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무등산 자락의 취가정醉歌亭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김덕령을 추모하여 지은 건물이다.
김덕령에 관한 이야기가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덕령은 귀신같은 용맹함과 정의감을 지니고서 큰 뜻을 품었다. 그런데 유교의 바른 의리를 쌓아 마음이 온화하고 자신의 재주와 덕을 잘 갖추어,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했다. 계사년인 1593년 선조 26년에 왜적이 더욱 함부로 굴 때, 감사, 수령 및 동지들이 서로 권하며 의병을 일으키자, 김덕령은 한창 어머니의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의병을 을이켰다. 임금께서 ‘충용장忠勇將’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군사를 이끌고 영남으로 나아가자, 왜적들이 이 소식을 듣고 ‘석저장군石氐將軍’이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거두어 그곳을 피했다. 이 무렵 김덕령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어 안팎에서 교묘하게 꾸며대니, 결국 체포되어 억울한 죽음을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일을 악무목岳武穆(남송의 충신인 악비岳飛를 가리키는 말)공의 죽음에 비유하였다. 일찍이 김덕령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노래 부르는 일일랑 영웅의 할 일이 아니니
차라리 칼춤을 추며 장수의 장막에서 놀리라.
훗날 무기를 씻고 고향에 돌아가는 날이면, 강호에 묻혀
낚싯대 드리울 뿐, 그 무엇을 구하리.
이 정자는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金德齡)의 원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인 김만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189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정자를 짓게 된 사유가 재미있다. 송강 정철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서 벼슬을 하지 않고 야인으로 일생을 보낸 권필(權韠)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그 때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웠지만 ‘이몽학(李夢鶴)의 난(亂)’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나타나 한 맺힌 노래 한 마디를 부르는 것이었다.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게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또한 뜬 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바라고저.
김덕령의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들은 권필은 꿈속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지난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을 어찌하랴.”
이 시를 지은 권필은 정철의 문인이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이 오로지 술만 마시고 세월을 보냈다. 광해군 때 척족의 방종함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는 죄로 친국을 받은 뒤 귀양을 가던 중 동대문 밖에서 전송 나온 사람들이 건네준 술을 마시고 그 다음 날 죽었다고 한다.
진나라 때 시인인 도연명의 「책자(責子)」에 나온 ‘하늘의 운수가 참으로 이러할 진대’라는 글이 있다.
백발은 양쪽 귀밑머리를 덮고, 피부도 이제는 탄탄하지 못하다. 내 비록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하나같이 종이와 붓을 좋아하지 않는다. 큰아들 서(舒)는 열여섯 살이나 되었는데, 게으르기가 짝이 없다. 둘째 아들 선(宣)은 열다섯 살이지만 학문에 뜻을 두지 않는다. 그다음 옹(雍)과 단(端)은 열세 살인데, 여섯과 일곱을 구별하지 못한다. 막내아들 통(通)은 아홉 살이 되었건만, 배와 밤을 찾을 뿐이다. 하늘의 운수가 참으로 이러할진대, 우선 술이나 들자.
한 가문의 운수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구국의 행동도 시대와 군주를 잘 못 만나면 운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슬픈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름다운 정자에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남아 있어, 술 한 잔 준비하지 않고 찾아온 길손을 슬픔과 회한에 젖게 하니 이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2023년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