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만난 현자의 죽비(竹篦)
나는 마치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인도에 온 것처럼 데칸고원에 위치한 라열라시마 지역을 두루 순회하며 많은 건물을 짓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 그런 중 우여곡절 끝에 첸나이에 탐바람 무디츄르에 선교 센터 빌딩을 짓게 되었다. 부지를 사는데 일 년의 세월이 걸렸으므로 가능하면 건물을 빨리 지어서 뭔가 본때를 보이고 싶었다.
설계자를 찾고 건축업자와 계약을 하고 난 뒤에 잡목과 풀을 베어내고 지하수를 개발하려고 하였다. 일꾼을 사서 부지를 정리하는 날이었다. 나는 하루에 부지를 깨끗이 정리하려는 마음에 일꾼을 여러 명 불렀다. 그런데 일꾼들이 두어 시간 동안 대충 님트리와 카누가, 가시덤불과 큰 돌들만 제거하고 일을 그만 두었다. 그러고도 하루 품삯을 요구하였다. 나는 그들이 내가 외국인이라고 텃새를 부린다고 생각하여 풀을 다 베어 내지 않으면 품삯을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선 듯 일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깨끗하게 풀을 제거하는 작업의 모범을 보이면 그들이 나를 따라서 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낫으로 큰 풀을 쳐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멀거니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 때 건너 편 빈터에 가 건물을 짓고 있던 건축업자가 나타나서 나에게 충고를 하였다.
“마담, 이러시면 일꾼을 부릴 수 없습니다. 일이 안됩니다. 그만 나오세요.”
일꾼을 잘 부리려고 본을 보여주는데 건축업자가 일꾼을 부릴 수 없다고 하므로 이해가 되지 않아 일손을 멈추었다.
“부지 정리를 하루에 마치려고 일꾼을 배나 불렀는데 겨우 잡목만 베고 일을 다 끝냈다고 하니 말이 되냐고요?”
“마담, 이것은 관행이어요. 새 땅에 건물을 지을 때 부지 정리를 한꺼번에 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니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요.”
“관행이라고요? 무슨 이 따위 관행이 있어요!”하면서 나는 건축업자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뭐 요즘은 도시에서는 그런 관행도 사라지고 있는 추세지요. 그러나 여기는 원체 변두리다 보니 아직도 관행을 따릅니다. 오늘 하루에 다 정리하고 싶으시면 품삯을 두 배로 쳐주고 쉬었다가 오후에 일 시키십시오.”
그리고 그는 가건물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건축업자 뒷덜미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뭐! 이따위 관행이 있어요? 내가 외국인이라고 텃새부리는 거요?”
그는 돌아서서 히죽 웃으며 “마담! 아닙니다.”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건축을 시작하기도 전에 못된 일꾼과 업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무엇보다 “관행”이라는 말로 일꾼들을 편 들어 준 건축업자가 괘씸하여 계약을 파기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 때 인도 농촌 어디에서나 봄직한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 “마담!” 하면서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나에게 손짓 발짓으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였다. 나는 속으로 ‘너는 또 뭐야’하는 태도로 그를 대하였지만 의외로 그가 차분하고 진지하여 통역을 세워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노인은 나에게 천천히 “관행”의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나는 뜻밖에 이름도 모르는 현자의 죽비에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는 우리 건축 부지는 오랫동안 공지로 두었기 때문에 나무도 풀도 무성하지만 쥐와 뱀 등 작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땅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선주(先住)하고 있는 생명들에게 땅에 변고가 있음을 알리고 그들이 이주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이 그들에 대한 존중이며 배려라고 하였다. “그들이 어떻게 알고 이사를 가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작은 동물들은 잡목과 큰 풀을 쳐내면 자기 몸을 숨길 수 없으므로 생존이 가능하지 않음을 감지하고 이동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이동하는데 열흘 정도면 충분하므로 열흘 후에 다시 부지 정리를 하는데 그 때는 바닥에 붙은 풀만 남기고 서 있는 풀은 다 베어 내고 소금을 뿌리라고 하였다. 그러면 개구리나 두더지 등 작은 동물들이 감지하고 이동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열흘 후에는 완전히 잔풀을 뽑고 맨 흙 위에 소금을 뿌리고 정리하면 개미와 같은 작은 것들이 이동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두르지 말고 개미 등이 이동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라고 하였다.
그의 말은 창조주 하나님의 심장에서 나오는 생명에 대한 심오한 사랑이었다.
그 관행은 다름 아닌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었다.
아!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아! 얼마나 고귀한가!
아! 아! 얼마나 자비한가!
아! 아!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인가!
그의 말에 나의 영혼이 춤을 추었다.
일꾼들과 건축업자가 형식적이고 관습적인 관행이라고 말했던 그 관행이 살아나서 나의 뒤통수를 쳤다. 그의 메시지는 애매모호하였던 나의 땅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뒤엎었다. 땅의 진면목이 눈에 보였다. 땅은 인간의 독점 대상이 아닌 생명이 함께 공유해야 하는 모두의 집이었다. 그렇다! 땅 주인은 그 땅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생명들의 살 권리를 겸허히 존중해주어야 한다. 땅의 용도를 변경할 경우에는 그들에게 알리고 그들이 생명을 보전할 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 후 나는 무려 한 달에 걸려서 선주하였던 모든 생명체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며 부지 정리를 하였다. “여기서 그 동안 몸 부쳐 산 여러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저희가 필요에 의하여 집을 짓게 되었으니 부디 양해하여 때에 맞게 이동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살 수 있는 좋은 집을 찾아서 평화롭게 살기를 빌겠습니다.”라고 땅을 향하여 건축 계획을 알렸다. 그런 긴 과정을 통해서 부지 정리를 하여서 일까? 그 집에 거주하고 있는 동안 개미를 비롯하여 땅에서 기는 벌레들이나 작은 짐승들이 일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첸나이 탐바람 무디츄르에 ‘희망발전소’를 세우면서 나는 비로소 소유와 투자 대상으로서 땅의 개념에서 벗어나 땅을 모든 생명체의 집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계약서도 없이, 세를 받지도 않고 모든 동식물에게 넉넉하고 풍성하게 가슴을 내어주는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가? 너니 내니 가리지 않고 품어주는 땅의 후덕함에 모든 생명체가 빚을 지고 우리는 그 후덕함의 결과물을 먹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오늘 고향집 뜰에서 다시 한번 생명의 집인 땅의 덕을 깊이 맛보았다.
대문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마당 일부만 제하고 내 키만큼 크게 자란 가막사리와 가마중. 망초꽃과 붉은서나물에 포위되어 기가 질렸다. 집을 돌보지 않은 아우에게 은근이 짜증이 나서 내심 성묘를 가지 않고 풀을 뽑기로 작정하였다.
‘도대체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 잡초 밭이 되었구먼.’하면서 손을 벋어서 가막사리를 뽑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가막사리가 나의 손길을 제지하였다.
“제가 당신을 괴롭혔습니까? 왜 나를 뽑으려 합니까? 장미는 되고 나는 안 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국화는 되고 나는 안 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땅이 저를 받아 주었습니다. 저는 마음껏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은혜로 자랐습니다. 이제 꽃이 피었으니 곧 열매가 익을 것입니다. 땅이 제게 준 생명의 기회, 하늘에 제게 준 생명의 기쁨을 부정하는 것입니까? 저의 번영이 당신에게 해가 됩니까? 제 입장에서 생각 좀 해보세요. 그러면 제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나는 ‘이곳은 네가 서있을 자리가 아니다.’ 라고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세상의 땅들은 장미니 백합이니 매화니 가리지 않고 다 품어 주는데 왜 사람만이 유달리 잡초니 꽃이니 하면서 생명을 차별하느냐는 그의 하소연이 가슴을 찔러서였다.
나는 꽃을 어루만지며 ‘내년에는 부디 들판에서 태어나라.’고 말 한 뒤 손을 떼었다.
잡초로 불리는 마당의 꽃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그들을 품어준 우리집 마당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구현하는 위대한 사랑의 장이었다.
흙으로 돌아간 내 몸이 개미와 구더기의 집이 되고 기생초나 개망초 꽃을 피울 것을 생각할 때 우주가 핑그르르 돌았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2023년 9월 30일. 토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