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사랑&산사람> 원주 치악산
겨울 산의 매력은 뭘까. 허리춤까지 빠지는 눈밭? 상고대의 날카로운 유혹? 순백에 잠긴 주목의 설화(雪花)? 다들 맞는 말이다. 모두 겨울 산의 풍경을 구성하는 주요한 소품들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얹는다면 눈꽃위에서 환상적인 배색(配色)을 맞춰주는 코발트빛 하늘쯤 되지 않을까? 사실 코발트색 하늘은 사철 있는 것이다. 봄여름엔 신록에 가려, 가을엔 단풍에 밀려 주목 받지 못했을 뿐. 겨울 산의 영하의 바람이 습기는 얼려서 눈으로 만들고, 연무(煙霧)와 먼지들은 날려 버려 더 선명한 컬러를 얻는 것이다. 색이 지천인 봄가을엔 그저 뭉게구름 하나 띄워도 충분하다. 그러나 온통 무채색뿐인 겨울 산에 코발트빛 하늘의 은은한 색감은 순백을 받쳐주는 든든한 후광이 되기에 충분하다.


◆ ‘꿩과 선비의 보은’ 전설 간직한 산=치악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등줄기인 태백산맥의 중서 쪽에 위치한 차령산맥의 근간(根幹). 본래 가을 단풍이 너무 아름답다 하여 적악산(赤岳山)으로 칭하다가 상원사의 꿩과 선비의 전설에 연유하여 치악산(稚岳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치악산은 단일 봉우리가 아니고 1,000m이상의 준령들이 장장 14km나 이어진 산맥급 산군(山群)이다. 이인직은 그의 신소설 ‘치악산’에서 “백주에 호랑이가 득시글거려 포수가 제 고기로 호랑이 밥을 삼는 일이 종종 있다.”라고 썼는데 그 만큼 산이 험하고 문명에서 단절되었음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또한 치악산은 산꾼들에게 악산(惡山)으로 유명하다. 이 탓에 ‘치가 떨리고 악에 받쳐 오르는 산’ 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보통 치악산은 구룡사-사다리병창-비로봉 코스가 가장 유명하다. TV뉴스에서 가을철 산행 풍경을 잡을 때 단골로 등장하는 산도 비로봉이다. 그러나 겨울엔 콘셉트를 바꾸어 국형사-향로봉-남대봉-상원사 코스로 올라볼 만하다. 우선 한적한 등산로를 따라 겨울 산의 낭만을 즐길 수 있고 상원사의 고즈넉한 동화 속에도 빠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향로봉-남대봉 능선따라 상고대 활짝=취재팀은 국형사(國亨寺)를 들머리로 산행에 나섰다. 잔설에 덮인 국형사는 이름부터 주목을 끈다. 국형(國亨)이라면 ‘나라의 형통’을 비는 사찰이라는 뜻인데 불가(佛家)의 공간에 유교 명찰을 단 격이다. 국가의 복을 기원하는 유불(儒佛)의 동행이 좋아 보인다.
절 초입엔 아름드리 적송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치악산은 조선시대 왕실의 목재인 황장목(黃腸木)의 공급지. 황장목은 궁궐은 짓는데 사용했던 속이 붉고 단단한 금강소나무를 말한다. 일찍이 사벌(私伐)을 엄격히 규제하여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표식을 붙여 국가에서 특별히 관리했다.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 길의 연속. 보은사를 지나며 등산로가 빙판길로 변했다. 일행은 눈 속에서 아이젠을 신는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중턱에서 남대봉 정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쪽빛 하늘을 인 고즈넉한 설산의 위용에서 제법 겨울 산의 운치가 풍긴다.
1시간여 씨름 끝에 일행은 향로봉 정상에 이른다. 제일 먼저 원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인구 30만이 산다는 원주는 눈 속에 평화로워 보였다. 향로봉과 대척점에 있는 비로봉도 바로 앞에서 설경을 펼쳐 놓았다. 치악산의 최고봉답게 좌우로 순백의 능선을 부드럽게 펼치며 위엄 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능선에 접어들면서 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장갑 두 켤레를 끼고 방한대를 동원해 겨우 바람을 막았다. 매서운 바람은 능선을 따라 환상적인 상고대를 펼쳐 놓았다. 나뭇가지 마다 영롱하게 매달린 얼음 꽃들과 그 뒤를 꽉 채운 코발트색 하늘의 조합에 잠시 추위를 잊는다.
취재팀은 정상 능선을 타고 남대봉으로 내달린다. 남대봉 근처에서 얼굴바위와 만난다. 눈보라 속에서 말없이 시내를 내려다보는 광경이 사뭇 비장하다. 방한복을 파고들던 칼바람은 남대봉 안부에 와서야 겨우 잠잠해졌다. 이때가 오후 2시. 일행은 서둘러 도시락을 꺼낸다. 추위에 입 근육이 얼어붙었다. 음식을 씹기가 불편할 정도. 식욕과 저작(詛嚼)의 부조화. 이 또한 겨울 산의 묘미라면 묘미다.


◆우리나라 세 번째 고지에 위치한 상원사=식사 후 일행은 상원사로 향했다. 가이드가 ‘상원사에 송아지만한 견공들이 있으니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고 귀띔한다. 산죽이 갈라 헤친 소로를 10여분 쯤 걸어 절에 이르렀다. 눈 속에서 일주문이 단아한 자태로 일행을 맞는다. 상원사는 ‘꿩과 선비의 보은’의 전설로 유명하다. 계룡산 남매탑과 함께 우리나라 사찰의 ‘스토리 텔러’의 원조 격이 아닐까. 눈 속에 웅자(雄姿)를 들어낸 범종각에서 꿩의 보은의 흔적을 더듬는다. 대웅전 앞의 쌍탑도 상원사의 명물.
아무리 찾아도 견공들이 보이지 않길래 스님한테 물었더니 사찰의 이미지와 맞지 않아 산 밑으로 내려 보냈다고 한다. 이 탓에 밤마다 멧돼지 고라니들이 절 곳곳을 헤집고 다녀 골치가 아프다고 손사래를 친다.
상원사는 봉정암(설악산), 법계사(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로 고지에 위치한 사찰이다. 경내는 물이 풍부하고 밭이 넓어 자족(自足)에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하산 길 상원사 입구에서 한 외국인을 만났다. 검은 피부에 작은 키의 여성은 온몸을 머플러로 친친 감고 있었다. 아프리카 열대와 설산의 기후의 언밸런스 탓인지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흐른다. 추위에 주눅이 들었는지 이 체액(?)을 닦아낼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듯 했다. 오늘 설산에서의 그녀의 고생은 훗날 고향에서 큰 수다거리가 될 것이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바람, 일행은 하산을 서두른다. 가파른 계단 길을 1시간 걸어 ‘원주의 수호성’ 이라는 영원산성 밑에 이르렀다. 이 산성은 고려 말 원나라 합단적(哈丹賊)이 침입했을 때 10여 차례 전투 끝에 원주를 지켜낸 호국산성이다. 조선시대 왜구가 내륙 깊이 침입 했을 때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귀중한 역사의 현장이다.
산행시작 6시간 만에 일행은 금대지구에 이르렀다. 저만치 남대봉 정상엔 벌써 어둠이 깃들었다. 겨울 산의 수목들 가지에도 그림자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투명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상고대는 황혼에 제 몸을 물들이고 겨울 산의 진객 코발트색 하늘도 노을빛에 놀라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