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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흐린 날씨에 獨立運動家 秋山 鄭燻謨(정훈모)선생 기념비에서 聞師會 山客四友...10:31:01
독립운동가
추산(秋山) 정훈모(鄭燻謨)선생 기념비
정훈모(鄭燻謨)선생의 호는 추산(秋山), 자는 국렬(國烈)이며 1888년 3월20일 慶尙北道 醴泉郡 豊壤面 憂忘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4년 27세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중국 남만주(南滿洲) 지역에서 독립투쟁을 시작하였다. 백범 김구(金九)선생과 형제의 의(義)를 나누기도 하였으며, 남만주 동사촌(東社村)에서 애국지사 유시언(柳時彦)선생과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창단에 참여하고 성동학교(盛東學校)를 설립하여 청년 광복군 배출에 힘썼다. 또한 거주 지역 교포들의 생계를 위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임시정부와 소통하며 석주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측근으로 항일투쟁에 주력(主力)하였다. 1920년 6월 미쓰야협약(三矢協約)으로 일본경찰과 중국인까지 독립운동가 색출에 혈안이 되자 선생은 일본인 경찰을 살해하고 북만주(北滿洲)로 이동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 나갔다.
1939년 초 동지들과 시베리아 아르하라(Arkhara)에서 자무쓰市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과 교전 중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자무쓰감옥에서 복역 중 심한 고문으로 위독하게 되자 병보석 되었으나, 1939년 4월7일 중국(中國) 싼장성(三江省) 자무쓰시(佳木斯市) 삼남여관에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향년(享年) 52세를 일기로 25년간의 독립투쟁을 마감하고 순국(殉國)하였다.
해방 후 정부는 선생께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이 묻혔던 공동묘지는 주거지로 변해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어, 선생의 위패와 우망리에 모셨던 아내 남영선(南英先)의 유혜를 2019년 4월 9일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奉安)하였다.
左側面 :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 바친 추산 정훈모 선생을 추모하며 선생께서 평생 그리워하신 고향인 이곳 우망리(憂忘里)에 후손들과 동래정씨(東萊鄭氏) 문중(門中)에서 기념비를 세웁니다. 2019년 10월 12일
右側面 : 처 남영선 자 정진원-이위성 손 정인영 정창숙-김중의 정의영-방재영 정지영-이경자
정덕희-남영대 정영희-서영국
증손 김재현-김정민 김성은 정재은-박성욱 정상훈-임혜진 정혜진 정재우-이주현 남은선-김미라
서은솔-서진솔
현손 김혜연-김윤지 박은우-박민우 정시온-정라온 조윤수 남다현-남다희
退山(퇴산)의 수고로 三江里 大東山 入口 강둑에 到着......08:30:46
羅浮山(나부산 : 2018.1.31방문)의 우뚝함을 바라보며 소나기로 초목이 싱그러워 눈을 푸르게 하는 全景과 그물망을 둘러친 논에는 모가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 08:34:44
맑은 강물은 가득 차게 흘러 은빛이 물 위에 반짝이며 山川草木이 물속에 잠겨있다...08:44:15
칡덩굴이 바위를 덮어 韻致(운치)를 더하고 산에는 樹木으로 가득하다... 08:44:29
풀잎 사이에 하얀 십자모양 꽃이 있어 野草가 당겨서 살피고, 松崗이 줄기를 만지니 거미줄이었다...08:45:11
강물에 몸을 숙인 나무 가지에 더부살이 식물이 올라타서 함께 살아간다... 08:51:45
데크 전망대를 스쳐 지나가며 강물의 흐름을 살피며 걷는다.... 08:55:23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변두리의 웅덩이는 물고기들의 놀이 공원이다... 08:56:14
야초가 앞서 가며 낙석으로 아카시아 나무가 부러진 것을 알려준다... 08:57:13
江가의 나무를 제거하여 줄거리는 쌓아 두어 걱정을 했는데 말끔히 옮겨서 감사했다.... 08:59:09
원두막에서 시원한 토마토와 보리빵으로 간식을 즐기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몸이 편하다... 09:03:03
관세암 표지석 옆의 "정훈모(鄭燻謨)선생 기념비 해설판"이 우측으로 옮겨지고, 江으로 길을 내어 나무줄거리 를 옮겼다.. 09:03:33
간식을 들며 원두막에서 바라 본 건너편 三樹亭의 풍경..... 09:11:20
청운3리(사막)에서 우망리로 통하는 자전거 전용도로(차량도 다님)의 모습.... 09:12:10
강으로 길을 내어 강 안쪽의 나무줄거리를 옮긴 임시 통로가 보인다... 09:41:51
강에서 옮겨 온 나무 줄거리가 길 아래 주차장에 가득 쌓여서 火木으로 이용되면 一石二鳥이다... 09:42:31
해바라기가 머리를 숙이며 익어가고 있다.... 09:43:15
강둑에 피어 있는 백일홍은 색다르게 피어 있어 눈에 띄게 아름답다.... 09:44:55
情熱(정열)의 상징인 붉은 백일홍은 너무 고와서 혼자보기 아깝다... 09:45:59
모래섬의 草綠樹木에 白鷺가 모여 들어 주변을 다니며 먹이를 사냥 한다..... 09:48:05
논에는 부드러운 草綠 絨緞(융단)이 펼치고, 언덕 위 나무에 白鷺가 떼를 지어 산다.... 09:48:54
몽싱몽실 핀 백일홍 꽃송이에 눈이 즐겁고, 마음까지 상쾌하다.... 09:50:45
三樹亭 입구의 밭에는 매년 고추를 잘 가꾸어 볼수록 주인장의 정성에 머리가 숙여진다... 09:55:42
회화나무 아래 쌓아 놓은 비닐포대는 회화나무를 회생시키려 내부 마감재와 외부 시멘트를 제거한 포대입니다.
예천 삼수정(醴泉 三樹亭)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삼수정은 동래정씨 청곡리 入鄕祖(입향조 :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은 선조)인 삼수 鄭龜齡(정귀령)이 조선 세종7년(1425)에 세운 정자로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인조 14년(1636)에 무너진 것을 순조29년91829) 경상감사로 부임한 鄭基善(정기선)이 다시 지었다. 이후 세 차례 옮겨지어졌다가 1909년 옛터에 다시 지었다. 정귀령은 정자를 세우면서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老巨樹(노거수 ; 나이가 많고 매우 큰 나무)로 성장했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학자나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이므로, 후손의 번영을 바라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후손 가운데 여러 명이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한다. 정귀령의 80세 생일잔치 날에 후손들이 자신의 관복을 회화나무에 걸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울긋불긋 오색 꽃이 핀 듯하여 보는 이들이 감탄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 앞에는 사주문이 있다. 구조는 전체를 마루로 하고, 가운데 뒤 칸에 마루방을 둔 독특한 평면형식이다. 이는 영남 지방에서 흔치 않은 사례로 희소가치가 크다.
三樹亭 담 밖의 당초 세 그루 중 하나 남아 있는 회화나무의 모습... 09:58:23
회생 시키려 속을 채운 마감재를 제거하여 텅 빈 모습과 철제지주로 나무 가지를 받쳐주고 있다.
三樹亭의 회화나무는 비바람에 가지가 찢기고 속이 텅 빈 채 관리되어 힘겹게 버티고 있다 ...10:00:20
회화나무 쓰임새 : 꽃은 동맥경화와 고혈압 등에 쓰이고, 열매와 가지 및 나무껍질은 치질 치료에 이용된다. 결이 아름답고 목재가 견실하여 목조각의 재료로 많이 쓰였다. 꽃봉오리는 천연염료 및 약재로 많이 이용된다. 그 밖에 조경수, 가로수, 기념수 등으로 이용 된다.
삼수정 앞에 세운 浣潭七賢 事跡碑가 山勢가 뛰어난 알운봉 그늘인 청곡리에 우뚝하게 서있다.... 10:01:26
완담 서원에 배향 하신 칠현의 사적비 해설... 2020.7.27.제216차 쌍절암,삼수정 탐방 때 [인터넷 퍼온 글]
완담칠현(浣潭七賢) 사적비(事跡碑)로, 삼수공의 옛 집터와 집터 뒤에 완담서원이 설립된 곳으로 완담서원에 제향된 칠현(七賢)의 사적비이며, 칠현(七賢)은 판서공 정귀령(鄭龜齡)과 아들 修撰公 옹(雍)과 直提學 사(賜), 손자 應敎公 환(渙)과 문익공 광필(光弼), 칠대손 매오공 영후(榮後)와 석문공 영방(榮邦)으로 일곱 분의 사적을 기록한 碑입니다. 즉 四世七絃이다. 일곱 분의 후손들이 대부분의 소파로 나뉘어져 후대에 내려오고 있다.
완담지(浣潭誌) 삼수편(三樹篇)과 용궁현지 유현록(儒賢錄) 등에서 三樹 정귀령에 대해서 살펴 볼 수가 있는데, 승훈랑 관직에 있던 삼수 정귀령이 세종 6년(1424) 9월에 결성현감(結城縣監:충남 홍성군)에 부임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사임하였는데, 그는 비록 짧은 근무 기간이었지만 고을을 잘 다스린 공덕으로 송덕비(頌德碑)가 건립되기도 하였습니다. 동래정씨의 가록(家錄)인 택지록(宅址錄)에는, "삼수"가 벼슬을 그만두고 용궁고을 남쪽 포구안 별곡마을에 터를 잡게 되니 지금의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라는 기록이 있어, 이는 아마도 관직을 떠나 조부를 따라서 안동 구담(九潭)으로 낙향하였다가 별곡에 터를 정하여 삶으로써, “동래정씨 별곡마을 입향조가 된 것이다“ 라고 기록합니다. 삼수는 옛 집터의 동남쪽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槐)를 심고 거기에 정자를 세워 삼수정(三樹亭)이라 이름하고 자호(自號)로 삼았는데, 회화나무를 집주변에 심은 역사는 멀리 상고시대 주(周)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나라가 조정에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어 삼공(三公)의 자리를 정하였다고 하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 그루 회화나무는 삼공벼슬을 상징하는 의미로 전하여 내려와, 자손들이 삼공에 들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심어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삼수가 그러한 염원으로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었던 것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으나, 삼수의 12세손 정재원(鄭在源)씨가 증언하는 가전(家傳)에 의하면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삼수정이 무너지고 세 그루의 회화나무도 시들어 죽었는데 삼수정이 중건되고 난 후에, 세 그루 중 한그루에서 움이 돋아나와 성장한 것이 현재에 남아있는 고목(古木)의 회화나무라고 합니다. 뜻을 두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삼수의 자손으로 정씨문중에서 말하는 소위 '사세 칠현(四世七賢)'이 배출 되었습니다. 1424년 결성현감을 지낸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이 1425년에 관직을 사임하고 이곳 별실촌에 입향하여 완담칠현 사적비가 있는 곳에 사저를 신축하고 후원에 정자를 지어 삼수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1635년 병자호란 뒤인 1636년에 폐하였다가 1829년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부임한 정기선(鄭基善)에 의해 중건되었고, 그 후 세 차례 이건하였으나 1909년에 구기(舊基)에 다시 돌아와 중건되었습니다.
삼수정(三樹亭)의 현판으로 상주목사를 지낸 정현(鄭玹) 의 글씨이며, 정자의 마루 위에는 정귀령(鄭龜齡)의 후손으로,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의 삼수정기(三樹亭記) 편액(扁額)을 비롯하여, 1420년대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의 삼수정운(三樹亭韻) 편액(扁額)과, 삼수정상량문(三樹亭上樑文) 편액(扁額)이 있으며 결성선조삼수정이십운(結城先祖三樹亭二十韻) 편액(扁額)도 보이며, 곁에는 근차(謹次) 결성선조삼수정이십운(結城先祖三樹亭二十韻) 편액(扁額)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수정(三樹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6칸규모의 홑처마에 팔작지붕의 구조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후에 몇 차례 중건을 거듭하였는데, 1829년에는 경상감사 정기선(鄭基善)이 중건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이건(移建) 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09년경 옛터에 다시 세운 것으로 삼수정이 오늘날까지 전함은 오직 자손들이 조상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마루 가운데에 방이 있었고 사방에 문을 달아놓은 구조로, 영남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로 호남지역에서는 더러 보이는 평면구조입니다. 삼수정의 특이한 점은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왼쪽의 바깥쪽의 기둥 3개는 유일하게 마루 위까지 돌기둥이 올라와 있으며 높이도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6칸의 삼수정은 모두가 마루이고 방은 마루의 중앙에 위치해 한 칸으로 단출하며, 정자의 주인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은 고려 말에 태어나서 정6품 승훈랑(承訓郞)으로서, 1424년(세종6년) 9월 지금의 충남 홍성군 결성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곧 벼슬을 내려놓고 이곳에 자리 잡았는데, 모란은 부귀(富貴)를, 석류는 다산(多産)을, 소나무는 절개(節槪)를, 회화나무는 학자나 정승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삼수(三樹)의 세 그루 회화나무는 일순간의 이익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성실과 정직과 진실의 가치관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齡)이 80세 생신 때 이 정자에서 잔치를 베풀며 자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관복을 벗어 이곳의 세 그루의 회화나무에 걸어 놓으니 울긋불긋 오색 꽃이 핀듯하여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하는데, 그 후 200년을 무성하게 자라더니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이후 차츰 잎이 시들고 고사 하였는데, 그중 한그루가 곁가지를 소생(蘇生)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이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소나무 세 그루가 자생(自生)하여 수백 년의 연륜과 푸르름을 자랑하며 고고(孤孤)하게 서있습니다. 삼수(三樹)는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지보면 마산리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모셨습니다.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최고위직인 정승(政丞)을 배출한 가문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단 한 사람의 정승이라도 배출되었다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승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씨 22명, 안동 김씨 19명, 동래 정씨가 17명이라고 한다.그러나 1위는 왕족이었고, 2위는 왕의 외척이라는 후광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평가가 절하되고 있다. 반면에 동래 정씨는 다르다. 즉 실력을 바탕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동래 정씨는 시조가 왕이거나 개국공신이던 지체 높은 분이 아니라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오늘날 군수 정도에 불과한 한미한 가문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고려조에 이미 기반을 쌓아 족세(族勢)를 넓히기는 했으나, 조선조에 와서 정승 17명과 대제학, 판서, 많은 대과 급제자를 배출함으로써 명문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러한 동래 정문의 번영은 외람된 말이 될지 모르지만 나무를 사랑하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과 그 기반이 득성지인 부산 동래가 아니라 예천 풍양면의 한적한 마을 청곡리라는 점이 또한 특이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란은 부귀(富貴), 석류는 다산(多産), 소나무와 대나나무는 절개(節槪)를 상징하는 나무인 데 비해 회화나무는 학자나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다. 이러한 삼수정의 다음 세대를 위한 염원이 헛되지 않아 큰아들 정옹(鄭雍)이 1417년(태종 17) 대과에 합격하여 지례현감으로 향교를 재건하여 학문진흥에 힘썼고 이후 수찬(修撰)을 지냈으며, 셋째 아들 정사(鄭賜) 역시 1420년(세종 2)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 집의, 직제학,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펼쳤다. 후손 중 처음으로 판서(判書)에 오른 분은 정사의 아들 허백당 정난종(鄭蘭宗`1433~1489)이다. 1456년(세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1467년(세조 13) 황해도 관찰사로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그 후 이조, 공조, 호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아직 상신(相臣)을 배출하지 못했다. 최초로 정승에 오른 분은 허백당의 아들 수부(守夫) 정광필(鄭光弼`1462~1538)이다. 그는 삼수정의 증손자로 1492년(성종 23) 문과에 급제하고 1504년(연산군 10) 이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 연산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다가 충남 아산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중종반정 후 부제학, 그 뒤 예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13년(중종 8) 우의정, 좌의정에 오르고, 1516년(중종 11)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와 그를 지지하는 신진개혁세력들이 많이 희생될 때에 그들을 두둔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기도 했으나 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분이다. 그 후 12명의 정승이 배출되어 동래 정씨가 배출한 17명의 정승 중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청곡리는 생각보다 깊은 오지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삼수정이 불타면서 나무도 죽었는데 1829년(순조 29) 경상도 관찰사 정기선이 중건하고 난 후 한 그루에서만 움이 돋아 자란 것이다. 삼수정 주변에 잘생긴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 특이했다. 자세한 내용을 사전에 몰랐다면 삼수(三樹)라는 말이 회화나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나무를 두고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삼수정이 가문의 번영을 염원하며 세 그루 심었는데 한 그루만 남은 점이다. 여러모로 볼 때 회화나무는 동래 정문의 상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그루를 더 심어 이후에도 천년만년 번성하여 동래 정문은 물론 나라에 기둥이 될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면 한다.
※ 별실을 지나면 우망리인데 별실과 우망리는 작은 고개를 사이에 두고 200여 호가 사는데 거의 대부분이 동래정씨이다. 憂忘里는 근심憂자에 잊을忘자라 하여 근심 없이 살 수 있는 편안한 마을을 뜻한다.
※용궁향교(龍宮鄕校) :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였는데, 현 위치보다 약 150보(步) 동쪽에 세워졌다. 6개 문중에서 세웠다고 한다. 1400년에 소실되었는데, 즉시 재건하였다가 1512년(중종 7)에 4월에 현 위치인 용궁면 향석리 266번지(보호구역 894평)로 옮겼는데, 임진왜란(1592) 때에 불탔다. 1599년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이 47세 때 현감과 유림들과 의논하여 향교를 다시 짓자고 하였다. 1603년에 문묘(文廟)를 중건하여 향사(享祀)를 의식대로 치루었으니 대성전(大成殿)과 주소(廚所) 동서재(東西齋)만 세우고, 묘우(廟宇)의 남쪽과 동서재의 북쪽은 명륜당(明倫堂) 자리로 60년 동안을 비워두었다. 유풍(儒風)이 땅에 떨어지고 향할 곳이 없을까 걱정하여 정매오(鄭梅塢), 정석문(鄭石門), 이국창(李菊窓), 장월송(張月松), 정청풍(鄭淸風), 전운계(全雲溪) 등과 더불어 제생들을 모아 대학(大學), 소학(小學) 등을 강했고, 위패 봉안문을 지었다.
※ 삼강강당은 조선 선조때 호종공신으로 좌의정을 지내고, 특히 이순신 장군이 국문을 당하여 죽기 일보 전에 목숨을 걸고 구하여 성웅을 만드신 정승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셋째 아들 정윤목(鄭允穆) 호 淸風子가찰방(察訪) 벼슬을 그만두고, 후진양성을 위해 지은 사설학교인 삼강 서원이다. 淸風子 鄭公은 西厓 유성룡과 한강 정구 문하에서 수학 경사와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초서의 필법이 탁월하여 당대 초서의 대가로 존경받았다.
三樹亭을 떠나서 청곡리 제방으로 되돌아간다... 10:03:36
백일홍이 만개한 憂忘里(우망리:근심 없이 평안한 마을)를 향해 긴 제방 길을 걷는다...10:06:32
연분홍 고운 꽃이 憂忘里와 謁雲峰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10:08:50
대동산 입구의 삼거리에 새로 만든 벤치가 나그네를 부른다... 10:59:49
벤치 쉼터에서 몸을 식히며 담소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11:02:07
★ 와락 스카우트! 지구를 껴안다 ★
맑은 강물 양쪽에 羅浮山(나부산)의 全景과 그물 친 논에는 녹색의 벼가 잘 자란다....11:02:51
벤치에 기대어 느긋하게 휴대폰 三昧境(삼매경 : 정신을 집중한 경지)에 빠진다... 11:08:46
주차장에 도착... 귀가 길에 중식은 옛고을 추어탕으로.... 11:18:48
첫댓글 흐린 날씨로 우선 볕이 없어서 다행이다. 대동산은 소나기 온 뒤라서 바지를 적셔서, 데크길로 걸으며 강가의 벌목 후 나무줄기를 말끔히 옮겨서 감사했고, 우망리 원두막에 올라 간식을 들며 시원한 바람에 심신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정훈모선생기념비안내판"을 관세암 우측으로 옮기고 강으로 들어 가는 길을 내어 벌목한 나무줄기를 언덕 아래 주차장으로 엄청난 양을 옮겼다. 청곡제방에 심은 백일홍이 다양한 색의 꽃을 피워 어찌나 곱고 이쁜지 탐스러웠다. 삼수정의 회화나무와 "완담칠현 사적비"(해설판)를 다시 살피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어 감사하다.
車輛이나 사람이나 컨디션 亂調로 멀리 가지도 못하고 雙絶巖 散策路를 간다.어제 내린 비의 影向으로 27도C의 알맞은 氣溫과 그늘진 데크길은 江邊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함께 이곳이 名所임을 말해준다.오랜 가믐탓에 洛東江은 命脈만 유지할 뿐 바닥 모래까지 훤하니 風景이 삭막하다.流水不爭先이라더니 유유히 흐르는 강물만큼 빠른 것도 없다.지난 겨울에 江邊의 버드나무를 모두 除去하여 둔치에 쌓아 두었더니 洪水 때문인듯 모조리 끌어올려 우망리 駐車場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늘 返還點이 되어주는 園頭幕에서 즐겁게 間食을 나누고 充分한 休息을 나눈 후 三樹亭 가는 堤防길로 나선다.河川敷地에 耕作한 키낮은 해바라기,木百日紅,洞樹 숲의 白鷺무리 등 平和스러운 風景이 연이어 展開된다.모처림 三樹亭에 올라서니 由緖깊은 亭子가 放置되어 인타깝다. 三樹의 代表인 회나무가 속이 뚫린체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姿態나 雜草 茂盛한 三樹亭 뜨락이 휑하기만하다.生存의 現場인 왜가리떼의 極盛스런 외마디를 뒤로하고 돌아오니 여느때처럼 長靴신은 中年女人이 오늘도 大東山으로 달려 내려온다.장한 모습에 박수를 보내나 相八君은 오늘도 左側으로 外面하며 지나간다.正午에 出發하여 옛고을에서 中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