕팔발자(王八脖子)라고 적혀 있는 것이 역시 불쑥
튀어 나오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산세(山勢)가 유(U)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사이’에는 북류(北流)하는 대추
피구(大秋皮泃)라는 강(江)이 흐르고 있습니다.
대추피구(大秋皮泃)의 뜻은 ‘큰 가을의 가죽처럼 털을 수확하게 하는 여울’이란 뜻입니다.
결국 환인호(桓仁湖)를 만들려면, 이 세가지의 지류(支流) ① 팔면욕산(八面峪山)과 빙구자산(冰泃子山)사이에서
서북류(西北流)하는 호상하(湖上河)와 ② 회룡산(回龍山) 우측의 대우구(大牛泃) ③ 회룡산(回龍山)좌측에서 튀어
나온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 ‘사이’에서 북류(北流)하는 ‘대추피구(大秋皮泃)’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도록 댐(dam)
을 만들면 가장 효과적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자면, 왕팔발자(王八脖子)라고 표기해서 산이 마치 옴(Ω)처럼 된 곳과 그 북(北)에 걸쳐있는 빙구자산(冰泃子山)
을 연결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옴(Ω)처럼 튀어나온 왕팔발자(王八脖子)의 맞은 편의 높이가 의외로 690미터로 높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의 환인호(桓仁湖)의 댐(dam)의 수문(水門)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우리는 ‘모르나 님’의 지도를 통
해서 추측할수 있는 것입니다.
(*) ① 팔면욕산(八面峪山)과 회룡산(回龍山)을 지산으로 하는 왕팔발자산(王八脖子山)이 서로 요철(凹凸)이 심하
면서도 별(丿)자 방향으로 놓이고,
② 빙구자산(冰泃子山)이 팔면욕산(八面峪山) W에서 호상(湖上)을 서북류(西北流) 시키면서
불(乀)자 방향으로 가면서 점점 높아짐과
③ 세 강 (1) 호상하(湖上河) (2) 대우구(大牛泃) (3)대추피구(大秋皮泃)의 강을 모두 껴안기 위해서는 왕팔발자
(王八脖子)라고 쓰여져서 마치 옴(Ω)처럼 생간 곳과 그 맞은 편의 빙구자산(冰泃子山) 690을 남북(南北)으로
수문(水門)과 댐(dam)을 설치함이 가장 좋음을 알 수 있는
‘모르나 님’의 지도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이 ‘모르나 님의 지도’는 오늘날의 환인수고(桓仁水庫)가 생기기 전에 작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알수 있는 것이 바로 위 소개한 ‘모르나 님의 지도’에서 보면, 대화방(大伙房) 수고(水庫)가 표시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지도 아래의 스크롤(scroll)을 좌측으로 옮기고 가장 또 가장 윗쪽으로 옮기면 나타납니다.)
그런데, 환인수고(桓仁水庫)는 전혀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傳)해져 내려오는 수명(水名) 가운데에 호상(湖上)이란 이름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호(湖) 위(上)에 물을 댄다.’는 의미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대에 이곳에 인공호수(人工湖水)가 있었다는 흔적이 아주 노골적(露骨的)으로 들어나는 것이 바로
호상(湖上)이란 지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단순히 환인수고(桓仁水庫)이지만, 고대에는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압록강(鴨綠江)에선 선박
(船舶)을 타고 혼강(渾江)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갑문(閘門)이 설치되어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배가 인공호수(人工湖水)에 오르려면, 최소한 갑문이 2개 이상은 되어야 올라가려는
쪽은 열어두고, 이미 올라온 쪽은 열어야만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한국(大漢國)에서 관경사국(管境四國) 시절 - 어쩌면 고리(高麗) 때까지 있었던 환인호(桓仁湖)의
갑문은 어디에 설치하는 것이 환인호(桓仁湖) 주변의 지리적 특성을 감안할때 가장 효과적일까?
이런 추정(推定)은 도리기(道里記)에 나오는 박작구(泊汋口)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갑문(閘門)이 3개 정도 쳐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마지막의 제삼(第三)의 갑문(閘門)은 팔면욕산(八面峪山: 1267미터)에서 서북(西北)쪽으로 인근한 염왕비자산
(閻王鼻子山: 1070미터)에서 혼강(渾江)을 사이에 두고 그 정동(正東) 쪽의 대북차(大北岔: 786미터)를 동서(東西)
로 연결하면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흥미있는 것은 갑문을 설치하는 양쪽 산 이름이 꼭 갑문이 있었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염와비자산(閻王鼻子山)은 ‘염라대왕의 코’라는 뜻이어서 ‘물(水)이 숨을 쉬는 곳’이란 의미가 있고, 또 대북차(大北岔)
는 문자 그대로 ‘가장 북쪽에 물을 갈라놓는 곳’이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제이(第二)의 갑문(閘門)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빙구자산(冰泃子山)의 690미터가 되는 곳과 지도에 왕팔발자
(王八脖子)가 기록된 곳을 남북(南北)으로 갑문(閘門)을 내면 됩니다.
(3) 문제는 제일(第一) 갑문(閘門)인데, ‘위 모르나 님’의 지도를 보면 최하단(最下端)에 석봉(石鳳)이란 곳이 나타납
니다. 이는 ‘돌(石)로 이루어진 봉황(鳳凰)’이라는 뜻인데, 이 지역이 양쪽에 암석으로 된 높은 단애(斷崖)가 마치
‘돌로 된 봉황이 날개’를 벌린 듯한 인상(印象)을 주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에 제일 갑문이 설치되었다고 추정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 (1)제삼(第三)의 갑문은 동서(東西)로 <염왕비자산(閻王鼻子山: 1070)-대북차(大北岔: 786미터) ‘사이’에 >
(2) 제이(第二)의 갑문는 남북(南北)으로 <빙구자산(冰泃子山) 690미터되는 곳 - 왕팔발자(王八脖子)>에
(3) 제삼(第三)의 갑문은 동서(東西)로 석봉(石鳳) ‘사이’에
(*) 이를 추정하 볼 수 있는 모르나 님의 지도
(아래의 스크롤(scroll)을 좌측 1/3되는 지점에 놓고 찾으면 됩니다.)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9.jpg
그런데, 이런 추정(推定)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박작구(泊汋口)가 되는 ‘제일(第一)의 갑문(閘門)’인데 석봉
(石鳳)이 있는 곳이 “왜 박작구(泊汋口)가 되는 제일(第一)의 갑문(閘門)‘이 놓이는 것이라고 추정을 할수가 있는가?
그것은 ‘모르나 님의 지도’에서 석봉(石鳳)이 지도 가장 밑바닥에 표기(表記)되어 있는데, 이어지는 그 남(南)쪽의
지도에 아주 특이한 지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래 ‘모르나 님의 지도’를 보면, 혼강(渾江)이 내려오는 최북단(最北端)이 있는 곳에서 마치 더블유(W)를 오른쪽
으로 눕혀놓은 것처럼 강이 흘러서 동남류(東南流)하게 되는데,
혼강 최북단(最北端) 좌측에 천순묘(千脣廟)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이는 ‘1,000개의 입술의 종묘(宗廟)’라는 뜻입니다. 이는 ‘환인호(桓仁湖)에서 배달화백을 할때에 수많은 사람들의
발언권(發言權)을 중시하는 어떤 종교적인 건물이 있었던 흔적’으로 볼수 있습니다.
또 혼강(渾江)을 건너서 바로 우측에는 고태자산(高台子山: 736미터)가 있는데, 이 의미는 ‘높은 곳에서 탄생(誕生)
하게 하는 산(山)’이란 의미여서 이 역시 환인호(桓仁湖)에 높이 오르는 갑문(閘門)장치와 또 이곳에서 ‘배달화백
으로 인간과 사회가 거듭나는 행사’가 있었던 지명(地名)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마치 더불유(W)가 오른쪽으로 완전히 눕혀졌을 때, 혼강(渾江)을 동쪽으로 밀어내는 곳에 노영구
(老營溝)란 지명이 있습니다.
이는 ‘도랑물(=구(溝))에 있는 오래된 진영(鎭營)’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환인호(桓仁湖) 제일(第一)의 갑문(閘門)’으로 들어서는 선박들을 발해(渤海)및 신라(新羅) 군인
(軍人)들이 합동으로 있으면서 조사(調査)하고, ‘바로 이곳에서 3개의 갑문(閘門)을 통과하고, 또 환인호(桓仁湖)를
지내서 험한 혼강(渾江) 상류로 감에 있어서 편리한 ’작은 쌍동선(雙胴船)(=소방(小舫))으로 갈아타게 하는 곳이라
고 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소방(小舫)으로 갈아타고, 약간 북쪽으로 가면 고태자산(高台子山)과 그 맞은 편의 거대한 암벽
(岩壁) ‘사이’에 난 석봉(石鳳)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가장 현실지리를 보아서 적합(適合)함을 알수
가 있습니다.
(*) 천순묘(千脣廟), 고태자산(高台子山:736미터), 노영구(老營溝)가 있는 박작구(泊汋口)를 확인할 수 있는
‘모르나 님의 지도’
(지도(地圖) 하단(下端)의 스크롤(scroll)을 전체의 2/5되는 곳의 오른쪽에 두고, 맨 꼭대기로 올라가면 됩니다.)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결국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 중에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서 “압록강(鴨綠江) 입구(入口)로 부터 배(舟)를
타고 100여리를 가서, ‘작은 쌍동선(雙胴船)(=소방(小舫))’으로 갈아타는 곳‘이 바로 혼강(渾江)이 꺽쇠(<)로 꺽이는
지점인 <모르나 님의 지도>에서 노영구(老營溝)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부터는 결국 3개의 갑문(閘門)을 통과하면서 동북(東北)쪽으로 구불 구불 올라가게 되는데, 30리를 올라
가게 되면, 박작구(泊汋口)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곳부터가 바로 발해(渤海)의 지경(地境)이라는 것입니다.
(이의 원문(原文): ①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
그런데, 당대척(唐大尺)으로 30리(里)이면, (30리(里) X 532.6 미터/리(里) = 15.978미터 = 약 16키로)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지도에서 혼강(渾江)이 꺽이는 곳인 신흥(新興) 앞의 이런(⊃)모양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모르나 님의 지도’에서의 노영구(老營溝)와 일치시키고, 이로 부터 16키로 동북(東北)을 잡아보면,
신기하게도 환인호(桓仁湖) 서남(西南)쪽에 마치 맹장(盲腸)꼬리 쪽으로 나온 호수(湖水)가 있는 쪽과 일치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제삼(第三)의 갑문(閘門)이 끝나는 곳의 위치임을 의미합니다.
(*) 신흥(新興) 앞의 이런(⊃)모양으로 튀어나온 부분에서 동북(東北)쪽 16키로 되는 곳의 위치는 환인호(桓仁湖)로
이르게 되는 ‘제삼(第三)의 갑문(閘門)’이 끝나는 곳임을 짐작케 하는 요녕성(遼寧省)지도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milpic&mode=read&num=17518
놀랍게도 오늘날 환인수고(桓仁水庫) 즉 환인호(桓仁湖)로 들어가는 최종적인 갑문(閘門)이 있었던 곳이 박작구
(泊汋口)로 들어나는 것입니다.
즉 도리기(道里記)에 표현된 환인호(桓仁湖)의 ‘국제적인 공식적 명칭’은 박작호(泊汋湖) 였던 것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 박작호(泊汋湖)의 크기가 ‘오늘날의 환인수고(桓因水庫)’보다 더 컸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요녕성 지도에서 ‘모르나 님’의 지도에서 노영구(老營溝)라고 오른쪽으로 이런(⊃) 모양으로
튀어나온 신흥(新興)에서 동북(東北)쪽으로 16키로(당대척(唐大尺)으로 30리)되는 곳에서 환인수고(桓仁水庫)는
맹장(盲腸)모양의 호수(湖水) 형태를 보동보(普東堡) 동남(東南)쪽(↘) 부근에는 호수(湖水)의 폭(幅)이 짧아서
거의 강(江) 수준임에 비해서 고대에는 이곳도 ‘훨씬’ 넓었음을 뜻합니다.
(*) 환인수고(桓仁水庫) 아래의 보동보(普東堡) 동남(東南)쪽이 호수(湖水)의 폭(幅)이 강(江)의 수준(水準)에 머뭄을
알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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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계가 이 곳 지형을 샅샅히 설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서 말하는 박작성(泊汋城)이 바로 오늘날의 오녀산성(五女山城)임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도리기(道里記)의 안동도(安東道)에서 “ (옛 대한국(大漢國)의 양평성(襄平城)이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인
오늘날의 ‘대화방호(大伙房湖)’에서) 남(南)쪽으로 이르러 압록강(鴨綠江)의 북(北)쪽에 있는 박작성(泊汋城)까지
는 700리가 된다. 이는 옛 (대한국(大漢國)의) 안평현(安平縣)이다. (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라고
할 때의 박작성(泊汋城)이 바로 오늘날의 오녀산성(五女山城)임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일단 위 박작성(泊汋城)을 거론하는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혼강(渾江)도 압록강(鴨綠江)으로 가탐(賈耽)의
시대에서는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혼강(渾江)은 바로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이기 때문입니다.
또 혼강(渾江)의 지류(支流)인 부이강(富爾江) 역시 모강(母江)이 압록강이기 때문에, 자연히 압록강(鴨綠江)이
될수 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이런 압록강(鴨綠江) 위에 박작호(泊汋湖)가 있는 것이고, 이 박작호(泊汋湖) 북쪽에 성(城)이 있기 때문에 박작성
(泊汋城)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환인호(桓仁湖) 즉 박작호(泊汋湖) 밑에 있는 환인(桓仁)-평양성(平壤城)은 동남(東南)
800리라고 하면서, 박작호(泊汋湖) 서(西)쪽에 있는 것은 방향을 남(南)이라고 칭하면서 또 거리가 700리로써
무려 100리가 차이(差異) 나는가?”를 문제 삼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는 ‘수계(水系)가 잘 들어난 솟대님의 지도’를 보면 그 이유를 확연(確然)하게 알수가 있습니다.
첫째 방향(方向)의 차이는 (1) 양평성(襄平城)인 ‘대화방호(大伙房湖)’에서 ‘환인(桓仁)-평양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소자하(蘇子河) 북안(北岸)을 따라서 상류로 가서 배다리(=주교(舟橋))로써 부이강(富爾江)을 건너고,
또다시 혼강(渾江)을 건너서 가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그 방향이 동남(東南)쪽이 확실합니다.
(2) 그러나 양평성(襄平城)인 ‘대화방호(大伙房湖)’에서 ‘박작성(泊汋城)’ 즉 오늘날 환인현(桓仁縣) 오녀산성
(五女山城)이 있는 쪽으로 가려면, 소자하(蘇子河) 북안(北岸)으로 동남(東南) 쪽으로 (↘) 가긴 하지만, 그 상류
(上流)가 ‘기역(ㄱ)자 처럼’ 꼬부라진 모양을 따라서 독산성(禿山城) 즉 대독정자산(大禿頂子山: 1325미터)을 지향
해서 태자하(太子河)원류(源流)와 추류하(酋流河) 원류(源流) 중간 쯤으로 향해서 서남(西南)쪽으로 (↙) 꺽이어서
가고, 또 태자하(太子河)-추류하(酋流河) 중간 지점에서는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에서 발원해서 동류(東流)하는
대이하(大二河)의 상류(上流)의 북안(北岸)으로 해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대이하(大二河) 중류(中流) 쪽으로
난 지구대(地溝帶)가 높인 방향인 동남(東南)쪽을 따라서(↘)내려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작성(泊汋城)으로 가는 길은 소자하(蘇子河) 북안(北岸)을 따라서 ‘길게’ 동남(東南)쪽으로 가다가(↘)
독산성(禿山城) 쪽으로 서남(西南)쪽으로 꺽이어서(↙) ‘짧게’ 가고, 다시 동남동(東南東) 지구대(地溝帶)를 따라서
(↘)가기 때문에, 이런 방향전환을 총괄적으로 정리해서 한마디로 표현할 때에는 남(南)쪽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박작성(泊汋城)으로 가는 길이 ‘길게’ 소자하(蘇子河) 북안의 동남(東南)(↘) ‘짧게’ 태자하(太子河)-추류하
(酋流河) 중간(中間) (↙), 다시 동남동(東南東)지구대(地溝帶)를 통해서 대이하(大二河) 동안(東岸)으로 동남
(東南)(↘)으로 가서 종합적으로 남(南)쪽이라고 생각하게 함을 느끼게 하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둘째로 박작호(泊汋湖) 서북안(西北岸)에 있는 오늘날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인 박작성(泊汋城)은 700리에 불과
하나, 같은 박작호(泊汋湖) 남안(南岸)에 있는 환인(桓仁)- 평양성(平壤城)이 800리로써 무려 100리나 차이가
나는 까닭은 (1) 박작호(泊汋湖)가 오늘날 보다 더 넓어서 이 호수(湖水)를 ‘시계방향’으로 도는 거리가 더 멀기
때문인 것이 그 하나이고, (2) 또 하나는 물가의 협곡(峽谷)으로 오는 것보다 능선(稜線)과 지구대(地溝帶)를 타고
오는 것이 요철(凹凸)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약 100리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오녀산성(五女山城)이 대한국(大漢國)과 관경사국(管境四國) 시절부터 계속적으로 있었던 박작성
(泊汋城)이고, 이런 명칭이 붙게 된 까닭은 그 밑에 오늘날 환인호(桓仁湖), 환룡호(桓龍湖)로 불리워지는
박작호(泊汋湖)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환룡호(桓龍湖)는 기이한 풍경(風景)을 만드는 호수(湖水)입니다.
하물며, 이 보다 더 규모가 컷던 박작호(泊汋湖)의 장쾌한 모습은 더욱더 신묘(神妙)한 광경을 띠었을 것이라는
상상슬 우리는 해 낼수 있습니다.
(*) 환룡호(桓龍湖) 풍경을 볼 수 있는 곳
http://www.kidoors.com/thread-117263-1-10.html
좌계가 이곳 지리(地理)를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를 중심으로 해서, 상세히 거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곳이 ①대한국(大漢國)- ② 고구리(高句麗)를 포함한 관경사국(管境四國)-③ 통일신라(統一新羅)와
발해(渤海)-④그리고 고리(高麗) 조(條)로 이어지는 무려 4 대(代)에 걸친 매우 중요한 ‘종교사회적인 성지(聖地)’
이고, 이 지역(地域)이 아시아(Asia) 고대사에 미친 영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즉 즙안(楫安)의 거대한 피라미드(pyramid)에서 통구하(通溝河)의 지류(支流)인 고리하(高麗河)를 넘어서면
박작호(泊汋湖)의 입구로 이어지는 혼강(渾江)과 이어지는 신개하(新開河), 대위사하(大葦沙河)를 통해서 만나게
되며, 그곳에는 거대한 종교사회적인 토시인 환인(桓仁)-평양성이 있고, 그 북쪽으로는 박작호(泊汋湖)가 있으며,
그 서북(西北)쪽에 마치 자연(自然)이 만들어준 신전(神殿) 같은 오늘날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인 박작성(泊汋城)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특이한 종교(宗敎)-지리학적인 배치가 종합되어 있고, 이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이 고대 아시아(Asia)
역사를 규명하는데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7. 박작호(泊汋湖)가 있었다는 추론은 올바른가?
그런데, 오늘날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 박작성(泊汋城)이라는 추론(推論)의 근거는 도리기(道里記) 중에 고리발해
도(高麗渤海道)의 문장 -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에서 압록강구
(鴨綠江口)의 의미를 ‘황해(黃海)와 압록강’이 만나는 입구(入口)로 보지 않고, - 즉 오늘날 신의주(新義州)와 단동
(丹東)의 ‘사이’로 보지 않고, 오늘날 압록강(鴨綠江)과 혼강(渾江)이 만나는 곳으로 보면서 추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압록강구(鴨綠江口)는 황해(黃海)와 압록강(鴨綠江)이 만나는 입구(入口)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오늘날 신의주(新義州)와 단동(丹東) ‘사이’에서 당대척으로 백여리(百餘里)인 약 60키로 되는 지점에 동북
(東北)쪽에서 서남류(西南流)하면서 흘러나오는 어떤 강이 있으면, 지금까지 좌계의 추론(推論)을 ‘흔들 수 있는
근거’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에 해당(該當)하는 강이 ‘수계(水系)가 잘 드러나는 솟대님의 지도’를 보면, 나타납니다.
즉 사방정자산(四方頂子山: 1270미터)에서 동남류(東南流)하는 포석하(蒲石河)가 그것입니다.
(*) 황해(黃海)와 압록강(鴨綠江)이 만나는 강구(江口)를 향해서 동남류(東南流)하는 포석하(蒲石河)를 볼 수 있는 곳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이 포석하(蒲石河)는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지도에서 보면, 장전하구(長甸河口)로 표현된 곳에 철로(鐵路)가
지나가는 곳이 바로 포석하(蒲石河)가 압록강(鴨綠江)과 만나는 강구(江口)인데, 실제 신의주(新義州) 약간 서(西)쪽
에서 따지면, 분명히 백여리 즉 60키로가 됩니다.
(*) 포석하(蒲石河)의 강구(江口)가 장전하구(長甸河口)로 표현된 곳까지 황해(黃海)와 압록강이 만나는 곳에서
60키로가 됨을 알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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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에서 당대척(唐大尺)으로 30리 즉 16키로 가면 ‘작은 쌍동선(雙胴船)’으로 갈아타야만 한 곳이 등장하고,
그곳에서 부터 강 이름이 오늘날의 포석하(蒲石河)가 아닌 박작하(泊汋河)라고 옛날에 칭한다고 할지라도,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 내용에 결정적으로 맞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는 어디까지나 선박(船舶)을 타고 사신단(使臣團)들이 발해(渤海)의 도읍(都邑)이
있는 쪽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하는데, 그중에서 강(江)을 타고 가는 부분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서 강(江)을 타고 감이 묘사된 곳의 원문(原文) (*)
①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
압록강구(鴨綠江口)에서 배를 타고 백여리(60키로)를 가서 ‘작은 쌍동선(雙胴船)(=소방(小舫))을 타고, 거슬러올라가
동북(東北)으로 30리(=약 16키로)를 가면, 박작구(泊汋口)에 이르는데, 이곳이 발해(渤海)의 경계(境界)이다.
② 又泝(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
또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소(遡))것’들‘을 500리에 이르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른다.
이는 옛 고구리(高句麗)의 왕도(王都)이다.
③又東北泝(溯)流二百里,至神州。
: 또 동북(東北)쪽으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소(溯))것 ’들‘을 200리에 이르면 신주(神州)에 이른다.
위 문단(文段)이 매우 이상한 문장이 등장합니다. 소류(遡流)하고 관련된 말이 3회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맨 처음에 등장하는 것은 소류동북(遡流東北)이란 말이 2번 사용이 되었고, 동북소류(東北遡流)라는 말이 1번
사용이 되었습니다.
소류(遡流)는 원래(原來)는 물이 흘러오던 방향 반대로 흐르는 것 - 즉 역류(逆流)를 뜻합니다.
그러나 ‘물의 반대방향으로 선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확장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맨 처음 등장하는 <소류동북(遡流東北) 삼십리(三十里)>는 박작구(泊汋口)에 도달하기 이전- 즉 박작호
(泊汋湖)에 도달하기 이전에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박작호(泊汋湖)의 입구를 들어선 후 부터의 ‘작은 쌍동선(雙胴船)’인 소방(小舫)이
움직이는 것을 뜻함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지류(支流)들이 합류(合流)하여 하나의 강(江)이 되어서 흘러 나갈 때, “소류(遡流)한다”고 하면,
모든 지류(支流)들을 다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본류(本流)쪽으로 회귀(回歸)하여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문(漢文)은 단복수(單複數)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소류(遡流)한다고 하면, 일단 모든 지류(支流)를 죄다 거슬러
올라갔다가 원래의 본류(本流)로 돌아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도리기(道里記)의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서 말하는 강(江)이 오늘날 포석하(蒲石河)냐?
아니면 오늘날의 혼강(渾江)인가?”를 따져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일단 ‘포석하(蒲石河)와 혼강(渾江)’이 동시에 나타나는 ‘솟대님의 지도’에서 포석하(蒲石河) 쪽을 살펴보면, 특별히
배(舟)가 다닐만한 지류(支流)가 전혀 없고, 또 외줄기로써 그 발원하는 산이 사방정자산(四方頂子山: 1270미터)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포석하(蒲石河)의 전장(全長) 2/3되는 지점에 ‘관전(寬甸) 만족자치현(滿族自治縣)’
즉 ‘관전현(寬甸縣)’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거리를 재는 스케일(Scale)이 달려있는 요녕성(遼寧省)지도’에 포석하(蒲石河)가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포석하(蒲石河)가 배(船)가 다닐만한 지류(支流)가 없는 외줄기로써 사방정자산(四方頂子山: 1270미터)에서
연원하는 전장(全長) 2/3되는 지점에 관전현(寬甸縣)이 있음을 보여주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요녕성(遼寧省) 지도를 보면, 포석하(蒲石河)의 하구(河口)인 ‘장전하구(長甸河口)’에서 관전현(寬甸縣)까지
철로(鐵路)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 거리가 우하단(右下端)에 있는 스케일(Scale)로 재면 약 35키로가 나옵니다.
(*) 장전하구(長甸河口)에서 관전현(寬甸縣)까지가 35키로가 됨을 볼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지도
http://bbs.defence.co.kr/bbs/bbs.cgi?db=milpic&mode=read&num=17518
따라서 포석하(蒲石河) 전장(全長)은 (35키로 X 3/2 = 52.5키로)가 되는데, 이는 당대척(唐大尺)으로 53.26키로가
백리(百里)임으로 모든 ‘배(船)가 다닐수 있는 지류(支流)들’을 소류(遡流)할 때에 당대척(唐大尺)으로 500리가 된
다는 것과는 지나치게 차이가 있어서 적어도 오늘날 포석하(蒲石河)는 ‘가탐(賈耽)의 도리기’ 중에 고리발해도
(高麗渤海道)에서 말하는 박작호(泊汋湖)에서 계속 올라가는 강(江)이 아님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혼강(渾江)의 경우는 어떤가?
일단 위 도리기(道里記) 문장에서 <② 又泝(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 즉
“또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소(遡))것’들‘을 500리에 이르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른다.
이는 옛 고구리(高句麗)의 왕도(王都)이다.”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당대척(唐大尺)으로 500리면 오늘날 키로 수로 얼마가 되는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500리(里) X 532.6m/리(里)=266,300 m = 266.3 Km)미터가 됩니다.
일단 이 길이는 ‘두만강 길이’가 547.8㎞ 이기 때문에, 일단 (266.3Km/547.8Km=약 0.4861)이 되어 거의 반(半)이나
되는 길이입니다.
거기다가 또 환도현성(丸都縣城)에서 발해(渤海)의 신주(神州)에 이르는 길이 200리이기 때문에 이는 (200리(里)
X 532.6 m/리(里)=106,520m=106.52 Km)가 보태지게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박작구(泊汋口)에서 발해(渤海)의
신주(神州)에 이르는 길이 만약 수로(水路)로써 외줄기로 나 있다면, (266.3Km + 106.52 Km= 372.82 Km)가 됩니다.
이는 두만강의 길이와 비교하면 (372.82 Km / 547.8Km = 약 0.68)이 되어 거의 2/3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 ‘솟대님의 지도’를 보면, 박작호(泊汋湖)와 혼강(渾江)의 지류(支流), 그리고 백두산(白頭山)에서 연원
되는 두만강의 길이를 비교할 수 있는 지도가 있습니다.
대아하(大雅河)가 박작호(泊汋湖)에 들어오는 곳 부터 혼강(渾江)이 발해(渤海)의 수도가 있는 경박호(鏡泊湖) 까지
감에 있어서 최단거리가 되는 물 줄기르 오늘날의 강원현(江源縣)으로 볼 때에, 이 <대아하(大雅河) 합류지점의
박작호(泊汋湖) ~ 강원현(江源縣)까지의 길이>를 비교해보면, 2/3는 커녕 겨우 1/2 밖에 안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 <대아하(大雅河)가 합류하는 박작호(泊汋湖)~ 강원현(江源縣)>이 두만강의 길이의 2/3가 되지 않고,
겨우 1/2이 넘을 정도임을 비교해 볼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jpg
따라서 이는 ‘하나의 물줄기’로써 계속 선박을 타고 올라가는 가는 것이 소류(遡流)의 의미가 아님을 알수가 있는 것
입니다.
더군다나, ‘작은 쌍동선(雙胴船)’인 소방(小舫)이란 배는 사신단(使臣團) 들이 타는 배이기 때문에, ‘큰 배’이며 이런
‘큰 배’가 가려면 강폭(江幅)과 수심(水深)이 어느정도 커야하기 때문에, 더욱더 소류(遡流)를 ‘외줄기’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이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그것은 왜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서는 “당(唐) 나라의 사신단(使臣團)들이 박작구(泊汋口)에 들어와서 부터는
지류(支流) 강들을 일일히 거슬러 올라가는 소류(遡流)를 하면서, 발해의 왕도(王都)가 있는 홀한해(忽汗海) 주변
- 즉 오늘날 경박호(鏡泊湖) 쪽으로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의 최대의 미스테리(mistery)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는 “동(東)쪽 곁 방향으로 바닷가로 청니포(靑泥浦), 도화포(桃花浦) 행화포
(杏花浦) 석인왕(石人汪) 탁타만(槖駝灣)을 지나 오골강(烏骨江)에 까지가 800리(里)이다. (東傍海壖,過青泥浦、
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八百里)”라고 최후에 이른 오골강(烏骨江)이 오늘날 요동반도의 웅악하
(熊岳河)임이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다시 발해(渤海)를 건너서 ‘그런데, 남(南)쪽 곁 방향으로 바닷가를 따라서 오목도
(烏牧島), 패강구(浿江口), 초도(椒島)로 가면 신라의 서북(西北)에 있는 장구진(長口鎭)으로 갈수 있다.(乃南傍海壖,
過烏牧島、貝江口、椒島,得新羅西北之長口鎮)“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왜 오늘날 청장하(淸漳河)-자아하(子牙河)
로 이어진 고대의 패수(浿水)에로 ’이미 온 길‘을 되돌아가는가?“하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일단 주해도편(籌海圖編)에서 오골강(烏骨江)으로 언급된 곳이 웅악하(熊岳河)이고, 이는 ‘문무왕(文武王)의 철관성
(鐵關城) 소도(蘇塗)’ 안(內) 쪽이라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래의 주해도편(籌海圖編)을 보면, 오른쪽의 개주위(蓋州衛)가 있고, 그 왼쪽편에 ‘2강이 합류된 강’이 흘러나오
고 있습니다. 이는 ‘수계(水系)가 잘들어나는 솟대님의 지도’와 대비해 보면 신개하(新開河)입니다. (서남류(西南流)
하는 청하(淸河)와 서북류(西北流)하는 개주하(蓋州河)를 합친 강(江)이름 입니다.)
따라서 그 왼 쪽에 있는 강(江)은 자연히 오늘날의 웅악하(熊岳河)일수 밖에 없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강의
오른쪽에 웅악일(熊岳馹)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일(馹)은 ‘역(驛)에 있는 말(馬)’을 뜻하기 때문에, 웅악역(熊岳驛)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 웅악하(熊岳河)로 들어가는 입구에 탁타만(槖駝灣)이라고 적혀있는데, 이 ‘탁타’는 낙타(駱駝)를 뜻합니다.
웅악하(熊岳河)가 나오는 하구(河口) 주변의 만(灣)의 모습이 그야말로 낙타 등처럼 휘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서 ‘탁타만(槖駝灣) → 오골강(烏骨江)’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오골강(烏骨江)이
오늘날 웅악하(熊岳河)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대(古代)의 오골강(烏骨江)이고 지금의 웅악하(熊岳河)’ 입구에서 30~40도 좌측 각도로 오목도
(烏牧島)가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해도편(籌海圖編)은 바다를 북(北)쪽에 두었는데, 이를 오늘날의 지도에서 보면 ‘바다’가 서(西)쪽에 있기 때문에,
웅악하(熊岳河) 입구에서 서남(西南)쪽으로 30~40도 기울어지면, 정확히 하북성(河北省)의 모믄 강물이 모이는
천진(天津) 쪽을 지향함을 알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오목도(烏牧島) 다음에 나오는 패강구(浿江口)는 하북성 천진(天津) 쪽에 하구(河口)를 두는 강임이 드러나는 것
입니다.
(*) ① 개주위(蓋州衛)의 신개하(新開河)(청하(淸河)+개주하(蓋州河)), 탁타만(槖駝灣), 웅악일(熊岳馹)
② 웅악하(熊岳河) 입구에서 30도 기울여져 있음을 볼 수 있는 주해도편(籌海圖編)
http://blog.daum.net/kwh0425/1552396?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kwh0425%2F1552396
(*)
① 웅악하(熊岳河)가 문무왕의 철관성(鐵關城) 소도 안(內)에 있음과
② 웅악하(熊岳河)에서 30도 ~40도 서남(西南)쪽으로 오목도(烏牧島)가 있게 되면, 그 곳은 천진(天津)쪽임을 추측
할 수 있는 ‘솟대님의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 요동반도에서 에서 수평(水平)에서 30~40도 아래로 서남향(西南向)이면 하북성 천진(天津)이 됨을 추측할 수
있는 ‘중국 및 그 동쪽 전도(全圖)’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문무왕의 철관성(鐵關城) 소도(蘇塗)’ 안에 들어와서 갑자기 엉뚱하게도 발해(渤海)를 건너서
패강구(浿江口)를 통해 ‘고구리(高句麗) 평양성’이 있는 대륙택(大陸澤) 위의 ‘고구리 평양성(平壤城)’인 초도(椒島)로
해서 오늘날 장야분지(長冶盆地)쪽 까지 거슬러 올라감이 분명한 것입니다.
왜 도리기(道里記) 가운데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는 꼭 ‘소도(蘇塗) 안(內)에 들어오기만 하면, 엉뚱하게 이미 온
길을 되돌아가는 행동’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는 소도(蘇塗) - 즉 ‘배달화백(倍達和白)을 하는 호수(湖水)’에서 회의를 진행시키다 보면,
당연히 따르는 현상인 것입니다.
배달화백은 ‘작은 공동체의 통합’과 동시에 ‘큰 공동체의 통합’을 진행시키는 방식 - 즉 배달(倍達)로 진행하는 방식
을 연(連)이은 방식이기 때문에, ‘하나의 호수(湖水)’에서 의견 수렴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될 때, 다른 곳에서
병행(竝行)해서 진행되는 의사진행 결과를 수렴(收斂)해 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사군(漢四郡)이래 중국의 천자국(天子國)들은 관경사국(管境四國)에 ‘투자’를 하면서 ‘천자(天子)가
임명한 대리(代理) 천독(天毒)’들이 배달화백에 참여하게 하는 제도(制度)에 매우 익숙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는 단순히 황제(皇帝)의 사신단(使臣團)을 보내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즉 당(唐)나라가 발해(渤海)와 신라(新羅)의 천독(天毒)들과 ‘배달화백’을 하기 위해서 마치 한사군(漢四郡)의 태수
(太守)들 처럼, 당(唐)의 ‘관료(官僚)-대리 천독(天毒)’들을 지휘하고, 또 이들의 의견을 어느정도 수렴(收斂)하기
위해서 ‘중재 배달화백에 참여하는 길’임을 뜻합니다.
우리는 ‘몽고’의 화백회의 명칭이 ‘쿠릴타이’로 학습(學習)하였지만, 몽고 사람들은 이를 ‘고릴타이’ 즉 ‘고리(高麗)의
회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란 명칭이 발해(渤海)가 고구리(高句麗)를 승계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가급적
<’고리(高麗)의 회의‘ 즉 ’쿠릴타이‘에 참여하기 위해 발해(渤海)로 가는 길>이란 엉뚱한 개념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서 “그런데, 남(南)쪽 곁 방향으로 바닷가를 따라서 오목도(烏牧島), 패강구(浿江口),
초도(椒島)로 가면 신라의 서북(西北)에 있는 장구진(長口鎭)으로 갈수 있다.(乃南傍海壖,過烏牧島、貝江口、椒島,
得新羅西北之長口鎮)”는 문장을 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패강구(浿江口)→초도(椒島)→득(得)+신라서북(新羅西北)의 장구진(長口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행(水行)하는
길로 보아서는 이는 분명히 ‘물(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류(遡流)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고리발해도(高麗渤海道)에서 박작구(泊汋口)가 나오는 부분에서 유난스럽게 소류(遡流)라는 등장하는 것과
매우 대조적(對照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류(遡流)라는 말을 쓰는 것은 당(唐)나라가 천자국(天子國)으로써 ‘투자’를 신라(新羅)와 발해
(渤海)에 하고, 이 신라(新羅)와 발해(渤海)의 영역 속에 있는 대리천독(代理天毒)들을 ‘중재(仲裁) 배달화백’에서
‘지휘통제’하는 천자(天子)의 ‘특수 사신단’이 직접 물을 거슬러 올라갈 때의 표현이라는 점을 생각할수가 있습니다.
즉 오골강(烏骨江) 다시 말하면, ‘문무왕(文武王)의 철관성(鐵關城) 소도’ 안의 오늘날 웅악하(熊岳河)에서는 고대의
패수(浿水)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는 ‘신라서북(新羅西北)의 장구진(長口鎭) →’고구리 평양성‘인 초도(椒島)→ 패강구
(浿江口)→발해(渤海)→오골강(烏骨江)(=웅악하(熊岳河)에서 신라(新羅)의 천독(天毒)들과 발해(渤海)의 천독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흐름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좌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