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혼자서 뚝딱거리며 요리를 하는가 싶더니 금세 각종 요리들이 등장한다. 모듬회와 회무침, 갈치와 병어, 조기를 구운 것이다. 여기다 술잔에 담은 정(情)까지. 절로 취한다.<사진제공=이명조>
여수의 유명한 대폿집 ‘말집’으로 가는 길은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이 동행하기로 했다. 선생은 여수가 고향이다. 말집은 그의 어릴 적 친구이자 이곳에서 조용히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으로 유명한 임용택씨가 소개했다. 임 선생은 막걸리 회사 사장이다. 그가 막걸리를 대는 여수 안팎 750군데 주점 가운데 주저하지 않고 ‘최고’로 꼽는 집이 바로 말집이다. ‘오래되고 소박하지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최후의 대폿집’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오동도 쪽으로 가다가 공화동 샹보르호텔(옛 세종호텔) 앞에서 두 분을 만나 호텔 옆 골목길로 150m 가량 올라가니,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말집이 보인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이채로운 연탄불 화덕 세 개가 보인다. 벽쪽에는 까만 연탄이 서로 키를 재듯 나란히 쌓여 있다. ‘함무니’인지 ‘어무니’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넉넉한 인상의 아낙이 우리를 맞이한다. 큼지막한 창문으로 연방 햇볕이 쏟아지는데, 어찌나 따뜻하던지 마치 햇볕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일제 강점기 때 이 근처엔 ‘신항’이라는 부두가 있었다고 한다. 전라도의 동쪽 곡창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수탈해 반출하는 전진기지였다. 그 곡물을 운반하는 마차를 끌었던 말을 주위에서 길렀다 해서 대폿집 이름이 말집이다. 일본으로 보내지는 쌀섬을 실은 마차를 힘겹게 끌었을 말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부들이며 노무자들이 그때부터 이 집에서 한잔 술로 애환을 달랬다니, 말집은 65년을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말집엔 말이 없다. 그래서 말집에 와서 말을 그리워하는 걸까? 우리의 농산물을 수탈해 갈 때 힘들게 그 농산물을 끌던 말들은 지금 없다. 그 흔적조차도 남아 있질 않다. 그때부터 부르던 말집이라는 이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거운 짐을 끌고 이 언덕을 힘들게 오르내렸을 슬픈 말들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지가 55년 단골인디요, 그 전서부터 말집이 있서수라우.” 옆에서 혼자 막걸리를 드시던 복덕방 할아버지의 말씀이다. 말집 주변은 비극의 여순사건 현장이기도 하다. 노인은 “근처에 경찰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을 봤지라우” 하며 당시를 증언한다. 고난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지금은 긴 불황의 터널 속에서 일을 못 찾아 헤매는 많은 젊은이들이 말집 주변을 서성인다. 고단한 사람들의 쉼터
막걸리는 추억과 낭만이 발효돼 만들어진 음식이다. 목로에 앉아 고된 삶을 막걸리에 실어 보낸다. 요즘엔 긴 불황의 터널 속에서 헤매는 젊은 실직자들도 대폿집을 찾는다.<사진제공=이명조>
연탄불 화덕에 석쇠를 올려놓고 그 위에 돼지껍질을 굽는다. 껍질은 거저 주는데 굉장히 푸지다. 바삭하게 구운 껍질을 그냥 먹기도 하고, 된장에 찍어 양파나 깻잎에 말아 먹기도 한다. “그만”을 외쳐도 아주머니는 자기 피붙이 먹이듯 자꾸자꾸 돼지껍질을 가위로 잘라 준다. 1500원만 있으면 배부르다. 막걸리 한 병에 돼지껍질은 거의 무제한이니까. 막걸리 회사에선 막걸리 한 병을 800원씩에 납품한다고 한다. 그것을 받아서 말집에서는 푸짐한 돼지껍질이며 밑반찬, 연료비 등을 합쳐 한 병에 1500원을 받고 손님에게 판다. 나로서는 도저히 계산이 안 선다. 환경미화원, 택시기사, 공단 근로자, 일용직 노무자,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이 집 손님들이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쌓인 목구멍 먼지를 돼지껍질과 막걸리로 씻어내는 것이다. 말집의 돼지껍질은 단연 ‘전국 최고’라고 꼽고 싶다. 돼지껍질이라면 서울 마포 굴레방다리 밑이나 홍대 앞, 왕십리, 대학로, 삼각지를 치는 분도 있겠지만, 담백하고 쫀득한 육질로는 말집을 못 따라간다. 게다가 공짜다. 한 단골손님이 술김에 공치사를 한다. “과분께 더 조치라이. 2~3년 후제(후에) 시의원 나올 것이여. 머시냐, 말집 하문 다 알 것이여. 인심이 무자게 푸저부러.” 여기에 소금 뿌려 연탄불에 구워 먹는 싱싱한 전어며 볼락이 기가 막히다. 알아준다는 ‘거문도 돗병어’도 나온다. 반쯤 얼어 있는 병어를 잘게 썰어 양념장에 찍어 먹는 것인데 너무 달다. 또 있다. 반쯤 건조한 장어를 역시 화덕에 아무런 양념 없이 그냥 굽는다. 이것이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것’이라며 바닷가에서 자란 배 선생은 어린아이마냥 즐거워한다. 내가 감탄을 연발하자 아주머니는 “꿀(굴)을 꾸면 맛이 기가 막힌디…”라며 마침 그날 생굴이 없음을 애석해한다. 나도 애석하다. 오늘 꿀이 없는 것이…. 배 선생과 임 선생은 서로에게 막걸리를 부어 주며 어릴 적 친구인 여수 출신 화가 손상기(1949~1988)에 대해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때 척추를 다쳐 성장이 멈춰 불구가 된 손 화백은 서른아홉에 요절한 ‘한국의 로트렉’이다. 그의 작품 <자라지 않는 나무>가 문득 생각난다. 임 선생은 흔한 휴대전화며 자가용 없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괴짜다. 지역 화가들이 전시회를 열면 앞장서 그림도 사 주고, 뒤풀이가 열리는 대폿집에서는 계산도 도맡는 멋쟁이이기도 하다. 이제 배 선생과 임 선생은 초등학교 단짝 방송작가 김정수, 전 공간사 사장 정종영씨 등과 돌섬 앞바다에서 발가벗고 헤엄치던 추억을 떠올린다. 여수의 맑고 푸른 바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말집은 추운 그늘로부터 따뜻한 햇볕을 찾아 모이듯, 고단한 사람들이 모여 쉬는 쉼터다. IMF 때는 많은 이들이 말집에서 아주머니가 제공하는 무료식사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그 덕에 5남매가 다 잘됐다”고 아주머니는 말한다. 노가다한다는 젊은 손님이 혼자 술만 마신다. 아내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어 보니 오늘 일감을 못 잡았단다. 원래는 고깃배를 탔다고 하는데 요즘 어장이 거의 고갈 상태란다. 그런가 하면 요란스럽게 문 여는 소리와 함께 하루 일을 끝마친 젊은 일용자들이 작업복을 그대로 입은 채 “어무니”를 부르며 왁자지껄 들이닥치기도 한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말집’엔 빛이 가득하다. 빛이 오글오글 모여 들끓는다. 이 기진맥진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말집’에 모여들어 또다시 찾아온 고난을 이겨내려 한다. 배 선생이 혼자 중얼거린다. “사람 사는 곳이다.”
아줌마 혼자서 뚝딱거리며 요리를 하는가 싶더니 금세 각종 요리들이 등장한다. 모듬회와 회무침, 갈치와 병어, 조기를 구운 것이다. 여기다 술잔에 담은 정(情)까지. 절로 취한다.<사진제공=이명조>
여수의 유명한 대폿집 ‘말집’으로 가는 길은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이 동행하기로 했다. 선생은 여수가 고향이다. 말집은 그의 어릴 적 친구이자 이곳에서 조용히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으로 유명한 임용택씨가 소개했다. 임 선생은 막걸리 회사 사장이다. 그가 막걸리를 대는 여수 안팎 750군데 주점 가운데 주저하지 않고 ‘최고’로 꼽는 집이 바로 말집이다. ‘오래되고 소박하지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최후의 대폿집’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오동도 쪽으로 가다가 공화동 샹보르호텔(옛 세종호텔) 앞에서 두 분을 만나 호텔 옆 골목길로 150m 가량 올라가니,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말집이 보인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이채로운 연탄불 화덕 세 개가 보인다. 벽쪽에는 까만 연탄이 서로 키를 재듯 나란히 쌓여 있다. ‘함무니’인지 ‘어무니’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넉넉한 인상의 아낙이 우리를 맞이한다. 큼지막한 창문으로 연방 햇볕이 쏟아지는데, 어찌나 따뜻하던지 마치 햇볕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일제 강점기 때 이 근처엔 ‘신항’이라는 부두가 있었다고 한다. 전라도의 동쪽 곡창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수탈해 반출하는 전진기지였다. 그 곡물을 운반하는 마차를 끌었던 말을 주위에서 길렀다 해서 대폿집 이름이 말집이다. 일본으로 보내지는 쌀섬을 실은 마차를 힘겹게 끌었을 말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부들이며 노무자들이 그때부터 이 집에서 한잔 술로 애환을 달랬다니, 말집은 65년을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말집엔 말이 없다. 그래서 말집에 와서 말을 그리워하는 걸까? 우리의 농산물을 수탈해 갈 때 힘들게 그 농산물을 끌던 말들은 지금 없다. 그 흔적조차도 남아 있질 않다. 그때부터 부르던 말집이라는 이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거운 짐을 끌고 이 언덕을 힘들게 오르내렸을 슬픈 말들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지가 55년 단골인디요, 그 전서부터 말집이 있서수라우.” 옆에서 혼자 막걸리를 드시던 복덕방 할아버지의 말씀이다. 말집 주변은 비극의 여순사건 현장이기도 하다. 노인은 “근처에 경찰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을 봤지라우” 하며 당시를 증언한다. 고난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지금은 긴 불황의 터널 속에서 일을 못 찾아 헤매는 많은 젊은이들이 말집 주변을 서성인다. 고단한 사람들의 쉼터
막걸리는 추억과 낭만이 발효돼 만들어진 음식이다. 목로에 앉아 고된 삶을 막걸리에 실어 보낸다. 요즘엔 긴 불황의 터널 속에서 헤매는 젊은 실직자들도 대폿집을 찾는다.<사진제공=이명조>
연탄불 화덕에 석쇠를 올려놓고 그 위에 돼지껍질을 굽는다. 껍질은 거저 주는데 굉장히 푸지다. 바삭하게 구운 껍질을 그냥 먹기도 하고, 된장에 찍어 양파나 깻잎에 말아 먹기도 한다. “그만”을 외쳐도 아주머니는 자기 피붙이 먹이듯 자꾸자꾸 돼지껍질을 가위로 잘라 준다. 1500원만 있으면 배부르다. 막걸리 한 병에 돼지껍질은 거의 무제한이니까. 막걸리 회사에선 막걸리 한 병을 800원씩에 납품한다고 한다. 그것을 받아서 말집에서는 푸짐한 돼지껍질이며 밑반찬, 연료비 등을 합쳐 한 병에 1500원을 받고 손님에게 판다. 나로서는 도저히 계산이 안 선다. 환경미화원, 택시기사, 공단 근로자, 일용직 노무자,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이 집 손님들이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쌓인 목구멍 먼지를 돼지껍질과 막걸리로 씻어내는 것이다. 말집의 돼지껍질은 단연 ‘전국 최고’라고 꼽고 싶다. 돼지껍질이라면 서울 마포 굴레방다리 밑이나 홍대 앞, 왕십리, 대학로, 삼각지를 치는 분도 있겠지만, 담백하고 쫀득한 육질로는 말집을 못 따라간다. 게다가 공짜다. 한 단골손님이 술김에 공치사를 한다. “과분께 더 조치라이. 2~3년 후제(후에) 시의원 나올 것이여. 머시냐, 말집 하문 다 알 것이여. 인심이 무자게 푸저부러.” 여기에 소금 뿌려 연탄불에 구워 먹는 싱싱한 전어며 볼락이 기가 막히다. 알아준다는 ‘거문도 돗병어’도 나온다. 반쯤 얼어 있는 병어를 잘게 썰어 양념장에 찍어 먹는 것인데 너무 달다. 또 있다. 반쯤 건조한 장어를 역시 화덕에 아무런 양념 없이 그냥 굽는다. 이것이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것’이라며 바닷가에서 자란 배 선생은 어린아이마냥 즐거워한다. 내가 감탄을 연발하자 아주머니는 “꿀(굴)을 꾸면 맛이 기가 막힌디…”라며 마침 그날 생굴이 없음을 애석해한다. 나도 애석하다. 오늘 꿀이 없는 것이…. 배 선생과 임 선생은 서로에게 막걸리를 부어 주며 어릴 적 친구인 여수 출신 화가 손상기(1949~1988)에 대해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때 척추를 다쳐 성장이 멈춰 불구가 된 손 화백은 서른아홉에 요절한 ‘한국의 로트렉’이다. 그의 작품 <자라지 않는 나무>가 문득 생각난다. 임 선생은 흔한 휴대전화며 자가용 없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괴짜다. 지역 화가들이 전시회를 열면 앞장서 그림도 사 주고, 뒤풀이가 열리는 대폿집에서는 계산도 도맡는 멋쟁이이기도 하다. 이제 배 선생과 임 선생은 초등학교 단짝 방송작가 김정수, 전 공간사 사장 정종영씨 등과 돌섬 앞바다에서 발가벗고 헤엄치던 추억을 떠올린다. 여수의 맑고 푸른 바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말집은 추운 그늘로부터 따뜻한 햇볕을 찾아 모이듯, 고단한 사람들이 모여 쉬는 쉼터다. IMF 때는 많은 이들이 말집에서 아주머니가 제공하는 무료식사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그 덕에 5남매가 다 잘됐다”고 아주머니는 말한다. 노가다한다는 젊은 손님이 혼자 술만 마신다. 아내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어 보니 오늘 일감을 못 잡았단다. 원래는 고깃배를 탔다고 하는데 요즘 어장이 거의 고갈 상태란다. 그런가 하면 요란스럽게 문 여는 소리와 함께 하루 일을 끝마친 젊은 일용자들이 작업복을 그대로 입은 채 “어무니”를 부르며 왁자지껄 들이닥치기도 한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말집’엔 빛이 가득하다. 빛이 오글오글 모여 들끓는다. 이 기진맥진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말집’에 모여들어 또다시 찾아온 고난을 이겨내려 한다. 배 선생이 혼자 중얼거린다. “사람 사는 곳이다.”
첫댓글제가 하루종일 혼자 있다가 대화도 별로 없었고 해서 이글을 소리내어 다 읽어봤습니다. 사람내음이 가득하고 고단한삶에 지친이들을 푸근하게 대접하고 맛나게 배부르게 해주는이의 마음이 다 나타나있습니다. 요즘 무슨 프로젝트니 하는 개발아래 추억이 서린곳이 깨끗하게 단장되고 새건물로 태어나는걸보면 추억을 잃은것이 아쉽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단한 서민들의 마음과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추억의 식당이 오래 보존 되어야하고 알려져야 하고 찾아가고 싶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첫댓글 제가 하루종일 혼자 있다가 대화도 별로 없었고 해서
이글을 소리내어 다 읽어봤습니다.
사람내음이 가득하고 고단한삶에 지친이들을
푸근하게 대접하고 맛나게 배부르게 해주는이의
마음이 다 나타나있습니다.
요즘 무슨 프로젝트니 하는 개발아래
추억이 서린곳이 깨끗하게 단장되고
새건물로 태어나는걸보면 추억을 잃은것이 아쉽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단한 서민들의 마음과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추억의 식당이 오래 보존 되어야하고 알려져야 하고 찾아가고 싶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